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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린토스 일러스트

라비린토스

“지금 당신이 가면 상황만 악화될 뿐이에요. 이건 단순한 폭주 사건이 아니에요. 명백한 ‘범죄 현장’이라고요.”

​

그녀의 눈빛은 전생에 프로파일러였던 ‘김윤아’의 그것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

“현장은 보존되어야 하고, 증거는 수집되어야 해요. 당신이 가서 다 쓸어버리면, 닥터 최가 남긴 유일한 단서도 사라져 버릴 거예요.”

“단서?”

​

권이헌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

“저런 쓰레기들을 만드는 놈들을 찾아낼 단서 말인가? 그딴 건 필요 없어. 내 눈에 띄는 족족 전부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아니요, 필요해요.”

​

서아린은 단호했다.

​

“이건 무차별 테러가 아니에요. ‘실험’이에요. 닥터 최는 지금 자신의 새로운 약물이 대중에게 얼마나 효과적인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는 거라고요. 현장에는 반드시 그의 흔적, 그의 ‘서명’이 남아있을 거예요.”

​

그녀의 확신에 찬 분석에 권이헌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

결국, 두 사람은 강지훈의 통제 하에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이미 폭주자는 제압되어 연행된 후였고, 관리국 요원들이 폴리스 라인을 치고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

“여긴 민간인 통제 구역입니다, 권 에스퍼.”

​

강지훈이 그들을 막아섰지만, 권이헌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폴리스 라인을 넘어섰다. 강지훈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권이헌이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 서아린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감정의 잔향을 읽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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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공포, 분노… 이건 피해자들의 감정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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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수많은 감정의 찌꺼기들 사이로, 이질적이고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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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져요.”

​

서아린이 나직이 읊조렸다.

​

“이 현장에… 닥터 최의 대리인이 있었어요. 아주 가까이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어요. 그가 남긴 잔향이에요. 차갑고, 비인간적인… 만족감 같은 거.”

​

그녀의 말에 권이헌과 강지훈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원격 조종이 아니었다. 적은 바로 그들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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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인공 각성’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서울뿐만 아니라, 뉴욕, 런던, 도쿄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비슷한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

닥터 최가 아닌, 그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조직이 전 세계를 상대로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각국 정부는 비상사태에 돌입했고, 국제 공조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에스퍼 심리 안정 연구소의 설립을 준비 중이던 펜트하우스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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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능력안보국(HSA) 소속, 줄리안 크로프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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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소개한 남자는 할리우드 배우처럼 화려한 금발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권이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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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예지 능력자죠. 당신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미스터 권. 대한민국 최강의 염동력자.”

​

권이헌은 그의 손을 맞잡는 대신, 차가운 눈으로 그를 훑어볼 뿐이었다. 자신과 동급의 S급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렬한 기운에 본능적인 경계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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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일이 뭐지?”

“볼일이라뇨, 섭섭하게. 국제 공조를 위해 파견된 공식 파트너입니다. 그리고….”

​

줄리안의 시선이 권이헌의 뒤에 서 있는 서아린에게로 향했다. 그의 푸른 눈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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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아주 희귀하고 특별한 능력을 가진 분이 계시다고 해서요. 제 예지가 당신을 가리키더군요, 미스 서.”

​

그가 서아린을 향해 능숙하게 손등 키스를 하려는 듯 다가가자, 권이헌이 순간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두 S급 에스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

“내 사람에게서 손 떼.”

“오, 진정해요. 친구. 그냥 인사였을 뿐입니다.”

​

줄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섰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서아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그날 밤, 줄리안은 권이헌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그는 국제 공조를 통해 얻어낸 충격적인 정보를 꺼내놓았다.

​

“닥터 최는 잊어요. 그는 도마뱀 꼬리에 불과합니다. 진짜 몸통은 따로 있으니까.”

“몸통?”

“우리는 그들을 ‘라비린토스(Labyrinthos)’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비밀 결사죠. 그들의 목표는 하나, 바로 ‘인류의 강제 진화’입니다.”

​

줄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대 유물에서 추출한 미지의 에너지원을 이용해, 일반인들을 강제로 각성시키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폭주하는 불안정한 능력자들은 그들에게 실패작일 뿐이죠. 그들은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병사’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세상의 질서를 새로 쓰려는 겁니다.”

​

권이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자신이 겪었던 비극이, 고작 그런 미친놈들의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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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예지에 따르면….”

​

줄리안은 서아린이 있는 방향을 턱으로 가리켰다.

​

“그들의 계획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저 아가씨입니다. 그녀의 능력… 단순한 정화 능력이 아니더군요. 제 미래 예지 능력으로도 그녀의 잠재력은 끝이 보이지 않아요. 아주 흥미로워.”

​

줄리안의 말은 협력이었지만, 동시에 견제이기도 했다. 그는 서아린이라는 미지의 변수에 대한 독점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권이헌에게, 그녀가 더 이상 그 혼자만의 안정제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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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안 크로프트의 합류로, 펜트하우스의 비밀 연구실은 국제적인 작전 본부의 모양새를 갖춰갔다. 줄리안이 가져온 HSA의 방대한 데이터와 서아린의 프로파일링, 권이헌의 JK그룹 정보력이 합쳐지자, 라비린토스의 실체에 대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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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헌은 며칠 밤낮으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잠도 자지 않고 정보 분석에 몰두했다. 서아린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파괴한 놈들을 향한 복수심이 그를 채찍질했다.

​

“도련님, 이러다 쓰러지십니다. 식사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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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훈 실장이 쟁반에 담아온 음식을 내밀었지만, 권이헌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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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시간 없어.”

​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고 서아린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도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김치찌개와 갓 지은 밥. 한정훈 실장이 준비한 최고급 호텔 요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소박한 가정식이었다.

​

그녀는 권이헌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앞 책상에 어지럽게 널려있던 데이터 칩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쟁반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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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시죠.”

“입맛 없어.”

​

권이헌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서아린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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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규칙 제1조>. 하루 한 끼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식사할 것. 치료 목적이 아닌, 평범한 식사로.”

​

그녀가 규칙을 읊조리자, 권이헌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와 그녀가 함께 만들었던 첫 번째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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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장난할 시간….”

“장난 아닌데요.”

​

서아린은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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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전략이에요. 총사령관이 굶고 지쳐서 쓰러지면 전쟁에서 어떻게 이기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당신의 임무예요. 그리고 그 임무를 감독하는 게 지금의 제 역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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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의 논리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억지처럼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

권이헌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숟가락을 들었다. 한 숟가락 떠먹은 김치찌개는, 놀랍게도 그가 기억하는 아주 희미한, 엄마의 맛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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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무 말 없이 밥 한 그릇을 전부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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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그를 보며 서아린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권이헌은 그런 그녀를 보며 무심한 척 툭, 하고 한마디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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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먹어.”

“네?”

“너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얼굴이 반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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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은 어느새 그녀의 핼쑥해진 뺨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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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은 일상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라비린토스라는 거대한 적과의 싸움 한가운데서, 김치찌개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함이 그들 사이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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