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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 메이커

"준비되셨습니까? 솔루션 시작합니다." 회의가 엉망진창으로 마무리 된 뒤, 박지호 대리에게 어제 이야기 했던 논문 심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브리핑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선언과 함께 바이오솔루션팀 사무실은 순식간에 '작전 상황실'로 돌변했다. 한승우 팀장은 어느새 정장 재킷을 벗어던지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화이트보드 앞을 서성이고 있었고, 이소연 과장과 윤채린 대리는 각자 노트북을 펴고 서류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 작전의 핵심 브레인, 박지호 대리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재 학계의 가장 큰 맹점은 '사람'입니다." 박지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평소 윤채린 앞에서 쩔쩔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달렸다. 화면에는 해외 저널의 '심사 철회 사례'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피어 리뷰 시스템의 고질병이죠. 심사위원 A가 논문을 보는데, 저자가 경쟁 관계인 B 교수 제자다? 그럼 일단 꼬투리잡고 탈락시킵니다. 반대로 자기 라인인 C 교수 제자다? 데이터가 부실해도 '참신한 시도'라며 통과시키죠. 객관성? 공정성? 그런 건 교과서에나 있는 얘기고, 실상은 '정치'와 '인맥'의 전쟁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화이트보드에 붉은색 마카로 크게 적었다. [규칙 기반 검증 시스템] "사람이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오직 시스템이 정한 '룰'대로만 굴러가게 만든다. 이게 우리의 전략입니다." "룰 베이스라... 기획실 양반들이 딱 좋아할 단어네." 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벌써부터 최민석 상무를 설득할 멘트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근데 연구소 박사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자기들 연구를 '기계' 따위가 평가한다고 하면 노발대발할 텐데." 이소연 과장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미끼가 필요합니다." 나는 박지호 대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박 대리님, 중앙연구소 수석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심사 기준'이 뭡니까?" "음... '기초 이론의 특수성'이죠. 당장 돈은 안 되지만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 이걸 평가절하하면 '과학 모독'이라며 뒤집어집니다." "좋아. 그럼 그 부분을 '특별 가산점' 항목으로 빼주죠. 단, 그 가산점의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정하라고 한다?" 윤채린이 내 의도를 눈치채고 문장을 완성했다. "빙고. '평가 기준 제정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들에게 감투를 씌워주는 겁니다. 자기들이 만든 룰이니까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겠죠." "와... 진짜 악질이다, 형님." 정민재가 혀를 내둘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한 승우 팀장이 한숨을 쉬며, 업무를 분배한다. "자, 그럼 각자 맡은 파트 정리합시다. 이소연 과장님은 연구소 박사들 성향 분석해서 '당근' 리스트 뽑아주시고, 박지호 대리는 평가 알고리즘의 논리적 허점 메워주세요. 윤채린 대리는 시스템 아키텍처 초안 잡아주시고. 서준혁 박사는 뭐... 나랑 같이 좀 자료 좀 봅시다." 착, 착, 착. 타건 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누구도 '싫다', '못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 그동안 무시받았던 '솔루션'팀이, 연구소라는 거대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화이트보드에는 복잡한 플로우 차트가 거미줄처럼 얽혀가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적혀 있었다. [목표: 절대 통제권 확보] #2. 솔루션팀의 반격 다음 날 아침, 기획조정실 상무실 앞. 한승우 팀장은 낡은 베이지색 재킷 대신,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감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비록 유행 지난 핏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비장했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제안서가 들려 있었다.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상무실. 최민석 상무는 최고급 가죽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독수리 날개처럼 펼쳐진 수행 비서들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 속에서도 한 팀장은 떨지 않았다. 어젯밤, 팀원들과 밤을 새우며 만든 '솔루션'이 그의 등 뒤를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준비는 좀 했나?" 최 상무가 삐딱하게 물었다. "네. 저희가 분석한 결과, 현재의 심사 방식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팀장은 서론을 길게 빼지 않았다. 그는 준비해 온 PT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문제점: 주관적 평가로 인한 신뢰도 하락 및 로비 비용 발생] [해결책: 정량적 데이터 기반의 자동 평가 알고리즘 도입] "지금까지 논문 심사는 심사위원들의 '감'에 의존했습니다. '우수하다', '미흡하다' 같은 모호한 기준이 로비를 불렀죠. 그래서 저희는 '기준'을 아예 데이터화했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복잡한 플로우 차트가 나타났다. 이소연 과장과 윤채린 대리가 밤새 엑셀과 싸워가며 만든 '평가 지표 매트릭스'였다. 실험 데이터 재현율: 95% 미만 시 자동 반려. 비용 대비 효율성: ROI 1.5 미만 시 '조건부 보류'. 현장 리스크 지수: 안전 등급 C 이하 시 시뮬레이션 의무화. "심사위원이 점수를 매기는 게 아닙니다. 연구자가 데이터를 입력하면, 시스템이 1차 등급을 자동 산출합니다. 심사위원은 그 결과값이 '참'인지 '거짓'인지만 검증하면 됩니다. 외압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최 상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엑셀 신봉자였다. 숫자로 딱 떨어지는 이 논리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아. 논리는 그럴듯하군. 하지만 말이야, 한 팀장. 저 콧대 높은 중앙연구소 박사들이 이 기준에 동의할까? 자기들 연구를 기계가 평가한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들고일어날 텐데?" "그래서... 권한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권한?" "네. 이 '평가 지표'를 만드는 권한. 그걸 중앙연구소 수석급 연구원들에게 위임할 겁니다." 한 팀장의 말에 최 상무가 처음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흥미롭다는 뜻이다. 이건 이소연 과장의 아이디어였다. "그 꼰대들은 자기들이 대접받는 걸 좋아해요. 룰을 지키라고 하면 반발하지만, 룰을 '만드시는 분'이라고 치켜세우면 감투 쓴 줄 알고 좋아할걸요?" "박사님들이 직접 만든 기준이니, 그 기준에 의해 탈락해도 불만을 가질 수 없겠죠. 자신들이 정한 룰이니까요." "허... 독을 독으로 제압하겠다?" 최 상무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재미있군. 아주 '정치적'인 공학이야. 마음에 들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행 비서에게 손짓했다. "진행해. 예산 승인하고, 전산팀 붙여줘. 바이오솔루션팀이 원하는 대로 시스템 구축하도록." #3. 아키텍트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바이오솔루션팀은 전쟁 모드에 돌입했다. 상대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데이터'였다. "박 대리, 중앙연구소에서 보낸 지표 리스트 왔어?" "네! 근데 이 양반들, 또 자기들 유리한 조항 숨겨놨는데요? '기초 이론의 특수성' 항목에 가산점 20%... 이거 완전 꼼수 아닙니까?" 박지호가 듀얼 모니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는 평소의 짝사랑남 모드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날카로운 '지적 사냥개'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허점을 찾아내는 그의 눈빛은 헌터의 동체 시력 못지않았다. "반려해. '정량적 수치로 환산 불가능한 항목은 배제한다'는 대원칙 1조 상기시키고." 서준혁, 아니 내가 지시했다. 나는 화이트보드 앞에서 전체 시스템의 아키텍처를 그리고 있었다. [입력] -> [알고리즘 필터링] -> [1차 등급 산출] -> [검증위 심사] -> [최종 승인] 단순해 보이지만, 이 안에는 수많은 함정과 방어 기제가 숨겨져 있었다. 윤채린 대리는 옆에서 묵묵히 코딩을 점검하고 있었다. "준혁 씨, 여기 보안 레벨 설정이 좀 이상한데요?" "네?" "데이터베이스 접근 권한이요. 왜 굳이 '과거 아카이브' 서버까지 연동시키는 거죠? 이번 프로젝트 범위는 신규 논문 검증이잖아요." 윤채린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역시 감이 좋다.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기존 연구와의 중복성 검사' 때문입니다. 표절 잡으려면 옛날 자료랑 대조해야 하니까요." "흐음... 그렇군요." 윤채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일처리'를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나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 시스템은 표면적으로는 투명한 논문 검증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연구소 전체의 데이터 흐름을 감시하는 거대한 파놉티콘(원형 감옥)'**을 심어두는 것이다. 모든 부서가 자신의 성과를 입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갖다 바치는 시스템. 나는 앉아서 그들이 바치는 정보를 뜯어보기만 하면 된다. 그 안에... 분명히 놈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진실'도 섞여 들어올 것이다. 30년 전의 화석이든, 지하 깊은 곳의 유령이든. "자, 오늘 밤까지 알고리즘 로직 완성합니다! 야근 식대 무제한이니까 법카 긁어!" 한 팀장의 호기로운 외침에 사무실에 활기가 돌았다. "오! 랍스터 시켜도 됩니까?" 정민재가 환호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이소연 과장이 등짝을 때렸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밤샘 작업. 익숙하다. 군대 행정반 시절, 사단 보안 감사 대비를 위해 3일 밤낮을 서류 더미 속에서 구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국 승리하는 건 총 든 놈이 아니라 '서류 쥔 놈'이다. '기대해라, 닥터 파브르. 네가 만든 이 거대한 미로의 설계도를, 내가 훔쳐내 줄 테니까.' 모니터 화면 위로, 수많은 숫자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진실을 향해 뻗어나가는, 차갑고도 정직한 좌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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