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메테우스
“네년 따위에게 줄 시간은 1초도 없다!”
권 회장이 일갈했다. 바로 그 순간, 단상 아래에 버티고 서 있던 권이헌이 움직였다. 그는 이사들을 향해 단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뿐이었지만, 그 행동 하나만으로 회의실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S급 에스퍼가 발산하는 순수한 위압감이, 회의실 전체를 짓눌렀다.
“제 파트너가, 5분을 달라고 하는군.”
권이헌의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그는 이사들 한 명 한 명의 눈을 마주치며, 마치 사냥감을 고르는 포식자처럼 말했다.
“나는 내 파트너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누구든, 그녀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방해하는 자는… JK그룹의 적이 아니라, 나 권이헌 개인의 적으로 간주하지.”
그것은 협박이었다. JK그룹의 적이 되는 것은 감당할 수 있어도, 통제 불가능한 S급 에스퍼 개인의 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회의실에는 다시 한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권기태 회장은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제 손자놈의 살기 어린 눈빛 앞에서 차마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서아린은 권이헌이 만들어준 완벽한 무대 위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녀는 스크린을 향해 손짓했다. 권이헌의 연설을 위해 띄워져 있던 요란한 그래프와 데이터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전 세계 지도 위에 붉은 점들이 찍힌,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지도가 나타났다.
“이것은 지난 72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인공 각성’ 폭주 사태가 발생한 지점들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인 테러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명백한 ‘패턴’이 존재합니다.”
그녀의 말투는 완전히, 범죄 현장을 브리핑하는 프로파일러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폭주 지점은 각국의 경제, 혹은 정치의 중심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중심지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인구 밀집도가 높은 상업 지구 혹은 교통의 요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라비린토스의 목적이 단순한 파괴나 혼란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공포’를 확산시키는 심리전입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브리핑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것은 마녀의 주술이 아니라, 날카로운 데이터 분석과 상황 판단이었다.
“저는 그들의 행동 패턴과 심리적 특성을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아키텍트라는 자가 남긴 영상 메시지의 문장 구조, 단어 선택, 그리고 음성 변조 패턴의 미세한 떨림까지. 그 모든 데이터는 하나의 ‘심리적 서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서아린은 리모컨을 눌러, 지도 위에 새로운 정보를 띄웠다. 그것은 복잡한 알고리즘과 심리 분석 모델이 결합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수식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아키텍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프로파일링 모델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에 따르면….”
그녀는 숨을 한번 골랐다. 회의실의 모든 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타겟은,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정확히 12시간 후.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한, 경쟁사인 태성 바이오의 신축 연구소 완공식 현장이 될 겁니다.”
“뭐라고!”
“태성 바이오?”
이사들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태성 바이오는 JK그룹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그들이 그룹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신약 개발의 핵심 연구소가, 바로 내일 완공식을 앞두고 있었다.
“근거 없는 소리! 네년이 태성과 짜고 우리를 혼란시키려는 수작이 아니냐!”
권기태 회장이 버럭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같은 확신이 없었다. 서아린의 예측은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JK그룹의 이해관계와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근거는, 아키텍트의 성향에 있습니다.”
서아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극도로 오만한 과시욕의 소유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 하죠. 태성의 신축 연구소는, 현존하는 최고의 마나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습니다. 아키텍트에게 있어, 그 ‘완벽한 방패’를 대중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꿰뚫는 것만큼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좋은 무대는 없을 겁니다. 동시에, 대한민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JK그룹의 라이벌을 무너뜨림으로써, 다음 타겟이 우리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효과도 있죠.”
그녀의 분석은 완벽했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다.
서아린은 브리핑을 마치고, 다시 한번 권기태 회장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제 판단은 회장님과 주주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이미 공은 그들에게 넘어갔다.
“제 예측을 무시하고, 내일 태성 바이오가 무너지는 것을 불구경하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JK그룹의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를 승인하고, 이 재앙을 기회로 만들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되시겠습니까?”
회의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권기태 회장은 지팡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단상 위에 선 작은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평생을 지배해 온 냉철한 이성과 계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미지의 가능성 앞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다.”
그는 마치 항복을 선언하는 늙은 왕처럼,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네년의 그 같잖은 예언에… JK그룹의 명운을 걸어보지. 하지만 명심해라. 만약 네 예측이 틀린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네년을 이 세상에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권이헌이 그의 말을 자르며, 서아린의 어깨를 단단히 감쌌다.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확실한 승률의 베팅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는 회의실의 모든 이들을 둘러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파트너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선포했다.
이사회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서아린과 권이헌을 짓누르던 수십 개의 시선과 살얼음 같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해방감이 아닌, 폭풍이 지나간 뒤의 아찔한 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VVIP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금속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숫자가 아래로 흐르기 시작하자 비로소 권이헌이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쉬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정신이야?”
칭찬도, 감탄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 이사회를 압도하던 군주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절벽 끝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연인을 지켜보는 남자의 생생한 공포와 불안이 가득했다.
“저 늙은 여우들 앞에서, 그것도 네 할아버님 앞에서 그런 도박을 해? 만약… 만약 네 예측이 틀리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었어!”
그의 손에 들어간 힘에 어깨가 아파왔지만, 서아린은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눈 녹듯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틀릴 리가 없으니까요.”
서아린이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건 도박이나 예언이 아니에요.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가장 확률 높은 ‘분석’이에요. 범죄자의 심리를 쫓는 건, 지난 10년간 제가 가장 잘해왔던 일이니까요.”
그녀는 무심결에 전생의 시간을 입에 담았다. 권이헌은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알 수 없는 무게감을 느끼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가끔, 스무 살 남짓의 앳된 외피 속에 수십 년을 살아온 노련한 영혼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서아린이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만약의 경우, 당신이 있잖아요. 당신이 내 옆에 있는데, 내가 뭘 걱정하겠어요.”
그녀의 절대적인 신뢰가 담긴 한마디.
그것은 권이헌의 모든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완벽한 주문이었다.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가볍게 끌어당겼다.
“정말이지… 널 어쩌면 좋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두 사람 사이의 짧은 평화를 깨뜨렸다.
로비는 여전히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사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한 소문이 벌써 새어 나간 듯, 그들을 향한 질문에는 ‘마녀’에 대한 비난 대신, JK그룹의 향방에 대한 호기심과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라는 생소한 단어에 대한 궁금증이 뒤섞여 있었다.
두 사람이 막 로비를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잠깐, 멈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