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라의 분노
다음 날 아침, 펜트하우스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한정훈 실장은 두 사람 사이의 미세한 기류 변화를 눈치챘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권이헌은 평소처럼 서재에 틀어박혔고, 서아린은 게스트룸에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문 너머의 상대를 의식하고 있음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권이헌이었다.
그는 서아린의 방문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서아린이 놀라 고개를 들자, 그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따라와. 보여줄 게 있어.”
그가 그녀를 이끈 곳은 펜트하우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의 서재, 그 안에서도 책장으로 위장된 비밀의 문 너머였다.
지문과 홍채 인식이라는 몇 단계의 보안을 거쳐 열린 공간은, 차가운 금속과 모니터로 가득 찬 작은 연구실에 가까웠다.
방 중앙에는 거대한 서버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장치가 놓여 있었다. 권이헌이 장치를 조작하자, 허공에 수많은 데이터 파일들이 떠올랐다. SF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 그대로였다.
[프로젝트 제로(Project ZERO) - 피험체 K 임상 기록]
“이게… 뭐죠?”
“내 과거다.”
권이헌의 목소리는 낮고 무미건조했다. 그는 하나의 영상 파일을 재생했다.
홀로그램 영상 속에는 낡고 차가운 실험실을 배경으로, 열 살 남짓한 어린 아이가 겁에 질린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영상 속 아이는, 권이헌의 어린 시절이었다.
[…피험체 K에게 2차 마나 각성 촉진제(코드명: 카오스) 투여 시작. 감정 증폭 반응 기록 개시.]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어린 권이헌의 팔에 굵은 주사기를 꽂았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어른들의 힘에 속수무책이었다.
약물이 주입되자, 아이의 몸에서 폭풍 같은 마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의 집기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부서졌고, 아이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영상 속에서, 한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훌륭해. 통제 불가능한 감정의 파도.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병기의 시작이지. 닥터 최의 최고 걸작이 될 거야.]
서아린은 그대로 굳어 숨을 멈췄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치료나 실험이 아니었다. 명백한 아동 학대이자,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이었다. JK그룹의 후계자였던 어린 아이가, 부모를 잃은 직후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납치되어 끔찍한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영상 속에서 고통받는 어린 권이헌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다른 파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일부러 공포와 분노를 유발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그때마다 마나 폭주 수치를 기록하는 비인간적인 실험 기록들.
그의 감정 과부하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닥터 최라는 인물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족쇄였다.
서아린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목격한 자의 깊은 분노였고, 그가 겪었을 지옥 같은 고통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본 권이헌의 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굳었다. 그는 지난 17년간 단 한 번도 타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줄 사람도, 이해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작은 여자가 자신의 가장 끔찍한 상처를 보고,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 있었다.
서아린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 순간, 권이헌의 단단했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기댄 채,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은 단순한 인연을 넘어 파트너가 되었다. 서아린은 그를 완벽하게 구원해주고 싶다는, 프로파일러로서의 사명감을 넘어선 뜨거운 의지를 느꼈다.
서아린의 위로는 권이헌에게 낯선 만큼 강력한 치유제였다. 그의 내면을 수십 년간 옥죄어 온 차가운 쇠사슬이, 그녀의 따뜻한 눈물 한 방울에 녹아내리는 듯한 감각.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약점이 아니었다.
비밀 연구실 안,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에게 기댄 채 서 있었다. 서아린은 더 이상 울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투명하면서도 깊고, 눈동자는 깊은 심연의 어둠만큼이나 단단해져 있었다.
“닥터 최….”
서아린이 나직이 그 이름을 읊조렸다. 증오와 경멸, 의문과 동정이 함께 담긴 목소리였다.
“그 자를 찾아야 해요. 당신에게 이런 짓을 저지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감정 과부하를 만든 ‘정신적 각인’에 대한 해독제도 그 자가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권이헌을 향한 위로를 넘어선, 사건 해결을 염원하는 프로파일러의 예리함도 함께 번뜩이고 있었다.
권이헌은 그녀의 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 역시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끝을 모를 분노가 아닌, 명확한 목표를 향한 진중한 결의가 담겨 있는 듯 했다.
“그 자는 그림자 속에 숨어있어. 지난 17년간 한 실장을 통해 추적했지만, 모든 기록이 지워진 유령 같은 존재다.”
“유령은 없어요. 흔적을 지웠을 뿐이죠.”
서아린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떠 있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 데이터들이 바로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에요. 아무리 완벽하게 자신을 지웠어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기록 안에는 반드시 범인의 심리와 행동 패턴이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이제부터 이 연구실은 우리의 작전 본부고, 당신은 내 유일한 파트너예요.”
그녀는 ‘파트너’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권이헌은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안정제, 계약자, 내 것. 그가 그녀를 지칭하던 모든 단어와는 차원이 다른, 동등한 무게감을 가진 단어였다. 그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펜트하우스의 비밀 연구실은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었다.
서아린은 프로파일러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방대한 양의 실험 데이터를 밤을 새워가며 분석했다. 닥터 최의 실험 방식, 약물 투여 패턴,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의 문체 하나하나에서 그의 성격과 심리를 역으로 추적해 나갔다.
권이헌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했다.
JK그룹의 정보팀을 동원해 그녀가 제시하는 키워드로 국내외의 모든 기록을 샅샅이 뒤졌고, 최고의 해커들을 고용해 17년 전의 보안 기록들을 파헤쳤다.
두 사람은 함께 식사하고, 함께 밤을 새우고, 함께 사건을 분석했다.
치료를 위한 스킨십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존재에 더욱 깊숙이 스며들었다. 서아린은 그의 곁에서 안정감을 느꼈고, 권이헌은 그녀의 지적인 모습과 사건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모습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권이헌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윤세라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서아린의 뒷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있었다.
“고아원 출신, F급 능력 발현 후 별다른 사회 활동 없이 반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지냄. 유일한 교류는 ‘이하나’라는 카페 사장뿐. 특이사항 전무.”
“고작 이런 애한테… 내가 밀렸다고?”
윤세라는 보고서를 구겨 던졌다. 그녀의 S급 힐러로서의 자존심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끌어내려야겠어.”
그녀는 자신이 가진 권력과 인맥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익명의 제보를 가장하여, 몇몇 언론사와 능력자 커뮤니티에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충격! S급 에스퍼 권이헌, 정체불명의 F급 능력자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다?]
[특혜 의혹! F급 서아린, 무슨 빽으로 능력자 등록 통과했나?]
[S급의 마나를 빨아먹는 기생충, 그녀의 능력은 정말 ‘정화’일까?]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과 게시글들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서아린의 신상 정보와 사진이 무분별하게 유출되었고, 그녀를 향한 비난과 억측이 쏟아졌다. 세상은 약하고 배경 없는 F급이 S급의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시기하고 질투했다.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한정훈 실장이 다급하게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에는 온갖 악의적인 기사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서아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그녀는 각오했지만, 세상의 악의는 생각보다 더 빠르고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