
# 혼담이라는 압박
혼담이라는 압박
레이나 벨루아 후작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연분홍빛 가면 아래로
부채 끝이 먼저 흔들렸다.
사람을 부르는 동작인데도
거절을 예상하지 않는 사람의 손이었다.
아델린은 홀 가장자리에서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에버딘 쪽에도,
사교국 차석 쪽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연회는 벌써
다른 판을 깔기 시작했다.
카시안은 반걸음쯤 멈췄다.
그리고 아주 짧게,
정말 아주 짧게
아델린 쪽을 보았다.
직접 시선을 맞추는 대신
그녀 가면 끝과 어깨선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확인.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눈은 아니었다.
지금 어떻게 움직일지
읽으려는 눈이었다.
아델린은 고개를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만 기울였다.
일단 받아 주라는 뜻.
레이나는 이미
둘 사이 거리를 계산한 듯
정확히 카시안 앞으로 걸어왔다.
“오늘 밤 가장 늦게 오신 분 중
가장 눈에 띄는 분이군요.”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런데 단어 선택은
너무 매끈해서 오히려 차가웠다.
카시안은 예를 갖춰 몸을 돌렸다.
“후작부인.”
“제 이름을 아시네요.”
“황궁에서 모르는 쪽이
드문 이름이니까요.”
레이나는 웃었다.
“그 대답,
칭찬인지 경계인지
구분하기 어렵네요.”
“구분이 필요한 자리입니까.”
“오늘 밤은
대개 그렇죠.”
아델린은 그 대화를
멀지 않은 거리에서 듣고 있었다.
직접 끼어들기엔 이르다.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하자니
레이나의 접근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반대편 테이블 쪽으로 두 걸음 움직였다.
서류상으론
다른 동선.
실제로는
카시안과 레이나 사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각도.
곧이어 사교국 차석인
메리트 공이 다가왔다.
황금빛 새 가면을 쓴,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말투는 부드럽지만,
시선이 사람 목이 아니라
명찰 자리를 먼저 훑는 종류.
“인사팀장님.
이런 자리에서 뵈니 새롭군요.”
“사교국도 오늘은
평소보다 바빠 보이는군요.”
메리트 공이 웃었다.
“연회는 늘 바쁩니다.
특히 오늘처럼
흥미로운 소문이 도는 밤엔 더.”
아델린은 미소도 짓지 않았다.
“소문이란 대개
근거가 없을수록 빨리 돌죠.”
“근거를 확인하러 오신 겁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메리트 공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카시안 쪽을 흘끗 보았다.
“동반 입장까지 하셨으니,
확인보다 선언에 가깝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습니다만.”
아델린은 그 문장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이건 떠보기다.
사교국은 언제나
공식 발언 대신
상대가 정정하도록 유도하는 문장을 쓴다.
“사교국이 해석까지 맡는 줄은
몰랐군요.”
메리트 공의 웃음이
아주 얇아졌다.
“오늘은 다들
해석에 관심이 많은 밤 아닙니까.”
그는 그 말로
제0서고 건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은근히 비쳤다.
아델린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잔 하나를 들어
테이블 가장자리에
짧게 한 번 두드렸다.
맑은 울림.
지금 보라는 신호.
카시안은 레이나와 대화 중이었지만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대신 잔을 받쳐 든 손 각도만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보고 있다는 뜻.
레이나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황실 친위 계열 예복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입는 분은
오랜만에 봐요.”
그녀가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직위가 사람에게 남는다고들 하죠.
정말 그런가 봅니다.”
카시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사람이 직위에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
그건 더 흥미롭네요.”
레이나는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럼 묻고 싶어지죠.
지금은 어느 쪽이십니까.
사람 쪽인가요,
직위 쪽인가요.”
그 질문은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어느 쪽으로 답해도
상대가 다음 문장을 얹기 좋다.
카시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아델린 쪽으로 몸을 아주 조금 틀었다.
직접 눈을 맞추진 않았다.
그러나 명백히
레이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기준으로
서 있는 자세였다.
“오늘 밤은
동행 쪽입니다.”
레이나의 눈이
짧게 가늘어졌다.
부드러운 얼굴 아래로
계산이 다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아델린은 그 장면을 보고서야
메리트 공과의 대화를 끝냈다.
“실례하죠.”
그녀가 짧게 끊자
메리트 공은 붙잡지 않았다.
그 대신 느린 목소리로
등 뒤에 말을 남겼다.
“오늘 밤 끝날 즈음이면
동행의 의미가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죠.”
아델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 말이
협박인지 예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둘 다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델린은
곧장 레이나 쪽으로 가지 않았다.
홀 중앙 벽면,
서고 후원 명단과
문화재 기증 목록이 걸린 쪽으로
동선을 한 번 더 꺾었다.
거기엔 예상대로
에버딘 후작가 장남 루시안이 서 있었다.
담청색 가면에
지나치게 단정한 미소.
직접 카드를 꺼내 들진 않지만,
카드가 오가는 판에
누가 앉아 있는지는 모르는 척하지 않는 얼굴.
“후원 명단을 직접 확인하시는군요.”
아델린이 말을 걸자
루시안은 아주 느긋하게 몸을 돌렸다.
“팀장님도 이런 벽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벽면보단
벽 뒤를 더 궁금해하는 편입니다.”
루시안이 짧게 웃었다.
“역시 인사팀답군요.”
“후작가 쪽도
여전히 제0서고 바깥 열람선에
관여하고 있습니까.”
그는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오늘 밤은
그 질문을 하기엔
조금 시끄러운 밤 아닙니까.”
“혼담이 더 시끄럽죠.”
아델린의 대답에
루시안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건 사교국 언어입니다.”
“에버딘이 모른 척할 만큼
바깥일은 아니겠죠.”
루시안은 잠시
카시안과 레이나가 서 있는 쪽을 봤다.
아주 짧은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알고 있다.
오늘 밤 연회가
서고 거래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카시안을 다른 선으로 밀어 넣기 위한
시험대로 쓰이고 있다는 걸.
“연회는 늘
여러 겹입니다, 팀장님.”
루시안이 조용히 말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듣고,
어떤 사람은 가격을 듣고,
어떤 사람은 다음 배치안을 듣죠.”
“오늘 밤 후작가는
어느 쪽을 듣습니까.”
“적어도 저는
누가 누구를 떼어 놓으려 드는지는
듣고 있습니다.”
그게 한계였다.
더 캐면
그는 바로 입을 닫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문장만으로도
에버딘이 오늘의 판을
모르고 있지는 않다는 건 충분히 확인됐다.
그녀가 카시안 쪽으로 다가가자
레이나는 미소를 지운 채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팀장님.
귀한 분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나요.”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아델린은 차갑게 답했다.
“다만 오늘 밤은
붙드는 사람이 많은 것 같군요.”
레이나는 부채를 펼쳤다.
“당연하죠.
희귀한 건
언제나 사람들이 탐내니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아델린은 자기 안에서
아주 낯선 감각이
선명하게 일어나는 걸 느꼈다.
짜증.
그리고 분노.
둘 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쪽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하나 더 있었다.
불쾌함이 아니라
가까운 쪽의 반발.
내 것이라는 착각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차갑고 정확한 감각.
저 사람은
함부로 카드처럼 다뤄질 대상이 아니다.
그 결론이
생각보다 앞서 나왔다.
아델린은 자기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걸 느꼈다.
“후작부인.”
“네.”
“황궁엔 희귀한 게 많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전시용이 아니죠.”
레이나는 웃음을 유지했지만
눈빛은 웃지 않았다.
“경고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죠.”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지금
그 문장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레이나는 부채 끝으로
카시안 쪽 잔을 가리켰다.
“전 오늘
가벼운 인사만 하려던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서 하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좋은 이야기.”
아델린이 되물었다.
“네.
가문도 없고
오래 얽힌 정치채도 없고,
황실 안팎에서
오히려 새롭게 자리를 만들 수 있는 분이라고.”
이번엔 노골적이었다.
혼담 시장에서 가장 흔한 수사.
배경을 약점처럼 말하면서
오히려 거래하기 좋은 조건으로 바꾸는 방식.
아델린은 이제 확신했다.
이건 우연한 접촉이 아니다.
누군가 레이나를 앞세워
카시안을 사교 시장에
올리려 하고 있다.
헤일 쪽인지,
사교국인지,
에버딘인지.
혹은 셋이 얽혀 있는지.
카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가 그런 평가를 합니까.”
레이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연회장 전체가 그렇죠.”
“그럼 틀렸군요.”
부드럽게 말했지만,
단호했다.
레이나가 눈을 깜빡였다.
카시안은 이번엔
조금도 숨기지 않고
아델린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물리적으로도,
명백히.
“전 자리를 새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미 선 쪽이 있으니까요.”
그 문장은
연회장 소음 속에서도
이상하게 또렷하게 남았다.
레이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델린 역시
바로 이어받지 못했다.
카시안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렇게 분명한 방향으로
몸을 틀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메리트 공이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도
대화를 멈추고
이쪽을 힐끗 보았다.
이미 늦었다.
이 장면은
반드시 남는다.
레이나는 다시 미소를 세웠다.
“그 선이
인사팀장님 쪽이라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겠네요.”
카시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들으셔도 됩니다.”
아델린의 손끝이
잔 표면을 아주 세게 눌렀다.
질투와 분노가
같이 올라오는 감각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레이나에게 향한 분노.
그리고 지금 이 자리가
너무 많은 사람 앞에서
의미를 강제로 부여받고 있다는 데 대한
짜증.
그런데 그 와중에도
카시안이 자기 쪽으로 돌아선 사실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아델린은 결국
가장 안전한 형태의 말로
그 자리를 정리했다.
“후작부인.
오늘 밤 귀한 정보를 얻었군요.”
레이나가 눈썹을 올렸다.
“정보라니요.”
“누가 누구를
시장에 올리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됐으니까요.”
이번엔 레이나가
표정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짧았지만 충분했다.
아델린은 더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실례하죠.
감시관,
가시죠.”
카시안은 말없이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섰다.
두 사람이 등을 돌리자
레이나는 붙잡지 않았다.
그 대신 뒤에서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회는 아직 길어요.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이야기해요.”
아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홀 중앙을 벗어나
기둥 뒤 사각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랬죠.”
카시안이 바로 물었다.
“무엇이.”
“화난 것처럼 보여서요.”
아델린은 그를 쳐다봤다.
“보였습니까.”
“네.”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
“후작부인이
당신을 카드처럼 말한 게
거슬렸습니다.”
아델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시안이 기다렸다.
그 짧은 침묵이
이상하게도 더 압박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그녀는 거기서 문장을 끊었다.
질투라고 말하진 않았다.
아직은.
대신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업무적인 표정을 세웠다.
“중요한 건
이제 저쪽이 본색을 드러냈다는 겁니다.”
“저쪽만은 아닙니다.”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에버딘도 알고 있더군요.”
아델린이 눈을 들었다.
“봤습니까.”
“네.
루시안 에버딘이
당신과 레이나,
그리고 메리트 공 쪽을
계속 번갈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둥 바깥쪽을
짧게 턱으로 가리켰다.
“직접 끼진 않았지만
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확인하는 얼굴이었죠.”
아델린은 방금 전 대화를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했다.
에버딘은 거래를 바로 하진 않는다.
그러나 오늘 밤 누가
카시안을 사교 시장에 올리려 드는지는
똑똑히 보고 있다.
그 말은 곧,
서고 열람선도 언젠가
같은 카드 묶음 위에
올라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연회가
접근 창구가 아니라
인내심 시험장이 됐군요.”
“네.”
카시안의 대답은 담담했다.
“누가 먼저 불편함을 드러내는지,
누가 먼저 선을 넘는지
보는 쪽으로.”
카시안은 한동안
그녀를 보고 있다가
낮게 말했다.
“네.
하지만 팀장님.”
“말하세요.”
“아까 한 말은
보여 주기용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엔 아델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카시안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잔을 들어
가장자리 기둥에
짧게 세 번 두드렸다.
경고.
둘은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정원으로 통하는 아치문 밖,
하인 복장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걸음이 아니라 눈이었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딘가를 향해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시안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그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아주 낮게 말했다.
“계약자입니다.”
아델린도 곧바로 알아챘다.
피부 아래로 흐르는
얇은 검은 선,
명령을 기다리는 사람의
지나치게 비어 있는 눈.
그 남자는
정원을 헤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방향을 잃지 않았다.
연회장 전체가 아니라
카시안이 있는 선을 향해
조금씩 축이 맞춰지고 있었다.
아델린은 눈을 좁혔다.
“유도됐군요.”
카시안도 곧바로 동의했다.
“네.
자연 기동이 아닙니다.
누군가 방금 깨워서
이쪽으로 밀어 넣은 겁니다.”
혼담 카드로 시선을 모으고,
그 직후 계약자를 투입한다.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정교했다.
누군가는 오늘 밤
카시안을 사람으로 묶든,
위협으로 보이게 만들든,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게 하려 들고 있었다.
아델린은 즉시 말했다.
“홀 안으로 들이기 전에 막습니다.”
“제가 먼저 갑니다.”
카시안이 한 발 내딛자
아델린이 곧장 그의 팔을 잡았다.
“아뇨.
지금은 같이 갑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짧게 그녀 손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둘을 떼어 놓으려는 판 위에서,
굳이 떨어져 움직일 이유가
이제는 없었다.
연회장 밖에서
휴면 계약자 한 명이 깨어났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오늘 밤 모든 가면보다
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