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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죄다

"오, 여기 있었군. 한 팀장." 평화로운 오후의 바이오솔루션팀 사무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사무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기획조정실의 실세, 최민석 상무였다. 그의 등장은 흡사 제황의 행차 같았다. 최 상무를 중심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수행 비서들과 실무진들이 좌우로 쫘악 펼쳐져서 우르르 사무실로 밀고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비좁은 새장 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최 상무는 마치 기름을 바른 듯 매끈하게 빗어 넘긴 포마드 머리에, 핏이 딱 떨어지는 이탈리아산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얇은 눈매는 엑셀 시트의 미세한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벽증적인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아, 상무님? 여긴 어쩐 일로..."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던 한승우 팀장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그 낡은 베이지색 재킷이 오늘따라 더 초라해 보였다. "지나가던 길에 잠깐 들렀네. 자네 팀 분위기가 어떤가 해서." 최 상무가 사무실을 쭉 둘러봤다. 게임 방송을 보다 황급히 창을 내리는 정민재,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다 멈춘 이소연, 묵묵히 서류를 넘기는 윤채린. 산더미 같은 해외 생물학 저널에 파묻혀 무언가를 열심히 체크하던 박지호 대리. 그리고 구석에서 커피를 타고 있는 나, 서준혁. 그의 시선이 마치 위생 검열관처럼 깐깐하게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소연 과장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했지만, 최 상무는 가볍게 무시하고 한 팀장의 책상 위에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던졌다. 마치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듯, 무심하고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이게... 뭡니까?" "선물이야. 위에서 이번에 '연구 투명성 강화' 지시 내려온 건 알지? 요즘 데이터 조작 이슈 때문에 회장님 심기가 불편하시거든." "네,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근데 이게 골치 아파. 중앙연구소 박사님들은 자존심 세지, 현장팀 무식쟁이들은 말 안 통하지, 우리 기획실은 바쁘지. 이걸 누가 조율하나 고민하다가, 딱 자네 팀이 생각나더군." 최 상무가 빙긋 웃었다. 뱀이 먹이를 앞에 두고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미소였다. "그래, 여기 바이오솔루션 팀, 해결이라는 뜻이지. 아주 좋은 이름이야." 그 칭찬이 왜 이렇게 불길하게 들릴까. 커피 믹스를 젓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멈췄다. "이름값을 해야지. 이번 '연구 검증 TF' 간사 역할, 자네 팀이 맡게. 문과와 이과, 이론과 현장 그 사이에 딱 걸쳐 있는 잉여... 아니, 융합 인력들이니 아주 적격이야." "예? 저희가요? 아니, 상무님. 저희는 지금 필드 파견 만으로도 인력이..." 한 팀장이 울상을 지으며 방어에 나섰지만, 최 상무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거절은 거절하네. 잘 해결하면 연말 평가 때 내가 특별히 신경 써줌세." 그는 업무 지시라는 폭탄을 아주 산뜻하게 던져놓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가자." 그의 짧은 한마디에, 좌우로 펼쳐져 있던 검은 정장의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우르르르.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사무실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름이 죄다, 정말. 무슨 심부름센터도 아니고, '솔루션'이라는 이름 하나 때문에 온갖 잡일이 다 굴러들어 온다. 심지어 직접 찾아와서 일을 던지고 가다니. 이건 부탁이 아니라 통보다. 거부할 수 없는 '갑'의 통보. "와...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저 인간 싸가지 봤어요?" 상무님이 사라지자마자 이소연 과장이 책상을 쾅 치며 폭발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의 '사회생활용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늘따라 화사한 핑크색 블라우스를 입었는데, 얼굴색과 깔맞춤이 되어버렸다. "아니... 최 실장이 좀 챙겨준다잖아..." 한 팀장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변명했다. "그 짠돌이 말을 믿어요? 작년에도 회식비 지원해 준다 해놓고 법인카드 한도 초과라고 까버린 인간인데!" 이소연은 분이 안 풀리는지 허공에 대고 펀치를 날렸다. "어휴, 진짜 호구 잡혔어, 호구." "근데 이거... 쉽지 않을 겁니다. 전형적인 논문 심사의 함정이거든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박지호 대리가 입을 열었다. 평소의 어리버리한 모습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서울대 석사 출신다운 통찰력이었다. "학계에서도 늘 문제가 되거든요. 심사위원이 경쟁자면 고의로 탈락시키고, 지인이면 무조건 통과시키고. 객관적인 지표 없이 '사람'이 평가하게 두면, 이건 100% 정치 싸움으로 변질됩니다. 우리보고 그 심판을 보라니, 사실상 총알받이 하라는 거죠." 옆자리에서 게임 방송을 몰래 시청하던 정민재 대리가 이어폰을 빼며 끼어들었다. "근데 팀장님, 간사 역할이면... 예산은 따로 나오나요? 전체 운영비도 우리가 관리하는 거죠?" "일이 산더미처럼 쏟아지게 생겼는데!" 윤채린 대리가 정민재의 뒤통수를 가볍게 노려봤다.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노려봤다. 마치 그 보드에 적힌 '연구 검증 TF'라는 글자를 눈빛으로 태워버릴 기세였다. "그래서... 거부권은 있습니까?" 윤채린이 물었다. 목소리에 감정이 1도 없었다. "없어." 한 팀장이 짧게 대답했다. "그럼 해야죠. 방법 없습니다." 윤채린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역시 에이스. 현실 파악이 빠르다. 나는 조용히 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검증 시스템 구축'. 말이 좋아 시스템이지, 이건 사실상 '완장' 채워줄 사람 찾는 게임이다. 누군가는 평가하고, 누군가는 평가받아야 한다. 누가 칼자루를 쥐느냐의 싸움. 그리고 우리 팀은 칼자루도, 칼날도 아닌... 칼을 올려놓을 '도마'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2. 아수라장 며칠 뒤, 대회의실. 바이오솔루션팀이 주재하는 첫 번째 '연구 검증 위원회' 준비 모임이 열렸다. 공기는 무거웠고, 에어컨 바람조차 눈치를 보며 흐르는 듯했다. 테이블은 정확히 삼각형 구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각 진영의 대표 선수들이 입장했다. 1. 중앙연구소 (이론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김형석 수석 연구원이었다. 그는 은색 금속테 안경을 쓰고, 티끌 하나 없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슴 포켓에는 몽블랑 만년필 세 자루가 나란히 꽂혀 있었는데, 마치 훈장처럼 보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알코올 솜을 꺼내 테이블을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표정에는 '내가 왜 이런 하찮은 자리에 와야 하는가'라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순수 과학 지상주의자였다. 현장의 땀냄새나 기획실의 돈 냄새를 혐오하는 고고학 학자 스타일. 2. 기획조정실 (예산파) 맞은편에는 최민석 실장을 대신해 나온 박성훈 부장이 앉았다. 그는 최 실장의 복제품 같았다. 칼 같은 정장,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태블릿 PC에는 엑셀 차트가 띄워져 있었다. 그는 1원 단위까지 계산하는 인간 계산기였다. 그에게 연구란 '투자 대비 수익'이 나와야 하는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3. 현장연구팀 (실전파) 마지막으로 문을 쾅 열고 들어온 남자는 장석훈 팀장이었다. 그는 가운 대신 온갖 주머니가 달린 전술 조끼를 입고 있었다. 팔뚝에는 몬스터에게 긁힌 듯한 흉터가 선명했고,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구리빛이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거친 야전 냄새에 김 수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 장 팀장은 현장에서 직접 장비를 테스트하고 몬스터와 싸우는 실전 부서의 리더였다. 그는 이론가들을 '책상물림'이라고 경멸했다. 그리고 그 삼각형의 정중앙, 가장 위태로운 자리에 우리 한승우 팀장이 앉아 있었다. 옆에는 서기 역할을 맡은 내가 노트북을 펴고 대기 중이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안건은..." 한 팀장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자마자, 김 수석이 말을 끊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합시다. 지금 우리 중앙연구소 논문을 검증하겠다는 겁니까? 누가? 감히?" 그가 볼펜으로 테이블을 딱딱 쳤다.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김 수석님, '감히'라뇨. 표현이 좀 거치시네요. 이게 다 회장님 지시 사항인 거 모르십니까?" 기획실 박 부장이 차갑게 받아쳤다. "지시요? 웃기지 마쇼. 이거 기획실에서 짠 판이잖아? 연구비 삭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 기초 과학이 무슨 자판기인 줄 알아? 동전 넣으면 바로 논문 튀어나오게?" "아니, 돈만 쓰고 성과가 없으면 삭감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작년에 '거미줄 탄성 연구' 한다고 받아간 50억, 결과물이 뭡니까? 고작 접착제 하나 나왔습니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연구를 모독하지 마세요!" "돈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사이, 이번엔 장석훈 팀장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커피잔이 덜그럭거렸다. "아, 시끄러워! 다 집어치우고! 이번에 보급 나온 '산성 용액 분사기', 그거 누가 만들었어? 엉?" 장 팀장이 김 수석을 노려보며 삿대질을 했다. "그거 테스트하다가 우리 대원 한 명 화상 입었어! 이론상 사거리가 10m라며? 근데 왜 역풍 불면 사용자가 뒤집어쓰는데? 너네가 현장을 알아?" "그건... 사용자의 숙련도 미숙이나 기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지랄! 연구실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시뮬레이션이나 돌리니까 그따위 물건이 나오지! 너네가 직접 들고 쏴 봐! 괴물 앞에서!" "말조심해! 당신들 무식하게 몸 쓰는 거 도와주려고 우리가 머리 짜내는 거야!" 아수라장.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한승우 팀장은 "자, 자, 다들 진정하시고..."라며 중재를 시도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폭풍 속의 모기 소리처럼 묻혀버렸다. 이소연 과장은 옆에서 썩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와... 진짜 답 없다. 저 인간들 어떻게 한자리에 모았대?" 나는 묵묵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회의록에는 이렇게 적었다. [10:15] 상호 이해 부족으로 인한 격렬한 의견 교환 중. 사실대로 적자면 [10:15]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는 중. 조만간 유혈 사태 발생 가능성 있음.이겠지만. 이곳에는 '기준'이 없었다. 이론이 최고라는 자존심, 돈이 최고라는 계산, 생존이 최고라는 본능.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세 종족이 모여서 바벨탑을 쌓고 있었다. #3. 관찰자의 눈 나는 회의실 구석, '서기'라는 이름의 투명 인간 자리에 앉아 이 난장판을 관찰했다. 마치 저격수가 스코프를 통해 타겟의 동선을 파악하듯이. 김형석 수석. 그는 권위주의자다.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에게 '평가'는 모욕이다. 하지만 역으로 그에게 '평가할 권한'을 준다면? 그는 누구보다 깐깐한 심사위원이 될 것이다. 박성훈 부장. 그는 실리주의자다. 과정 따위는 관심 없다. 오직 '숫자'로 증명되는 명분만 있으면 된다. 그에게 필요한 건 예산 삭감의 '근거'다. 장석훈 팀장. 그는 생존주의자다. 화려한 이론도, 복잡한 예산도 필요 없다. "이게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 그 답만 원한다. 그리고 우리, 바이오솔루션팀. 지금 우리는 샌드백이다. 이쪽에서 치이고, 저쪽에서 까인다. 중재자? 웃기는 소리다. 힘없는 중재자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일 뿐이다. 한승우 팀장은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시죠..."라고 애원하고 있다. 저대로 가면 이 회의는 아무 결론 없이 끝나고, 모든 책임은 '능력 없는 간사'인 우리 팀이 뒤집어쓴다. 기획실장은 "자네 팀 이름값 못 하는군"이라며 혀를 찰 것이고, 각종 지원은 물 건너갈 것이다. 그건 곤란하다. 내가 이 회사를 다니는 유일한 이유가 복지와 연봉인데. 좋은 팀장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나는 잠시 타건을 멈췄다. 눈앞의 모니터 화면에는 깜빡이는 커서만 가득했다. '솔루션이라...' 문제는 규칙의 부재다. 규칙이 없으니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규칙을 만들면 된다. 심판은 그라운드에서 뛸 필요 없다. 호루라기만 있으면 된다. 단, 그 호루라기 소리에 모두가 멈출 만큼 강력한 '권위'가 필요하다.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나는 장석훈 팀장의 흉터와, 김형석 수석의 만년필, 그리고 박성훈 부장의 계산기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들의 욕망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키워드. '안전' 박사들에게는 '실험 실패의 책임 회피'를. 기획실에는 '사고 처리 비용 절감'을. 현장팀에는 '생존 보장'을.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가치. 그걸 명분으로 삼으면 된다. "팀장님." 내가 조용히 한 팀장을 불렀다. 전쟁터의 포화 속에서 넋이 나간 듯한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네? 어, 준혁아. 왜?" 한 팀장이 구세주를 본 듯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봤다. "잠깐 휴식하시죠. 이대로는 밤새도 답 안 나옵니다." "그... 그럴까?" 한 팀장이 용기를 내어 마이크를 잡았다. "자, 자! 잠깐 휴식! 10분만 쉽시다! 머리 좀 식히고 하시죠!"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거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한 팀장과 이소연 과장, 윤채린 대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작전 지도를 펼치듯, 내 노트북 화면을 그들에게 돌려 보여주었다. "우리가 계속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치? 내 말이! 저것들 다 미친놈들이라니까!" 이소연 과장이 울분을 토했다. "판을 바꿉시다." 내 말에 윤채린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떻게요?" "우리가 심판이 되는 겁니다. 그냥 심부름꾼 간사가 아니라, 거부권을 가진 진짜 심판이요." "우리가? 무슨 힘으로?" 한 팀장이 되물었다. "우리에겐 '솔루션'이라는 간판이 있잖아요. 이름값 해야죠." 나는 씩 웃었다. 군대 행정반에서 익힌 문서 작업 스킬과, 특수부대에서 배운 심리전. 그리고 이 연구소의 생리를 꿰뚫는 통찰력. 이 모든 것을 동원해서, 나는 지금부터 아주 정교한 '시스템'을 설계할 생각이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투명하고도 잔혹한 거미줄 같은 시스템을. "준비되셨습니까? 솔루션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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