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분 있는 일
권이헌이 나직이, 그러나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통제실의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반응할 수 없었다. 눈앞의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문 열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 인내심이 바닥난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콰드드득-!
그가 기대고 있던 강화유리가, S급 에스퍼의 순수한 염력에 짓눌려 비명을 질렀다. 거미줄처럼 번져나가던 균열은 이내 유리가 버틸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콰장창!
수억 원을 호가하는 특수 방탄유리가 허무하게 가루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유리 파편의 폭풍 속에서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격리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앞을 막아서려던 무장 요원들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길을 터주었다.
“권 에스퍼! 진정…!”
강지훈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격리실의 육중한 철문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뜯어냈다.
우그러지는 금속의 굉음과 함께, 수십 개의 잠금장치가 박살 나고 경첩이 뜯겨나가며, 문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복도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서아린.”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서아린은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권이헌의 눈에는 보였다.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사이킥 레조넌스’라는 미지의 힘은, 그녀의 정신력을 한계까지 소모시킨 것이 분명했다. 창백한 뺨, 가늘게 떨리는 손끝,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입꼬리까지.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부서질세라, 날아갈세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품에 안듯, 조심스러우면서도 단단하게.
“…….”
“…….”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아린은 그의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고 있는지, 그녀를 끌어안은 그의 팔이 얼마나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 끝났어요.”
서아린이 그의 등을 토닥이며, 지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네가… 네가 해냈어.”
권이헌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그들만의 세상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통제실의 ‘심판관’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관리국장이 마이크를 잡고 헛기침을 했다.
“큼… 서아린 씨. 당신의 능력은… 확인되었소. 약속대로, 당신에 대한 모든 혐의는 전면 재검토에 들어갈 것이며, 공식적으로 이 사태 해결을 위한 ‘특별 자문’으로 임명하겠소.”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냉정함은 사라진 채, 애써 위엄을 찾으려는 다급함과 숨길 수 없는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그녀를 ‘피의자’나 ‘마녀’가 아닌, 미지의 힘을 가진 존재로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큰 충격에 빠진 것은 윤세라였다.
그녀는 의사로서, S급 힐러로서 눈앞의 현상을 이해하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의학 지식과 마나 이론은, 서아린이 행한 ‘기적’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저건 힐링이 아니야. 안정제도 아니지. 마치… 오염된 OS를 포맷하고 재설치한 것처럼, 대상의 정신 구조 자체를 재구성했어. 저런 능력은… 들어본 적도 없어. 신의 영역이야. 감히 F급 따위가 행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고!’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질투와 시기를 넘어선, 근원적인 공포와 패배감이 그녀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권이헌은 서아린을 부축하여 격리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늘어서 있던 요원들과 연구원들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경멸과 적의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한 자의 경외와 두려움이 채우고 있었다.
모세의 기적처럼, 그들이 지나가는 길 양옆으로 사람들이 갈라졌다.
“우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제가 따로 마련해 둔 VVIP 병실로….”
강지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권이헌이 그의 말을 잘랐다.
“필요 없어. 집으로 간다.”
“하지만 서아린 씨의 상태를 체크해야….”
“내 집보다 안전한 곳은 이 세상에 없어. 그리고 저 여자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것도 나야.”
권이헌은 더 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아린을 거의 안다시피 부축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강지훈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목에 찬 통신기를 향해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현 시간부로, 서아린 씨에 대한 모든 감시를 해제한다. 경호 등급을 SSS급으로 격상하고, 펜트하우스 주변 반경 1km 이내의 모든 통신을 감청하고, 의심스러운 인원은 즉시 체포해. 이건 내 직권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그는 이제 그녀를 감시하는 대신,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는 차 안.
서아린은 권이헌의 어깨에 기댄 채, 정신을 잃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고르고 평온했다. 하지만 권이헌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돌아왔는지.
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에, 그의 마음이 다시 한번 저며왔다. 그는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조용히 방을 나와 한정훈 실장을 찾았다.
“한 실장.”
“네, 도련님.”
“오늘 밤, 주주총회 소집해.”
“네?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한정훈의 놀란 물음에, 권이헌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사냥 허가증을 받으러 가야지.”
그는 창밖, 불빛으로 가득 찬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JK그룹의 이름으로, 라비린토스에게 공식적인 전쟁을 선포할 시간이야. 내 여자를 마녀로 만든 세상에게,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줘야지.”
마녀의 재판은 끝났다.
하지만 마녀가 될 뻔했던 그녀를 지키기 위한 악마의 전쟁은, 끝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한밤의 펜트하우스는 전쟁을 앞둔 사령부처럼 차가운 정적과 뜨거운 열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서아린의 방문이 조용히 닫히고, 거실에는 권이헌과 한정훈 실장, 단둘만이 남았다. 창밖으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은 수천억 개의 다이아몬드를 쏟아부은 듯 화려했지만, 권이헌의 눈에는 그저 잿더미가 될 사냥터처럼 보일 뿐이었다.
“도련님.”
한정훈 실장이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생을 그림자처럼 보좌해 온 주인을 향한 염려와,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조타수 같은 긴장감이 뒤섞여 있었다.
“긴급 주주총회 소집은… JK그룹의 명운을 건 도박입니다. 이사회를 설득할 명분이 부족합니다. ‘회장님의 사적인 감정’으로 라비린토스라는 불확실한 적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안건은, 절대 통과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실을 직시했다. JK그룹은 권이헌 개인의 왕국이 아니었다. 수많은 주주들의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는 법이다.
“사적인 감정?”
권이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나 조급함 대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냉철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아린이라는 존재는, 들끓는 용암 같던 그의 힘을 가장 정교하고 예리한 칼로 제련시키는 숫돌과도 같았다.
“한 실장. 라비린토스가 전 세계 대도시에서 벌이고 있는 ‘인공 각성’ 테러. 그로 인해 발생할 경제적 손실이 얼마로 추산되는지 아나?”
“……현재로서는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합니다. 물류가 마비되고, 소비 심리가 위축되고, 사회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권이헌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은 마치 왕좌에 앉은 젊은 왕처럼 오만하고 여유로웠다.
“라비린토스는 단순한 테러 집단이 아니야. 그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혁명가들이지. 그들의 ‘강제 진화’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JK그룹의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고,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그들의 발밑에 놓이게 될 거다.”
권이헌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이건 내 사적인 복수가 아니야, 한 실장. JK그룹의 생존이 걸린, 가장 확실한 ‘미래 가치 투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