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 (2)
“여기서, 멈춰도 괜찮습니다.”
서아린은 권이헌의 미간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보고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의 감정들이 파도가 되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그의 고통을 공유하듯,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은 김윤아였다. 강한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되,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사건의 본질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프로파일러의 눈빛.
권이헌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대면한 피로감, 그리고 그녀가 부여하는 안정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손을 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테이블에 엎드려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해변처럼, 그의 내면은 잔잔하지만 깊은 상흔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며칠간 서아린의 심리 치료는 계속되었다. 매일 밤, 혹은 매일 낮, 그녀는 권이헌과 마주 앉아 그의 억압된 기억들을 조금씩 건드려나갔다.
자동차 사고 현장에서 그를 끌어내던 그림자 같은 형상들, 주사기와 섬뜩한 미소를 짓던 하얀 가운의 남자, 그리고 자신의 몸속으로 주입되던 차가운 액체의 감각.
서아린은 그 파편적인 정보들을 조합하며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그는 단순히 사고의 피해자가 아닐 것이다. 그날, 그는 어떤 실험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로 그의 능력이 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감정 과부하’는 그 실험의 부작용이다.’
그녀의 프로파일러 본능은 닥터 최라는 인물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품었다. 소설 속 최종 흑막. 그가 이 모든 일의 배후일 가능성이 높았다.
서아린은 그녀의 능력이 권이헌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마나 부조화를 완화시키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마치 권이헌의 ‘감정 쓰레기’를 정화하며 그녀의 능력이 강화되는 것처럼.
그녀의 몸에도 미세한 변화가 찾아왔다. 며칠 전만 해도 햇빛 한 번 제대로 못 본 듯 창백했던 피부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식사를 제대로 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내며 F급의 능력도 미약하게나마 성장하는 듯했다.
딩동-.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한정훈 실장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도련님, 특수능력관리국 강지훈 팀장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권이헌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아린은 긴장했다.
강지훈 팀장. 소설 속에서 권이헌의 불안정한 능력을 예의주시하며 그의 통제 가능성을 끊임없이 시험하던 원리원칙주의자. 그리고 서아린을 의심하던 조력자였다.
“들어오라고 해.”
서아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강지훈의 등장은 그녀의 계획에 변수로 작용할 터였다.
잠시 후, 정복 차림의 훤칠한 남자가 거실로 들어섰다. 강지훈 팀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권이헌을 한 번 훑어본 뒤, 곧바로 그의 곁에 앉아있는 서아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빛에는 권이헌을 향한 경계심과 함께, 서아린을 향한 노골적인 의심이 서려 있었다.
“권이헌 에스퍼님, 안녕하십니까. 특수능력관리국 강지훈 팀장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이분은…?”
그의 시선은 서아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프로파일러 김윤아로서, 그녀는 그 시선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권이헌의 곁에 나타난 낯선 F급 능력자. 위험 요소인가, 아니면 이용당하는 존재인가.’
서아린은 무의식중에 권이헌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이 관계는 이제 단순한 계약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치료해야 했고, 그는 그녀의 보호 아래 있었다.
강지훈 팀장의 방문은 펜트하우스의 평온을 깨뜨리는 균열 같은 존재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권이헌의 옆에 앉아있는 서아린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미지의 바이러스를 발견한 과학자처럼, 그녀를 분석하고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강 팀장, 내 개인적인 공간에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권이헌의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그의 감정 파도가 미세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자, 서아린은 조용히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녀의 세레니티 터치가 발동되며 그의 격앙된 감정을 순식간에 진정시켰다.
강지훈은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미간이 더욱 굳어졌다.
“권 에스퍼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최근 마나 불안정 지수가 급격히 상승하여 저희 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전부터 지수가 안정권에 들어섰더군요.”
그는 서아린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원인이 이 아가씨에게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대체 무슨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서아린 씨?”
강지훈의 질문에 서아린은 권이헌의 눈치를 살폈다. 권이헌은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F급 ‘세레니티 터치’입니다. 타인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화하는 능력입니다.”
서아린의 솔직한 대답에도 강지훈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F급 능력이 S급 에스퍼의 마나 불안정을 제어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F급으로 S급 에스퍼의 감정 과부하를 잠재울 수 있다니… 희귀하지만 강력한 능력이군요. 하지만 저희 국에 등록된 F급 능력자 명단에는 ‘서아린’이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능력자 등록은 의무인데, 왜 이제껏 등록하지 않으셨습니까?”
강지훈의 추궁은 날카로웠다. 서아린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능력 발현 후 부작용 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정화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에 노출되면 저의 생명력이 깎여나가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깎여나간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멀쩡해 보이시는군요. 권 에스퍼님과의 접촉이 그 부작용까지 치료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강지훈의 질문은 핵심을 찔렀다. 서아린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권이헌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권이헌은 그녀의 신호에 따라 입을 열었다.
“강 팀장, 내 계약 관계는 국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이 이상은 사생활 침해야.”
권이헌의 단호한 태도에 강지훈은 더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서아린을 의심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국은 권 에스퍼님의 상태와 서아린 씨의 능력에 대해 계속 주시할 것입니다. 불안정한 S급 에스퍼와 미등록 F급 능력자의 접촉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강지훈은 그렇게 경고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의 방문은 서아린에게 하나의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이 세계는 능력자의 힘이 곧 권력인,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것을. 그리고 F급인 그녀의 존재는 S급인 권이헌의 옆에서 늘 의심받고 견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똑! 똑!
며칠 뒤, 서아린은 게스트룸에서 ‘닥터 최’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자료를 뒤지던 중, 문밖에서 노크 소리를 들었다. 한정훈 실장이 아닌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저예요, 윤세라. 권 이헌 씨가 보낸 선물 좀 가져왔어요.”
선물? 서아린은 의아했지만, 일단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윤세라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거대한 꽃바구니와 명품 브랜드 쇼핑백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어머, F급답게 방도 초라하네. 이헌 씨가 이런 곳에 머물게 할 줄이야.”
윤세라는 서아린의 방을 경멸하듯 훑어보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시선은 서아린이 들고 있던 ‘닥터 최’ 관련 자료에 멈췄다.
하지만 이내 흥미 없다는 듯 다시 서아린에게로 향했다.
“이게 다 이헌 씨가 당신한테 보내는 선물이에요. 이헌 씨는 고작 당신 같은 F급에게도 이렇게 관대하거든요. 하지만 착각하지 마세요. 그는 그저 제가 고칠 수 없는 ‘두통’을 잠시 가라앉히는 도구로 당신을 쓰는 것뿐이에요.”
윤세라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같은 능력, 길거리 힐러들도 가지고 있는 흔한 거예요. 그저 이헌 씨가 잠깐 호기심이 생긴 것뿐이라고요. S급인 저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거, 명심하세요.”
그녀는 서아린의 어깨를 툭 치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감히 이헌 씨 곁에서 넘보려 하지 마요. 주제를 알아야지, F급.”
윤세라는 그렇게 경고를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서아린은 한동안 문 앞에서 굳어 있었다. 윤세라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의 능력과 존재 가치를 뿌리째 흔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프로파일러 김윤아는 그런 심리전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윤세라의 말에서 오히려 불안감을 읽었다.
‘자신이 이헌의 곁에서 밀려날까 봐 초조해하고 있군. 내가 이헌씨에게 단순히 도구 이상의 존재가 되고 있다는 방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