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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변수 일러스트

최악의 변수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어느새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권기태 회장이었다. 그의 뒤에는 최소한의 수행원만이 남아 있었고, 그의 얼굴에서는 이사회장에서의 격노는 사라진 채, 깊이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침잠만이 남아 있었다.

“할아버님.”

권이헌이 서아린을 자신의 등 뒤로 반쯤 숨기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따라오너라.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

권 회장은 더 이상의 말을 허락하지 않고, 돌아서서 건물 뒤편의 한적한 임원 전용 라운지로 향했다.

두꺼운 방음벽으로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라운지 안.

권기태 회장은 소파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권이헌과 서아린은 그의 맞은편에 섰다.

“아비와… 똑 닮았구나.”

한참의 침묵 끝에, 권 회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동굴처럼 공허하게 울렸다.

“네놈의 아비도, 늘 그런 눈을 하고 있었지. 자신이 믿는 것 앞에서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눈.”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권이헌을 지나, 서아린에게로 향했다. 그 눈에는 더 이상 경멸이나 분노가 아닌, 지독한 피로와 해묵은 상처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놈은, 그 어리석은 신념 때문에 제 목숨뿐만 아니라… 네 어미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

예상치 못한 말에 권이헌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부모님의 죽음은 늘 그에게 있어 ‘사고’로 기억될 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놈들은 천재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구제 불능의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헛된 꿈에 빠져, 건드려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댔지. ‘라비린토스’… 그놈들의 시작에는, 네 아비의 연구가 있었다.”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권이헌의 부모님은 라비린토스에 의해 희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연구가, 의도치 않게 라비린토스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괴물을 막으려다, 결국 그 괴물에게 잡아먹혔다.

“나는 막으려 했다. 위험한 연구를 당장 중단하라고 수없이 경고했지. 하지만 그놈은 내 말을 듣지 않았어. 오히려 나를, 자신의 꿈을 가로막는 낡고 부패한 권력자로 취급했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더냐. 남은 것은 고아가 된 어린 손자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뿐이었다.”

권 회장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서아린을, 마치 과거의 며느리를 보듯 아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네년을 반대한 이유가, 고작 F급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느냐. 네년이 내 손자를 망칠 요물이라 생각했느냐.”

그는 지팡이를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리쳤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네년의 그 눈빛이, 내 아들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해서. 이놈 또한, 제 아비처럼… 너 하나를 지키겠다는 그 어리석은 신념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될까 봐. 다시 한번 내 눈앞에서, 내 혈육이 비극으로 끝나는 꼴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게야!”

평생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철혈의 제왕.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절절한 고백이자, 한 아버지의 뒤늦은 참회였다.

서아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한평생 가장 강한 갑옷을 두르고 살아야 했던 늙은 남자의 고독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헌아.”

권 회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제 손자를 불렀다.

“나는… 또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증명해 보여라. 네놈은 네 아비와는 다르다는 것을. 네가 선택한 이 길이, 파멸이 아닌 구원임을, 이 늙은이의 눈앞에서 똑똑히 증명해 내란 말이다.”

그것은 허락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손자에게 거는 마지막 희망이자, 가장 무거운 부탁이었다.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할아버지의 고백은, 그들의 전쟁에 ‘가족’이라는 새로운 무게를 더했다.

“괜찮아요?”

서아린이 그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권이헌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시원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혼란스러운 그의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어.”

그가 처음으로, 가족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를 이런 괴물로 만든 세상을 원망했고, 그런 세상에 나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버린 부모님을 원망했지.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원망이 없었다.

“이제 알겠어. 그분들은 도망친 게 아니었어. 싸우셨던 거야. 자신들이 만들어낸 책임과, 그리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

“나도 그렇게 할 거야, 서아린.”

그는 그녀의 손을 더욱 굳게 잡았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도, 원망하지도 않아.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키지 못했던 모든 것을, 그리고 할아버지가 짊어져야 했던 그 모든 슬픔까지. 내가 전부 끝낼 거야.”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바로 그때, 비밀 연구실의 비상 알람이 울렸다. 줄리안 크로프트의 긴급 통신이었다.

[권! 서아린! 지금 당장 이쪽으로 와줘! 내 예지 속에서… 최악의 변수가 나타났어!]

화면에 떠오른 줄리안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를 완전히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상황이 원망스러운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비상! 비상!

고요한 펜트하우스의 새벽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기계음은, 마치 지옥의 사이렌처럼 울려 퍼졌다. 평화는 단 한 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듯, 냉혹한 현실이 그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권이헌은 서아린의 손을 잡은 채, 반사적으로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그의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며, 침입자를 향한 S급 에스퍼의 본능적인 살기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방금 전까지 나누었던 위태로운 평화와 미래에 대한 결의는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다시 한번 거대한 폭풍의 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전사의 비장함만이 감돌았다.

“가보죠.”

서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놓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밀 연구실을 향해 걸어갔다. 권이헌은 그녀의 작은 등 뒤를 따르며, 자신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연구실 안, 중앙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는 평소의 여유롭고 능글맞은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줄리안 크로프트의 얼굴이 떠 있었다. 그의 완벽하게 세팅된 금발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푸른 눈동자는 미래의 공포를 목격한 자의 생생한 충격으로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권! 서아린! 맙소사, 드디어 연결됐군!”

그는 안도와 다급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등 뒤, HSA의 최첨단 상황실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권이헌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차갑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줄리안은 잠시 이성을 되찾은 듯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내 예지 속에서… 최악의 변수가 나타났어. 너희의 계획,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 시작부터 틀어졌어. 이건 함정이야!”

“함정이라는 건 예상했어. 아키텍트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

권이헌의 대답에, 줄리안은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아니, 그런 차원의 함정이 아니야! 이건… 이건 달라! 그들은 너를 기다리는 게 아니야, 권. 그들은 오직, 서아린. 그녀만을 기다리고 있어!”

줄리안의 시선이 화면 너머의 서아린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에는 연민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내 예지 속에서 똑똑히 봤어. 12시간 후, 태성 바이오 연구소. 너희의 계획대로 그곳에서 인공 각성자가 폭주해. 하지만 그건 미끼야. 그 현장의 중심에… 라비린토스가 설치해 둔 ‘무언가’가 있어.”

그는 기억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그게 활성화되는 순간, 검고 거대한 파동 같은 것이 연구소 전체를 뒤덮었어. 그리고… 그리고 그 파동의 중심에 있던 당신이….”

줄리안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서아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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