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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파티 일러스트

VVIP 파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재의 통유리창 너머로 어슴푸레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밤새 딱딱한 보조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피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나와 동기화된 듯, 권이헌의 상태가 안정되자 그녀를 짓누르던 감정의 소음도 옅어져 한결 편안했다.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운 서아린의 머릿속은, 지난 10년간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가설과 분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권이헌의 트라우마는 17년 전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한정훈 실장의 말에 따르면 부모를 잃은 시점과 일치.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감정 과부하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기점으로 발현된 후천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일종일 수 있다.’

그녀는 마치 미제 사건 파일을 검토하듯, 권이헌이라는 인물을 해부하고 재구성했다. 그의 통제 불능의 능력, 극단적인 타인에 대한 불신, 그리고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분노의 근원. 그 모든 퍼즐 조각이 ‘17년 전 그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서아린이 고개를 들자, 권이헌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서서히 눈을 뜬 그의 눈동자는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특유의 몽롱함에 젖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듯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제 손을 잡고 있는 서아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커졌다.

지난밤의 기억이 돌아온 듯했다. 자신이 이 여자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명령했고, 그 상태로 잠들었다는 사실을.

“……잤군.”

그가 잠긴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그는 서아린의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반대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악몽도, 소음도 없었다. 이렇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고요하게’ 잠든 것이 생소하다는 듯.

서아린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그녀가 단순한 ‘인간 진통제’가 아님을 각인시킬 첫 번째 기회였다.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권이헌 씨. 무의식에 억압된 감정과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건, 어젯밤 당신의 무의식이 처음으로 안정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프로파일러로서 피의자를 심문할 때처럼, 부드럽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투로 말했다.

권이헌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듯한 그녀의 분석적인 말투가 거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경한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네까짓 F급이 뭘 안다고 지껄여.”

“F급이지만,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느껴왔으니까요. 당신이 느끼는 고통이 단순히 시끄러운 소음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 소음은 결과일 뿐,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겠죠. 17년 전이라던가.”

‘17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권이헌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를 감싸던 평온한 기운이 다시 날카로운 경계심으로 변해갔다.

“누가 그런 소릴 지껄였지? 한정훈인가.”

“중요한 건 누가 말했냐가 아니죠. 그걸 듣고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서아린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살벌한 기세에 눌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여기서 밀리면 주도권을 빼앗긴다.

“단순히 손만 잡고 있는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죠. 당신의 소음을 잠재우려면, 그 소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치료사이자, 프로파일러로서의 힘이 담긴 말이였다.

권이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꿰뚫어 볼 듯이 서아린을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스캔하려는 것처럼.

이 F급 엑스트라는 그저 시한부 인생을 연명하기 위해 겁에 질려 계약서에 사인한 게 아니었다. 그의 가장 깊은 곳,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영역을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재미있군.’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흥미라는 것을 느꼈다.

“좋아.”

그가 입을 열었다.

“네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보지. 내 머릿속 소음의 근원을 찾아내서 완벽하게 잠재워 봐. 성공한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지.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넌 평생 내 새장 속에서, 내가 주는 모이만 받아먹는 새로 살게 될 거다.”

권이헌과의 아슬아슬한 심리전이 시작된 며칠 후, 서아린은 난생 처음으로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게스트룸은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보다 더 좋았고, 옷장에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그녀의 취향과 사이즈에 맞춰진 명품들이 매일같이 채워졌다. 먹고 싶다고 혼잣말이라도 하면, 한 시간 안에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가 만든 요리가 눈앞에 배달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새장에 불과했다. 그녀는 권이헌의 허락 없이는 펜트하우스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유일한 바깥과의 소통은 한정훈 실장이 건네준 최신형 스마트폰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서아린은 처음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전화번호 목록에 유일하게 저장되어 있던 이름, 이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서아린? 너 맞아? 살아있었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하나. 고아원 시절부터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서아린의 단 하나뿐인 친구였다.

“응, 나야. 잘 지냈어?”

[잘 지냈냐니! 너 며칠 동안 연락 두절이라 내가 경찰에 실종 신고하려던 참이었거든? 너 어디야? 무슨 일 있어?]

서아린은 잠시 망설였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결국 그녀는 웹소설 마니아인 하나의 눈높이에 맞춰, 최대한 상황을 순화하고 각색해서 설명했다. 몸이 안 좋아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우연히 만난 재벌 3세의 희귀병을 고쳐주는 조건으로 후원을 받게 되었다고.

[…뭐? 재벌 3세? 희귀병? 야, 서아린. 너 그거 완전… 웹소설 클리셰잖아! 계약 동거! 선계약 후사랑!]

역시나. 이하나의 반응은 정확히 예상대로였다. 엉뚱하고 발랄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잘생겼어? S급으로 잘생겼어? 성격은 까칠한데 내 여자한테는 따뜻한 그런 타입?]

“어… 비슷해.”

서아린은 옆에서 자신을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는 한정훈 실장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한정훈은 그녀의 통화를 허락하면서도, 대화 내용을 전부 감시하려는 듯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사이 그의 태도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특히 그가 가져다주는 간식의 퀄리티가 날마다 상승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다를 떨던 중, 권이헌에게서 호출이 왔다. 서아린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하나와의 통화를 마쳤다.

“오늘 저녁, 외출 준비해.”

드레스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권이헌이 말했다.

“VVIP 파티가 있어. 넌 내 파트너로 참석해야 한다.”

“파티요? 제가 왜….”

“내 ‘안정제’는 24시간 내 곁에 있어야 하니까. 시끄러운 인간들이 많은 곳에 가려면 네가 반드시 필요해.”

그의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잠시 후, 전문가들이 들어와 그녀를 인형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낯선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서아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후줄근한 후드 집업을 입고 있던 병약한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우아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파티가 열리는 호텔 연회장은 그야말로 부와 권력의 결정체였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재벌과 정치인, 톱클래스 연예인들이 모여 자신들의 세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권이헌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곧, 그의 팔짱을 낀 낯선 여자, 서아린에게로 옮겨갔다. 호기심, 질투, 경계심. 온갖 종류의 날 선 감정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그녀에게 박혔다.

“어머, 이헌 씨. 옆에 계신 분은 누구? 처음 뵙는 얼굴이네.”

그때, 그들 앞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눈부신 은발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미모의 소유자.

‘윤세라.’

서아린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국내 유일의 S급 힐러이자, 소설 속에서 권이헌을 짝사랑하며 서아린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악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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