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세주
그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전쟁을, 그룹의 생존과 직결된 비즈니스로 완벽하게 포장했다. 한정훈 실장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도련님은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던 불안정한 S급 에스퍼가 아니었다. 제국의 앞날을 내다보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적을 제거하려는 냉혹한 군주였다.
“그리고 이사회를 설득할 최고의 명분은, 이미 우리 손에 있어.”
권이헌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혼돈의 시대에는 새로운 구원자가 필요한 법이지. 전 세계가 속수무책인 이 재앙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그게 바로 우리 JK그룹에 있다고 말해줄 거야. 그 열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하다고.”
그가 말하는 ‘열쇠’가 서아린임을, 한정훈은 단번에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지키는 것을 넘어, 그녀의 존재 자체를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한정훈 실장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더 이상 주인을 말리는 충신이 아니었다. 군주의 의지를 받들어, 제국을 전쟁 준비 태세로 전환시키는 충실한 집행관이 될 터였다.
그는 돌아서서, 자신의 모든 인맥과 능력을 총동원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던 걸까.
서아린은 아주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희미한 빛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내미는 듯한 감각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렸고, 정신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듯한 극심한 피로감이 솜에 물을 먹인 듯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가장 먼저 코끝을 스친 것은 익숙하고 편안한, 권이헌의 체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펜트하우스의 침실에 누워있음을 깨달았다. 언제 돌아온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자신을 뜬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권이헌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저러고 있었던 건지, 그의 눈 밑이 미세하게 거뭇했다.
“깼어?”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안도감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서아린이 눈을 뜨자마자,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따뜻한 우유가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마셔. 한 실장이 기력 회복에 좋을 거라고 하더군.”
그는 그녀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주고, 그녀의 입술에 컵을 가져다주었다. 서아린은 아이처럼 그의 손에 들린 컵을 받아 마셨다. 달콤하고 따뜻한 우유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꽁꽁 얼어있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권이헌은 빈 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뺨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조심스러웠다.
“바보같이. 고마워할 사람이 누군데.”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조금… 피곤한 것 말곤 괜찮아요. 능력의 부작용 같은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정신력을 너무 많이 쓴 것뿐이에요.”
그녀는 프로파일러로서, 자신의 상태를 냉철하게 분석하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
“내가 잠든 사이에, 또 혼자서 무슨 위험한 계획이라도 세운 거 아니죠?”
그녀의 예리한 질문에 권이헌의 어깨가 순간 흠칫했다. 역시, 속일 수가 없는 여자였다. 그는 피식,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전쟁 준비.”
“전쟁이요?”
“그래. 네가 판을 깔아줬으니, 이제 내가 배우로 나설 차례지. 내일 아침, JK그룹의 이름으로 라비린토스에게 선전포고를 할 생각이야.”
그의 말에 서아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그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안 돼요. 그건 너무….”
“너무?”
“너무 당신다운 방법이라서 안 돼요.”
서아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권이헌 씨. 당신이 생각하는 전쟁은 모든 걸 부수고 파괴하는 거겠죠. 하지만 이건 그런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에요. 여론전이고, 명분 싸움이에요. 우리가 이기기 위해 필요한 건 파괴가 아니라, ‘대안’이에요.”
그녀는 프로파일러의 눈으로, 이 거대한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라비린토스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당신 또한 두려워해요. 당신이 JK그룹의 힘으로 그들을 찍어누른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구원자로 보는 게 아니라 더 거대한 괴물의 등장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그게 바로 아키텍트가 원하는 그림이고요.”
그녀의 분석에 권이헌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자신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방법을 물었다.
서아린은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 그들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완벽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우리는 파괴자가 아니라, 해결사가 되어야 해요. JK그룹은 라비린토스를 향해 총을 쏘는 대신, 그들이 만든 상처를 치료하는 ‘백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인도주의적 기업이 되는 거예요.”
그녀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백신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고, 나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세상의 그 어떤 의사나 힐러도 만들 수 없는, 유일무이한 백신의 원료, 즉 ‘치유’ 그 자체가 되는 거죠.”
방패와 치유. 파괴와 구원.
그녀는 권이헌의 전쟁을, 전 인류를 위한 가장 위대한 구원의 서사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권이헌은 그녀의 말에,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창밖의 도시를, 그리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이 작은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그의 안정제가 아니었다.
그의 세상을 흔들고, 부수고, 그리고 마침내 새롭게 재건하는, 그의 유일한 창조주였다.
“좋아.”
그가 마침내 결심한 듯 말했다.
“내일 아침 주주총회에서, 나는 JK그룹의 대표로서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의 시작을 알리겠어.”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신의 이름. 그는 라비린토스가 가져온 절망의 어둠 속에서, 인류에게 희망의 불꽃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녀가 함께 있을 터였다.
다음 날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펜트하우스의 주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소한 밥 짓는 냄새와 옅은 커피 향이 감돌고 있었다.
권이헌은 잠든 서아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실을 빠져나와, 동이 트기 전부터 전쟁 준비에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향한 곳은 비밀 연구실이나 상황실이 아닌, 바로 주방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고급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리고, 한정훈 실장이 미리 준비해 둔 재료로 간단한 샐러드를 만드는 것뿐이었지만,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서툰 만큼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
어느새 잠에서 깬 서아린이, 주방 입구에 기댄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커다란 와이셔츠 차림의 그녀는 평소보다 더 작고 가녀려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깊고 따뜻했다.
“언제 일어났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접시에 방울토마토를 올리던 권이헌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시끄러워서. 네 숨소리가.”
“거짓말.”
서아린이 피식 웃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갓 내린 커피 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나네요. 잠 못 잤어요?”
“……조금.”
그는 마침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밤새 단 1초도 잠들지 못한 자의 피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벌어질 모든 일을 감당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함께 서려 있었다.
“오늘… 꼭 같이 가야겠어?”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를 위험한 자리에 세우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어제는 흑기사가 되어주겠다면서요. 공주님 없이 무슨 수로 기사 작위를 받으시려고요.”
서아린이 짐짓 농담처럼 받아쳤다. 그녀는 그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그의 손에 들린 샐러드 접시를 받아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먹어요. 총사령관이 굶고 전쟁터에 나가는 법은 없으니까.”
어젯밤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그녀를 보며, 권이헌은 결국 희미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조용히 아침 식사를 했다. 창밖으로 서서히 밝아오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식탁 위에서 오가는 눈빛과 짧은 대화 속에는, 오늘 함께 치러낼 전쟁에 대한 무언의 약속과 절대적인 신뢰가 오가고 있었다.
“가자.”
식사를 마친 권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을 구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