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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니티 허브 일러스트

세레니티 허브

서아린은 윤세라가 남기고 간 명품 선물들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화려하지만 윤기는 없는 선물들. 마치 윤세라의 마음처럼.

그녀는 다시 ‘닥터 최’를 조사한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윤세라의 견제나 강지훈의 의심이 아니었다. 권이헌의 과거를 파헤치고,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여 이 계약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벗어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윤세라가 남긴 꽃바구니에서 가장 예쁜 꽃 한 송이를 뽑아 책상 옆 작은 화병에 꽂았다. 그리고 권이헌의 닫힌 방문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에게 의지하는 만큼, 나도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줄게요. 그게 이 지독한 감옥에서 나가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날 밤, 권이헌은 서아린의 게스트룸을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나직했다. 서아린은 유리병을 받아 들었다. 안에는 맑고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 이파리 하나.

“세레니티 허브. 네 능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약초라고 한정훈 실장이 어렵게 구해왔더군.”

세레니티 허브. 소설 속에서 F급 능력자의 마나 부조화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희귀 약초였다. 하지만 워낙 귀해 서아린의 몸으로는 구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이걸 왜 저한테…?”

“네가 내 치료에 전념해야 하니까.”

그의 대답은 여전히 맛없이 건조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어딘가 모르게 깊어진 신뢰와 집착이 엿보였다. 그는 서아린의 어깨에 남은 멍 자국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다치지 마. 네가 다치면, 나도 아프니까.”

그의 말에 서아린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그녀를 향한 그의 집착은 이미 단순한 안정제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세상에서 그녀는 이미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집착은 그녀에게 기회이자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이 될 수도 있음을 예감했다.

서아린은 세레니티 허브를 유리잔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었다. 푸른 이파리가 서서히 퍼지며 맑은 물에 영롱한 빛깔을 더했다.

한 모금 마시자, 온몸에 퍼지는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에 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리는 듯했다. [남은 시간]의 감소 속도가 더욱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보며, 서아린은 자신의 생존 확률이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권이헌은 나에게 세레니티 허브를 제공함으로써, 내가 그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있어. 하지만 동시에 이 허브는 나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이건 상호 의존적인 관계의 시작이야.’

그녀는 프로파일러로서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권이헌의 집착은 그녀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그녀의 자유를 옥죄는 사슬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해야 했다.

그녀는 다음 날부터 권이헌의 과거를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하얀 가운의 남자’와 ‘주사기’에 집중했다. 권이헌은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그녀의 세레니티 터치와 끈질긴 설득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 남자들은… 나를 ‘피실험체’라고 불렀어. 그리고 내 몸에 무언가를 계속 주입했지. 너무 어렸을 때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게 내 능력을 강제로 끌어낸 거라고….”

그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자, 서아린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맞아요. 그게 당신의 능력을 발현시킨 계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신의 마나 코어에 무리한 자극이 가해졌고, 그것이 지금의 ‘감정 과부하’로 나타난 거죠.”

“그럼… 고칠 수 있다는 건가?”

권이헌의 눈빛에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 그는 자신의 평생을 짓눌러온 고통이 치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마주한 듯했다.

“완벽하게 고칠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마주하면, 당신 스스로 그 고통을 제어할 힘을 키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힘은 당신 안에 이미 존재해요.”

서아린은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에게 단순히 진통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힘을 가르쳐주려 했다. 그것이 그녀가 ‘인간 진통제’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며칠 후, 그녀는 이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제안했다. 권이헌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놀랍게도 그는 쉽게 허락했다. 단, 한정훈 실장이 동행한다는 조건이었다.

서아린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친구와의 만남은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하나의 작은 카페는 따뜻하고 아늑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그간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하나의 눈은 서아린의 신데렐라 같은 변신에 경악과 환호를 동시에 보냈다.

“서아린! 너 진짜 회장님 딸이라고 해도 믿겠어! 봐봐, 이 옷에 이 얼굴! 완전 재벌가 사모님인데?”

이하나는 서아린의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잘생긴 재벌 3세랑은 잘 돼가? 계약 동거 로맨스는 이제 선계약 후사랑 단계로 넘어가는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치료해주는 관계야.”

서아린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이하나는 이미 로맨스 스토리에 푹 빠져 있었다.

“에이~ 뭘 또 빼! 내가 웹소설 10년 차인데, 이 전개는 뻔해! 까칠한 재벌남이 겉으로는 무심한 척하다가 여주한테 속절없이 빠지는 거지! 그나저나… 그 재벌남 과거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이하나의 엉뚱한 질문에 서아린은 순간 흠칫했다. 그녀는 이하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하나의 직감은 가끔 소설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어떻게 알았어?”

“어이구, 내 촉은 무시 못 하지! 웹소설 공식이야! 남주가 사연이 깊어야 로맨스가 진해지는 법이거든! 그래서 그 비밀이 뭔데? 설마 아픈 과거를 가진 악당 보스였다가 여주 만나서 갱생하는 스토리야?”

이하나의 엉뚱한 추측에 서아린은 한숨을 쉬면서도,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소설 속 이야기처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슷해.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받고 있어. 그리고 그 트라우마에 어떤 비윤리적인 실험이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서아린은 조심스럽게 권이헌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닥터 최와 관련된 이야기는 최대한 배제했지만, 이하나의 상상력은 이미 헬륨가스 넣은 풍선처럼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흐어어어… 대박! 이거 완전 흥미진진한데? 그럼 그 실험을 주도했던 흑막이 있을 거고, 그놈을 잡아야 남주가 완전히 해방되는 그런 스토리?”

“…글쎄.”

서아린은 이하나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통찰력을 얻었다. 이하나의 웹소설 클리셰 분석은 때때로 그녀의 프로파일링보다 더 정확한 예측을 제공하곤 했다.

어쩌면 이하나의 엉뚱한 시각이 이 난감한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를 나서자, 한정훈 실장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특수능력관리국에서 온 서류였다.

“강지훈 팀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서아린 아가씨의 능력 등록 관련 서류입니다.”

서아린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능력 등록 신청서, 그리고 능력 평가를 위한 검사 일정이 적혀 있었다. 강지훈 팀장이 그녀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래, 어차피 나도 이 세계에서 F급 엑스트라의 운명에 묶여 있을 생각은 없어. 제대로 등록하고, 내 존재감을 각인시켜야지.’

그녀는 서류를 들고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권이헌은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서재로 불렀다.

“이하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그의 질문에 서아린은 놀랐다. 한정훈 실장이 보고한 것일까?

“친구와 나눈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적인 이야기? 내 이야기라면, 나에게도 사적인 이야기다. 넌 이제 내 세상 안에서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집착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음을 느꼈다.

“당신을 치료하기 위해선, 저 역시 숨통이 트일 공간이 필요합니다. 친구와의 대화는 저의 정신 건강에 중요해요. 당신의 소음을 잠재우는 제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겠죠.”

서아린은 그의 집착을 역으로 이용했다. 권이헌은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했다.

“알겠다.”

그의 승낙에 서아린은 안도했다. 이 계약 관계에서 그녀는 단순한 을이 아니라, 권이헌의 치료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임을 그에게 각인시켜야 했다. 그것이 이 지독하고 불공평한 계약 관계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분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였다.

“그리고, 저 능력 등록할 겁니다.”

그녀는 권이헌에게 강지훈 팀장이 보내온 서류를 내밀었다. 권이헌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를 천천히 응시했다.

그녀가 그의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 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하지만 서아린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F급 엑스트라로 죽어갈 운명에 순응할 리 없는, 그녀는 김윤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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