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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터치 일러스트

퍼스트 터치

그녀는 방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

현장 감식 하듯, 작은 단서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

낡은 책상 서랍 안에서는 먼지 쌓인 통장과 신분증이 나왔다.

​

통장 잔고는 처참했다. 13,250원.

​

한숨이 절로 나왔다.

​

신분증 속 서아린의 사진은 지금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

침대 밑에서는 낡은 스마트폰이 발견되었다.

​

액정 구석은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지만, 다행히 전원은 켜졌다.

​

그녀는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날짜를 확인했다.

​

‘…!’

​

날짜를 확인한 서아린의 눈이 커졌다.

​

아직 웹소설 <멸망 세계의 그림자 군주>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기 6개월 전이었다.

​

S급 주인공이 각성하고, 세상에 게이트가 터지기 시작하는 그 시점보다 훨씬 이전.

​

아직은 평화로운 시대라는 뜻이다.

​

이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

적어도 당장 괴물에게 뜯어 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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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곧바로 웹소설의 내용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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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중반에 하차했지만, 초반부의 내용은 꽤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신상, 주요 조연들의 특징,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만한 결정적인 사건들.

​

“정보가 무기다.”

​

이 세계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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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생존 확률은 극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미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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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르륵-.

​

뱃속에서 처량한 소리가 울렸다.

​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먹은 게 언제인지, 서아린의 기억 속에는 희미했다.

​

어제저녁이었나, 그제였나.

​

극심한 허기가 몰려오자 어지럼증이 더욱 심해졌다.

​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군.”

​

생존의 제2원칙: 최적의 판단을 위해 최상의 신체 컨디션을 유지한다.

​

지금 그녀에게는 뭐라도 위에 집어넣는 것이 급선무였다.

​

서아린은 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찾아냈다. 전 재산을 긁어모아도 5천 원이 채 되지 않았다.

​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편의점 삼각김밥 두어 개와 컵라면 하나.

​

그게 최선이었다.

​

그녀는 낡은 후드 집업을 걸치고 마스크를 썼다.

​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었다.

​

끼익-.

​

오랫동안 열지 않은 듯, 현관문이 녹슨 비명을 질렀다.

​

문을 열자, 반지하 특유의 눅눅하고 서늘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계단을 오르자 비로소 바깥세상이 보였다.

​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골목길.

​

그리고 문을 나서는 순간, 서아린은 숨을 헙, 들이마셨다.

​

‘이게… 이런 느낌이었나.’

​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

단순한 소음이라고 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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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골목길 너머 대로변에서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의 찌꺼기들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그녀의 정신을 찔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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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기 싫다는 직장인의 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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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아이의 울음소리에 시달린 젊은 부부의 피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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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취에 절어 비틀거리는 대학생의 자기혐오.

​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필터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

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

이래서 서아린이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구나.

​

이건… 맨몸으로 방사능에 노출된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주머니 속의 얄팍한 지폐를 꽉 쥐었다.

​

‘버텨야 해.’

​

여기서 무너지면, 방구석에서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

결국 결말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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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일러 김윤아는 수많은 범죄 현장의 참상을 맨정신으로 버텨냈다.

​

피와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도,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건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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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까짓 감정의 소음 따위에 무너질 수 없다.

​

서아린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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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고쳐 썼다. 마치 격전지로 향하는 군인처럼.

​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생존을 향해,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소설속에서의 첫걸음을 시도했다.

​

편의점까지는 고작 50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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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 거리는 지뢰밭을 건너는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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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거대한 감정의 쓰레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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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끈적한 거미줄처럼 온몸에 달라붙었다.

​

마치 스펀지가 더러운 물을 빨아들이듯, 서아린의 몸은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흡수했다.

​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왔고, 속은 메스꺼웠으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

이것이 서아린이 느끼는 세상이었다.

​

프로파일러 김윤아로서 타인의 감정을 분석하고 이해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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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공감’이 아니라 ‘오염’이었다.

​

‘젠장, 겨우 50미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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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

서아린은 주변 환경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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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골목, 쓰레기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은 지저분한 길가, 담벼락 구석에 그려진 조잡한 그래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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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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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로파일러의 눈으로 본 세상은 조금 달랐다.

​

CCTV 사각지대가 유난히 많은 골목 구조,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집과 꺼져 있는 집의 비율,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유형.

​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유의미한 데이터였다. 직업병은 몸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

영겁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그녀의 눈앞에 24시간 편의점의 환한 불빛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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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빛, 생명의 빛이었다. 서아린은 거의 기다시피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

딸랑-.

​

자동문이 열리며 익숙한 환영 인사가 흘러나왔다.

​

편의점 안은 바깥세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쾌적했다. 감정의 소음이 현저히 줄어든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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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아르바이트생은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무관심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

서아린은 곧장 라면 코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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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한의 열량을 낼 수 있는, 가장 싸고 자극적인 음식이었다.

​

그녀는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 두 개를 집어 들었다. 고민 끝에 작은 생수 한 병도 추가했다.

​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니, 아슬아슬하게 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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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0원입니다.”

​

아르바이트생은 기계적으로 말했다.

​

서아린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을 꺼내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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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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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대답하고, 그녀는 서둘러 물건들을 품에 안았다.

​

이 평화로운 공간에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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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옥 같은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

편의점 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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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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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아르바이트생인가? 아니,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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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 편의점 안에는 분명 자신과 아르바이트생 둘뿐이었는데.

​

서아린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그리고 그녀는 숨을 멈췄다.

​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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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의 환한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서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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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에 가까운 큰 키, 넓은 어깨, 흐트러짐 없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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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검은색 코트 위로 새벽의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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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아린을 압도한 것은 그의 외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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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폭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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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골목길에서 느꼈던 찌꺼기 같은 감정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

이것은 폭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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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분노,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 세상을 향한 날 선 경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는 얼음 같은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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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활화산의 분화구 바로 앞에 서 있는 듯한 끔찍한 압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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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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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코피를 쏟으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

남자가 천천히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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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서아린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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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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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턱선, 오뚝한 콧날, 그리고 모든 감정이 거세된 듯 차갑게 가라앉은 짙은 눈동자.

​

웹소설 <멸망 세계의 그림자 군주>의 삽화를 찢고 나온 것만 같은 모습.

​

‘…권이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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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남자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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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확히는 초반부의 메인 빌런이자, 나중에 각성하여 주인공이 되는 S급 에스퍼.

​

서아린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

‘왜 이 남자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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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려면 아직 6개월이나 남았다. 그가 이 허름한 동네에 나타날 이유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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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

권이헌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온도가 제거된 것처럼 차가웠다.

​

그는 서아린을 꿰뚫어 볼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

“방금 그거, 뭐였지?”

“……네?”

“내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리던 소음이, 네가 스쳐 지나간 순간 사라졌어. 어떻게 한 거지?”

​

그의 말에 서아린은 깨달았다.

​

아까 편의점에 들어오면서,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와 어깨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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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능력 ‘세레니티 터치’가 저도 모르게 발동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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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능력이 권이헌의 ‘감정 과부하’를 일시적으로 잠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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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엮여선 안 될 인물과 최악의 타이밍에 엮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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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린의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미친 듯이 울렸다.

​

지금의 권이헌은 영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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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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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것을 위협으로 간주하는 위험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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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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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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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린은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평범하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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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고, 품에 안은 컵라면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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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냥 지나가는 F급 엑스트라 1로 여겨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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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권이헌은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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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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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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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차가운 손이 뻗어 와, 그녀의 후드 모자를 벗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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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서아린의 창백한 얼굴과 겁에 질린 눈동자가 형광등 불빛 아래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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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봐.”

“…뭘 말입니까?”

“아까 그거. 다시 한번 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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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의 힘이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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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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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한 줄기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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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대로 그것을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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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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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배가 고파서 라면 사러 온 것뿐이에요. 비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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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를 지나쳐 문으로 향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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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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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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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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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안에 있던 감정의 폭풍이 쓰나미처럼 그녀에게로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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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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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의 마나가 희미하게 흘러나와 그의 손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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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니티 터치’가 강제로 발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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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이헌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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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살벌한 기운이 순식간에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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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고, 수십 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고요함과 평온이 그의 정신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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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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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리고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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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린은 공포에 질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망했다.

​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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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속 최강의 빌런이자 미래의 영웅에게, 자신의 능력을 들켜버렸다.

​

그리고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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