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줄 이름과 뒷줄 손
새벽 야영지는 불빛보다 흙자국이 먼저 깨어났다.
가운데 화덕은 젖은 재를 덮은 채 낮게 식어 있었고, 수레 여섯 대는 그 둘레를 찌그러진 원처럼 감싸고 섰다. 동쪽에는 말 두 필이 안쪽을 향해 묶여 있었고, 남쪽 길목에는 졸린 보초 하나가 창끝을 땅에 세운 채 발만 굴렀다. 북서쪽 흙턱 위에는 무너진 감시초소가 걸려 있었다. 지붕 절반은 내려앉았고 기둥 둘만 검게 남았지만, 저기 서면 화덕과 수레 사이의 간격, 보초가 도는 방향, 내가 잠든 자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담요를 걷자마자 그쪽을 봤다. 어젯밤 내가 세워 둔 풀대는 원래보다 더 낮게 꺾여 있었다. 누군가 새로 밟은 건 아니다. 바람이 눌렀다면 풀대 끝이 한쪽으로만 쓸렸을 텐데, 지금은 중간이 다시 접혔다. 밤사이 누군가 돌아와 가까이 확인했거나, 적어도 초소 위에서 우리가 남긴 작은 표시까지 내려다봤다는 뜻이었다.
발자국은 야영지 안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바깥 원을 훑고, 무너진 초소 턱에서 오래 머문 뒤, 북서쪽 사면으로 빠졌다. 짐을 훔치려는 자국이 아니었다. 어느 수레가 어디에 섰는지, 누가 불가에 남고 누가 가장자리로 빠지는지 잰 흔적이었다.
오른쪽 수레 그림자 끝에 세라 벨로네가 서 있었다.
그녀는 검 손잡이 대신, 장갑 낀 손을 팔꿈치에 얹고 있었다. 칼을 뽑으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이미 보았지만, 아직 경고를 울리지 않기로 한 사람의 자세였다. 새벽빛이 그녀 옆얼굴 절반만 긁고 지나갔다.
“역시 그쪽부터 보네.”
“발자국보다 자리가 먼저니까.”
세라는 초소를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리를 곧장 고른 사람이 더 문제야.”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 온 사람이 야영지를 가장 잘 내려다보는 높이를 망설임 없이 고를 리 없다. 누군가는 우리 대열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공식 길보다 먼저, 우리가 어디서 멈출지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기사단 쪽이야?”
세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초소 턱과 북서쪽 사면, 다시 내 주머니 쪽을 차례로 훑었다.
“그렇게 한 이름으로 묶이면 편하겠지.”
그 말은 아니라고도, 맞다고도 들리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감시가 제일 나쁘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면 피할 곳도 고를 수 없다.
나는 주머니 속 부적을 만졌다. 금속은 차가웠다. 그런데도 손이 먼저 갔다. 어젯밤 박동이 남은 탓이다. 부적만 들여다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상한 일은 늘 손바닥 안에서 먼저 시작됐다.
세라는 그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혼자 초소로 올라갈 생각이면 접어.”
“명령이야?”
“아침부터 널 묶고 싶진 않아.”
“어제부터 충분히 묶었잖아.”
세라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 예전 같으면 차갑게 규정부터 꺼냈을 텐데, 이번에는 말을 고르느라 한 박자 늦었다. 그 작은 지연이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 감시자는 빠르게 말한다. 들킨 사람은 늦게 말한다.
야영지 안쪽에서 거친 고함이 터졌다.
“출정 준비! 보조 인원은 뒤 수레 붙어!”
기사단 조교가 후보생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선두 둘은 말머리 앞으로, 창을 든 둘은 첫 수레 양옆으로, 갑옷이 좋은 사람들은 길 앞쪽으로 이동했다. 내 이름은 어느 줄에도 또렷이 불리지 않았다. 손짓 하나가 내 자리를 대신했다. 뒤쪽 보급 수레. 끈을 잡고 상자를 받치고, 문제 생기면 사람보다 짐에 먼저 닿는 자리.
세라는 그 손짓을 보고도 바로 막지 않았다.
“일단 붙어.”
“뒤에?”
“지금은.”
지금은.
그 두 글자가 더 거슬렸다. 나중엔 다르다는 뜻처럼도 들렸고, 지금은 다툴 값어치도 없다는 뜻처럼도 들렸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뒤 수레로 갔다. 이슬 먹은 흙은 장화 밑에서 물렀다. 바퀴 홈에는 검은 진흙이 얇게 차 있었고, 수레 옆에는 접이식 방패판 두 장, 삽자루 셋, 말먹이 자루, 물통 상자, 감은 밧줄이 순서 없이 쌓였다.
자리만 보면 사람이 어떤 값으로 계산되는지 안다. 앞줄 이름들은 칼을 쥔다. 뒷줄 손들은 무너지는 걸 받친다.
하지만 뒤에 서면 앞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인다.
첫 수레 왼쪽 바퀴가 돌턱에 반쯤 걸린 채 기울어 있었다. 말은 안쪽으로 묶인 상태라 머리를 돌릴 폭이 좁고, 뒤 수레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저 상태에서 출발을 서두르면 앞수레가 한 번 삐끗하고, 뒤 수레가 밀고 들어오고, 짐줄이 사람 어깨 높이에서 먼저 터진다. 나는 삽자루의 길이와 방패판 두께를 눈으로 셌다.
사고는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왔다.
선두 쪽에서 재촉 소리가 났고, 앞수레 말이 젖은 돌턱을 피해 반 걸음 옆으로 튀었다. 왼쪽 바퀴가 그대로 꺼졌다. 수레 몸체가 비스듬히 눕자 상자 둘이 옆판을 밀고 올라왔고, 뒤 수레의 말먹이 자루가 그 상자를 받치듯 걸렸다. 말 한 필이 놀라 목을 젖혔다. 고삐를 잡고 있던 후보생 하나가 팔이 고삐에 감긴 채 끌려가며 진창에 무릎을 박았다.
“줄 끊어!”
“말부터 잡아!”
서로 다른 외침이 같은 방향으로 엉켰다. 힘을 보태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수레는 더 눕는다. 줄을 다 끊으면 무게가 반대로 쏟아지고, 말머리를 억지로 꺾으면 고삐가 후보생 팔을 더 조인다.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순서였다.
“뒤 수레 멈춰!”
내 목소리가 먼저 나갔다.
누군가 바로 소리쳤다.
“넌 빠져!”
나는 듣지 않았다. 옆에 세워 둔 접이식 방패판을 잡아 세라 쪽으로 던지듯 밀었다.
“세라! 앞축 밑에 이거 받쳐. 검 뽑지 마!”
세라가 반 박자 늦게 나를 봤다. 짜증과 망설임이 동시에 스쳤다. 그러나 수레가 한 번 더 기울자 그녀는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방패판을 낚아챘다.
나는 말 옆에 얼어붙은 후보생 둘을 가리켰다.
“눈부터 가려! 고삐 당기지 말고 천으로 눈을 덮어!”
“뭐?”
“못 알아들으면 네 팔이 먼저 빠진다!”
그 말에 후보생이 몸을 떨며 외피 안쪽 천을 찢어 냈다. 나는 삽자루 하나를 발로 차 굴렸다.
“너, 바퀴 뒤에 깊게 박아. 끝까지 넣지 말고 절반만. 받침으로 써야 해.”
다른 쪽에서는 상자를 묶은 매듭이 세 겹으로 걸려 있었다. 긴 줄을 자르면 짐이 전부 쏟아진다. 짧은 매듭 하나만 풀어야 무게가 빠진다.
“오른쪽 짐줄 짧은 것만 풀어. 칼로 다 자르지 마!”
후보생 하나가 욕을 삼키며 칼을 댔다. 나는 진흙 위로 무릎을 밀며 손가락으로 매듭 아래쪽 줄을 짚었다. 칼끝이 그제야 멈췄다. 세라는 앞바퀴 아래 방패판을 밀어 넣고 어깨로 옆판을 받쳤다. 그녀의 외피 어깨 부분이 진흙에 젖었다. 말 눈앞에는 급히 찢어 낸 천이 덮였고, 삽자루 끝이 바퀴 뒤에서 비명을 내듯 휘었다.
수레가 크게 흔들렸다.
“지금 풀어!”
짧은 매듭이 풀리자 상자 하나가 진창으로 떨어졌다. 짐 하나만큼 무게가 빠지며 기울던 쪽이 가벼워졌다. 세라가 이를 악물고 옆판을 밀었다.
“밀어!”
이번에는 모두가 그녀의 말에 맞춰 달라붙었다. 방패판, 삽자루, 세 사람의 어깨, 말이 멈춘 틈이 한순간에 맞물렸다. 앞바퀴가 진흙을 씹으며 올라왔고, 뒤 수레도 겨우 멈춰 섰다. 고삐에 팔이 감겼던 후보생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숨만 몰아쉬었다. 팔은 꺾이지 않았다. 비탈 쪽에 붙어 있던 보급조 막내도 깔리지 않았다.
잠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숨을 뱉었다. 손바닥에는 진흙과 가죽기름이 뒤섞여 있었고, 손목 보호구 안쪽 철심은 아까보다 더 휘어 있었다. 그래도 끊어지진 않았다.
세라는 방패판을 빼며 나를 봤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해가 눈에 잠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저기만 보던 이유가 이거였어?”
“길보다 끊길 자리를 먼저 봤으니까.”
뒤에서 코웃음이 났다.
“운 좋았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세라가 먼저 대답했다.
“운이었으면 다음엔 네 다리가 깔리겠지. 매듭 다시 묶어.”
차가운 말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밀어내는 차가움이 아니었다. 방금 바뀐 배치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차가움이었다. 세라는 진흙 묻은 장갑을 털며 내 옆을 스쳐 갔다.
“뒤처지지 마.”
“명령이야?”
“통보.”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덧붙였다.
“이제 널 맨뒤 보조로만 둘 수는 없다는 통보.”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더 위험한 칸으로 옮긴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나는 뒷줄 손이었다. 사고가 터지자 앞줄 이름들이 못 본 끊김을 먼저 읽은 사람이 됐다.
그 사실을 세라가 보았다.
그리고 세라가 보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보았다.
수레가 다시 정리되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보급조 막내는 내 손목 보호구를 힐끔거렸고, 팔을 끌려갈 뻔한 후보생은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만 숙였다. 조교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다음 수레 배치를 정할 때 내 위치를 한 칸 앞으로 옮겼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은 없었다. 대신 줄의 간격이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제도는 말을 아낀다.
세라는 보급 수레 두 대 사이의 그늘로 들어갔다.
나는 물통 끈을 조이는 척하며 그녀 쪽을 봤다. 접이식 방패판과 삽자루 사이, 새벽빛이 아직 끝까지 닿지 않는 좁은 틈이었다. 거기서 종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세라는 두 장의 문서를 포개 보고 있었다. 앞장은 기사단 원정 허가서처럼 두껍고 반듯했다. 뒤장은 더 작고 얇았다. 그녀는 주변을 확인한 뒤 작은 쪽지를 허가서 뒤에 맞춰 붙였다.
접힌 가장자리에서 문구가 잠깐 드러났다.
`대상 접촉 시 보고`
`단독 이탈 금지`
`지휘 재량 범위 초과 금지`
허가서라기보다 허가서 뒤에 감시 항목을 덧댄 모양이었다. 접힌 모서리에는 붉은 밀랍이 뜯긴 흔적이 있었고, 그 갈라진 끝은 삼각형처럼 벌어져 있었다. 훈련 사고 뒤 바닥에서 봤던 봉인 파편의 갈라짐과 닮았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미 눈에 박힌 뒤였다.
세라는 문서를 접어 허리춤 주머니에 넣었다.
“남의 서류 보는 취미가 생겼어?”
그녀가 먼저 말했다.
“네가 너무 잘 숨겼지.”
“못 본 척할 수도 있었잖아.”
“검문 막사에서 내 이름 앞에만 멈춘 손도, 어젯밤 발자국도, 방금 그 문장들도 전부?”
세라는 바로 받아치지 않았다. 얼굴 반쪽에만 새벽빛이 걸렸다. 밤새 못 잔 얼굴이었다. 피곤함보다 먼저 보이는 건 들킨 사람의 경계심이었다.
“원정에는 원래 확인 절차가 있어.”
“내가 원정 인원이라서?”
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아니면 대상이라서?”
세라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화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정확히 읽었다는 게 불편한 사람의 흔들림이었다.
“목소리 낮춰.”
“낮춰야 하는 쪽은 나야, 아니면 네 문서야?”
그녀의 손이 서류 주머니 위를 눌렀다. 종이보다 그 안 문장을 더 숨기고 싶은 손놀림이었다.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어.”
“말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둘 다야.”
생각보다 빨리 나온 대답이었다. 변명처럼 꾸며 낸 말은 아니었다. 오래 삼킨 문장이 목에 걸려 있다가, 결국 그대로 나온 소리였다.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세라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낮게 덧붙였다.
“네가 뭘로 분류됐는지 궁금한 건 이해해. 하지만 저 문장이 전부 정답은 아니야.”
“그럼 뭐가 정답인데.”
“이 원정이 허가서 한 장으로 끝나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
시험.
감시보다 그 단어가 먼저 걸렸다. 세라는 나를 붙잡는 쪽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방금 말투는 관리자의 말투가 아니었다. 자기 이름도 남의 손에 올라가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너도 같은 시험장이야?”
세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벨로네 가문의 차녀, 기사단 상급반, 늘 앞줄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 그런 이름 밑에서도 누군가는 성과표를 들이민다. 물론 그 사실이 내 사정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다. 같은 장부 위에 올라도 같은 칸에 적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네 시험 통과하려고 내 발목을 붙잡는 거야?”
세라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네가 여기서 혼자 사라지면 끝나는 건 너 하나가 아니야.”
“어제도 비슷하게 말했지.”
“어제는 네가 다른 뜻으로 들었고.”
“오늘도 크게 다르진 않아.”
세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가 여기 붙은 건 기사단 얼굴 세우는 일하고도, 가문 평가하고도 같이 묶여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과를 못 내면,” 그녀가 덧붙였다. “나는 기사 후보가 아니라 벨로네 이름에 금 낸 차녀로 남아. 네가 살아 돌아와도 이름 없는 보조로 밀릴 수 있는 것처럼.”
이해는 갔다. 그렇다고 마음이 풀리진 않았다. 세라가 자기 명예가 걸린 시험장에 서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덜 묶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늘 완성된 얼굴을 하던 사람이 다른 줄에 묶여 있다는 걸 보여 줄 뿐이다.
“같은 장부에 오른 사람이란 말이네.”
세라가 낮게 답했다.
“칸은 다르겠지.”
“그건 맞아.”
“하지만 밀려나는 방식은 생각보다 비슷할 수도 있어.”
출발 준비를 재촉하는 호각이 울렸다. 세라는 몸을 돌렸다.
“대열 정리한다.”
그녀는 두 걸음쯤 나가다가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자리가 바뀐 건 나도 봤어.”
사과도 호의도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솔직했다.
아침 해가 낮게 걸릴 무렵 원정대는 마른 개울 갈림목에서 멈췄다.
개울바닥은 오래전에 물이 빠져 회색 자갈과 갈라진 흙판만 남았다. 가운데 움푹 꺼진 바닥을 기준으로 길은 둘로 벌어졌다. 공식 원정로는 남쪽으로 완만하게 휘어 내려갔고, 다른 갈래는 잡목이 드문드문 선 북서쪽 사면을 타고 얕게 올라갔다. 수레가 가기엔 좁고 사람이 가기엔 충분한 폭이었다. 버려진 길처럼 보이지만, 풀대가 누운 방향이 너무 일정했다.
갈림목 가운데에는 오래된 말뚝 하나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윗부분에는 기사단 표식이 새로 덧대어졌고, 아래쪽에는 붉은 밀랍 자국이 반쯤 긁힌 채 남아 있었다. 밀랍 가장자리의 갈라진 틈에는 흰 가루가 엉겨 붙어 있었다. 새 표식과 오래된 표식이 같은 나무를 서로 다른 손으로 누른 모양이었다.
세라는 모두 보는 앞에서는 그저 통과 점검을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손을 얹고 표식 방향을 확인한 뒤 사람들 간격을 조절했다. 하지만 기사단 표식이 아니라 아래쪽 밀랍 자국을 볼 때만 손끝이 한 박자 늦었다.
그 순간 검문 막사에서 들었던 단어가 떠올랐다.
확인.
한 번 성문을 통과했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길목마다 이런 중계 표식이 남고, 누군가는 대열이 그대로 지나갔는지, 대상이 빠지지 않았는지, 별도 반응이 없는지 계속 대조한다. 성도의 확인 절차는 막사 하나로 끝나지 않고, 길 위로 이어진 그물이었다.
세라는 허리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문서를 꺼내려던 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에 밀랍 가루만 묻힌 채 다시 들어갔다.
아주 작은 지연이었다. 그래도 분명했다. 여기서 바로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왜 안 적어?”
내가 낮게 물었다.
세라는 남쪽 공식 길을 보며 답했다.
“지금 올리면 너무 많은 손이 붙어.”
“나 때문이야?”
“방금 수레에서 네가 필요한 순간을 모두가 봤으니까.”
호의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믿을 만했다. 동시에 더 불편했다. 사람을 살렸다는 일이 곧 사람을 더 단단히 붙잡는 이유가 된다.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나는 말뚝 옆을 지날 때 밀랍 가장자리를 한 번 더 봤다. 갈라진 삼각형. 안쪽의 가는 이중선. 훈련 사고 뒤 바닥에서 급히 베껴 둔 봉인 파편 스케치와 같은 결이었다. 세라 허가서 모서리에 남은 뜯김도, 로웬 메모 가장자리의 기호도, 모두 그쪽으로 겹쳐 보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반복이 많았다.
하지만 확정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한 조각이 모자랐다.
비탈길로 들어서자 앞뒤 대열 소리가 바람과 지형에 잘려 흩어졌다.
오른쪽은 잡목 사면, 왼쪽은 아래로 꺼진 돌너덜이었다. 수레가 겨우 지나갈 폭만 남았고, 말굽이 돌을 차면 그 소리가 뒤쪽까지 얇게 울렸다. 세라는 내 앞 반 걸음쯤에서 걷다가 뒤 수레가 돌턱에 걸려 속도를 늦추는 틈에 발을 맞췄다. 그러다 우리 둘만 잠깐 떨어졌다.
“아까 그 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험이라는 거.”
세라는 정면만 보고 걸었다.
“네 가문에서 준 거야, 기사단에서 준 거야?”
“둘이 나뉘어 있으면 좋겠네.”
“안 나뉘어 있어?”
“여기선 겹치지 않는 게 더 드물어.”
바람이 마른 가지를 긁고 지나갔다. 세라의 등은 곧았지만, 그 곧음이 자신감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틀리면 바로 적히는 자리에 선 사람이 일부러 더 반듯하게 서는 느낌이었다.
“이번 원정 성과가 네 이름에 붙는 거겠지.”
“붙을 수도 있고, 실패로 남을 수도 있지.”
“그래서 날 뒤로 밀어 둔 거고.”
“내가 그렇게 정했다고는 안 했어.”
“막지도 않았잖아.”
세라는 이를 악물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내가 안 받았으면 다른 누가 같은 문서를 받았을 거야.”
“그게 변명돼?”
“변명 아니야.”
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현실이지.”
그 말은 얄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도 아니었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줄을 잡는 사람을 나는 많이 봤다. 수련원 교관도, 성도 사제도, 어제 배정서를 넘기던 서기관도 그랬다. 세라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을 했지만, 손에 든 문서가 그 차이를 전부 증명해 주지는 못했다.
“너는 네 칸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고,” 내가 말했다. “나는 내 칸이 뭔지도 모르고 끌려가고 있고.”
“나도 다 아는 건 아니야.”
“그래도 문서는 네가 들고 있지.”
세라는 그 말에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지금 단계의 한계였다. 그녀는 나를 넘겨야 하는 줄과, 그대로 넘기면 자기 쪽도 같이 틀어질 수 있다는 감각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런 사람은 믿기 어렵다.
하지만 함부로 무시하기도 어렵다.
정오 무렵 짧은 정차가 있었다.
바위턱 아래 흙바닥은 바퀴가 푹 꺼지지 않을 만큼만 단단했다. 말들은 짧은 숨을 뿜었고, 사람들은 제 물통과 끈을 점검했다. 바람은 아침보다 말랐고, 먼지와 짐 냄새 사이로 금속 같은 맛이 간간이 올라왔다. 북서쪽 사면에서 넘어오는 광물 냄새였다.
나는 수레 그늘 밑에 쪼그려 앉아 로웬이 남긴 메모를 꺼냈다.
메모는 여전히 불친절했다. 선 몇 개, 일부러 비워 둔 칸, 끝까지 적지 않은 표시들. 처음엔 덜 그린 지도 같았는데 오래 보면 반대다. 보여 주려는 것보다 보이면 안 되는 걸 먼저 잘라 낸 종이. 나는 메모 가장자리의 작은 기호를 엄지로 쓸었다. 삼각형처럼 보이지만 한쪽 끝이 갈라지고, 안쪽에 가는 선이 두 줄 더 들어간 표식.
예전에 훈련 사고 뒤 바닥에서 본 봉인 파편에 비슷한 선이 있었다. 그때는 피와 흙이 묻어 정확히 보지 못했고, 나중에 기억나는 대로 급히 베껴 둔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갈림목 밀랍 자국 가장자리에도, 세라 허가서 접힌 끝에도, 지금 이 메모 모서리에도 그 갈라짐이 자꾸 겹쳤다.
나는 예전 스케치를 꺼내 메모 옆에 펼쳤다. 선은 서툴렀지만 갈라진 각도와 안쪽 이중선은 살아 있었다. 완전히 같다고는 못 해도, 전혀 다른 종류라고 우기기엔 너무 많이 겹쳤다.
“그 문양.”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종이를 덮었다. 세라가 수레 바퀴 바깥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내 손보다 종이 가장자리에 더 오래 머물렀다.
“네가 알아?”
세라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대신 맞은편 바퀴에 기대며 낮게 물었다.
“어디서 봤어.”
“훈련 사고 때.”
그녀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그리고 로웬 메모에도 있었지. 갈림목 말뚝 밀랍 자국도. 네 허가서 가장자리도.”
내가 하나씩 짚을수록 세라 표정은 더 닫혔다. 부정하고 싶은데 전부 부정하긴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게 다 같은 뜻이라고 확정하지 마.”
“확정은 안 해. 그런데 무관하다고 보기엔 너무 많이 겹쳐.”
세라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전부는 몰라.”
그 말은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디까지 알아?”
“그 표식은 기사단 훈련 규정에 없는 종류야. 성도 쪽 문서와 겹칠 때만 문제 취급돼. 그리고 그 선이 보이는 자리마다 누군가 너무 서둘러 덮으려 들어.”
“그럼 훈련 사고도 그냥 사고는 아니었겠네.”
세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은 대답만큼 선명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냈다. 금속은 손바닥 위에서 처음엔 잠잠했다. 메모와 스케치를 함께 쥔 채 몸을 반쯤 돌려 북서쪽 사면을 봤다. 공식 원정 방향은 남쪽 아래였다. 북서쪽은 잡목과 낮은 돌등성이 겹쳐 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부적은 늘 그랬듯 그쪽에서 먼저 반응했다.
뜨거운 열은 아니었다. 균열 안쪽만 아주 가늘게 숨을 쉬는 느낌. 더 북서쪽으로 기울이자 반응이 분명해졌다. 반대로 공식 원정 방향으로 돌리면 금방 식었다.
세라도 그걸 봤다. 그녀 시선이 부적에서 내 손목, 북서쪽 사면으로 천천히 옮겨 갔다.
“또 그쪽이네.” 내가 말했다.
“어젯밤 초소도 그쪽이었지.”
“로웬은 길을 남긴 거고, 누군가는 그 길을 먼저 밟고 있는 걸 수도 있겠네.”
세라가 장갑 낀 손으로 바퀴 가장자리 흙을 한번 문질렀다.
“그 말이 맞으면 우릴 보는 쪽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아는 거랑, 같은 장소를 노린다는 걸 확인하는 건 달라.”
맞는 말이었다. 성도는 중계 표식으로 따라붙고, 기사단은 허가서와 평가표로 움직이고, 제3자는 야영지 바깥과 북서쪽 사면을 먼저 밟는다. 셋이 완전히 같은 손이면 이렇게 모양이 다를 이유가 없다.
멀리서 출발 신호가 들렸다. 세라는 몸을 일으켰다.
“종이 정리해. 남들 눈에 띄면 귀찮아져.”
“남들?”
“기사단이든 성도든, 아니면 저 발자국 주인이든.”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먼저 걸어 나갔다.
해가 기울 무렵 길은 다시 한번 갈라지는 표정을 보였다.
공식 원정로는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아래 협곡 쪽으로 굽었고, 북서쪽 사면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옛 수레자국처럼 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완전한 길은 아니었다. 오래전에 몇 번만 쓰이고 버려진 흔적 같았다. 그런데 자연이 만든 선처럼 넘기기엔 너무 규칙적이었다. 돌 몇 개가 같은 방향으로 긁혀 있고, 풀대도 바람 반대쪽으로만 눕지 않고 일정하게 꺾여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쭈그려 앉았다.
흙 표면은 말라 있었지만 아래는 약간 눅눅했다. 최근에 누가 밟지 않았다면 이렇게 얇게 긁힌 자국이 남지 않는다. 장화 자국처럼 깊지는 않았다. 무게를 분산해 딛는 사람, 혹은 짐을 최소로 줄인 사람이 조심스럽게 올라가며 남긴 흔적이었다.
“봤지.”
세라가 바로 뒤에 섰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내가 혼자라고 느낄 때마다 그녀는 시야 바깥에서 나타났다. 감시라면 감시고, 동행이라면 동행이었다. 여전히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공식 길은 아니네.”
“응.”
“최근 흔적이야.”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는 못 올라가. 사람만 간 자리야.”
나는 손안의 부적을 다시 쥐었다. 이번에는 꺼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금속 안쪽이 이미 얇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북서쪽 사면 쪽으로 몸을 돌리자 반응이 한층 또렷해졌다.
누군가가 먼저 그 길을 밟고 있다.
그리고 로웬이 남긴 메모는 자꾸 그쪽을 가리킨다.
“보고할 거야?” 내가 물었다.
세라는 침묵했다. 눈은 흔적에 고정돼 있었고, 한 손은 또 허리춤 주머니 근처까지 갔다가 멈췄다. 그 안에는 아침에 본 허가서와 쪽지가 들어 있을 것이다. 대상 접촉 시 보고. 단독 이탈 금지. 지휘 재량 범위 초과 금지. 여기서 가장 먼저 나와야 하는 문장은 그런 것들이겠지.
하지만 세라는 끝내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야.”
“왜.”
“저게 뭔지 확인도 못 했는데 먼저 올리면 다른 손이 더 빨리 붙을 수도 있어.”
다른 손.
기사단일 수도, 성도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네 규정은?”
세라는 나를 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규정대로만 움직이면 네가 뭘 찾는지도 모르고 넘기게 돼.”
“그래도 아직 날 놓을 생각은 없겠지.”
세라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피곤하고 짜증나고, 무언가를 오래 참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래도 새벽보다 한 겹 덜 차가웠다.
“널 믿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알아.”
“나도 아직 다 모르니까.”
“그것도 알아.”
우린 잠깐 서로를 봤다.
신뢰라고 하기엔 멀고, 적대라고만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걸 같이 봤다. 새벽 발자국, 뒷줄 배치, 수레 사고, 허가서 뒷장, 갈림목 중계 표식, 같은 갈라짐 문양, 북서쪽에서 보인 부적의 반응, 그리고 지금 여기 남은 새 흔적. 둘 다 아직 자기 줄을 끊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같았다. 누군가가 우리보다 먼저 로웬의 길에 닿는 건 막아야 한다.
대열 앞쪽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라가 먼저 몸을 돌렸다.
“지금은 공식 길로 간다.”
나는 곧장 따르지 않고 물었다.
“그리고?”
세라가 반쯤만 돌아봤다.
“오늘 밤 배치가 끝나면 저쪽을 다시 본다.”
명령도 약속도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처럼 들렸다.
세라가 대열 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북서쪽 사면을 돌아봤다. 눌린 풀과 긁힌 돌 사이로, 눈으로만 보면 금방 놓칠 만한 가는 길이 언덕 뒤로 이어져 있었다.
로웬은 도망친 게 아니라, 쫓기는 중에도 길을 남긴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 길엔 우리보다 먼저 닿으려는 누군가가 있다.
바람이 사면 위를 훑고 지나가자 눌린 풀 한 줄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살아 있는 사람이 방금 비켜 선 자리처럼 짧고 얕은 떨림이었다.
나는 손안의 부적을 더 세게 쥐었다.
오늘 밤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먼저 길을 읽고 있는지는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