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기고의 짐승들
재받이 수로 첫 굽이는 사람보다 꾸러미를 먼저 흘려보내도록 길든 통로였다.
왼쪽 벽에는 견인 고리 두 개가 서로 다른 높이에 박혀 있었다. 하나는 허리께, 하나는 무릎 바로 아래였다. 바닥에는 끌개가 비스듬히 긁고 간 홈이 검은 물 밑에서 끊겼다 이어졌고, 천장 사슬은 용광빛이 스칠 때마다 젖은 이빨처럼 번뜩였다. 물은 발목을 넘지 않았지만 벽마다 물때 높이가 달랐다. 어느 날은 사람을 위에서 붙들고, 어느 날은 짐을 아래로 밀어 보냈다는 흔적이었다.
세라는 첫 벌을 품에 안은 채 맨 앞 돌턱에 섰다. 왕가 문양 반지, 공동 명령서 조각, 죽은 톱니축이 그녀 팔 안에서 낮게 부딪혔다. 브론은 손수레를 굴리지 않고 손잡이를 낮춰 들었다. 숨칸에 누운 인질 명단과 출입 기록이 흔들리지 않게 바퀴를 하나씩 넘길 각도를 재는 손이었다. 미리엘은 내 뒤에서 벽 번호 홈과 물 높이를 번갈아 살폈고, 리에트는 맨 뒤에서 위쪽 실무자들의 발소리와 아래 병기고의 금속 진동을 갈라 들었다. 위에는 아직 이름을 덮으려는 북방 손들이 있었고, 아래에는 도리안이 깨운 장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셋째 벌은 내 왼쪽 옆구리에 묶여 있었다. 위조 채무 증서와 겉문장 밑에 남은 원문 흔적, 노장이 마루 틈에 남긴 작업 순번표 자리와 맞춰야 할 것들. 얇고 초라해서 가장 가벼워 보였지만, 물에 젖으면 제일 먼저 죽는다. 반지와 톱니축은 잃어도 금속 자국이 남는다. 명단과 출입 기록은 젖어도 일부 이름이 남는다. 하지만 채무 증서는 번지는 순간 북방 공방이 가족을 어떤 말로 묶었는지 입으로만 설명해야 한다. 입으로만 남은 진실에는, 힘 있는 사람이 다른 이름을 붙이기 쉬웠다.
그래서 달리기 전에 먼저 나눴다. 세라는 보이게 들고, 브론은 숨겨 들고, 미리엘은 글줄 방향을 기억하고, 리에트는 추격의 소리를 가른다. 나는 가운데에서 서로 다른 손들이 같은 줄로 다시 맞물릴 자리를 봐야 했다. 한데 모아 들면 한 번에 빼앗긴다. 완전히 흩으면 살아 나가도 다시 맞출 길이 없다. 이 수로는 그 중간을 찢어 놓는 데 능한 길이었다.
나는 앞턱 가장자리로 몸을 낮췄다. 물은 얕아 보였지만 돌턱 바로 밑이 종아리 깊이로 파여 있었다. 사람이 먼저 미끄러지면 품 안 물건이 떠오르고, 꾸러미가 먼저 빠지면 사람은 그걸 잡느라 몸을 비튼다. 길은 그 반사 동작까지 알고 있었다.
"세라, 앞턱 먼저."
말은 짧게 끊었다. 말이 길어지면 위쪽 실무자들도, 아래 장치도 박자를 얻는다.
"브론은 바퀴 따로. 미리엘은 글만 보지 말고 물도 봐. 리에트, 아래 소리부터."
세라는 대답 대신 왼발을 돌턱 끝에 걸고 오른발을 젖은 홈 바깥에 눌렀다. 품 안 첫 벌은 더 깊이 감았다. 누가 봐도 가장 중요한 물증이 자기 팔 안에 있다고 읽히는 자세였다. 세라가 스스로 미끼를 맡았다는 사실이 목 안을 거칠게 긁었다. 벨로네 가문 이름을 빌려 길을 열던 사람은 이제 가문 문장 대신 자기 몸을 앞줄에 세웠다.
브론은 손수레 앞바퀴를 홈 밖으로 비껴 놓았다. 팔뚝이 떨렸지만 그는 바퀴 소리부터 죽였다. 수레가 삐걱이면 숨칸을 의심받는다. 미리엘은 셋째 벌을 묶은 천끈 끝에 작은 납추를 다시 달았다. 물에 닿더라도 주머니째 떠올라 벽을 치지 않게 하려는 손이었다. 리에트는 젖은 돌벽을 한 번 만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
"위쪽은 발을 아껴. 아래는 아니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저건 사람을 찾는 소리가 아니라 어느 것을 먼저 물지 재는 소리야."
굽이 너머 어둠에서 쇠집게 두 짝이 바닥을 끌며 닫혔다 열렸다. 붉은 빛이 벽면을 핥고 지나가자 젖은 약호가 드러났다.
`A-3 / 인계 전 / 분리 우선.`
브론 입가가 굳었다.
"인계 전? 병기 이름이 아니잖아."
이름이 아니었다. 절차였다. 어느 손에서 어떤 물건을 먼저 떼어 낼지 적어 둔 말. 허리 높이 고리에는 굵은 밧줄 섬유가 말라붙어 있었고, 무릎 높이 고리에는 더 가는 끈이 여러 번 감겼다 풀린 자국이 남았다. 사람 줄은 위에서 잡고, 꾸러미 줄은 아래에서 끌었다. 바닥 홈도 둘이었다. 넓은 홈은 끌개나 손수레가 지난 자리였고, 그 옆 가는 홈은 쇠집게나 사슬 끝이 지나간 자리였다.
이 길은 누군가를 빨리 데리고 나가는 길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몸과 입을 막아야 할 물건을 서로 다른 속도로 떼어 올리는 길이었다. 도리안은 병기를 깨우기 전에 먼저 이 수로의 오래된 버릇을 살려 놨다. 칼날보다 순서가 사람을 더 빨리 무너뜨린다는 걸 아는 적이었다.
둘째 굽이를 돌자 수로가 갑자기 넓어졌다. 왼쪽에는 녹슨 우리 셋이 벌어진 채 누워 있었고, 가운데에는 쇠사슬이 매인 기동 홈이 길게 패어 있었다. 오른쪽 반원형 작업대 위로 붉은 용광빛이 눌리듯 흘렀다. 천장 홈마다 접힌 구속용 마력 족쇄가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실험체 관리 표식과 몸 길이 눈금이 함께 남아 있었다. 사람을 재던 자리 위에 짐승 골격을 억지로 올린 흔적이었다.
용광빛이 한 번 크게 번졌다.
강철 병기 셋이 동시에 눈을 떴다.
짐승처럼 생겼지만 짐승은 아니었다. 목과 어깨 안쪽의 금속 턱은 사람 어깨를 눌러 묶는 구속 틀 규격과 같았다. 등판 아래에는 끊긴 족쇄 조각이 박혀 있었고, 앞발 옆면에는 왕국식 기동 약호와 실험체 번호가 겹쳐 찍혀 있었다. 사람을 눕혀 재던 눈금 위에 짐승 모양 골격을 덧댄 작업물. 누군가는 병기라 불렀고, 누군가는 실패체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두 이름을 붙인 손은 같은 쪽에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셋은 쓰임이 달랐다. 왼쪽 놈은 앞다리가 길어 높이 든 꾸러미를 낚아채게 돼 있었다. 가운데 놈은 허리 금속링이 두꺼워 손수레나 끌개를 오래 붙들 수 있었다. 오른쪽 놈은 턱 아래 집게가 넓고 얕아 사람 살보다 주머니와 묶음끈을 먼저 찢도록 되어 있었다. 발톱 끝에는 피가 아니라 낡은 섬유와 밀랍 조각이 달라붙어 있었다. 사람을 죽인 흔적보다 물건을 뜯어 낸 흔적이 먼저 보였다.
브론이 작업대 옆 눈금을 보더니 숨을 삼켰다.
"손목. 목둘레. 어깨 폭."
그가 숫자를 하나씩 짚었다.
"짐승 치수가 아니야. 사람 몸 치수를 먼저 적고 그 위에 골격을 올렸어."
미리엘은 작업대 아래 지워진 표식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안정화 실패체. 전환 허가. 상행 금지."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성도 문서에서 사람을 분류하던 말투와 북방 공방의 금속 약호가 한 줄에 섞여 있었다. 미리엘은 그걸 읽고도 기도문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젖은 천을 펴서 표식 아래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았다. 여기서는 위로보다 보전이 먼저였다.
병기 셋은 포효하지 않았다. 소리를 아낀 채 우리를 둥글게 끊어 놓으려 들었다. 하나는 세라 품 안 첫 벌 쪽으로, 하나는 손수레 쪽으로, 마지막 하나는 나와 미리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각도로 움직였다. 살상보다 분리. 사람을 찢는 짐승이 아니라, 꾸러미와 읽는 손을 따로 떼는 기계였다.
"사람 먼저 안 문다."
나는 세라의 어깨 너머로 병기 턱의 각도를 보며 말했다.
"묶음끈부터 노린다."
세라는 바로 몸을 틀었다. 검집 끝으로 앞 병기 턱을 비껴 밀며 첫 벌을 더 위로 끌어안았다. 병기는 그녀 팔이 아니라 품 안의 부피를 따라왔다. 리에트의 화살이 오른쪽 병기 집게 관절을 찍었다. 깊게 박지 않았다. 관절 사이 금속을 긁어 방향만 틀었다. 브론은 손수레를 물에 밀지 않고 허리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발톱이 바퀴가 아니라 빈 물길을 긁게 만드는 자리였다.
나는 세라가 앞으로 너무 오래 남지 않게 왼손을 들었다. 그녀는 신호를 보고도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반 박자 더 머물렀다. 병기 둘의 시선이 완전히 그녀 품에 붙은 뒤에야 뒤꿈치를 틀었다. 세라가 고른 위험이었다. 그녀가 앞줄을 맡았기 때문에 브론의 숨칸이 한 박자 더 살아났다. 그 선택은 명예롭지 않았다. 더러운 물과 금속 냄새 속에서 증거를 살리려고 자기 몸을 다른 손의 첫 표적으로 내놓는 일이었다.
"가운데 길은 너무 넓어요."
미리엘이 바닥 눈금과 기동 홈을 보며 소리쳤다.
"둘째 벌을 떨구라고 만든 통로예요. 수레가 잘 나가게 만든 게 아니라 집게가 같이 물게 만든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 위에서 웃음이 울렸다.
"그래도 곧게 달리는 쪽이 제일 빠르지 않나?"
도리안의 목소리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수로 벽과 철기둥과 물살을 타고 목소리만 먼저 들어왔다. 그는 모습을 숨긴 채 우리 발밑 길을 먼저 잡아당기고 있었다.
"위로 가면 사람 회수대. 가운데로 가면 내 짐승들. 아래로 빠지면 물이 문장을 먹는다. 어느 쪽이 덜 아까운지 보자고."
삼거리가 드러났다. 위로는 하역문 쪽 비탈 계단, 가운데는 넓은 물길, 오른쪽 아래로는 검은 물이 더 빠른 좁은 배수 틈. 위쪽 계단은 사람을 올리기 쉬워 보였지만 폭이 넓어 창과 손이 내려오기 좋았다. 가운데 물길은 손수레가 잘 나갈 만큼 편평했고, 그래서 병기 셋이 나란히 물고 늘어지기 좋았다. 오른쪽 아래 배수 틈은 사람 둘이 나란히 설 수조차 없었다. 대신 한 번 몸을 구겨 넣으면 병기는 각도를 크게 틀어야 따라붙는다.
위쪽에서는 북방 실무자 발소리가 머뭇거렸다. 그들은 우리와 한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리안 쪽도 아니었다. 명단이 나가면 도시가 무너진다고 믿는 손, 자기 이름이 같이 끌려 나올까 두려운 손, 그래도 아래 장치가 누구 편도 아니라는 걸 아는 손이 뒤섞여 있었다. 도리안은 그 망설임을 전장에 끼워 넣었다. 사람들의 겁을 병기보다 느린 칼처럼 쓰고 있었다.
직선으로 달리면 셋 중 하나를 버린다. 틈으로 꺾으면 모두 다친다. 그래도 다친 채 살아 나가면 다시 맞출 수 있다. 버린 것은 누군가 이름을 바꿔 버린다.
"세라."
나는 가운데 물길과 오른쪽 배수 틈의 모서리를 동시에 보았다.
"넓은 길로 가는 척해. 발자국 크게 남겨. 오래 끌지는 마. 내가 손 내리면 빠져."
세라 눈빛이 곧바로 달라졌다. 묻지 않았다. 첫 벌을 안은 채 일부러 넓은 물길 쪽으로 발을 크게 디뎠다. 물이 높게 튀고 검집이 돌턱을 긁었다. 병기 둘이 즉시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반짝이는 금속 소리와 앞줄에 선 기사. 도리안이 보기에도 가장 쉬운 먹이였다.
"브론, 굴리지 마. 들어서 틀어."
"알아."
브론은 이를 악물고 손수레 앞바퀴를 들어 배수 틈 입구로 비껴 넣었다. 굴린 게 아니라 앞쪽 바퀴를 홈 밖으로 넘기고 뒤쪽만 끌어 붙이는 손놀림이었다. 리에트는 마지막에 남아 화살 두 발을 날렸다. 하나는 집게 관절, 하나는 바닥 기동 홈. 금속이 틀어지며 병기 하나가 반 박자 늦었다.
"위쪽 발 셋. 아래는 둘."
리에트가 외쳤다.
"같은 박자에 묶였어. 위 사람들이 도리안 쪽 장치와 맞춰 움직여. 공모인지 겁인지 아직 몰라."
중요한 건 길 전체가 이미 한몸처럼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위의 사람, 가운데 병기, 아래 물살. 모두 우리를 한 줄로 세우려 했다. 나는 그 줄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손수레 옆에 붙어 몸을 낮췄다.
배수 틈 안쪽은 숨 쉴 공간부터 모자랐다. 한쪽은 사람 하나가 겨우 발을 붙일 수 있는 마른 턱, 다른 쪽은 손수레 바닥을 걸쳐 놓아야 건널 수 있는 검은 물 도랑이었다. 벽에는 뜯어 낸 제어판 자리와 깨진 수정 홈이 남아 있었다. 세라는 넓은 물길 쪽에 마지막까지 남았다. 왼발은 바깥 돌턱에, 오른발은 틈 입구에 비틀어 둔 채 병기 둘의 시선을 자기 앞에 묶었다.
내 손이 내려갔다.
세라는 뒤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완전히 등을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빠질 때마다 검집을 돌벽에 스치게 해 병기 턱이 소리를 따라 틀어지게 했다. 리에트는 그 박자에 맞춰 화살을 얕게 긁었다. 관절을 완전히 끊으면 병기가 거기서 미쳐 날뛸 수 있다. 얕게만 틀어 놓으면 반 박자씩 늦는다.
미리엘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도랑 가장자리에서 젖은 헝겊을 뜯었다. 제어판 자리 아래에 눌러 물이 어느 홈으로 먼저 스미는지 봤다. 오른쪽 아래 틈으로 물이 빨리 빠지는 걸 확인하자 셋째 벌을 내 쪽으로 더 붙였다.
"종이는 왼쪽. 천은 오른쪽. 몸은 가운데."
그녀가 자기에게 말하듯 낮게 읊었다.
"누가 미끄러져도 전부 한꺼번에 잠기면 안 돼요."
도망보다 보전이 먼저였다. 도리안이 원한 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뭘 버리는지 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버리는 대신, 살아남는 방식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브론은 이미 벽을 보고 있었다. 제어판 자리, 깨진 수정편, 금속턱 높이, 홈 넓이. 그의 손이 병기 목 안쪽에서 빠져 나온 작은 수정 조각을 집어 들었다. 제어판 자리에 맞대 보던 손이 멈췄다.
"이거…… 우리 집 해체 설계랑 닮았어."
그 목소리는 분노보다 낮았다. 낮아서 더 위험했다.
미리엘이 제어판 밑 네 줄을 손톱으로 더듬었다.
"기동. 구속. 안정화. 회수."
그녀가 한 줄씩 읽었다.
"같은 끝번호 아래예요. 사람을 관리하던 줄이 먼저 있고, 도리안은 그걸 싸움에 맞게 뒤틀어 썼어요."
제어판 자리는 겉보기보다 깊었다. 앞판만 뜯긴 게 아니라 안쪽 연결 못 두 개가 억지로 비틀려 빠져 있었다. 브론은 못 홈을 짚다가 왼쪽과 오른쪽의 마모가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왼쪽은 여러 번 열고 닫은 자국이고, 오른쪽은 한 번에 뜯어 낸 자국이었다. 누군가는 이 장치를 오래 쓰다가, 마지막에는 서둘러 뜯어 갔다.
깨진 수정 홈 아래에는 얇은 분말이 가라앉아 있었다. 미리엘이 젖은 손끝을 대자 푸른 기운이 잠깐 번졌다 사라졌다.
"정화용이 아니에요. 안정화 잔광이에요."
브론은 제어판 턱 안쪽 금을 따라 손톱을 밀어 넣더니 아주 얇은 철편 하나를 빼냈다. 철편에는 거의 닳아 지워진 보정선 세 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걸 심핵 조각 옆에 맞대 보고 숨을 멈췄다.
"한 번에 힘을 주는 장치가 아니야."
그가 말했다.
"힘을 어긋난 박자로 넣고, 좌우가 같은 순간 닫히지 못하게 막고, 안쪽 핵이 반응하기 전에 끊는 거야."
카르트 가문이 남긴 해체 설계가 완성 병기를 만드는 도면만은 아니었다. 이미 돌아가는 병기를 멈추게 하는 역설계. 적어도 누군가의 손은 끝까지 완성을 늦추려 했다. 브론은 그 사실을 변명으로 삼지 않았다. 눈을 더 낮췄다. 자기 집 이름으로 남은 죄와, 그 이름으로 남겨 둔 저항을 같은 손바닥 위에 올려 보는 얼굴이었다.
미리엘이 제어판 밑 마지막 지워진 칸을 문질렀다. 아주 흐린 글자가 살아났다.
`재기동 전 확인자 둘.`
한 사람이 눌러도 돌아가지 않게 만든 장치였다. 사람 하나가 제멋대로 다시 돌리지 못하게, 적어도 둘이 같은 박자를 확인해야만 움직이는 마지막 안전장치. 도리안은 그 장치를 뜯어 병기로 바꿨고, 브론은 뜯긴 순서를 거꾸로 읽고 있었다.
위쪽에서 금속이 또 울렸다. 병기 둘이 배수 틈 입구를 더듬었다. 이 좁은 자리에서 오래 읽으면 증거가 아니라 사람부터 잡힌다. 세라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입구를 등지지 않았다. 검을 뽑지 않고 검집만 짧게 잡았다. 긴 베기보다 좁은 통로에서 걸어 잠그는 쪽이 필요한 자리였다. 리에트는 화살을 새로 끼우며 고개를 기울였다.
"넓은 길 쪽 병기는 느려졌어. 대신 위 사람 발이 빨라져. 도리안이 시킨 건지, 자기들이 먼저 겁먹은 건지는 아직 몰라."
"둘 다야."
나는 낮게 답했다.
"겁먹은 손을 누가 먼저 쓰느냐가 도리안 방식이니까."
그 말에 세라가 한 번 나를 봤다. 그녀가 가문 명령과 자기 판단 사이에서 여러 번 멈췄던 얼굴이 그 짧은 시선 안에 지나갔다. 여기서도 누군가는 두려움 때문에 이름을 덮으려 하고, 누군가는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으려 한다. 세라는 이번에는 닫는 손이 아니라 시간을 버는 몸으로 섰다. 그 차이가 이 더러운 수로에서 작게나마 빛났다.
정비칸 끝에는 낮은 제어틀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벽에는 반쯤 지워진 작업 순서표와 `군수 반입 전 재기동 금지` 약호가 남았다. 병기고 전체를 여기서 부술 수는 없었다. 무너뜨리면 첫 벌과 둘째 벌, 셋째 벌이 물과 불에 함께 죽는다. 병기 몇을 멈춰도, 증거를 잃으면 위쪽 사람들은 다시 말을 바꾼다. 카르트 이름만 남고, 왕가 반지는 사라지고, 인질 명단은 젖은 종이로 밀려난다. 죽은 사람에게 또 다른 이름을 붙이는 일은 늘 살아남은 사람들의 서류에서 시작됐다.
나는 제어틀 앞 바닥을 봤다. 오래전 누군가 제자리에서 뒤로 미끄러진 발뒤꿈치 자국이 두 겹 남아 있었다. 급히 도망친 자국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무엇인가를 붙들고 버틴 사람의 자국이었다. 벽 순서표 밑줄도 눈에 들어왔다. `기동`과 `회수`는 같은 먹으로 쓰였지만 `안정화`는 나중에 덧댄 잿빛 먹이었다. 처음부터 살리려고 만든 절차가 아니라, 너무 많이 망가뜨린 뒤 뒤늦게 붙인 덮개 같았다.
지금 끊어야 하는 건 병기고 전체가 아니었다. 병기고를 다시 읽을 길이 끊기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오늘은 병기고를 안 부숴."
내가 말했다.
"증거랑 읽는 손부터 살린다."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이 없는 얼굴은 아니었다. 여기서 바로 부수면 속은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알았다. 기둥이 무너지면 반지와 명령서 조각은 불에 먹히고, 명단과 출입 기록은 물에 젖어 들러붙고, 채무 증서는 가짜인지 진짜인지 따지기 전에 번진다. 정의가 분노보다 느리게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있다. 세라는 그 느린 쪽을 골랐다.
브론은 심핵 조각을 천 조각에 감쌌다. 손을 바로 떼지 못했다. 작은 조각이 그의 손금 사이를 아프게 눌렀다.
"아버지가……"
그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변명으로 흘러가려는 말을 스스로 삼켰다.
"끝까지 못 만들게 해 둔 부분이 있어. 완성한 죄만 있는 게 아니라, 완성 못 하게 버틴 흔적도 있어."
"그 흔적도 같이 들고 나간다."
나는 말했다.
"죄를 덮으려는 게 아니라, 누가 어디서 뒤집었는지 보려고."
브론은 그제야 조각에서 손을 뗐다. 대신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옷자락을 한 번 더 눌렀다.
깊은 물길 어딘가에서 쇠사슬이 천천히 당겨졌다. 물살이 검은 턱 밑에서 꺾이며 낮게 울었다. 도리안의 웃음이 그 위를 탔다.
"그래. 읽고 나서 끊어 봐라."
허락이 아니었다. 다음 전장을 예약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브론이 읽을 줄 안다는 사실까지 계산했다. 우리를 여기서 죽이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읽는 손을 살려 더 깊은 곳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먼저 지키는지, 어느 순간 누구를 앞세우는지, 어떤 증거를 끝까지 놓지 못하는지 더 많이 볼 수 있으니까.
위쪽 발소리가 다시 갈라졌다. 하나는 넓은 물길 쪽에 남고, 하나는 우리가 선 틈 위를 더듬듯 지나갔다. 오래 버틸 자리가 아니었다. 미리엘은 셋째 벌 겉천을 손등으로 눌러 물이 안쪽까지 스미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리에트는 화살 한 대를 새로 끼우며 말했다.
"아래쪽 더 낮은 문이 열려. 물살도 바뀐다. 여기서 멈추면 뒤가 먼저 닫혀."
나는 세라의 등, 브론의 손, 미리엘이 눌러 붙든 천, 리에트의 귀를 차례로 봤다. 한 사람도 한 물건도 따로 안전하지 않았다. 서로의 자리 때문에 겨우 버티고 있었다. 도리안이 우리에게 강요한 건 하나를 버리는 선택이었다. 우리가 고른 답은 더 번거롭고 더 느렸다. 아무것도 한 손에 넘기지 않는 것.
"세라, 첫 벌은 계속 보이게. 대신 너무 높이 들지 마. 낚아채기 좋다."
"보이되 물리지는 않게."
세라가 짧게 받았다.
"브론, 손수레는 벽에 눕혀. 심핵은 몸 안쪽. 둘째 벌은 바깥판이 아니라 축이 먼저 물리게 해."
"축은 버려도 다시 만들 수 있어. 이름은 못 만들어."
브론이 이를 악물고 손수레 뒤축을 틀었다.
"미리엘, 셋째 벌은 네 손에 오래 두지 마. 글을 보는 손이 젖으면 끝이다. 내가 한 번 받고, 네가 물 높이를 외워."
미리엘은 잠깐 망설였지만 바로 천주머니를 내게 넘겼다. 그녀는 대신 벽에 손톱으로 물 높이와 홈 방향을 표시했다. 나중에 다시 돌아오든, 다른 증언자가 따라오든, 이 표시는 같은 장소를 다시 찾는 실마리가 된다.
"리에트."
"뒤는 셋, 아래는 하나. 아래 하나가 더 커."
"큰 박자 때 내가 손수레 뒤를 누른다. 넌 위 발소리만 끊어."
리에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도리안의 병기보다 위쪽 사람의 망설임을 겨눴다. 화살이 사람을 맞히지 않아도 된다. 발끝 앞 돌을 깨거나 난간 사슬을 울리면 위쪽 손은 멈춘다. 겁먹은 손은 작은 소리에도 서류를 먼저 붙든다.
짧게 둘.
검은 물 아래에서 집게 두 개가 빈 곳을 물었다. 세라는 첫 벌을 안고 한 발을 넘겼고, 브론은 손수레를 벽에 눕힌 채 끌었다. 나는 손수레 뒤축을 눌러 숨칸이 위로 뜨지 않게 했다. 미리엘은 표시를 남긴 손을 바로 옷자락에 닦고 따라붙었다.
길게 하나.
뒤에서 더 큰 집게가 올라왔다. 나는 몸을 틀어 손수레 뒤축을 눌렀다. 집게는 숨칸이 있던 높이보다 위쪽 빈 공기를 물고 지나가 천장 사슬을 크게 흔들었다. 붉은 빛이 물 위에서 부서졌고, 세라 품 안 첫 벌이 잠깐 빛났다. 병기 하나가 그 빛을 따라 머리를 틀었지만 리에트의 화살이 바닥 홈을 깨뜨렸다. 금속 발이 반 박자 미끄러졌다.
도리안이 노린 일직선은 어긋났다. 하지만 그는 한 번으로 끝낼 사람이 아니었다. 더 낮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물살이 방향을 바꿨다. 우리가 지나온 턱방 쪽으로 검은 물이 거꾸로 밀려들었다. 위쪽 실무자들의 발소리도 다시 따라붙었다. 뒤에 남은 노장의 순번표가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셋으로 나눈 증거도 어느 하나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우리는 무엇을 들고 있는지 알았다. 반지와 톱니축만이 아니었다. 인질 명단과 출입 기록만도 아니었다. 빚을 지웠다는 말로 가족을 묶은 글줄, 공방 이름 뒤에 숨은 직계 대체 칸, 사람을 줄로 바꾸고 다시 사람 목에 걸던 절차,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게 늦춘 손까지 같이 들고 있었다.
남은 건 그 사슬을 누가 먼저 끊느냐였다.
나는 더 아래로 이어지는 정비 수로를 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 길은 도망치는 길이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세라 품 안의 첫 벌, 브론의 안주머니 속 심핵 조각, 미리엘이 외운 물 높이, 리에트가 갈라 들은 발소리, 내 옆구리에 눌린 셋째 벌이 한 줄로 이어지자 길의 이름이 달라졌다. 우리를 몰던 통로가, 이제는 우리가 읽어 끊을 길이 되었다.
브론이 젖은 손으로 안주머니를 한 번 더 눌렀다. 눈빛이 천천히 바뀌었다.
"멈춘다."
그가 낮게 말했다.
"아니. 끊는다."
그 말은 분노만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손수레 바퀴 높이를 다시 맞추고, 숨칸 덮개 안쪽 끈을 두 번 묶었다. 심핵 조각은 몸 안쪽에, 둘째 벌은 바퀴 아래에, 빈 축은 일부러 바깥에 보이게 두었다. 누가 낚아채도 처음 손에 걸리는 건 가짜 무게가 되게 만든 배치였다. 세라는 그 모습을 보고 첫 벌을 더 꼭 끌어안지 않았다. 오히려 팔꿈치 하나를 낮춰 병기 입에 걸릴 빛을 줄였다. 미리엘은 벽 표식을 하나 더 남기고, 방금 읽은 `확인자 둘` 문장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손가락 두 개를 접어 기억했다. 리에트는 위쪽 난간의 발목 앞 돌을 겨누고 있었다. 누군가 내려오면 죽이지 않고 멈출 자리였다.
그제야 길이 조금 달라졌다. 도리안이 우리를 미끼로 썼듯, 우리도 그의 병기고 버릇을 거꾸로 이용했다. 보이는 물건과 숨은 물건, 읽는 손과 막는 몸, 도망치는 발과 되돌아볼 표식을 서로 다른 칸에 놓으면 한 번에 삼켜지지 않는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장치를 만나기 전, 우리가 버리지 않을 순서를 우리 손으로 정한 첫 박자였다.
나는 그 한마디를 듣고 아래 물살 속 다음 발판을 골랐다. 도리안은 우리를 더 깊은 병기고로 끌어들이려 한다. 위쪽 사람들은 여전히 이름을 덮고 싶어 한다. 둘 다 하나를 버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말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도주는 끝났다.
완전히.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