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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 관계 일러스트

인과 관계

망했다.

​

그것도 아주 제대로.

​

망했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가? B급 소설 제목처럼 폭망했다고 하자.

​

서아린, 아니 김윤아는 전직 프로파일러로서 겪어본 수많은 위기 상황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었다.

​

인질극 현장, 조폭과의 대치, 심지어 폭탄 조끼를 입은 테러범과의 협상 테이블에도 앉아봤다.

​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최악의 난이도였다.

​

데이터가 없었다.

​

상대는 권이헌.

​

소설 속 세계관 최강자이자, 아직 각성 전인 통제 불능의 시한폭탄.

​

그에 대한 정보라고는 소설 속 몇 줄의 묘사와, 지금 온몸으로 느껴지는 지옥 같은 감정의 폭풍뿐이었다.

​

분노, 고통, 경멸, 고독. 이 모든 감정이 뒤섞여 그녀의 F급 멘탈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

“다시, 해보라고 했다.”

​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지만, 그를 붙잡은 눈동자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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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속에서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사람의 맹목적인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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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의 머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미친 듯이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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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

상대는 지금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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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이 처음으로 진통제를 맞은 것과 같은 상태. 논리적인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 즉 고통의 소멸뿐이다.

​

“저…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겁니다.”

​

일단 발뺌하고 보자.

​

서아린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며 겁에 질린 목소리를 연기했다.

​

이 가녀린 몸의 유일한 장점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쉽다는 점이다.

​

소설 속에서 묘사된 권이헌은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다. 무관심할 뿐.

​

“우연?”

​

그가 코웃음을 쳤다.

​

“내 인생에 우연 따위는 없어.”

​

권이헌은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그녀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지옥 같은 소음으로 가득한 듯, 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

“네가 내 어깨를 스쳤을 때, 10초. 네가 내 팔을 잡고 있는 지금, 30초… 소음이 사라졌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인과관계야.”

​

젠장. 너무 똑똑한 악당은 상대하기 피곤한데.

​

서아린은 속으로 욕을 씹으며 다음 수를 생각했다.

​

여기서 순순히 능력을 인정하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권이헌 전용 인간 진통제’가 되어버릴 게 뻔했다.

​

그건 시한부 인생보다 나을 게 없는 삶이다.

​

“그… 그럼, 이건 어떠세요? 사실 제가 아니라 이 컵라면에 특별한 기운이…”

​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컵라면을 필사적으로 내밀었다.

​

죽기 전에 먹어야 할 바질 페스토 치킨만큼이나 소중한 생명의 양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이 먼저였다.

​

권이헌의 시선이 잠시 컵라면으로 향했다.

​

그의 얼굴에 떠오른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하는 표정을, 프로파일러 김윤아는 놓치지 않았다.

​

위험 신호였다.

​

“죄송합니다.”

​

서아린은 빛의 속도로 컵라면을 다시 품에 안았다.

​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편의점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명이 들어섰다.

​

딱 봐도 야간 노가다라도 뛰고 온 듯, 작업복 차림에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 있었다.

​

“어라? 젊은 총각이 어린 아가씨 팔목 잡고 뭐 하는 거야?”

​

그들 중 하나가 시비조로 말했다.

​

다른 하나는 권이헌의 값비싼 코트와 서아린의 후줄근한 후드 집업을 번갈아 보며 히죽거렸다.

​

최악의 타이밍에 나타난 최악의 구원투수였다.

​

서아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안돼, 이 멍청이들아! 그냥 지나가! 저 남자는 너희 같은 동네 양아치들이 껄떡거릴 상대가 아니라고!’

“아가씨, 저놈이 괴롭히면 아저씨한테 말해. 아저씨가 혼쭐을 내줄 테니… 컥!”

​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이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그는 서아린의 팔을 잡은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

콰직!

​

편의점 진열대에 있던 생수병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이 쥐어짠 것처럼.

​

물벼락을 맞은 남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

염동력.

​

대한민국 유일의 S급 에스퍼가 가진 힘의 편린이었다.

​

“…….”

“…….”

​

편의점 안은 순간 정적으로 가득 찼다.

​

겁에 질린 아르바이트생은 카운터 밑으로 기어 들어간 지 오래였다.

​

남자들은 제정신이 아닌 상대를 만났다는 것을 깨닫고 눈알을 굴리기 바빴다.

​

권이헌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직 서아린만을 응시하며 말했다.

​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

그것은 경고였다.

​

그녀를 향한, 그리고 세상 모두를 향한.

​

그는 서아린의 팔을 잡아끌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

그녀는 마지막 미련으로 계산대의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아련하게 돌아보았다.

​

‘안녕, 내 2,800원.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

​

그렇게 그녀는 S급 에스퍼에게 맥없이 끌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거리로 끌려나왔다.

​

​

​

​

​

​

​

“타.”

​

편의점 앞에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검은색 스포츠카.

​

서아린은 차에 대해 잘 몰랐지만, 저 차 한 대 값이면 서울에 작은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으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

권이헌은 그녀를 조수석에 거의 던지다시피 밀어 넣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탔다.

​

철컥.

​

문이 잠기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

부아앙-!

​

차는 조용한 골목길과 어울리지 않는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출발했다.

​

서아린은 시트에 몸이 파묻히는 감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권이헌에게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폭풍이었다.

​

좁고 밀폐된 공간 안에서 그 위력은 배가 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

‘진정해, 김윤아. 넌 지금 납치당한 게 아니야. 특이 케이스의 용의자를 연행하는 중이라고 생각해.’

​

그녀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옆자리의 남자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

이름: 권이헌.

특징: S급 염동력자, JK그룹 후계자 추정, 감정 과부하로 인한 만성적 고통에 시달림, 감정 조절 능력 제로, 사회성 제로,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잘생김 (분석에 불필요한 정보지만 부인할 수 없음).

​

‘한마디로, 잘생긴 통제 불능 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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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

“저기요.”

“…….”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집.”

​

단답형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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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프로파일러 김윤아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범죄자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는 전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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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원하는 게 정확히 뭐죠? 아까 그 능력… 원하신다면 다시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최소한의 설명은 해주셔야 제가 협조를…”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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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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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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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서아린은 입을 다물었다.

​

지금 그녀의 목소리마저 그에게는 소음이고 고통인 것이다.

​

그녀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점점 더 화려하고 낯선 거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자, 강남의 마천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얼마나 달렸을까.

​

차는 서울의 가장 비싼 땅 위에 세워진,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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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리자, 정장을 흠잡을 데 없이 차려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깊이 고개를 숙였다.

​

“도련님,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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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권이헌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그의 시선은 곧바로 권이헌에게 붙들린 서아린에게로 향했다.

​

그의 눈에는 당혹감과 경계심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

‘한정훈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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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권이헌을 유일하게 진심으로 아끼고 보살피는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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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헌의 비서실장이자 집사 같은 존재였다. 그의 등장은 소설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

“도련님, 이 아가씨는…?”

​

한정훈 실장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물음이 담겨 있었다.

​

“손님이야.”

​

권이헌은 짧게 대답하고는 서아린을 데리고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손님이라기엔 행색이… 그리고 저녁 약속은 어찌…”

“취소해.”

​

한정훈 실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뒤를 따랐다.

​

하지만 그의 날카로운 눈은 서아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분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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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스캔하듯이.

​

서아린은 그 시선을 느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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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설득할 수 있겠군.’

​

권이헌과 달리, 한정훈은 상식과 이성이 통하는 인물이다.

​

그를 아군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탈출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띵.

​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에 도착했다.

​

문이 열리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

드라마에서나 보던,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펜트하우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하지만 그 화려함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

너무나도 넓고 차가운 공간은, 오히려 더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

“한 실장님은 나가보세요.”

“하지만 도련님…”

“나가. 그리고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

권이헌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

한정훈 실장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아린을 한번 쳐다본 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

철컥.

​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제 이 거대한 공간에는 서아린과 권이헌,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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