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태창 확인
거짓말 하지 말라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윤세라가 지껄인 그 미친 소리 때문이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서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이 남자의 모든 감각은 오직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으니까.
“대답해, 서아린. 그깟 질투 섞인 저주를 믿고, 지금 나를 피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의 다그침에 결국 그녀는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고 말았다.
“믿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라도 사실이라면 어떡해요?”
서아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만약 제 능력이 당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가로, 당신의 생명력을 아주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거라면요? 내가 당신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웃으면서 서서히 죽이고 있는 기생충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녀의 외침에 권이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하지만 그건 분노나 실망이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그녀가 이런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사실에 대한, 스스로를 향한 분노였다.
“그딴 미친 소리를….”
그는 말끝을 흐리며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고작 그딴 소리를 믿었다고? 너는?”
“확인해봐야 해요.”
서아린은 결심한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제 손을 잡고, 제 상태창을 확인해 주세요. 만약 제 ‘남은 시간’이 늘어나 있다면… 그건 윤세라의 말이….”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권이헌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을 굳힌 듯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이 어리석은 의심을 끝내야만 했다.
“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서아린은 떨리는 눈으로 허공에 외쳤다.
“상태창.”
푸른빛 시스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맨 아래, 가장 잔인한 문장을 향했다.
[남은 시간: 121일 4시간 17분 5초]
시간이 늘어나지 않았다. 윤세라의 말은 거짓이었다. 서아린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치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간이 멈춰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완치된 것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 121일 4시간 17분 4초]
1초.
또 1초.
시계는 아주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다시 흐르고 있었다. 권이헌의 곁에 있으면서 잠시 멈췄던 사형 선고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서아린의 입에서 절망적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권이헌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 그래. 시간이 늘어난 게 아니잖아.”
“늘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완치가 아니었어요. 당신 곁에서 잠시 멈췄던 것뿐이에요. 닥터 최의 각인을 파괴한 게 치료법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것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가장 잔인한 순간이었다.
권이헌은 상태창의 숫자를, 그리고 절망에 빠진 서아린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녀가 왜 시한부였는지, 왜 자신의 곁에서 상태가 호전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불안해했는지.
그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온몸을 집어삼켰다. 닥터 최를 향한, 이 모든 것을 설계한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잔인한 운명 그 자체를 향한 분노였다.
그는 서아린을 자신의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겨 안았다.
“울지 마.”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감싼 팔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고작 121일이라고? 웃기지 말라 그래.”
그는 그녀의 귓가에, 세상을 향해 선포하듯 말했다.
“네 시간은 내가 정해. 121일이 아니라, 121년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내가, 반드시 너를 살려낼 테니까. 알겠어?”
그것은 맹목적인 사랑 고백이자, 세상을 상대로 한 무모한 선전포고였다. 서아린은 그의 품에 안겨,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단 하나의 희망을 붙들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날 이후, 펜트하우스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었다면, 이제는 전쟁터의 사령부와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권이헌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는 통제 불능의 폭군이 아니었다. 오직 ‘서아린의 치료법을 찾는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냉철하고 무자비한 전략가로 거듭났다.
“연구소 설립은 예정대로 진행해. 세상에 보여줄 명분은 ‘에스퍼 복지 및 심리 안정 연구’로 하고.”
거실에서 한정훈 실장의 보고를 받으며 그가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딱 하나야. ‘마나 부조화’ 현상의 원인 규명 및 완치. 전 세계 최고의 생명공학자, 마나 연구가, 힐러들을 긁어모아.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JK그룹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알겠습니다, 도련님.”
한정훈은 비장한 각오로 대답했다. 그에게도 서아린은 이제 단순한 ‘도련님의 안정제’가 아니었다. 도련님을 구원하고, 이제는 도련님이 구원해야만 하는 소중한 존재였다.
서아린 역시 무력하게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피험체 1호’로서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생의 프로파일러로서의 분석력을 이용해, 자신의 능력과 권이헌의 마나가 공명할 때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을 데이터로 기록하고 가설을 세웠다.
그날 밤도, 서아린은 비밀 연구실에서 홀로그램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수많은 에스퍼들의 능력 부작용 사례들을 검토하며,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파고들수록, 그녀의 케이스가 얼마나 특수하고 희귀한지 깨닫게 될 뿐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이 모든 소동이, JK그룹이 움직이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오직 자신 하나를 살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아직도 안 자고 뭐 해.”
어느새 다가온 권이헌이 그녀의 어깨에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요.”
“네가 무리하는 게 나에겐 가장 큰 손해야.”
그는 그녀의 옆 의자에 앉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
“…….”
“네 탓이 아니야. 이건 우리 둘의 전쟁이야. 닥터 최,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놈들과의 전쟁. 그리고 나는, 내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어.”
그의 무뚝뚝한 위로에, 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위로하는 방식마저 지독히 그다웠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내 옆에서 딴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있기나 해.”
그가 투덜거리듯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평온하고 따뜻한 온기.
바로 그때, 연구실의 통신 장비에서 긴급 호출음이 울렸다. 강지훈 팀장이었다.
[권이헌 에스퍼, 서아린 씨! 지금 즉시 모니터 확인해주십시오!]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중앙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쳐다보았다. 화면에는 서울 도심 한복판의 CCTV 영상이 떠 있었다.
광장 분수대 앞에서, 한 평범한 남자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몸에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어젯밤부터 세 번째입니다. 평범한 일반인이 갑자기 강력한 능력자로 각성하며 폭주하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검출된 마나 파장이… 17년 전 닥터 최의 실험체들에게서 나타났던 인위적인 파장과 일치합니다!]
강지훈의 보고에 서아린과 권이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그 자식이….”
권이헌의 입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닥터 최의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숨어서 그들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테러를 시작했다.
서아린은 폭주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영상으로 보았던 어린 권이헌의 고통을 겹쳐 보았다.
이것은 더 이상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강지훈의 다급한 보고가 끊긴 후에도,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떠 있는 광장의 아비규환은 계속되고 있었다. 화염을 뿜어내는 남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 현장으로 출동하는 관리국 요원들의 분주한 움직임.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권이헌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 개자식이….”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구실 안의 금속으로 된 집기들이 그의 분노에 공명하듯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가지.”
“잠깐만요!”
서아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