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1% 의 가능성
조사실에 다시 둘만 남자, 권이헌이 서아린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질문이 반짝거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너… 대체 누구야?”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위압감 대신, 절박한 호기심이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어울리듯 실려 나오고 있었다.
서아린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게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편이라는 거.”
그녀의 대답은 모든 의문을 해소해주지 못했지만, 권이헌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했다.
그걸로 되었는지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과거가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현재였다.
강지훈과의 위태로운 공조 관계가 시작되면서, 서아린의 일상은 더욱 빡빡하게 돌아갔다.
낮에는 권이헌과 함께 비밀 연구실에서 닥터 최의 흔적을 쫓았고, 밤에는 강지훈이 몰래 넘겨주는 관리국의 기밀 자료들을 분석하며 퍼즐 조각을 맞춰나갔다.
그녀의 프로파일링 능력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녀는 닥터 최가 남긴 단편적인 기록들 속에서 그의 오만하고 과시적인 성향을 읽어냈고, 그의 다음 행동 반경을 예측하기 시작했다.
“닥터 최는 평범한 연구자가 아니에요. 그는 자신의 작품, 즉 권이헌 씨에게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예술가에 가깝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고 걸작이 F급 따위에게 치료되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할 겁니다. 반드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거예요.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서아린의 분석에 권이헌과 강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마치 닥터 최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강지훈은 그녀의 비범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비공식적으로 ‘김윤아’라는 순직한 프로파일러의 자료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아직은 그저 심증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아린은 닥터 최가 남긴 실험 영상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했다. 어린 권이헌에게 ‘카오스’ 약물을 주입하던 영상의 배경. 그곳의 창문 밖으로 아주 희미하게, 특정 건물의 첨탑 모양이 비친 것이었다.
“찾았어요!”
서아린은 즉시 JK그룹의 정보망과 관리국의 위성 사진 데이터를 대조 분석했다.
그리고 마침내, 17년 전 버려졌던 한 제약회사의 비밀 연구소 위치를 특정해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을 그곳. 닥터 최의 모든 악행이 시작된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려는 그들 앞에,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나타났다. 윤세라였다.
그녀는 백화점 사건 이후 권이헌이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관리국 상층부와 자신의 집안을 동원해, 권이헌에게 공식적인 ‘S급 파트너십 및 정신 감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명분은 ‘불안정한 S급 에스퍼 권이헌의 상태를 공식적으로 관리하고, 그의 곁에 있는 미심쩍은 F급 능력자의 영향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이헌 씨, 이건 당신을 위한 거예요. 언제까지 저런 F급 먼지에게 당신의 고귀한 정신을 맡겨둘 셈이죠? S급은 S급이 관리해야 마땅해요.”
펜트하우스를 무단으로 찾아온 윤세라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뒤에는 관리국 감사팀 요원들이 서 있었다.
권이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의 몸에서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내 집에서, 당장 꺼져.”
“이건 제 독단이 아니에요. 관리국 위원회의 공식 결정이라고요. 당신이 거부한다면,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당신을 ‘보호 조치’할 수밖에 없어요.”
윤세라는 권이헌을 협박했다. 바로 그 순간, 서아린이 권이헌의 앞을 막아서며 윤세라와 마주 섰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권이헌 씨를 위한 건가요, 아니면 그를 독차지하고 싶은 당신의 욕심인가요?”
“뭐라고?”
“S급 힐러라는 당신은 수년간 그의 곁에서 고통을 ‘완화’시켜주기만 했죠.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그 고통의 ‘근원’을 알려고 노력한 적은 있나요? 당신은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게 두려웠던 것뿐이에요. 당신에게 그는 치료 대상이 아니라, S급이라는 타이틀을 공유하는 트로피에 불과했으니까.”
서아린의 날카로운 지적에 윤세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권이헌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서아린의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S급 힐러와 국가기관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그녀의 모습. 그는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아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모두에게 선언했다.
“내 파트너는, 여기 서아린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내 정신 상태를 증명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여주지.”
그는 윤세라를 조롱하듯 바라보며, 서아린의 손을 잡았다.
“이 사람만 내 곁에 있으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니까. 나에게 필요한 건 당신의 치료가 아니라, 이 사람의 존재 그 자체라고. 아직도 모르겠나?”
서점에서 했던 말의 반복. 하지만 그 의미의 무게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세상 모두를 향한 확신에 찬 고백이었다.
모욕감에 얼굴이 새빨개진 윤세라가 비명처럼 외쳤다.
“두고 봐! 네 능력의 진실을 내가 밝혀주고 말 테니까! 네가 이헌 씨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려주겠어!”
그녀는 악에 받친 저주를 퍼붓고 돌아섰다. 서아린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생명력을 빨아먹는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 같은 것이라고 할 순 업었다. 닥터 최가 흘릴 법한, 가장 악의적이고 영악한 거짓 정보였다. 그것이, 윤세라를 통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윤세라가 남기고 간 말은 독처럼 서아린의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이헌 씨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
터무니없는 악담이라 치부하기엔, 그 말이 너무나도 교묘하고 구체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심어준 정보처럼. 서아린의 머릿속에 닥터 최의 비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물리적인 공격보다 더 효과적으로 관계를 파괴하는 방법. 신뢰의 근간을 흔드는 심리전.
그녀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었지만, 권이헌은 그녀의 미세한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개가 짖는 것뿐이야.”
그가 무심한 척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체온이 그녀의 불안을 조금이나마 녹여주었지만, 의심의 씨앗은 한번 심어지면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날 밤, 서아린은 모두가 잠든 사이 몰래 비밀 연구실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서아린]
클래스: 오라 정화사 (Aura Purifier)
등급: F급
고유 능력: [세레니티 터치 Lv.2]
상태: 마나 안정화 (생명력 저하 중지)
남은 시간: 121일 4시간 18분
권이헌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감정 쓰레기를 정화하며 그녀의 능력은 조금이나마 성장했고, 시한부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오히려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그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면, 그녀의 남은 시간은 폭발적으로 늘어나야 했다. 윤세라의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0.0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정확히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지 못했다.
만약 정화 과정에서 그의 생명력이 미세하게나마 소모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그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들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다음 날부터 서아린은 권이헌과의 접촉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잡으려 하면 다른 화제를 꺼내며 슬쩍 피했고, 밤에 악몽을 꾸는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였다.
권이헌은 즉시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며칠간 이어진 그녀의 알 수 없는 거리두기에,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지긋지긋한 감정 소음과는 다른, 심장이 서서히 조여오는 듯한 낯선 감각. 그녀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나를 피하는 거지?”
서재에서 단둘이 마주한 상황. 그의 목소리에는 상처받은 맹수 같은 불안과 위태로움이 묻어 있었다.
“피하는 게 아니에요. 요즘은 상태가 안정적이신 것 같아서….”
“거짓말하지 마.”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떻게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이라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