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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 없는 연회 일러스트

# 춤 없는 연회

춤 없는 연회

소문은 발보다 빠르다.

특히 황궁에서는 더 그랬다.

정원에서 홀 안으로

다시 들어서는 짧은 거리 동안에도,

아델린은 이미

연회장 공기가 달라진 걸 느꼈다.

직접 수군대는 소리는 없었다.

그 대신 시선이 있었다.

너무 오래 머무는 시선,

의미를 아는 사람끼리

한 번씩만 스치는 시선,

그리고 일부러 못 본 척하는 시선.

방금 전까진

가면 아래서 서로를 떠보는 밤이었다면,

이제는 누군가가

정답지를 미리 돌려 버린 밤 같았다.

아델린은 익명 투서를

장갑 안쪽에 접어 넣었다.

카시안은 아무 말 없이

반걸음 옆을 따라왔다.

원래라면 여기서

다시 거리를 벌리는 게 맞다.

투서가 돌았고,

혼담 카드가 공개적으로 나왔고,

계약자 기동까지 있었다.

상식적인 대응은

둘이 잠깐이라도 떨어져

소문의 밀도를 낮추는 쪽이어야 했다.

그런데 카시안은

이번엔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

홀 중앙으로 들어서자마자

의전관 둘이 지나가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예의는 완벽했지만

눈빛은 정중하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은

아델린이 지나간 뒤에도

한 박자 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시작됐군요.”

아델린이 낮게 말하자

카시안이 답했다.

“네.

생각보다 빠릅니다.”

“익명 투서를 뿌린 쪽이

연회장 안에도 있다는 뜻이겠죠.”

“적어도 읽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 짧은 대화조차

주변에서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오가는 말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델린은 다시 한 번

걸음을 늦추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사교국 차석 메리트 공이

정확한 타이밍으로 가로막듯 다가왔다.

“두 분이 다시 함께 계시는군요.”

말은 밝았지만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아델린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답했다.

“사교국은 연회 진행보다

참석자 배치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군요.”

메리트 공은 태연하게 웃었다.

“관심이라기보다

공간 관리라고 해 두죠.

오늘 밤은 특히

배치가 중요한 밤이니까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도

메모하듯 주변을 훑었다.

누가 듣고 있는지,

누가 아직 다가오지 않았는지,

누가 둘 사이 거리를

이미 계산했는지 확인하는 눈.

지금 이 대화 자체가

연회장 안에서

하나의 배치 조정이라는 뜻이었다.

“그 배치를 누가 정합니까.”

“늘 그렇듯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겠지요.”

거짓말이었다.

오늘 밤 황궁은

사람들이 스스로 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손을 썼다.

카시안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저희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공간 관리상 문제는 없겠군요.”

메리트 공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문제라고까진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카시안의 어조는

조용한데도 이상하게 단호했다.

아델린은 그가

지금 일부러 떠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메리트 공은 더 길게 붙들지 못하고

정중한 말을 남긴 채 물러났다.

그러나 바로 그 뒤로

투서의 후폭풍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밀려왔다.

가면을 쓴 젊은 귀족 둘이

아델린과 스치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이라던데.”

“설마.

그래도 저 정도면…”

끝까지 다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황궁의 소문은

대개 문장 전체보다

반쯤 끊긴 부분이 더 잘 퍼진다.

누가 무엇을 정확히 말했는지보다,

어떤 분위기로 중얼거렸는지가

더 오래 남으니까.

그날 밤 연회장에선

이미 몇 가지 버전이 동시에 돌고 있었다.

인사팀장이 불멸기사를

공개적으로 데리고 다닌다.

직원번호 0001이

팀장 지시 없이는 안 움직인다.

둘이 제0서고 일로

같이 묶였다는 말도 있었고,

그보다 훨씬 사적인 어조로

둘 사이를 확정해 버리는 말도 있었다.

소문은 언제나 그렇듯

사실의 빈칸보다

사람들 욕망이 채워 넣은 부분이 더 컸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다루기 어려웠다.

아델린은 그 시선을

하나하나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상대가 원하는 구도가 완성된다.

대신 곧장

의전실 책임보좌관이 서 있는 자리로

방향을 틀었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면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이 소문을 누가 활용하려 드는지

먼저 보는 것이다.

책임보좌관은

수정 장식이 달린 푸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름은 세바스틴 렌.

의전실 내에서도

사교국과 친위 사이 조율을 맡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즉,

오늘 밤 돌아가는 배치를

모를 수 없는 위치.

“렌 경.”

아델린이 먼저 말을 붙이자

세바스틴은 잔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연회는 즐기고 계십니까.”

“즐길 분위기입니까.”

세바스틴이 애매하게 웃었다.

“황궁의 연회가

원래 분위기로 즐기는 자리는 아니죠.”

“좋습니다.

그럼 실무 얘기만 하죠.”

아델린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오늘 밤 연회장 안에서

익명 투서가 돌고 있습니다.

배치 이상과 정원 외곽 기동도 있었고요.

의전실은 이 상황을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까.”

세바스틴은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더 답 같았다.

“정원 쪽 일은

막 보고받았습니다.”

“투서는요.”

“소문 수준까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이

누구를 향하는지도.”

세바스틴의 시선이

아델린과 카시안 사이를

짧게 스쳤다.

너무 짧아서

오히려 더 노골적이었다.

“네.”

아델린은 잔을 들지도 않고

차갑게 물었다.

“그런데도 의전실은

배치 개입을 안 했군요.”

“개입하면 오히려

소문에 공적 형태를 부여하게 됩니다.”

“안 하는 쪽은

사적 형태를 키워 주겠죠.”

세바스틴은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비겁했지만

정직했다.

오늘 밤 의전실은

몰라서 손을 놓은 게 아니라,

손을 대는 순간

누구 선이 먼저 드러나는지 알고 있어서

일부러 가만히 있는 쪽이었다.

카시안이 대신 낮게 말했다.

“그래서 다들

못 본 척하고 있는 겁니까.”

세바스틴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정면으로 손대는 쪽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델린은 그 문장을

즉시 뒤집었다.

“정면으로 손대면

누가 먼저 움직였는지 드러나기 때문이겠죠.”

세바스틴은 웃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누구든,

혹은 여러 선이 함께,

지금 이 소문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의전실은

그걸 모른 척하며

상황을 관망 중이다.

아델린은 더 얻을 건 없다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의전실은 계속 관망하세요.

대신 나중에

모르고 있었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세바스틴은

그제야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근처를 지나던 귀부인 둘이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속삭이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렸다.

“정말 저쪽이 맞나 봐.”

“저렇게 안 떨어지는 걸 보면.”

아델린은 들은 티를 내지 않았다.

카시안 역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무반응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겐

더 확실한 그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카시안은 여전히

아델린 바로 곁을 지켰다.

너무 바짝 붙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거리.

아델린은 낮게 물었다.

“감시관.”

“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

카시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너무 깔끔한 인정이었다.

“이유는.”

“지금 물러나면

상대가 원하는 구도를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그것만입니까.”

카시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

홀 안쪽에서

느린 현악기가 흐르고,

가면을 쓴 사람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밤처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그 한 박자 정적만

유난히 또렷했다.

“아니요.”

그가 낮게 말했다.

“그것만은 아닙니다.”

아델린은 그 대답을 듣고도

곧장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가면 아래로는

표정이 완전히 읽히지 않을 텐데도,

이상하게도 그 짧은 말 하나가

홀 전체 소음보다 더 또렷했다.

아델린은 더 묻지 않았다.

물으면

정말 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답이 오히려

더 위험한 형태로 남을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좋습니다.

그럼 오늘 밤은

정식 동행처럼 움직이죠.”

카시안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정식.”

“네.

이왕 소문이 났으면

누가 먼저 불편해하는지

끝까지 보자는 뜻입니다.”

“상당히 공격적이군요.”

“상당히 늦었으니까요.”

아델린은 대답하면서도

연회장 전체를 훑었다.

메리트 공은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와

아주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레이나는 여전히

가장 안전한 거리에서

부채만 움직이고 있었다.

세바스틴 렌은

의전관 둘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지만,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은

둘을 갈라놓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보기 좋은 각도로

홀 동선을 정리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도 직접 손대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두가

이 장면이 더 선명하게 보이게 놔둔다.

황궁다운 비겁함이었다.

그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팀장님은 가끔

놀랄 만큼 공격적입니다.”

“감시관은 가끔

놀랄 만큼 눈에 띄고요.”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 직후,

연회장 중앙 계단 위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사교국 측 진행자가

밤의 후반 순서를 알리는 종을 울린 것이다.

“다음은 자유 교류 순서입니다.”

그 말은

공식 춤 순서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춤을 청하지 않았다.

가면궁 특유의 느린 왈츠가 흐르는데,

사람들은 무도장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와 발코니,

계단 난간 부근에 더 많이 서 있었다.

오늘 밤 진짜 관심사는

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와 붙어 서는지,

누가 누구 곁을 떠나지 않는지,

그리고 누가 그걸 끝내 견디지 못하는지.

아델린은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한가운데 서 있으니

이해와 체감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레이나의 혼담 카드보다

지금 더 성가신 건

이 무수한 제3자들이었다.

직접 다가와 묻지는 않지만,

이미 둘 관계를

각자 편한 언어로 정리하고,

그 정리본을 또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사람들.

그 시선 속에 오래 서 있으면

사건보다 관계가 먼저 소비된다.

그래서 원래라면

아델린은 더더욱

카시안을 곁에 세워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떨어져 봤자

상대가 원하는 부정만 남는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직접 버티는 편이 낫다.

타인의 시선이

이미 둘 관계를 먼저 정의하기 시작한 밤이었다.

아델린은 그 사실이

기분 나쁘면서도,

이제는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 레이나 벨루아 후작부인이

멀리서 다시 부채를 접었다.

이번엔 직접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노골적으로

주변 두 사람과 말을 섞으며

이쪽을 한 번씩만 보는 쪽을 택했다.

소문이 충분히 퍼졌다는 뜻이었다.

카시안도 그걸 보았다.

그는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아델린에게로 돌아섰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그러나 누구라도 볼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한 걸음 더 그녀 곁으로 섰다.

더는 애매한 거리도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아델린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택한 사람의 위치.

가면 연회에서 저 정도 거리는

의미 없이 남지 않는다.

아무도 이름으로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식대로 해석해

다음 사람에게 넘기게 되는 거리.

홀 가장자리 몇 곳에서

숨죽인 기척이 일었다.

메리트 공은

멀리서 잔을 든 채 멈췄고,

세바스틴 렌은

그 장면을 보고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아델린은 그 모든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굳이 피하지 않았다.

카시안이 낮게 물었다.

“문제 있습니까.”

아델린은 똑바로 앞을 보며 답했다.

“이제 와서요.”

그 대답에

카시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순간,

도로시가 연회장 뒤쪽 통로에서

급히 걸어왔다.

정원 시종 복장 그대로였지만

표정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팀장님.”

아델린은 즉시 몸을 돌렸다.

“레온은.”

“살아 있어요.

근데 그보다 더 안 좋은 게 있어요.”

도로시는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정원 관리실에서

외곽 지구 보고가 들어왔는데,

오늘 밤 같은 패턴의 봉침 흔적이

세 군데에서 더 확인됐대요.”

카시안의 표정이

단번에 사라졌다.

“위치는.”

“남동 외곽 숙소,

하부 창고 구역,

그리고 구시가지 경계.”

아델린은 바로 계산이 돌아갔다.

연회장 안 소문전은 미끼다.

진짜 목적은

외곽 여러 지점에서

휴면 충성 계약을 연쇄적으로 깨우는 것.

오늘 밤 황궁 안에서

둘을 붙들어 두려 했던 이유도

이제야 맞아떨어졌다.

황궁 안에서는

둘을 하나의 소문으로 묶어 움직임을 늦춘다.

황궁 밖에서는

작은 기동들을 여러 점에 찍어

대응 반경을 넓힌다.

누가 짰든

처음부터 대형 붕괴를 노린 게 아니라,

누가 어느 쪽을 먼저 살피는지

반응 속도를 재려는 설계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런 설계가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반응이 늦으면

다음 기동이 커지고,

반응이 갈리면

더 치명적인 쪽을 골라 누를 것이다.

즉,

오늘 밤은 시작에 불과할 수 있었다.

도로시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전면 기동은 아니에요.

근데 조짐은 맞아요.”

아델린은 가면 끝을

아주 천천히 눌렀다.

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문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황궁 바깥에서

더 큰 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정원 밖 마차길과

외곽 숙소와

구시가지 경계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면,

다음은 연회 따위로 덮을 수 없는 밤이 된다.

황궁 안에서 돌던 소문이

순식간에 사소해질 만큼,

더 직접적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더 이상 가면 뒤에서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도시 전체가 무대가 될 차례였다.

그 밤이 그렇게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게.

그리고 빠르게.

도시 외곽에서

휴면 충성 계약 연쇄 기동 조짐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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