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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의 규칙 일러스트

동거의 규칙

<동거 규칙>이 생긴 이후, 펜트하우스의 껄끄러운 분위기는 아주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규칙적인 식사 시간은 어색함으로 시작했지만, 서아린의 주도하에 점차 대화라는 것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프로파일러의 기술을 십분 활용했다. 절대로 그의 과거를 묻거나 심리를 파고드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음식의 맛은 어떤지, 싫어하는 식재료는 없는지 등,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물었다.

권이헌은 처음에는 단답으로 일관했지만, 서서히 그녀의 질문에 한두 마디씩 답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누군가와 식사를 하며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가장 큰 변화는 권이헌 스스로에게서 나타났다. 그는 더 이상 서아린을 필요할 때 부르는 안정제로 취급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말없이 식탁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고, 서재에서 일에 몰두하다가도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았다. 그의 세상에 ‘서아린’이라는 존재가 당연한 일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서아린이 첫 번째 외출권을 사용할 날이었다.

“어디로 가고 싶지?”

권이헌의 질문에 서아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서점이요.”

그녀에게는 정보가 필요했다. 이 세계에 대한 정보, 그리고 17년 전 사건과 관련된 단서가 될 만한 모든 것.

권이헌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차를 몰았다. 서울에서 가장 큰 대형 서점이 입주해 있는 백화점 건물의 VVIP 주차장으로 차가 들어섰다. 서점 전체를 빌린 듯, 그들이 들어서자 일반 고객들의 출입이 잠시 통제되었다.

“저기,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서아린의 말에 권이헌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그는 여전히 사람 많은 곳을 극도로 꺼렸다. 서아린은 그의 손을 잡지 않았지만, 그가 미세하게 불안정해지는 것을 느끼고 일부러 그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그의 감정 소음이 어느 정도 제어되고 있었다.

서아린은 역사와 사회, 시사 코너를 샅샅이 훑었다. 17년 전의 굵직한 사건들을 되짚으며, JK그룹 교통사고 기사가 실렸을 법한 낡은 잡지나 신문 자료를 찾아보려 했지만, 모든 것이 통제된 듯 아무런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쉬운 마음에 책을 뒤적이던 그때였다.

“어머, 이헌 씨 아니세요?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날카롭고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윤세라가 우연을 가장한 채 완벽하게 꾸민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권이헌에게 고정된 채, 서아린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마침 근처에서 미팅이 있었는데, 신기한 우연이네요. 이왕 만난 김에 차라도 한잔….”

“거절한다.”

권이헌이 그녀의 말을 차갑게 잘랐다. 그는 서아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명백한 소유욕의 표현이자, 윤세라를 향한 경고였다.

윤세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서아린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이 F급이랑 같이 다니시나 봐요. S급이신 이헌 씨 옆자리는 아무나 설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쓸데없는 동정심은 이헌 씨의 격을 떨어뜨릴 뿐이에요.”

그녀의 말은 권이헌이 아닌, 서아린의 심장을 겨눈 독화살이었다. 서아린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권이헌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차갑고 잔혹했다.

“윤세라.”

“네, 이헌 씨.”

“넌 아직도 모르겠나?”

그는 서아린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윤세라를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네까짓 S급의 같잖은 치료가 아니야. 이 사람의 존재, 그 자체라고.”

공개적인 모욕. 그리고 선언이었다.

윤세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분노와 수치심으로 떨렸다.

그 순간, 서아린은 권이헌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히 윤세라를 쳐내기 위한 발언이 아니었다. 혼란스럽고 거칠지만, 명백한 그의 진심이었다.

차로 돌아오는 내내,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좁은 차 안에는 어색하면서도 뜨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펜트하우스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펜트하우스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권이헌이 거칠게 서아린의 몸을 돌려 벽으로 밀어붙였다.

“……!”

서아린이 놀라 숨을 삼키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리고 그는,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듯한, 폭풍 같은 첫 키스였다.

그의 키스는 서툰 만큼 절박했고, 거친 만큼 외로웠다.

권이헌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본능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이 작은 여자가 주는 절대적인 평온, 그녀의 존재 자체가 주는 구원. 그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것으로 각인하고 싶은 맹목적인 갈망이 그를 집어삼켰다.

서아린은 저항할 수 없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힘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입술을 통해, 그의 온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감정의 폭풍이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다. 혼란, 갈망,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지독한 슬픔과 두려움. 프로파일러로서 분석하던 감정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영혼의 비명이 그녀의 심장을 때렸다.

이건 사랑의 키스가 아니었다. 이것은 구조 신호였다. 수십 년간 어두운 심해에 갇혀 있던 남자가 처음 발견한 한 줄기 빛을 향해,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뻗는 손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칠게 그녀를 탐하던 그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고,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기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감정의 폭풍이 휩쓸고 간 흔적으로 가득했다. 후회도, 당혹감도 아닌,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혼란.

“너는….”

그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정체가 뭐지? 왜 내 세상을 전부 흔들어 놓는 거지?”

그의 질문에 서아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통제 불능의 S급 에스퍼가 아닌, 길 잃은 상처투성이의 영혼을 보았다.

그 순간, 프로파일러 김윤아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두려움과 놀라움이 가라앉은 자리에, 명확한 분석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생소한 안정감과 평온을, 나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감정이 통제 범위를 넘어서자,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뿐.’

이것은 기회였다. 그의 가장 깊은 방어 기제가 무너진 지금, 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서아린은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피부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제가 당신의 세상을 흔드는 게 아니에요, 권이헌 씨.”

그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당신을 옭아매고 있던 세상이, 비로소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당신이 두려워해야 할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을 그렇게 만든 진짜 원인이죠.”

그녀의 말은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뺨을 감싼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마치 그녀가 주는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펜트하우스의 분위기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계약으로 묶인 갑과 을의 관계는 끝났다. 그 자리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복잡하고 아슬아슬한 감정의 끈이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고 있었다.

권이헌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생전 처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지긋지긋한 소음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제멋대로 심장을 뛰게 했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었다.

그는 미치도록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혼란의 근원인 서아린을,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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