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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깊은 잠에 대하여 일러스트

그의 깊은 잠에 대하여

잠이 들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멎고, 절대적인 고요가 찾아온 것처럼.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이자, JK그룹의 후계자이며, 방금 전까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증오, 고독이라는 감정의 폭풍을 온몸으로 뿜어내던 남자, 권이헌이.

서아린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제 손을 단단히 그러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그를 감싸던 살벌한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대신,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평온을 갈구하듯 깊고 고른 숨소리만이 삭막한 서재를 채웠다. 살얼음이 덮인 듯 냉정하고 날카롭던 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풀려 있었다.

수십 년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시위가 비로소 느슨해진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위태로운 평화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의 잠든 얼굴을 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마 없을 것이다. 서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프로파일러의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인상은 잠이 들자 한결 유해져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길게 뻗은 속눈썹이 만든 그늘, 굳게 닫혔을 때와는 달리 미세하게 힘이 풀린 입술.

그는 괴물이나 통제 불능의 시한폭탄이 아니라, 그저 끔찍하게 지쳐 보이는 영락없는 스물일곱 살의 남자로만 보일 뿐이었다.

‘잠들지 못했구나. 단 한 번도, 제대로.’

그녀는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소설 속에서 그의 고통은 ‘감정 과부하’라는 단어로 간단히 설명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지독한 일상이 있었을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수천 번의 밤, 뇌수를 파고드는 환청과도 같은 소음, 타인의 악의에 뜬눈으로 노출되어야 하는 생지옥. 그녀의 쓸모없다 여겨졌던 F급 능력은 그에게 마약 같은 진통제이자, 생전 처음 겪어보는 강제 수면제였던 셈이다.

문제는, 그가 그녀의 손을 놓아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잠결에 무언가 불안한 듯, 손을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갔다.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F급의 미약한 마나는 마치 링거액처럼, 그의 손을 통해 꾸준히 그의 정신 세계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권이헌이 깨어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마나 고갈로 기절할 판이었다.

그때였다.

아주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서재 문이 살짝 열렸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한정훈 실장이었다.

그는 권이헌이 부르지 않았음에도 감히 서재에 들어온 자신의 행동에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려다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시선은 권이헌과 서아린이 맞잡은 손, 그리고… 지난 17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권이헌의 깊이 잠든 얼굴에 고정되었다.

이성적인 중년 남성의 얼굴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순수한 경이와 충격. 동요를 감추지 못한 그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도, 도련님께서… 주무시는 겁니까?”

한정훈 실장은 성대에 필터라도 낀 것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선 경외감 비슷한 것이 섞여 있었다. 그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아까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날카로운 경계심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비현실적인 광경을 이해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대체… 서아린 아가씨는… 뭘 한 겁니까? 혹시 도련님이 약을 드시거나 한 건 아닌가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그냥, 손만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서아린 역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한정훈 실장은 그녀의 대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권이헌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권이헌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발견되었을 때부터 그의 곁을 지켜온 유일한 어른이었다. 누구보다 그의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그에게 권이헌의 잠든 모습은 기적과 동의어였다.

“도련님께서는… 17년 전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약 없이는 10분 이상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S급 힐러라는 윤세라 양조차 도련님의 두통은 완화시킬 뿐, 잠재우지는 못했죠. 그마저도 악몽에 시달리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기 일쑤였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한정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평온한 얼굴이라니.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의 고백에 서아린은 권이헌이라는 인물의 고통의 깊이를 다시금 실감했다.

이것은 단순하게 능력의 부작용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삶 전체를 좀먹어온 거대한 트라우마이자, 벗어날 수 없는 저주이기도 했다.

“으… 으윽… 흐음… 그만…”

바로 그 순간, 권이헌이 잠결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서아린과 한정훈의 심장이 동시에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권이헌은 잠꼬대처럼 무언가 나직이 읊조리며, 서아린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마치 이 한 줄기 평온마저 빼앗길세라, 필사적으로 붙드는 어린아이처럼.

다행히 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한정훈 실장은 거의 멎을 뻔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서재 한편에 있던 캐시미어 담요를 가져와 잠든 권이헌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 손길에는 비서의 의무감을 넘어선, 깊은 애정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서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결, 아니 완전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그녀를 향한 희망과 아마도 일말의 부채감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편하시고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이대로 계셔주시겠습니까? 도련님께서 이렇게 깊이 잠드신 것은 정말로,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라서요.”

그는 목소리에 간절한 부탁을 가득 담은 말을 조심스레 전했다.

서아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다고 해서 단순한 체념은 아니었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다른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는 듯 했다.

한정훈 실장은 작은 목소리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무엇이든 인터폰으로 불러주십시오. 식사든, 뭐든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다시, 거대한 서재에는 둘만 남았다. 통유리창 너머의 서울 야경은 여전히 보석처럼 화려했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저 반짝이는 불빛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잠들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까.

프로파일러 김윤아는 범죄자의 심리를 파고들었지만, 피해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자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S급 에스퍼 권이헌의 고통을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을 타고 전해져 오던 지옥 같은 감정의 폭풍이 잦아든 자리에 남은 것은, 우주처럼 광활하고 차가운 공허함과 외로움이었다.

‘단순히 개인 안정제, 인간 진통제 역할로 끝낼 순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뛰는 것이 서아린, 아니 김윤아 스스로 느껴졌다.

이것은 더 이상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파일러로서의 본능이, 수많은 괴물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가면을 벗겨냈던 직업의식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시한부 F급 엑스트라 서아린의 몸. 남은 시간 87일. 그리고 눈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지만 가장 고통받는, 미지의 트라우마로 가득한 난공불락의 남자.

그녀는 권이헌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숨겨진 괴물의 정체를 밝혀내고, 17년 전부터 시작되었을 그의 고통의 근원을 파헤쳐야 한다. 그것만이 그를 완벽하게 치료하고, 나아가 그녀 자신도 이 화려하고 거대한 감옥에서 주도권을 쥐고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 권이헌.’

서아린, 아니 김윤아는 속으로 말하며 동시에 결심했다.

‘지금부터 넌 내 전담 마크 VVIP 고객이자, 내 프로파일러 인생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가장 흥미로운 사건 파일이야.’

겁에 질려 떨던 사슴의 눈빛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희대의 연쇄살인마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의 예리하고 차가운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이 지독하고 불공평한 계약 관계를,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분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해 나갈 생각이었다.

첫 번째 분석 대상의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길고 긴 심리전의 시작을 예감했다. 하지만 프로파일러로서 익숙했던 일 아닌가.

범인들과의 협상에서 항상 그랬듯, 이 소설의 주도권도 반드시 자신이 가져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속 서아린의 남은 시간에 자신도 결박될 것이다.

‘내가 살려면 반드시 F급 엑스트라의 지위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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