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령 거부
권이헌은 부서진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잔해 앞에서, 쉴 새 없이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강철처럼 차가웠고, 그가 내리는 지시는 무자비했다.
“여론 통제팀은 뭐 하고 있어! 당장 라비린토스가 유포한 모든 영상과 게시물을 인터넷에서 삭제해! 방송통신위원회? 그깟 놈들 눈치 볼 시간 없어. 내 말 안 듣는 놈들은 모조리 법적으로, 아니, 물리적으로 밟아버려!”
그는 JK그룹의 모든 힘을 동원해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막아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비린토스는 거대했다. 하나를 막으면, 열 개의 다른 곳에서 악성 루머가 터져 나왔다. 마치 거대한 댐의 균열을 손바닥으로 막으려는 것처럼, 역부족이었다.
그때, 강지훈 팀장에게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굳어 있었다.
[서아린 씨, 그리고 권이헌 에스퍼. 들으십시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강지훈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부와 관리국 상층부에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서아린 씨를 지목했습니다. 지금 당장 서아린 씨의 신병을 관리국으로 인도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명분은 ‘에스퍼 폭주 유발 및 사회 혼란 야기 혐의’에 대한 긴급 체포입니다.]
“뭐라고…?”
권이헌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개자식들이 지금 제정신이야? 범죄 집단의 선동에 놀아나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겠다고?”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지금 관리국 특수 체포팀이 펜트하우스로 향하고 있습니다. 10분 안에 도착할 겁니다.]
강지훈은 괴로운 듯 말을 이었다.
[이건 비공식적인 조언입니다만… 도망치십시오. 어떻게든 시간을 버세요. 제가 상층부를 설득할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하지만…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통신이 끊겼다.
펜트하우스 안에는 절망적인 정적이 흘렀다. 국가가, 그녀를 지켜줘야 할 공권력이, 그녀를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권이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릴 각오는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세상에, 그녀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마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천천히 서아린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서아린.”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나 봐. 내 눈 봐.”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도록,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이 널 버려도, 나는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네가 마녀라면, 나는 기꺼이 너만의 악마가 되어주지. 온 세상을 불태워서라도, 너 하나만은 내가 반드시 지켜낼 테니까.”
그의 말에, 서아린의 텅 비었던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바보 같아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나 하나 때문에… 당신까지 세상의 적이 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나를 넘겨줘요. 그럼 모든 게….”
“닥쳐.”
그가 그녀의 말을 거칠게 막았다.
“네가 없는 세상 따위,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어. 차라리 내가 전부 부숴버리고 말지.”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심장이 있는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쿵, 쿵, 쿵. 세차고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그녀의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들려? 이게 지금 너 때문에 뛰고 있어. 네가 없으면, 이건 그냥 멈춰버릴 거야. 그러니까 두 번 다시 그딴 소리 하지 마.”
그의 절박한 고백에, 서아린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권이헌이 그녀를 더욱 굳게 안으며 말했다. 그의 눈은 맹렬한 불꽃처럼 타오르며, 펜트하우스의 현관문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세상 전부가 나에게 사과하게 될 테니까.”
띵동-
마치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현관 벨이 울렸다. 관리국 특수 체포팀이 도착한 것이다.
권이헌은 서아린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실장.”
“네, 도련님.”
“이하나 씨와 은영이, 그리고 서아린을 데리고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 내가 시간을 벌지.”
“도련님…!”
“이건 명령이야.”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자서 국가를 상대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강의 S급 에스퍼가,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유일한 세상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명령, 거부합니다.”
권이헌의 등 뒤에서, 차갑고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권이헌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더 이상 울고 있던 서아린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낸 얼굴로, 흔들림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절망의 심연에서 빠져나온, 프로파일러 김윤아의 얼굴이었다.
“지금 뭐라고….”
권이헌이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도망치지 않겠다고요.”
서아린은 권이헌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숨고 도망치는 건 라비린토스가 원하는 그림이에요. 우리가 고립되고 무력해지기를 바라는 거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도망이 아니라, ‘역습’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권이헌과 한정훈, 이하나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키텍트… 그 자는 지금 의기양양해 있을 거예요. 완벽한 계획으로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모든 범죄자는 자신의 완벽함에 도취되는 순간,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에요.”
한때 프로파일러였던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나를 ‘마녀’라고 했어요. 에스퍼들을 폭주시키는 바이러스의 근원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마녀가 되어주겠어요. 그의 논리, 그의 프레임을 그대로 이용해서, 그의 뒤통수를 쳐주는 거죠.”
“어떻게?”
권이헌이 물었다.
“‘마녀’가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면, 그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 또한 마녀가 가지고 있겠죠.”
서아린은 연구실 모니터에 떠 있는 ‘인공 각성’ 폭주자들의 데이터를 가리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인 모를 고통 속에서 폭주하고 있어요. 각국의 정부와 관리국은 속수무책이죠. 그 어떤 힐러도, 어떤 약물도 그들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할 수 있어요. 은영이를 구했던 것처럼. 내 능력, ‘사이킥 레조넌스’만이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어요.”
그녀의 계획은 대담하고 위험했다.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 자신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사임을 증명하겠다는 것.
“미쳤어. 너무 위험해.”
권이헌이 단칼에 반대했다.
“세상 사람들이 널 가만둘 것 같아? 그들은 널 구원자로 보는 게 아니라, 더 위험한 존재로 보고 제거하려 들 거야!”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서아린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당신이 나를 지켜주면 돼요. 세상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절대적인 방패’가 되어주세요. 내가 내 능력을 증명하는 동안, 그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당신이라면 할 수 있잖아요?”
그녀의 말은 그의 자존심과,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힘을 믿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있었다.
권이헌은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너란 여자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좋아. 까짓 거, 해주지. 네가 마녀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네 옆을 지키는 유일한 흑기사가 되어주겠어. 감히 누가 너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놈의 왕국을 통째로 잿더미로 만들어주지.”
그는 현관문을 향해 턱짓했다.
“강지훈에게 전해. 마녀가, 직접 관리국으로 행차하시겠다고.”
이것은 라비린토스가 설계한 판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