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 (1)
윤세라는 서아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노골적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어디서 이런 F급 먼지 같은 걸 파트너라고 데려오셨어요? 이헌 씨 수준에 안 맞게.”
그녀의 말에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서아린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권이헌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내 사람한테 함부로 지껄이지 마.”
“어머, ‘내 사람’이라니. 이까짓 F급이 뭐라고. 제가 몇 년간 이헌 씨 두통을 치료해 드렸는데, 고작 이런 애 때문에 제 성의를 무시하시는 거예요?”
윤세라의 질투 섞인 목소리가 높아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집중되었다. 그들의 악의적인 관심과 윤세라의 날카로운 감정이 권이헌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폭주 직전의 신호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아린은 테이블 아래로,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자신의 손을 움직여 권이헌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괜찮아요. 내가 있잖아요.’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고요하고 따뜻한 기운.
세레니티 터치가 발동되자, 권이헌의 몸을 휘감던 살벌한 기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의 굳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뒤틀리던 공간이 안정을 되찾았다.
권이헌은 놀란 눈으로 서아린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를 통해 그가 얼마나 흔들리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테이블 아래, 그들만이 아는 은밀한 접촉. 지옥 같은 소음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는 단 하나의 감각.
그것은 짜릿한 비밀을 공유한 공범이 된 것 같은, 기묘한 연대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파티에서의 소동 이후, 권이헌과 서아린 사이에는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었다.
그는 여전히 폭군처럼 굴었지만, 서아린을 대하는 태도에 이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소유욕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서아린은 아직 단정할 수 없었다.
그날 밤, 펜트하우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굉음이 들렸다.
서아린은 잠에서 깨어나 소리가 들려온 곳, 권이헌의 침실로 달려갔다. 한정훈 실장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와 있었다.
“도련님!”
침실 문을 열자, 방 안은 폭풍이라도 휩쓸고 간 듯 엉망이었다.
값비싼 가구들은 염력에 의해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고,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권이헌이 침대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롭게 신음하고 있었다.
“악몽… 또 그 악몽이야…!”
그는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불안정한 마나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서아린 아가씨, 위험합니다!”
한정훈 실장이 그녀를 막아섰지만, 서아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프로파일러로서 수많은 트라우마 환자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권이헌 씨, 정신 차려요! 나 좀 봐요!”
그녀가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는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그녀를 뿌리치려 했다. 그의 손길에 서아린의 팔에 시퍼런 멍이 들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발…!”
결국 서아린은 마지막 수단을 썼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뜨거운 몸이 그녀의 품에 가득 찼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흘려보냈다.
‘괜찮아. 다 괜찮아요. 이제 무서운 건 없어요.’
손을 잡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강력하고 부드러운 평온의 기운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미친 듯이 날뛰던 그의 마나가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가 점차 고르게 바뀌고, 그녀를 밀어내려던 손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맹수 같던 남자는 지친 아이처럼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악몽 없는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서아린은 조심스럽게 그를 침대에 눕히고, 곁에 앉아 그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이마를 짚어주자, 그의 미간에 깊게 패여 있던 고통의 흔적이 거짓말처럼 옅어졌다.
그 모든 광경을 문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정훈 실장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다음 날 아침.
권이헌은 자신의 침대에서, 지난 17년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머릿속은 수정처럼 맑았고, 지긋지긋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지난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엉망이 된 방, 악몽의 고통, 그리고 자신을 끌어안던 작고 따뜻한 품.
그는 거실로 나갔다. 서아린은 소파에 앉아 한정훈 실장이 가져다준 구급상자로 자신의 팔에 생긴 멍을 치료하고 있었다. 권이헌의 시선이 그 시퍼런 멍에 닿는 순간,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서아린의 앞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멍든 팔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미안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사과에, 서아린과 한정훈 실장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사과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남자였다.
“어젯밤 꿈에서… 17년 전 그날을 봤다.”
권이헌은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단편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 자동차 사고, 그리고 자신을 실험체 취급하며 무언가를 주입하던 하얀 가운의 남자들. 기억은 파편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공포와 분노는 생생했다.
서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단순한 계약 관계를 넘어, 두 사람의 마음속에 이름 모를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그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의 고통을 잠재워주는 유일한 존재. 그녀의 온기를 갈망하게 된 남자.
권이헌이 털어놓은 파편적인 기억 조각들은 서아린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미제 사건 파일로 재구성되었다.
17년 전, 비 오는 날, 자동차 사고, 그리고 자신을 실험체 취급하던 하얀 가운의 남자들. 프로파일러 김윤아의 직감은 이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권이헌의 '감정 과부하'가 그 사건의 후유증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권이헌이 잠든 사이, 그의 서재에 있는 오래된 신문 기사들을 찾아봤다. 17년 전, JK그룹 후계자의 부모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모두 검열된 듯 찾아볼 수 없었다. 철저하게 은폐된 사건이었다.
“권이헌 씨.”
그녀는 그의 서재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차분해 보였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깊은 고독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부터, 당신의 그 기억들을 꺼내봐야겠습니다.”
그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
“쓸데없는 짓이야. 떠올린다고 달라질 건 없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억은 당신을 얽매는 사슬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진실을 찾을 열쇠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당신의 고통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그 소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서아린은 그를 설득하려 했다. 프로파일러로서, 그녀는 범죄자의 심리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도 수없이 지켜봤었다. 기억과의 대면은 고통스럽지만, 치유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권이헌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이 작은 여자가, 자신의 가장 깊고 어두운 영역을 침범하려 한다는 사실에 그는 경계심과 함께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감정의 파도는 이전처럼 난폭하지 않았다. 마치 거센 파도가 잔잔한 물결로 변해가는 것처럼.
“좋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줘.”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아린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자고 제안했다.
“괜찮습니다. 제가 옆에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의 닫힌 마음의 문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권이헌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억압되어 있던 17년 전의 기억 속으로 천천히 침잠해갔다.
회색빛 비.
그것이 그의 기억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였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부모님이 운전하던 차 안. 즐거운 대화가 오가던 평온한 순간, 갑자기 차 안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엄마의 비명.
쾅!
강렬한 충격과 함께 차는 도로 옆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권이헌은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