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역의 동거 제안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간단해. 그냥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 24시간. 내가 부르면 언제든 와서, 내 손을 잡고, 이 소음을 잠재워주면 돼.”
그의 눈이 번뜩였다.
“내 개인 안정제가 되는 거다.”
서아린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개인 안정제라니. 무슨 약 이름도 아니고.
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치열하게 싸웠다.
‘살아야 해! 일단 살고 봐야 다음이 있는 거야!’ - 생존 본능 서아린.
‘미친 소리. 저건 감금이야.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자유롭게 살던 내가, 한 남자의 애완동물처럼 살라고?’ - 프로파일러 김윤아.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파일러 김윤아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 먹을 밥과, 석 달 뒤의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힘없는 F급 서아린일 뿐.
“…알겠습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체념 섞인 대답이었다.
“그 계약, 받아들이죠.”
그녀의 대답에 권이헌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변화가 생겼다. 안도감. 아주 미세했지만, 김윤아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절박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남자였다.
“좋아. 현명한 선택이다.”
권이헌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터치했다.
“한 실장, 들어와.”
잠시 후, 한정훈 실장이 거실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가득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권이헌의 지시를 기다렸다.
“계약서 준비해. 내용은 방금 말한 대로. 갑, 권이헌. 을, 서아린. 계약 기간은 을의 마나 부조화가 완치될 때까지. 을은 계약 기간 동안 24시간 갑의 곁에 머물며, 갑의 요청 시 즉시 ‘정화’ 능력을 제공한다. 갑은 그 대가로 을의 치료와 의식주 일체를 책임진다.”
한정훈 실장의 눈이 커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권이헌과 서아린을 번갈아 보았다.
“도련님, 그게 무슨…”
“군말 말고 준비해.”
“……알겠습니다.”
한정훈 실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서재로 향했다. 서아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상황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는 저 사람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서아린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끌려다닐 수만은 없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권리는 확보해야 했다.
권이헌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F급 시한부 주제에 조건을 건다는 것이 의외라는 눈치였다.
“말해봐.”
“첫째, 신체적 접촉은 치료 목적으로 손을 잡는 것 외에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권이헌이 말했다.
“그건 가능할 거 같군.“
뭔가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서아린은 다음 조건을 말했다.
“둘째, 개인적인 공간과 최소한의 사생활은 보장해 주십시오.”
“그것도 원한다면 그렇게 해. 단 이 곳 안에서 만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서아린이 주춤했다. 하지만 토를 달진 않았다. 그대로 세번째 조건을 말하기로 했다.
“셋째… 가끔은 바깥 공기를 쐴 수 있게 해주세요. 친구를 만난다거나…”
“안돼.”
마지막 조건은 말과 동시에 잘렸다.
“친구? 그런 건 필요 없어. 넌 이제부터 내 세상 안에서만 움직인다. 외출은 내가 허락할 때, 나와 함께하는 경우에만 가능해.”
독재자 같은 발언에 서아린은 기가 막혔지만,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이라도 관철시켜야 했다.
권이헌은 잠시 생각하더니,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받아들이지. 어차피 나도 너한테 그 이상의 관심은 없으니까.”
그의 말에 서아린은 안도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프로파일러로서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해 봤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잠시 후, 한정훈 실장이 최고급 종이에 인쇄된 계약서를 들고 나왔다. 내용은 권이헌이 말한 그대로였다.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건 계약서가 아니라 노예 문서에 가까웠다.
서아린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어, ‘서아린’이라는 낯선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의 서명을 본 권이헌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실장. 손님 방 준비하고, 필요한 모든 걸 갖춰줘. 아, 그리고 저 반지하 방은 정리해. 짐은 다 버리고.”
“네? 버리라니요?”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는 서아린의 과거를 지워버리듯 간단하게 말했다. 그녀가 살았던 흔적, 그녀의 얼마 안 되는 물건들. 그 모든 것이 그의 말 한마디에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서운하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아린의 물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독단적인 방식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다.”
권이헌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 유일한 세상이 될 거고.”
그 순간, 서아린은 깨달았다. 자신이 단순히 시한부 인생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 더 크고 화려한 감옥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계약이 성립된 후, 첫 번째 공식 업무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한정훈 실장의 안내에 따라 게스트룸으로 배정된 방을 둘러본 직후였다.
그녀가 살던 반지하 단칸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럭셔리한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 전체가 옷장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녀의 사이즈에 맞는 옷들이 브랜드별로 가득 차 있었다.
속옷부터 잠옷, 외출복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준비한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방금 온라인으로 다 긁어모은 거겠지.’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니까. 서아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옷장을 닫았다.
그때, 방에 설치된 인터폰이 울렸다.
[서재로 와.]
권이헌의 목소리였다. 첫 호출이었다.
서아린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그의 성격을 보여주듯, 온통 검은색과 회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거대한 책상에 앉은 그는 여러 개의 모니터를 띄워놓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감정의 소음이 그녀의 머리를 다시 찔러왔다.
“왔나.”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
그가 가리킨 곳은 그의 책상 바로 옆에 놓인 작은 보조 의자였다. 서아린이 마지못해 그곳에 앉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명령이었다. 서아린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커다란 손 위로 자신의 작고 차가운 손을 겹쳤다.
그의 손은 뜨거웠다.
손이 맞닿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의 기운이 희미하게 흘러나가 그의 손을 감쌌다. 세레니티 터치.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능력은 그의 고통에 반응해 자동적으로 발동되었다.
스으으-.
마치 뜨거운 김이 빠져나가듯, 권이헌의 몸을 감싸고 있던 날카로운 기운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사납게 요동치던 그의 감정의 파도가 잔잔한 호수처럼 변해갔다.
“……하아.”
권이헌의 입에서 깊은 숨이 터져 나왔다. 수십 년간 그를 짓누르던 끔찍한 압박에서 벗어난 사람의 안도감.
그의 굳어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풀리고, 찌푸려졌던 미간이 펴졌다.
그는 처음 느껴보는 완벽한 고요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갑옷을 두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상처투성이의 맨몸이 있는 것 같았다.
김윤아의 프로파일러 본능이 고개를 들었다.
‘이 남자… 강한 게 아니야. 고통을 견디기 위해 강해져야만 했던 거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 그의 숨소리,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단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움켜쥐는 것 같았다.
“저기… 이제 좀 괜찮으시면…”
서아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 역시 F급의 미약한 마나를 계속 소모하고 있었기에, 조금씩 피로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서아린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권이헌은, 잠들어 있었다.
의자에 기댄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마치 평생 처음 잠을 자보는 아이처럼 깊고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