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사라진 장례

이름 비교판 아래 벌어진 틈은 사람 하나가 몸을 비틀어 겨우 빠져나갈 만큼만 열려 있었다.

브론이 먼저 아래를 보고, 내가 돌받침을 한 번 더 눌러 보고, 미리엘이 젖은 천을 판 끝에 끼워 미끄럼을 막았다. 세라는 아직도 위 협로 입구를 막은 채였다. 검집 끝은 돌바닥에 박혀 있었고, 오른쪽 어깨는 바깥을 향했으며, 왼손은 언제든 칼집을 더 밀어 넣을 수 있게 고정돼 있었다. 바깥에서 왕국 사절이 한 번 더 고함쳤지만 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발뒤꿈치를 반 치 더 눌렀다. 그 짧은 움직임으로 길목이 더 좁아졌다.

나는 틈 아래로 먼저 손을 넣었다. 차가운 바람이 손등을 스쳤다. 막장처럼 죽은 공기가 아니었다. 오래 닫혀 있었지만 아직 숨이 남은 통로에서만 올라오는 바람이었다.

“아래가 비었어.”

브론이 내 말 끝을 바로 이었다.

“비기만 한 게 아니야. 안쪽 받침 폭이 넓어. 사람이 딛는 발판보다 짐을 밀어 넣는 받침에 가깝다.”

미리엘이 젖은 손가락으로 틈 가장자리를 짚었다. 돌벽에 엉겨 붙은 실오라기가 그녀 손톱 끝에 겨우 걸렸다. 흙먼지보다 오래 젖은 천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피 냄새가 아니에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장례천이에요. 오래 접혔다가 다시 젖은 냄새.”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틈 아래는 처형장보다 장례 물품을 감춰 둔 곳에 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배신자 하나를 세워 목을 자르던 자리라면 이런 냄새가 날 리 없었다. 여긴 죽인 뒤 버린 곳이 아니라, 이름을 바로 드러내지 못한 채 접어 숨긴 것들을 오래 붙들고 있던 자리였다.

브론이 판을 조금 더 올렸다. 돌이 낮게 갈리며 틈이 한 뼘 반쯤 벌어졌다. 그 정도면 몸을 낮춘 채 계단턱 하나를 밟고 내려갈 수 있었다.

아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대신 길었다. 좌우 벽에는 가슴 높이까지 위패 홈이 줄지어 있었고, 바닥엔 작은 관이나 위패함을 밀어 넣을 때 생기는 얕은 홈이 같은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홈 폭은 사람 허리보다 좁았고, 받침 간격은 몸을 묶어 세워 두는 칸보다 훨씬 촘촘했다. 누군가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러 이름을 눕혀 두고 한 줄씩 다시 꺼내게 만든 자리였다.

계단턱 아래 첫 칸은 더 차가웠다. 물은 발목까지 차오르지 않았지만 돌바닥 전체를 미끈하게 적셔 놓고 있었다. 왼쪽 벽 밑에는 오래 젖은 목편 부스러기가 얇게 쌓여 있었고, 오른쪽 벽 아래에는 한 번 눕혀 둔 위패함을 다시 빼낼 때 긁힌 듯한 반달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천장 가까이엔 검게 썩은 뿌리가 길게 늘어졌지만, 뿌리 끝마다 맺힌 물방울은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었다. 누군가 이 안을 자주 드나들던 시절에는 물길까지 손봤을 것이다. 무덤처럼 닫아 둔 자리가 아니라, 오래 감추면서도 완전히 버리진 못한 길이었다.

나는 계단에서 두 칸 더 내려간 자리에 무릎을 세우고 숨을 골랐다. 브론은 왼쪽 벽을 따라 손을 옮기며 받침 높이를 쟀고, 미리엘은 오른쪽 벽 아래 깔린 천 조각과 목편 부스러기를 한 군데씩 걷어 냈다. 리에트는 바로 내려서지 않고 계단 중간에서 위아래를 함께 봤다. 위 협로에서 내려오는 빛, 세라가 막고 있는 갈림칸 각도, 아래 물길이 더 깊은 안쪽으로 어떻게 꺾이는지까지 한눈에 넣으려는 자세였다.

“발을 끌고 간 자국도 있어.”

브론이 바닥을 두드렸다.

“위패만 세웠으면 앞쪽만 닳아야 하는데, 여기엔 뒤꿈치가 버틴 흔적이 남아. 읽는 사람, 세우는 사람, 옆에서 받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야.”

미리엘도 한쪽 위패 홈을 만졌다. 홈 안쪽은 거칠고, 바로 아래 덧댄 부분만 이상하게 매끈했다.

“윗결이 먼저예요.”

“또 덧댄 거냐.”

브론이 묻자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 안쪽에서 쓰던 이름 결을 먼저 넣고, 나중에 바깥 번호 체계를 억지로 얹은 거예요. 위는 이름을 접어 숨기는 자리이고, 아래는 남들이 숫자부터 읽게 만드는 자리예요.”

나는 왼쪽 두 번째 위패 홈 앞에 멈췄다. 젖은 장례천 조각 하나가 받침 아래 눌려 있었다. 그걸 살짝 들어 올리자 목패 하나가 비스듬히 기운 채 걸려 있었다. 목패 앞면은 거의 비어 있었지만, 뒷면 끝에는 엘프식 이름 결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는 인간식 끝번호가 차갑게 눌려 있었다. 이름을 다 지운 뒤 번호만 새로 붙인 자국이었다.

“같은 짓이야.”

내 말에 리에트가 아주 천천히 가까이 왔다. 아직 손끝은 떨리고 있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뭐가.”

“첫 던전에서 본 거랑.”

나는 목패 밑면과 위패 홈 간격을 차례로 짚었다.

“열세 번째 줄을 비우고, 이름 대신 줄과 칸만 남기고, 나중에 다른 체계로 다시 넘기는 방식.”

브론이 옆에서 받았다.

“장례 줄을 바깥 행정 줄로 바꿔 세웠다는 거군.”

미리엘이 젖은 홈 안쪽을 더 들여다봤다.

“환자 장부에서도 같은 방식이었어요. 이름은 안쪽 칸에 접고, 밖으로 나갈 때는 번호와 처리 순서만 남겨요.”

숲에서 지워진 이름과 성도에서 번호로만 남는 환자 줄.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명분인데 손놀림은 닮아 있었다. 이름보다 줄을 먼저 세우고, 애도보다 처리 순서를 먼저 남기는 손.

미리엘은 위패 홈 아래 손가락 두 개를 넣어 작은 틈을 더듬었다. 그러자 얇은 나무 조각 하나가 안쪽에서 밀려 나왔다. 젖은 표찰 조각이었다. 앞면 글씨는 거의 지워졌지만 뒷면에는 같은 끝번호를 두 번 고쳐 적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 적힌 숫자는 짧고 둥글었고, 나중에 덧쓴 숫자는 더 곧고 차가웠다. 나는 그 필압 차이를 보는 순간, 이름을 지운 손과 번호를 박은 손이 한 번에 겹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는 숨기기 위해 접었고, 다른 누군가는 나중에 와서 정리한다는 얼굴로 그 위에 숫자를 눌렀다.

브론은 표찰 조각을 받아 손톱으로 가장자리를 긁었다.

“이거 한 번에 잘린 게 아니다. 바깥쪽 겉칠을 먼저 벗기고, 나중에 얇게 다시 발라 붙였어. 급하게 한 짓이 아니야. 한 줄을 오래 관리하면서, 볼 때마다 조금씩 바꿨다는 뜻이지.”

미리엘이 곧장 말을 이었다.

“성도 하층 장부도 그랬어요. 이름을 바로 없애지 않고 안쪽 칸에 먼저 접어 둬요. 대신 바깥에선 끝번호와 처리 이유만 남겨요. 시간이 지나면 사람 얼굴이 아니라 숫자 순서부터 읽히게 되죠.”

나는 세운 목패 둘과 아직 눕혀진 위패들을 번갈아 봤다. 누군가는 장례를 완전히 묻지 못했고, 누군가는 그 미련까지 실무 칸 안에 가둬 두려 했다. 그래서 여기 남은 건 단순한 비극 흔적이 아니라, 애도와 삭제가 같은 자리에서 오래 씨름한 자국이었다.

리에트는 목패를 곧바로 잡지 못했다. 대신 목패 아래 받침을 오래 봤다. 자기 과거와 지금 눈앞 물증이 너무 빨리 같은 줄 위에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그녀가 겨우 말했다.

“여긴 배신자를 남긴 자리가 아니라는 거네.”

“배신자 하나로 끝낼 수 없는 자리지.”

나는 목패를 조심스럽게 바로 세웠다.

목패 아래 숨은 받침이 맞물리며 돌 안쪽에서 얇은 울림이 났다. 곧바로 옆 위패 홈도 아주 약하게 떨렸다. 브론이 그 소리를 듣고 허리를 더 낮췄다.

“구조가 이어져.”

그는 바로 옆 기운 목패도 세웠다. 그러자 두 목패 밑면 아래 서로 다른 홈 셋이 동시에 드러났다. 맨 위는 이름을 꽂는 자리, 가운데는 넘겨진 순서를 적는 좁은 홈, 맨 아래는 묻힌 칸을 표시하는 더 가는 홈. 이름 하나를 기리는 장치가 아니었다. 이곳은 이름과 인계와 보관을 따로 적게 만든 차가운 현장이었다.

두 번째 목패가 바로 서자, 물이 고인 바닥 아래서 아주 작은 기포가 한 줄로 올라왔다. 브론은 곧장 몸을 틀어 그 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기포는 우연히 새는 틈이 아니라, 바닥 아래 빈 관로를 따라 같은 간격으로 솟고 있었다. 회랑 전체가 한 줄로 이어져 있고, 어딘가 더 안쪽에서 아직 숨 쉬는 장치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단순 보관칸이 아니야.”

브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세운 위패 수, 밟는 자리, 아래 빈 선이 같이 맞물려. 누가 장례를 읽을 자격이 있는지까지 장치가 가늠하고 있었어.”

나는 바닥 얕은 홈 위에 손바닥을 댔다. 물이 식어 있는 부분과 미세하게 따뜻한 부분이 나뉘어 있었다. 따뜻한 쪽은 우리가 세운 위패들 쪽으로 조금씩 이어졌다. 바깥에서 억지로 파 들어온 게 아니라, 원래부터 세워질 순서를 기다리던 장치 같았다. 장례를 감춘 쪽도, 언젠가 누군가 다시 읽을 가능성까지 아예 버리진 못했던 셈이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장례를 남기긴 했는데… 바로 읽히지 않게 접어 놓은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번호를 덮었지.”

브론이 받침턱 아래 얇은 금속심을 손톱으로 튕겼다.

“한 번 세워 둔 걸 그대로 둔 적도 없어. 자꾸 눕히고, 빼고, 다시 넣었어. 누가 와서 뭘 보고 갔는지 따라 줄을 바꿔 왔다는 뜻이야.”

나는 세운 위패 둘과 아직 눕혀진 위패들을 차례로 훑었다. 어느 쪽은 이름 결이 먼저 잘렸고, 어느 쪽은 번호가 먼저 눌렸다. 서둘러 덮은 줄, 나중에 다시 파낸 줄, 절반만 지우고 손을 뗀 줄. 여기 남은 건 깔끔한 진실 하나가 아니었다. 애도를 끝까지 지우지 못한 손과, 그래도 줄과 칸으로 다시 눌러 담으려 한 손이 겹친 흔적이었다.

위쪽 협로에서 다시 고함이 내려왔다.

“판을 닫아라! 그 아래는 숲 기록을 더럽히는 잔향이다!”

이번엔 엘프 강경파 목소리가 먼저였다.

“배신자 줄을 다시 열면 숲 전체가 갈라진다!”

왕국 사절도 곧바로 겹쳤다.

“그 위패와 목패는 입회 아래 대조하면 충분하다! 외부 증언 하나로 기록 전체를 흔들 순 없다!”

세라는 한 번도 이쪽을 보지 않은 채 검집을 더 깊게 눌렀다. 돌과 금속이 맞물리는 마찰음이 갈림칸 전체를 짧게 울렸다.

그녀가 길목을 막는 방식은 말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오른발은 위 협로 쪽으로, 왼발은 회랑 쪽으로 틀어 두고 있어서 누가 내려오든 먼저 검집 옆면에 몸을 부딪치게 돼 있었다. 칼을 뽑지 않았는데도 그 자리는 이미 싸움이 일어난 뒤처럼 좁아졌다. 왕국 사절이 더 내려오려면 세라 어깨를 밀고 지나가야 했고, 엘프 강경파가 억지로 발을 들이밀려면 물에 젖은 돌턱 위에서 먼저 균형을 잃어야 했다. 세라는 그 계산을 몸 하나로 끝내 놓고 있었다.

나는 그 등을 보며 짧게 숨을 골랐다. 북방에서 그녀가 문장을 늦췄던 일은 아직 우리 사이에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세라가 막고 있는 건 내 변명도, 벨로네 이름값도 아니었다. 누군가 장례를 다시 한 조각만 떼어 가는 순간을 막는 문턱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고, 나도 굳이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손에 닿은 위패를 더 깊이 눌렀다. 세라가 시간을 버는 동안,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물증 하나로 바꿔야 했다.

“그래서 하나만 들고 가고 싶겠지.”

짧은 말이었지만 바깥 소리가 잠깐 끊겼다. 세라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자기 몸과 금속 각도로 이미 충분히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하나만 빼 가면 또 같은 식으로 잘린다는 걸.

나는 위패 하나를 다시 눕히려는 손을 막듯 손바닥을 올려 두었다.

“하나만 가져가면 또 배신자 하나로 끝난다.”

브론이 곧장 옆에 섰다.

“이 위패는 이름 자리이고.”

미리엘이 아래 끝번호를 가리켰다.

“이 번호는 처리 순서예요.”

나는 바닥 얕은 홈을 짚었다.

“그리고 이건 넘겨진 순서지. 셋을 떼면 사건도 찢겨.”

위쪽에서 왕국 사절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기사는 질서를 지켜야 한다! 지금 네가 막는 건 숲과 왕국 모두를 위한 봉함이다!”

세라는 그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봉함이면 왜 이름부터 잘라.”

이번엔 그녀 목소리가 더 낮았다. 그러나 검집 끝이 돌에 박힌 힘은 더 셌다.

그 한 문장으로 바깥 논리가 비뚤어졌다. 잠깐 생긴 침묵 사이, 리에트가 드디어 세운 위패들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왔다.

그녀는 비어 있는 깊은 홈 하나를 오래 봤다. 남들보다 조금 더 깊고, 끝번호도 아직 닿지 않은 자리였다. 자기 옛 대장 표식과 로웬 우회 기호가 함께 남은 홈이 그 옆에 있었다.

“나는…”

그녀가 말을 꺼냈다가 잠깐 멈췄다.

예전 같으면 여기서 다시 자기 수치에 붙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치켜드는 대신 위패 홈과 표식과 물증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끝까지 배신이라고 믿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메말랐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믿어야 살아 돌아온 내가 덜 비겁해 보였으니까.”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위로나 반박도 없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해설이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어느 자리로 옮겨 서는지를 보는 일이었으니까.

리에트는 비어 있는 깊은 홈 앞에 섰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 손이 위패 가장자리에 닿았다.

“누가 남아 시간을 벌었는지, 누가 먼저 넘겨졌는지, 누가 늦게 같은 줄에 붙었는지… 내가 다시 말해야 해.”

미리엘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증언하겠다는 거네요.”

“그래.”

리에트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도망친 장면부터가 아니라, 장례가 끊긴 자리부터.”

그녀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계단 쪽을 한 번, 세라가 막고 있는 갈림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리에트 목소리는 오히려 회랑을 더 또렷하게 갈랐다. 누가 먼저 넘어졌는지가 아니라 누가 어떤 자리에 남아 있었는지부터 다시 말하겠다는 선언. 그 말을 듣고 나자 회랑 안 물건 배치도 다르게 보였다. 눕혀진 위패들은 버려진 물건이 아니라 아직 읽지 못한 증언 자리였고, 빈 깊은 홈은 없는 자리가 아니라 가장 늦게까지 비워 둔 발언 자리 같았다.

리에트는 활을 등 뒤로 완전히 넘기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는 여전히 시위 가까이에 걸려 있었다. 겁이 남아서가 아니라, 자기가 선 홈을 빼앗으려는 손이 오면 가장 먼저 막겠다는 자세였다. 그녀가 증언하겠다고 말한 순간에도 회랑은 안전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은 더 분명해졌다. 바깥 두 세력은 배신자라는 말을 빼앗기면 자기들이 고쳐 쓴 번호와 봉함 문구까지 함께 흔들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에트가 한 걸음 선 자리야말로 다음 화살과 다음 명령이 동시에 겨눌 자리였다.

미리엘은 곧장 위패 아래 부호를 눈으로 세기 시작했다. 브론은 바닥 홈과 깊은 홈 사이 거리를 재고, 나는 세워 둔 위패들이 어느 순서에서 반응하는지 기억해 두었다. 리에트가 말하겠다고 정한 순간부터 이 회랑은 단순 발견 현장이 아니었다. 읽는 순서를 틀리면 다시 누군가를 덮게 되는 자리였다. 말보다 먼저 손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도 더 분명해졌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비어 있는 깊은 홈 아래서 아주 약한 진동이 올라왔다. 목패를 세운 줄과, 리에트가 선 자리와, 갈림칸을 막고 있는 세라의 검집 끝이 같은 박자로 한 번 울렸다.

브론이 바로 바닥을 짚었다.

“의식 자리다.”

“뭐?”

“장례 물품을 감춰 둔 곳이기만 한 게 아니야.”

그는 비어 있는 깊은 홈 둘레의 둥근 긁힘 자국을 가리켰다.

“여기 봐. 위패를 세우고 끝내는 자리가 아니야. 누군가 앞에 서고, 누군가 읽고, 누군가 버티는 순서를 맞춰야 하는 자리다. 추도식 같은 거였어.”

미리엘도 바로 이해했다. 그녀는 홈 아래 끝번호와 장례천 조각, 돌벽 안쪽 작은 숨구멍 셋을 번갈아 봤다.

“이름을 바로 읽으면 방어가 흔들릴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접어 숨긴 거예요. 순서를 잃지 않으면서도, 아무나 함부로 읽지 못하게.”

나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곧장 붙들었다. 이 회랑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었다. 이름을 감추면서도 버리지 않기 위한 장치, 장례를 접어 숨기면서도 끝내 복원할 가능성까지 남겨 둔 자리였다. 그러니 다음에 해야 할 일도 뚜렷했다. 위패 몇 개를 들고 도망치는 게 아니다. 장례 순서와 이름의 자리를 여기서 먼저 읽고 바로 세워야 한다.

“밖으로 당장 들고 나가면 또 잘린다.”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줄 모양부터 잃어.”

미리엘도 받았다.

“끝번호가 먼저 살아남을 거예요.”

리에트는 비어 있는 깊은 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도 이름보다 판정문이 먼저 남겠지.”

그 순간 회랑 맨 안쪽 검은 물막이 아주 얇게 갈라졌다.

반쯤 잠긴 마지막 거울실 입구였다. 양옆에는 이름 홈이 아니라 둥근 추도 홈이 있었고, 중앙 거울면은 아직 검게 닫혀 있었다. 검은 뿌리 사이 어둠에서 이솔데의 실루엣이 다시 어른거렸다. 그녀는 이번에도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세운 위패들과 비어 있는 깊은 홈을 차례로 본 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장례를 본 자들이 문턱 앞에 섰구나.”

세라가 갈림칸을 막은 채 물었다.

“저 안쪽엔 뭐가 있지.”

이솔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젖은 손끝으로 둥근 추도 홈 하나를 눌렀다. 홈 가장자리에 물빛이 가늘게 켜졌다.

“이름을 읽는 자리.”

미리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추도식?”

“금지된 추도식.”

이솔데가 말했다.

“배신자의 이름을 찾는 자는 다시 하나만 골라 죄를 덮는다. 장례 순서를 바로 세우고, 지워진 이름을 감당할 자만 안으로 들어간다.”

브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위패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거군.”

“이름을 읽어야 해.”

미리엘이 거울실 문턱의 둥근 홈과 회랑 쪽 끝번호 배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제대로 읽으면… 숲 장례 줄이랑 성도 환자 줄이 같은 체계로 어떻게 묶였는지도 더 분명해질 거예요.”

나는 마지막 거울실 입구를 봤다. 검은 물막은 아직 닫혀 있었지만, 둥근 추도 홈 하나가 조용히 살아 있었다. 위패를 세우고, 줄을 맞추고, 누가 무엇을 먼저 지웠는지까지 따라온 사람만 건널 수 있는 문턱처럼 보였다.

거울실 앞 바닥은 회랑 쪽과 미묘하게 달랐다. 장례 회랑은 물이 낮게 번져 있었지만, 여기 물은 둥근 홈 가장자리에서만 얇게 고였다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추도 홈 둘레 돌결도 바깥 위패 홈보다 훨씬 닳아 있었다. 오래전에 누군가 여러 번 무릎을 꿇고, 손을 얹고, 이름을 읽거나 멈췄던 자리였다. 미리엘은 홈 둘레를 훑고는 이 구조가 성도 장부의 분류열과 반대로 맞물린다고 속삭였다. 바깥에서는 번호를 먼저 읽게 만들지만, 여기서는 이름을 제대로 붙들지 못하면 다음 칸으로 못 넘어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브론도 곧장 문턱 아래 돌틈을 눌렀다. “받침이 셋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둥근 홈, 세워 둔 위패 줄, 깊은 홈 쪽을 번갈아 가리켰다. “누가 읽고, 누가 버티고, 누가 뒤를 막는지까지 같이 맞아야 문턱이 움직여.” 세라는 그 말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검집 끝이 아주 조금 더 파고들었다. 길목을 붙드는 일 역시 이 의식의 한 칸으로 이미 들어가 있다는 걸 그녀도 알아챈 것이다.

바깥에서 다시 발소리가 밀려왔다. 왕국 사절도, 엘프 강경파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안쪽 줄이 자기 손을 벗어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듣고도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검집 끝은 여전히 바닥에 박혀 있었고, 한쪽 어깨는 좁은 길목 전체를 막고 있었다.

나는 회랑 쪽을 돌아봤다. 세워 둔 위패 셋, 눕혀진 위패들, 번호가 덧댄 흔적, 비어 있는 깊은 홈, 그리고 그 앞에 선 리에트. 여기까지 와서야 우리가 찾는 게 배신자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 완전히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은 감정보다 먼저 실무 순서를 바꿨다. 미리엘은 젖은 천 조각을 펼쳐 위패 셋 밑의 부호를 순서대로 베껴 적기 시작했다. 위쪽 줄엔 이름 결이 남은 방향을, 가운데 줄엔 덧댄 번호 순서를, 아래 줄엔 바닥 홈이 어느 위패함과 이어지는지를 나눠 적었다. 브론은 세워 둔 위패 받침이 다시 기울지 않도록 얇은 목편을 접어 받쳐 넣고, 어느 돌턱이 가장 먼저 무너질지 손끝으로 확인했다. 나는 두 사람이 적고 받치는 동안 계단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선을 다시 짧게 재며, 나중에 추도식을 열 때 누가 어느 자리에 서야 같은 반응이 나는지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리에트는 빈 깊은 홈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세라는 아직 바깥 길목을 막고 있었다. 누가 읽고, 누가 버티고, 누가 기록하고, 누가 시간을 버는지 회랑 자체가 우리 역할을 먼저 정리해 주는 것 같았다.

위쪽에서는 조급한 움직임이 더 늘어났다. 금속 장식이 부딪히는 얇은 소리, 젖은 돌턱을 헛디딘 발소리, 더 아래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는 숨이 들렸다. 왕국 사절은 위패를 증거물이라고 부르고, 엘프 강경파는 봉해야 할 수치라고 불렀다. 하지만 둘 다 이 안의 줄을 통째로 보려 하지 않았다. 이름을 읽으면 자기들이 붙들고 있던 설명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보다 먼저 목패 하나, 번호 하나, 문장 하나를 떼어 가고 싶어 했다. 나는 그 조급함을 들으며 오히려 확신했다. 이 장례 회랑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누군가 끝까지 애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반대로 누군가 끝까지 조각만 떼어 가며 진실을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히 슬퍼하는 것도, 분노만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줄을 다시 묶고, 칸을 다시 맞추고, 누가 어떤 순서로 지웠는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읽어 내는 일이었다.

누가 먼저 도망쳤는지가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먼저 넘겼는지, 누가 남아 시간을 벌었는지, 누가 장례를 접어 숨겼는지, 그리고 누가 나중에 이름을 잘라 번호만 남겼는지. 그 선택 전체를 끝까지 봐야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첫 던전 반원실, 성도 하층 장부칸, 북방 전초 기록칸에서 봤던 줄들이 한 자리에서 다시 이어지는 걸 느꼈다. 이름을 안쪽에 접고, 바깥엔 번호를 세우고, 나중에는 영웅담 하나만 남기는 방식. 장소도 세력도 달랐는데 실무는 같았다. 그래서 이 회랑 앞에서는 누구 한 사람의 배신을 가려내는 일보다, 그 같은 손버릇을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곳에서 줄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바깥으로 나가서도 또 누군가가 한 칸만 떼어 자기 편한 설명으로 바꿔 버릴 것이다.

“우리가 들어갈 자리는 정해졌어.”

나는 둥근 추도 홈을 가리켰다.

“배신자 색출은 끝났다. 이제 장례 순서를 다시 세우고, 지워진 이름을 읽는다.”

리에트가 처음으로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할 건 말할게.”

미리엘은 세운 위패 아래 부호와 끝번호를 다시 적어 접었다.

“읽는 순서를 틀리면 또 누군가를 덮게 돼요. 제가 줄을 맞출게요.”

브론은 기운 위패 하나를 더 바로 세우며 말했다.

“받침은 내가 잡지. 무너지게 두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

세라는 짧게만 말했다.

“길목은 내가 붙들어.”

그 네 마디면 충분했다. 긴 맹세도 감상도 필요 없었다. 각자 맡을 자리가 이미 정해졌으니까. 세라는 바깥 손을 막고, 브론은 받침을 고정하고, 미리엘은 읽는 순서를 붙들고, 리에트는 증언을 감당하고, 나는 그 자리들이 다시 잘리지 않게 다음 칸으로 잇는다. 그 역할 분담이 장례 회랑 안에서 처음으로 또렷한 문장처럼 굳었다.

이솔데는 검은 뿌리 사이로 조금 더 물러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배신자의 이름을 묻지 마라.”

그녀의 젖은 시선이 세운 위패들과 리에트의 그림자, 그리고 둥근 추도 홈을 차례로 훑었다.

“삭제자의 선택을 보아라.”

그 말 뒤, 닫혀 있던 거울면 한가운데 가는 물빛 선이 길게 켜졌다.

다음 문은 이미 열리고 있었다.

검은 거울실 안쪽에서.

금지된 추도식이 기다리는 자리였다. 이름을 덮은 손과 이름을 남긴 손을 같은 빛 아래 다시 세워야 하는 자리였다. 잘린 줄과 남은 줄을 끝까지 함께 읽어야 하는 자리였다. 그래야 다음 이름이 살아남는다. 거짓 없이. 이번에는 끝까지. 반드시.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