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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사이클

"못 믿겠는데?" 김형석 수석 연구원의 차가운 한마디에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화면에는 이번 주 가장 중요한 안건인 **[광역 방어용 페로몬 살포 시스템]**의 심사 결과가 떠 있었다. 종합 등급 'B-'. 조건부 보류에 해당하는 점수였다. "B 마이너스라니. 우리 팀이 3년을 갈아 넣은 프로젝트야. 고작 기계 따위가 산출한 이 점수를 받아들이라고?" 김 수석이 알코올 솜으로 테이블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쏘아붙였다. 단상에 서 있던 한승우 팀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이크를 잡았다. "저, 수석님. 이건 감정이 들어간 게 아니라, 사전에 입력된 알고리즘에 따른...." "그 알고리즘을 누가 짰지?" 김 수석의 눈빛이 한 팀장을 넘어, 배석해 있던 우리 바이오솔루션팀을 향했다. "결국 당신들 입맛대로 가중치 조정한 거 아니야? 기획실 예산 아껴주려고?"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지켜보던 박성훈 부장이 끼어들었지만, 김 수석은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까고 말합시다. '룰 베이스'? 듣기엔 그럴싸하지. 하지만 코드를 짠 건 사람이야. 이 안에 당신들의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누가 보장해? 난 이 결과 인정 못 해. 사람이 직접 재검증해!"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특히 현장팀장 장석훈도 팔짱을 낀 채 거들었다. "나도 동감이야. 기계는 현장의 '변수'를 몰라. 몬스터가 교과서대로만 움직이나? 시뮬레이션 돌려봤어? 직접 굴러봤냐고." 회의실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기 직전이었다. 심사위원들의 주관을 배제하기 위해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시스템의 '설계 의도'를 의심받는 상황. 한 팀장의 눈동자가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구석 자리의 솔루션팀. 이소연 과장이 펜을 딱딱거리며 짜증을 냈다. "아오, 저 꼰대들. 지들이 만든 기준에 미달해놓고 왜 우리한테 화풀이야?" "과장님, 진정하세요. 등급컷이 너무 빡빡하긴 했다니까요. 재현율 95 미만이면 가차 없이 자르니까." 정민재 대리가 눈치를 살피며 거들었다. "야! 너도 문제야. 시뮬레이터 서버 관리 똑바로 안 해? 왜 렉이 걸리고 난리야?" "아니, 그건 서버가 낡아서..." "변명 금지. 가서 서준혁 불러와. 박 대리랑." 하지만 부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나는 박지호 대리와 함께 서버실에서 터미널을 열고 있었으니까. #2. 월드 시뮬레이션 모델 "준비됐어?" "네, 형님... 아니, 박사님. 근데 진짜 이걸로 될까요?" 박지호 대리가 떨리는 손으로 엔터키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화면에는 [World Simulation Model : Activated] 라는 문구가 깜박이고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빨라. 저들이 원하는 건 '신뢰'가 아니야. '반박할 수 없는 패배'지." 나는 인이어 마이크를 켰다. "팀장님. 시뮬레이션 준비 완료됐습니다. 화면 전환하시죠." 회의실의 한승우 팀장이 내 목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 자!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말로만 하니까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김 수석님도, 장 팀장님도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한 팀장의 신호와 함께, 회의실 전면의 대형 스크린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졌다. 그곳에는 3D로 구현된 가상의 '방어선'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우리 팀이 개발한 월드 시뮬레이션 모델입니다. 실제 현장 데이터와 김 수석님의 논문 데이터를 결합해서 가상의 전투를 돌려보는 거죠." "흥, 게임이라도 보여주겠다는 건가?" 김 수석이 코웃음을 쳤다. "시작해." 내가 박지호에게 신호를 줬다. 박지호가 엔터키를 눌렀다. 쿠구구구... 스피커를 통해 웅장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화면 속에서 수천 마리의 '가상 몬스터'들이 방어선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김 수석이 개발한 '페로몬 살포기'가 작동했다. 치이이익- 보라색 가스가 전장을 덮었다. 이론대로라면 몬스터들은 혼란에 빠져 서로를 공격하거나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경고: 풍향 변화 감지] [확률 변수: 돌풍]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건 내가 장석훈 팀장의 '현장 데이터'에서 가져온 변수였다. 보라색 가스가 아군 진영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어... 어?" 김 수석의 눈이 커졌다. 보라색 가스가 살포기를 조작하던 가상의 요원을 그대로 덮쳤다. 페로몬의 확산 노즐의 범위를 지나치게 넒게 퍼지도록 설계한것이 원인 같았다. 좁은 범위에 적당량 살포가 아닌 한번에 많은 범위를 커버하려는 욕심이 현장의 상황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요원의 몸이 보라색 픽셀로 표기된 페로몬 가스가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자신이 뿌린 가스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꼴이었다. [시뮬레이션 종료] [생존율: 극도로 낮음] [원인: 기상 변수에 대한 대응책 부재] 화면에는 붉은색 글씨로 처참한 성적표가 떴다.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까까지 목소리를 높이던 김 수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내 설계에 오차는..." "오차는 없으셨죠. '실험실' 안에서는요." 한 팀장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멘트는 내가 써준 대본이었다. "하지만 현장은 다릅니다. 장석훈 팀장님 말씀대로, 몬스터와 날씨는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시스템이 'B-'를 준 건, 이 변수 때문이었습니다. 틀렸나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비주얼 쇼크.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라, 눈앞에서 펼쳐진 '가상의 죽음'은 그 어떤 논리보다 강력했다. "......인정하지." 장석훈 팀장이 먼저 침묵을 깼다. "저따위 물건 들고 나갔으면 우리 애들 다 죽었어. 시스템이 정확했네." 현장의 리더가 인정하자,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김형석 수석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과학자로서 '결과값'을 부정하는 건 자기 부정이나 다름없으니까. #3. 위기 탈출 "휴우... 십년감수했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한승우 팀장이 소파에 대자로 뻗었다. 그의 셔츠 등판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팀장님, 아까 멘트 쩔었어요! '오차는 없으셨죠, 실험실 안에서는요.' 와... 영화 주인공인 줄?" 정민재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시끄러워, 이 자식아. 나도 준혁이가 적어준 거 읽은 거야. 다리가 후들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이번 건으로 확실히 도장 찍었네요. 이제 아무도 우리 시스템에 토 못 달걸요?" 이소연 과장이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를 탔다. 그녀는 김 수석이 파랗게 질린 표정을 짓던 순간을 핸드폰으로 몰래 찍어둔 모양이었다. "이거 우울할 때마다 봐야지."라며 낄낄거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서버실에서 나오며 조용히 말했다. 박지호 대리는 옆에서 탈진한 듯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준혁 씨... 다음부터는 미리미리 좀 합시다. 실시간 렌더링 돌리느라 그래픽카드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잖아요." 나는 피식 웃으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에는 방금 돌린 시뮬레이션의 로그가 남아 있었다. 사실 그 시뮬레이션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돌풍' 변수의 발생 확률을 내가 살짝 높여놨다는 것. 물론 조작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였을 뿐. 하지만 그 작은 조정이 회의의 판도를 뒤집었다. 시스템은 공정하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건 결국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면, 이 시스템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일단 이번 주는 넘겼고.' 나는 달력을 쳐다봤다. 월급날까지 D-5. 평화롭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모니터를 껐다. 일단은 이 평화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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