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레귤러 데이터
권이헌의 세상 밖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는 선언.
서아린이 내민 ‘능력 등록 신청서’는 얇은 종이 몇 장에 불과했지만, 권이헌에게는 그녀가 쌓아 올린 견고한 벽이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통제권 안에 완벽하게 들어왔다고 믿었던 작은 새가, 이제 스스로 날갯짓을 해보겠다며 새장의 문을 부리로 쪼는 듯한 기묘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 드리워졌던 희미한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겨울의 냉기가 감돌았다. 서재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가 네 멋대로 하라고 했지?”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위압감은 서아린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안에서 불쾌감과 분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여 작은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왔다.
하지만 서아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프로파일러 김윤아는 위압적인 용의자 앞에서 위축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감정적일수록, 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파고들었다.
“이건 제 멋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의 치료를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절차죠.”
“합리적인 절차?”
“특수능력관리국은 이미 제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강지훈 팀장의 눈을 보셨잖아요. 그는 의심하고 있고, 파고들 겁니다. 제가 미등록 상태로 당신 곁에 계속 머문다면, 그들의 의심은 확신이 될 거고, 결국 당신에게 불필요한 위협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할 테니까요.”
서아린은 약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권이헌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전을 위한 최선의 방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능력을 등록하고, 관리국의 감시 아래 들어가는 것. 그게 외부의 불필요한 위협을 차단하고, 제가 당신의 곁에 안정제로서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녀는 그의 논리를, 그의 방식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를 설득하고 있었다. <너의 세상 안에서> 안전하게 있으려면, 역설적으로 <세상의 규칙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권이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서류와 서아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제 논리를 조금도 굽히지 않는 저 당돌한 눈빛. 처음 편의점에서 마주쳤을 때의 위태로운 사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 여자를 단순한 F급 시한부로 얕잡아 봤다는 것을.
“…마음대로 해.”
마침내, 그가 툭 내뱉듯 허락했다.
“단, 조건이 있다. 등록 절차의 모든 과정에 한정훈 실장이 동행한다. 그리고 네 능력에 대한 모든 정보는 내가 통제한다. F급 ‘세레니티 터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알려져선 안 돼. 알아들었나?”
“네, 알겠습니다.”
서아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고비를 넘었다.
“그리고 이거 하나만 기억해, 서아린.”
권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관리국에 등록되든, 세상 모두가 네 존재를 알게 되든, 변하는 건 없어. 넌 여전히 내 거야. 내 허락 없이는, 이 새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어.”
그의 뜨거운 숨결과 차가운 집착이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서아린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얻어냈다. 하지만 동시에 더 깊은 족쇄에 묶여버렸다.
며칠 후, 서아린은 한정훈 실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특수능력관리국 본부 건물 앞에 섰다. 차가운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은, 그 자체로 권위와 힘을 과시하는 듯했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분주했다. 제복을 입은 요원들과 각양각색의 능력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서아린은 사람들의 감정 소음에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후드 집업 대신 단정한 투피스를 입은 지금은 피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권이헌이 쥐여준 세레니티 허브 차를 마시며 간신히 평정을 유지했다.
“서아린 씨, 이쪽입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지훈 팀장이었다. 그는 사적인 공간인 펜트하우스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영역 안에서 한층 더 날카롭고 빈틈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서아린을 능력 측정실로 안내했다. 방 중앙에는 거대한 캡슐처럼 생긴 기계와 여러 개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간단한 테스트입니다. 서아린 씨의 능력인 ‘세레니티 터치’의 정화율과 마나 효율, 그리고 지속 시간 등을 측정할 겁니다.”
강지훈이 기계를 조작하자, 모니터 하나에 영상이 떠올랐다. 영상 속에는 한 남자가 취조실에 앉아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D급 사이코메트리 능력자입니다. 최근 불법적인 능력 사용으로 체포되었죠. 현재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 대상에게 능력을 사용해, 감정 안정 수치를 최대한 끌어올려 보십시오.”
서아린은 유리창 너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프로파일러의 눈으로 본 그는, 단순히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죄책감, 공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절망감이 뒤섞여 그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능력 테스트가 아니었다. 강지훈은 그녀의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녀가 정말 평범한 F급이 맞는지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서아린은 측정 기계의 센서에 손을 올렸다. 눈을 감고, 유리창 너머의 남자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권이헌의 지옥 같은 감정의 폭풍에 비하면, 남자의 감정은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했다.
그녀는 남자의 불안감을 <이해>했다. 프로파일러 김윤아로서, 수많은 범죄자들이 법의 심판 앞에서 보였던 그 감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감정의 근원을 향해, 세레니티 터치의 힘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그 순간, 측정 기계의 그래프가 미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지켜보던 강지훈 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F급의 마나 파장이 아니야. 미약하지만, 그 순도와 효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마치… 수십 년간 훈련받은 전문가가 힘을 조절하는 것처럼.’
그는 경이와 의심이 뒤섞인 눈으로 서아린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저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
삐빅-
측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기계음과 함께, 모니터에 최종 결과가 표시되었다.
[능력 등급: F]
[마나 순도: B+]
[감정 정화율: 78%]
[효율 등급: A]
결과를 확인한 측정실의 연구원들과 강지훈 팀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모순적인 결과였다.
마나의 총량이나 파장의 강도는 명백히 F급의 범주에 속했지만, 그 마나를 운용하는 방식이나 효율은 A급에 가까웠다. 마치 경차의 엔진을 가지고 F1 레이서처럼 운전하는 것과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한 연구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강지훈에게 물었다. 강지훈은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서아린을 바라보았다. 서아린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제 능력이… 좀 특이한 편이라서요.”
김윤아로서 수많은 심문과 취조를 경험하며 익힌 포커페이스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특이한 수준이 아닙니다, 서아린 씨. 이건 거의 전례가 없는 데이터입니다.”
강지훈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함께 희미한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서아린이라는 미지의 변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곁에 버티고 선 한정훈 실장과 그 뒤에 있는 권이헌의 존재 때문에,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F급 판정은 변함없습니다. 서류 절차 마무리하고 등록증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강지훈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아린을 한번 더 쳐다본 뒤 측정실을 나갔다. 서아린은 그가 자신의 파일을 ‘요주의 인물’ 서랍에 넣어두었을 것임을 직감했다.
능력자 등록증을 손에 쥐었을 때, 서아린은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카드 한 장 뿐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이 세계에서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첫 번째 증표였다. 동시에 그녀를 더 큰 감시망 안으로 밀어 넣는 크나큰 족쇄이기도 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녀는 등록증을 가방에 밀어 넣으며 결심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