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직원의 월급
도로시가 장부를 끌어안은 채 아델린 책상 앞에 선 자세는,
보고라기보다 폭발 직전의 증언에 가까웠다.
“팀장님, 이건 진짜 더러워요.
그냥 계산이 꼬인 수준이 아니라 누가 일부러 썩힌 거예요.”
아델린은 책상 위로 장부 세 권을 나란히 펼쳤다.
공식 사망 명단, 급여 지급 기록, 유족 보상 정산표.
숫자와 날짜와 인장 번호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들이었지만,
그녀 눈에는 이미 하나의 구조가 보이고 있었다.
사망 처리 후 지급 중단.
유족 심의 이관.
보상 집행.
원래라면 이 세 줄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도로시가 표시해 둔
열세 개 이름은 그 흐름에서 미끄러져 있었다.
이름은 사망 명단에 올라가 있는데, 급여는 멈추지 않았다.
유족 보상은 일부만 처리됐거나 아예 비어 있었다.
지급 승인 인장은 정식 결재선과 맞지 않았다.
“최근 겁니까?”
아델린이 묻자 도로시가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가장 오래된 건 칠 년 전, 최근 건은 두 달 전.
그러니까 정권 바뀌기 전부터 있던
구멍이 아직도 열려 있는 거죠.”
카시안은 자기 책상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장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로시는 아직도 그에게 시선이 가면 약간씩 말을 더듬었지만,
이제는 놀람보다 호기심이 더 커 보였다.
“사망자한테 돈이 계속 나간다면 누가 받는지는 확인했습니까?”
카시안이 묻자 도로시가 눈을 깜빡였다.
“일단 계좌 흐름은요.”
“계좌가 아니라 최종 수령자요.”
“둘이 같은 말 아닌가요?”
“황실 회계에선 아니죠.”
카시안은 장부 가장자리 한쪽을 손끝으로 밀었다.
“중간 정산 창구, 대리 수령, 유예 지급, 전환 계좌.
이름 바꾸는 방법은 많습니다.”
아델린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카시안이 숫자를 세거나 조항을 읽는 타입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적어도 이런 종류의 허점에는 낯설지 않은 듯했다.
“감시관.”
그녀가 불렀다.
“예.”
“어디서 그런 걸 배웠죠?”
카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쟁은 결국 돈으로 굴러가거든요.
병사가 죽었는데도 급여가 사라지지 않으면,
누군가 그 병사를 계속 쓰고 있는 겁니다.”
도로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 그 말 무섭네요.”
“대개 사실도 무섭습니다.”
아델린은 장부 위 특정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
“사망자는 열세 명.
공통점은?”
“전부 황실 직속 조직 출신이에요.”
도로시가 재빨리 답했다.
“경비대 둘, 기록보관실 보조서기관 하나, 종각 관리원 셋,
조달청 서기 둘, 그리고 나머지는 결계 보수 쪽이에요.
부서가 다 흩어져 있는데 이상하게 다 황궁 내부 직위예요.”
“외곽 기사단이나 지방청은 없고요?”
“없어요.
그래서 더 수상해요.”
아델린은 짧게 생각했다.
황궁 내부 직위.
예산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접근권이 섞이면 위험해지는 자리들.
누군가 거대한 돈을 빼돌린 게 아니라,
작고 조용한 권한들을 계속 살려 두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름보다 직위를 봐야겠군요.”
그녀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동의합니다.”
“의견이 맞는 건 별로 반갑지 않군요.”
“저도 조금 섭섭합니다.”
도로시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두 분 원래 이렇게 대화해요?”
“업무 중입니다.”
아델린이 답했다.
“그렇죠.”
카시안도 덧붙였다.
“그래서 더 피곤합니다.”
아델린은 장부를 닫았다.
“좋습니다.
지급실로 갑시다.”
“지금요?”
도로시가 되물었다.
“네.
장부는 사무실에서 읽고, 사기는 현장에서 잡습니다.”
“갑자기 말이 멋있네요.”
“칭찬으로 듣지 않겠습니다.”
지급실은 회계국 본관 지하에 있었다.
황궁 안에서도 창이 가장 적고, 금고가 가장 많고,
공기가 가장 답답한 곳이었다.
낮인데도 등불이 켜져 있었고,
철문 세 겹을 지나야 안쪽 보관실이 나왔다.
도로시가 앞장서며 허리춤에서 회계국 출입패를 꺼냈다.
“원래는 팀장님 한 분만 들어가셔도 되는데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오늘은 제가 넉넉하게 미쳐 보겠습니다.”
세 번째 문이 열리자
안쪽 실무관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도로시와 아델린까지는 예상했을지 몰라도,
그 뒤에 서 있는 카시안은 전혀 예상 못 한 얼굴이었다.
“왜, 왜 그분이 여기…….”
도로시가 산뜻하게 답했다.
“오늘부터 저희 쪽 감시관이래요.”
실무관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요.”
카시안이 무심하게 말했다.
“저도요.”
아델린은 불필요한 대화를 끊었다.
“최근 십 년치 사망자 급여 보관 원장, 지급 명령서 원본,
유예 심사 이력 전부 가져오세요.
그리고 두 달 전 이후 폐쇄된 지급 창구 목록도요.”
실무관은 본능적으로 도로시를 봤다.
도로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같은 편이에요.
오늘은.”
자료가 쌓이기 시작하자
지급실 안쪽 공기는 먼지와 묵은 마력 냄새로 탁해졌다.
아델린은 문서를 분류했고,
도로시는 빠르게 수치 대조 표를 만들었다.
카시안은 처음엔 벽에 기대 서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묻지도 않고
종이 뭉치를 날짜순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이 빠르다.
아델린은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무심코 추린 세 묶음을 눈으로 확인했다.
사망 후 1개월 이내 지급 중단, 사망 후 1년 내 차단,
그리고 아직 지급 중인 건들.
정확했다.
설명 없이도 어디를 먼저 봐야 하는지 아는 사람의 분류였다.
“경험이 많아 보이는군요.”
그녀가 말하자 카시안은 시선도 들지 않았다.
“시체 수습 뒤에 남는 문서는 늘 지저분합니다.”
말은 건조했지만, 도로시는 그 순간 손을 잠깐 멈췄다.
농담처럼 넘길 수 없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아델린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
“도로시.
유예 심사 이력은?”
“여기요.”
도로시가 낡은 서류철을 밀어주었다.
“문제 건 전부가 급여 유예로 한 번 더 돌아가요.
원래는 부상자 행방 불명이나 전시
급보 누락 때 잠깐 쓰는 절차인데,
여기선 죽은 직원들한테 붙어 있어요.”
“사유란은?”
“거의 비었어요.
‘최종 확인 전 유예’ 정도.”
카시안이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같은 손입니다.”
아델린이 그를 보았다.
“뭐가요.”
“사유란 필체.”
“필체만 보고요?”
“잉크 눌림도 비슷하고, 획 끝을 빼는 습관도 같군요.”
그는 서류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다른 연도 문서인데 같은 사람이 적었거나,
같은 사람처럼 쓰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도로시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와, 저건 회계국에서도 잘 못 잡는데.”
아델린은 말없이 문서를 더 끌어왔다.
정말이었다.
날짜는 다르지만 사유란의 획 방향과 잉크 눌림이 거의 같다.
서기관이 여러 번 바뀌었다면 나올 수 없는 통일감이었다.
“좋아요.”
그녀는 짧게 말했다.
“그럼 이건 단순 자동 오류가 아니라 반복된 수작업이군요.”
“네.”
도로시가 장부를 뒤적이며 답했다.
“게다가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요.
유예 지급 최종 승인란이 비어 있는 문서가
몇 개 있는데도 돈은 나갔어요.”
“비어 있는데?”
“겉보기엔요.”
도로시는 종이 한 장을 등불 쪽으로 비췄다.
희미한 압흔이 있었다.
분명 누군가 서명을 눌렀는데, 잉크는 남기지 않은 형태였다.
카시안이 낮게 말했다.
“긁어낸 건가.”
“가능합니다.”
아델린은 문서를 받아 손끝으로 결을 읽었다.
잉크의 잔흔은 없지만, 인장 마력의 얇은 껍질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정식 승인 후 흔적만 지웠다.
“지급실 안에서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겠죠.”
그녀 말에 실무관이 창백해졌다.
“저희, 저희는 모릅니다.
정말로요.”
“모르는 척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릅니다.”
아델린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지금부터 지급실 출입 명단 전부 열람합니다.”
그때 카시안이 문득 천장 쪽을 보았다.
“창문이 있습니까?”
아델린은 고개를 들었다.
지하 지급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없죠.”
“그런데 바람 냄새가 나네요.”
도로시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시인 같은 소리예요?”
카시안은 대답 대신 방 한쪽, 서가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오래된 지급함과 폐기 문서 상자가 벽처럼 쌓인 곳이었다.
아델린은 그를 따라갔다.
카시안은 상자 하나를 밀어내더니 벽면 하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돌 틈 사이에 아주 얇은 틈이 있었다.
비밀 통로까지는 아니지만,
문서 한두 장이나 얇은 봉투 정도는 드나들 수 있는 크기.
“여기서 넘겼군.”
카시안이 말했다.
“뭘요?”
“승인 뒤 문서를 빼내거나, 반대로 끼워 넣었겠죠.”
“근거.”
카시안은 손끝에 묻은 회색 가루를 보여 주었다.
“바깥 회랑 청소용 분필입니다.
지급실 안쪽엔 원래 안 쓰죠.”
도로시가 눈을 크게 떴다.
“진짜네.”
아델린은 벽 틈과 바닥의 미세한 긁힘을 확인했다.
지급실 내부에서만 장부를 조작한 게 아니라,
누군가 회랑 쪽에서 자료를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좋습니다.
출입 통로 위치도 기록하세요.”
실무관이 허둥지둥 받아 적기 시작했다.
아델린은 그 순간, 카시안을 잠깐 바라보았다.
단순히 오래 산 기사나 방치된 유물이 아니었다.
그는 닫힌 방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규칙을 속이는지,
아주 빠르게 읽고 있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감각인지,
궁정에서 오래 버틴 감각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쓸모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마음에 들진 않아도 인정은 해야 했다.
“감시관.”
그녀가 불렀다.
카시안이 돌아보았다.
“이번 건은 괜찮았어요.”
도로시가 펜을 떨어뜨렸다.
“방금 칭찬하셨어요?”
아델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실 확인입니다.”
카시안은 아주 짧게 웃었다.
“그럼 저도 기록해 두죠.”
“쓸데없는 데 기억력이 좋군요.”
“살아남으려면 필요합니다.”
그 말은 여전히 가벼웠지만,
이번에는 아델린도 굳이 잘라내지 않았다.
조사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도로시는 지급 이력을 최신 순과
사망 연도 순으로 교차 정리했고,
아델린은 승인 절차를 역으로 추적했다.
카시안은 지급실, 회랑,
폐기함 위치를 오가며 문서가 움직인 경로를 그렸다.
해가 완전히 저물 무렵, 도로시가 갑자기 허리를 폈다.
“잠깐.”
그녀는 이미 세 번쯤 본 장부를 다시 펼쳤다.
“이상해.”
“또 뭐죠.”
아델린이 묻자 도로시는 장부 두 권을 나란히 펼쳤다.
하나는 정식 지급 승인 장부,
다른 하나는 유예 지급 보조 원장이었다.
“같은 건인데 서명 위치가 달라요.”
“위조?”
“아니요, 더 기묘해요.
정식 장부엔 승인란이 비어 있는데,
보조 원장엔 같은 날 같은 건에 서명이 있어요.”
카시안이 옆으로 다가왔다.
“보여 주시죠.”
도로시가 펜 끝으로 작은 칸을 짚었다.
빛에 각도를 맞추자, 흐릿한 서명이 떠올랐다.
이름은 지워졌지만 직위 표기가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아델린은 숨을 죽이고 결을 읽었다.
황실 급여 유예 심사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직위, 지금 있습니까?”
도로시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회계국 현행 직제에 없습니다.
예전에도 독립 직위였다는 기록은 못 봤고요.”
아델린은 곧바로 지급실 실무관을 봤다.
“당신은 압니까?”
실무관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처, 처음 듣습니다.”
카시안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듣는 표정은 아니군.”
실무관이 움찔했다.
“정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델린은 보조 원장을 빛에 비춘 채 서명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은 없고 직위만 남은 서명.
담당자는 없는데 결재 흔적은 있다.
직함은 있는데 사람은 없다.
유령직위였다.
도로시가 숨을 삼키며 속삭였다.
“팀장님.”
“예.”
“죽은 직원 급여를 살린 게 사람 하나가 아니라,
직위 자체일 수도 있어요.”
아델린은 장부를 천천히 덮었다.
“아니요.”
그녀가 말했다.
“직위는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 직위를 쓰고 있어요.”
카시안의 금빛 눈이 서명 위에 멈춰 있었다.
아주 오래된 전쟁 문양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름은 대개 하나로 끝나지 않죠.”
아델린은 즉시 결론을 내렸다.
“관련 장부 전부 봉인합니다.
오늘부로 지급실은 이 건에 대한 문서 반출 금지.
도로시는 문제 건 열세 명의 직위선을 다시 따고,
감시관은 회랑 통로와 연결된 부서를 확인하세요.”
“네.”
도로시가 빠르게 받아 적었다.
“어느 쪽부터 볼까요?”
“서명이 먼저입니다.”
아델린은 보조 원장을 품에 안았다.
“존재하지 않는 직위가 승인선을 탔습니다.
이게 1차 핵심입니다.”
카시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팀장님.”
“왜죠.”
“이제 조금 실감이 납니까?”
“무엇이.”
“황실이 생각보다 더 썩었다는 것.”
아델린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아뇨.”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생각한 만큼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시안도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지급실 철문이 닫히고,
세 사람의 발소리가 지하 복도에 길게 울렸다.
장부 속 죽은 이름들, 사라진 승인선,
그리고 사람 없이 움직이는 직위.
황실 인사팀의 첫 공동 업무는 이제 겨우 입구를 찾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 입구 한가운데,
분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서명이 하나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