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분의 시간
“당신이 비명을 질렀어, 미스 서. 내 예지 속에서 당신은 단 한 번도 소리를 지른 적이 없었지.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혼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렀어. 그리고 권, 너는… 너는 그녀의 바로 옆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마치 투명한 벽에 막힌 것처럼, 그녀의 고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줄리안의 묘사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권이헌은 자신도 모르게 서아린의 팔을 붙잡았다. 예지 속의 무력한 자신이, 현실의 자신과 겹쳐지며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와 공포가 치밀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지? 내 힘이 통하지 않았다고?”
“그래. 그것이 바로 최악의 변수야. 라비린토스는 서아린, 당신의 능력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그것만을 카운터치기 위한 무기를 만들어 낸 거야. 당신의 ‘사이킥 레조넌스’는 타인의 정신에 공명하여 치유하는 힘이지. 하지만 만약, 그 공명 자체를 방해하고, 오히려 수천, 수만 개의 악의적인 정신 파장을 강제로 주입하는 장치가 있다면?”
서아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그녀는 줄리안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것은 ‘정신 오염 폭탄’이었다. 그녀의 능력이 섬세한 조율을 위한 음차라면, 라비린토스는 그 음차를 향해 수만 개의 불협화음을 동시에 쏟아붓는 확성기를 준비한 것이다. 그녀의 가장 강한 무기가, 그녀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끔찍한 흉기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당장 계획 취소해.”
권이헌의 목소리는 모든 감정이 거세된 채, 결정만을 통보하는 군주의 그것이었다.
“태성 바이오든,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든, 전부 집어치워. 한 발자국도, 이 펜트하우스 밖으로 나갈 생각 하지 마.”
“권이헌 씨….”
“닥쳐.”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거칠게 잘랐다. 그의 눈은 예지 속의 참상을 떠올리는 듯, 붉게 충혈되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려서라도 너 하나는 지켜내겠다고. 그 세상에 네 어리석은 계획 따위도 포함이야. 나는… 나는 두 번 다시, 내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없어. 절대로.”
그의 외침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었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남자의 절박한 절규였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처럼, 그녀마저 허무하게 잃게 될까 봐 미칠 듯이 두려웠다.
하지만 서아린은 그의 품에 안겨 보호받는 연약한 공주가 되기를 거부했다.
“아니요. 가야 해요.”
그녀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아닌, 프로파일러의 냉철한 분석의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줄리안의 예지가 사실이라면, 이건 더더욱 가야만 하는 이유가 돼요.”
“서아린, 너 제정신이야? 내 말이 안 들려? 그건 널 죽이기 위한 함정이라고!”
“바로 그거예요!”
서아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그의 말을 파고들었다.
“그들이 저를 죽이기 위한 무기까지 만들었다는 건, 그만큼 제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예요. 저의 ‘사이킥 레조넌스’가, 그들의 ‘인류 강제 진화’ 계획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유일한 변수라는 걸 그들 스스로 인정한 셈이라고요.”
그녀는 부서진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있던 자리로 걸어가, 보조 모니터를 켰다. 그리고는 마치 이사회를 설득하던 그때처럼, 막힘없이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갔다.
“우리가 여기서 멈추면 어떻게 될까요? 라비린토스는 승리를 확신하고, 더 대담하게, 더 잔인하게 자신들의 실험을 계속해 나갈 거예요. 전 세계는 그들이 만들어낸 괴물들로 뒤덮일 거고, 우리는 이 펜트하우스라는 작은 섬에 고립되어 세상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기만 해야 하겠죠. 그게 당신이 원하는 그림이에요?”
“…….”
“이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싸움이에요, 권이헌 씨. 그리고 적이 우리를 위해 친절하게 함정까지 파놓았다면, 기꺼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주는 게 예의죠. 단….”
그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함정을 역으로 이용해서, 그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리는 거예요.”
그녀는 줄리안을 향해 말했다.
“줄리안. 그 ‘정신 오염 폭탄’이라는 거, 활성화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예지 속에서 본 게 있을 텐데요.”
줄리안은 그녀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폭주자가 나타나고 현장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약 3분 정도의 예비 시간이 있었어. 거대한 에너지를 응축시키는 것처럼 보였지.”
“3분.”
서아린은 그 시간을 가만히 곱씹었다.
“충분해요.”
그녀는 다시 권이헌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필요해요, 권이헌 씨. 내가 그 3분이라는 시간 동안 라비린토스의 함정을 무력화시키고, 폭주자를 안정시키는 동안. 당신은 세상의 그 어떤 위협도 나에게 닿지 못하게, 완벽한 시간을 벌어주세요. 당신의 염동력이라면 할 수 있잖아요. 도시 하나를 통째로 들어 올릴 수도 있는 당신이, 고작 3분을 못 버티겠어요?”
그녀는 그의 가장 깊은 자존심과, 그녀를 향한 그의 가장 강한 열망을 동시에 건드렸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위험한 제안이었다.
권이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으로 파고드는 손톱의 아픔이, 들끓는 그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젠장.”
마침내, 그의 입에서 거친 욕설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좋아. 가자, 가.”
그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두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진지한 눈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피맺힌 맹세처럼 말했다.
“대신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내 세상은 너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서아린. 네가 부서지면, 나도 부서져. 알겠어?”
그의 절절한 고백에, 서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통해, 말없이 마지막 약속을 나누었다.
함께 살아서, 이 지옥을 끝내자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권이헌의 핏빛 맹세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비밀 연구실의 공기를 가르고 모두의 심장에 박혔다.
어떻게 봐도 연인을 향한 절절한 고백이자, 세상의 모든 위협을 향한 명백한선전포고였다.
서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세상을 불태울 남자의 맹렬한 불꽃을 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말로도 지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신뢰와 약속의 무게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젠장, 두 사람 로맨스 영화 찍는 건 잠시 미뤄줄 수 있겠어?”
화면 속 줄리안 크로프트가, 잔뜩 굳어있던 얼굴을 애써 풀며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경박함 대신, 눈앞의 두 사람을 향한 경외와 착잡함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11시간 47분이야, 로미오와 줄리엣. 지금부터 1분 1초가 당신들, 아니,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할 거라고. 자, 그럼… 죽음의 무도회 작전 회의를 시작해 볼까?”
그의 말과 함께, 연구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한 냉철한 작전 상황실로 전환되었다.
서아린은 권이헌의 손을 놓고, 마치 지휘관처럼 중앙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태성 바이오 연구소의 3D 설계도와 주변 지형 데이터, 예상 동선 등이 스크린 위로 펼쳐졌다. 더 이상 그녀는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 위험천만한 작전의 총괄 설계자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플레이어였다.
“작전의 성패는 ‘3분’에 달려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회의실 전체를 장악했다.
“줄리안의 예지에 따르면, 라비린토스의 ‘정신 오염 폭탄’이 활성화되기까지 약 3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 안에 저는 두 가지 임무를 완수해야 해요. 첫째, 폭주체를 안정시킬 것. 둘째, 폭탄의 작동을 멈출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고? 미친 짓이야.”
권이헌이 즉각 반박했다. 폭주체 한 명을 안정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정신력은 한계에 다다를 터였다. 그런데 미지의 함정까지 해체하겠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눈빛도 단호한 목소리와 어울려 보였다.
✦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