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층 합 개방
상층 문 앞 반원 줄은 사람 다섯이 아무렇게나 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정면 돌문은 내 어깨보다 두 배는 넓었지만, 문틀 양옆 장치는 흩어진 손을 처음부터 허락하지 않는 모양으로 짜여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병목을 눕혀 고정하던 홈이 위아래로 세 칸 박혀 있었고, 왼쪽에는 납작한 석편을 끝까지 밀어 넣는 틈 하나와 그 아래 깊이가 다른 보조 받침 셋이 숨어 있었다. 발밑 반원 줄은 중앙이 가장 깊게 닳아 있었고, 양옆 두 자리는 반걸음씩 물러난 높이로 갈라져 있었다. 아래 낭떠러지 밑 그림자에선 누군가가 밧줄을 더듬으며 기어오르고 있었고, 위 반턱 바깥벽 굴곡 뒤에선 또 다른 손이 우리가 문을 여는 박자만 기다리고 있었다.
세라는 오른쪽 바깥 홈과 맞닿은 자리에서 방패를 세우지 않고 낮게 눕혔다. 방패 윗선이 병목 홈과 내 허리 높이를 동시에 가리지 않도록 계산한 각이었다. 브론은 왼편 석편 틈 아래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보조 받침 모서리 마모를 더듬었고, 미리엘은 오른쪽 병목 홈 가까이에 얼굴을 대지 않은 채 은향과 오래된 밀랍 냄새가 어느 칸에서 더 짙은지 구분했다. 리에트는 반원 줄 맨 뒤에서 활끝을 위 반턱과 아래 그늘 사이에 걸쳐 둔 채, 몸은 줄 안에 남기고 시야만 밖으로 빼고 있었다. 나는 중앙 닳은 자리 위에 발을 고정한 채 금속통을 두 손으로 들었다.
병 하나, 석편 하나, 음성 하나. 그리고 사람 위치.
아래에서 찢겨 올라온 줄들이 여기서 다시 맞물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람은 차갑고 말랐지만, 문 앞 공기는 그보다 더 오래 닫혀 있던 냄새를 품고 있었다. 병목 홈 셋 가운데 칸에만 은회색 막이 더 짙게 들러붙어 있었고, 석편 틈 아래 두 번째 받침엔 누군가 금속가루를 닦아 낸 흔적이 짧게 남아 있었다. 바닥 반원 줄 왼쪽 끝엔 발꿈치 자국만이 아니라, 무거운 물건 모서리가 여러 번 눌렀던 네모난 패임까지 겹쳐 있었다. 이 문은 무엇을 열쇠로 삼는지 숨기지 않았다. 대신 순서를 틀린 손을 오래 붙들 수 있게 만들어 두고 있었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두 번째 받침이 제일 많이 닳았어. 석편은 여기다.”
미리엘이 곧장 받았다.
“병은 가운데 홈이에요. 다른 두 칸은 눌린 결이 얕아요. 보조 봉함이거나 높이를 맞추는 자리예요.”
세라의 시선은 아직 문이 아니라 발밑 줄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 자리가 먼저다. 줄에서 빠지면 반응이 끊길 것 같아.”
나는 금속통 밑면 음각을 엄지로 쓸었다. `병 1 / 석편 / 음성`. 북하단에선 셋을 모으라는 말처럼 보였다. 여기선 셋을 어떤 자리에서 어떤 손으로 내놓으라는 문장으로 읽혔다.
“먼저 시험해 보자.”
세라가 내 말을 끊지 않았다. 브론이 석편을 꺼내 두 번째 받침 위에 살짝 올렸다. 세라는 오른쪽 바깥 홈에 맞춘 자리에서 반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리엘은 병목 홈 가운데와 내 사이에 선 채 분류표를 접어 손바닥 안에 숨겼다. 리에트는 마지막 자리를 비우지 않은 채 활시위를 반쯤만 당겼다.
“가겠다.”
내가 금속통을 병목 홈 가운데 높이에 맞춰 천천히 들자 문 안쪽에서 아주 낮은 걸림음이 한 번 돌았다.
오른편 가운데 홈이 안쪽으로 손톱 반 마디만큼 내려앉았다. 동시에 왼편 두 번째 받침도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반응은 맞았다. 하지만 돌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바닥 반원 줄 중앙에서 싸늘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멈춰.”
미리엘이 속삭였다.
“하나가 비었어요.”
그녀 시선 끝엔 오른쪽 병목 홈 맨아래 칸이 있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지만 홈 안쪽 벽에만 유독 짧은 긁힘이 남아 있었다. 병을 꽂는 자리가 아니라, 병목 높이를 받쳐 눌러 두는 버팀 자리처럼 보였다.
브론이 이를 다물었다.
“병 하나만 넣는 게 아니네. 받쳐 놓고, 높이를 맞춰 눌러야 해.”
나는 금속통을 내리지 않은 채 세라에게 말했다.
“방패 끝.”
세라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방패 아래 모서리를 병목 홈 맨아래 줄과 같은 높이로 천천히 밀어 올렸다. 쇠면이 돌에 스치자, 맨아래 홈 안쪽 어둠이 한 번 흔들렸다. 다음 순간 가운데 홈이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
브론이 짧게 웃음을 삼켰다.
“맞네. 병을 눕힌 뒤 다른 줄에서 높이를 고정하던 방식이야.”
하지만 반응은 거기까지였다. 문 아래 중앙 줄이 더 차갑게 식어 갈 뿐,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리에트가 뒤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아래 손이 반 층 더 붙었다.”
자갈이 긁히는 소리가 한 번, 두 번 가까워졌다. 아래 그림자 쪽 손은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문을 여는 박자를 익히려는 쪽이었다. 위 반턱 손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더 나빴다. 내려쏠 각 하나만 잡히면 바로 방해하겠다는 태도였다.
세라가 방패를 다시 눌렀다.
“정답 맞추기 오래 못 한다. 다음.”
미리엘은 손안의 분류표를 펴서 금속통 밑면 음각과 나란히 보았다. 글자는 다르지만 줄 맞춤이 닮아 있었다. 분류표 맨아래엔 `보관 협조자 지정` 아래 아주 짧은 칸 하나가 더 있었고, 거기엔 글자 대신 세 점이 찍혀 있었다.
“증인 수를 세는 양식과 비슷해요.”
“몇?”
“셋이나 다섯. 둘은 아니에요. 둘이면 줄이 이렇게 안 나뉘어요.”
브론이 바닥 줄 바깥을 망치 자루로 두드렸다. 왼쪽 바깥은 둔탁했고, 우리가 서 있는 줄 안쪽만 속 빈 듯 울렸다.
“다섯 쪽이다. 안에 얇은 관로가 이어져.”
세라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더 정리했다.
“브론 한 칸 왼앞. 미리엘은 중앙 뒤. 리에트는 뒤를 보되 줄에서 발 떼지 마.”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브론이 한 칸 왼쪽 앞으로 서자 왼편 두 번째 받침 진동이 안정됐다. 미리엘이 내 반걸음 뒤로 물러나 분류표를 가슴 높이에 세우자 오른쪽 맨위 병목 홈에서 아주 약한 숨 새는 소리가 났다. 리에트가 뒤쪽 줄을 밟은 순간 반원 줄 끝이 차갑게 잠겼다.
나는 그제야 장치 전체가 무엇을 하는지 더 분명히 봤다. 아래선 사람과 병과 기록을 찢어 올렸다. 여기선 그 셋을 원래 함께 있어야 할 순서로 다시 세우게 만든다. 누구 손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어느 위험을 받쳐 줄지, 누가 줄 밖 시야를 끊을지까지.
“세라.”
내가 낮게 불렀다.
“네 방패는 병 버팀이야.”
“알고 있어.”
“브론은 받침. 미리엘은 기록. 리에트는 증인.”
세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가운데.”
그 말은 장치를 위한 자리 설명이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다섯 중 누가 끊기면 전체가 무너지는지에 대한 판정처럼 들렸다. 하지만 감상할 틈은 없었다. 위 반턱 쪽에서 짧은 금속성 떨림이 한 번 울렸다. 누군가 갈고리 못 같은 걸 다시 준비하는 소리였다.
리에트의 활끝이 즉시 올라갔다.
“위 손 움직인다.”
“쏘면?”
세라가 물었다.
“죽이진 않을 거야. 박자 깨는 쪽이 먼저다.”
브론이 석편을 받침 위에 세우며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가 먼저 문을 깨워야지.”
나는 금속통 윗면 첫 줄을 눌렀다. 전에 북하단에서 반응했던 바로 그 줄이었다. 잡음이 짧게 일었다가 이번엔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열세 번째 줄은… 지운 쪽이 아니라… 묶인 쪽을 찾아라…`
음성이 거기까지 밀려 나오자, 문 왼편 석편 틈 안쪽에서 딸깍, 하는 작은 잠금 소리가 났다. 브론 손바닥 아래 받침 하나가 안쪽으로 한 마디 더 물러났다.
“좋아.”
브론이 숨을 죽였다.
“하나는 풀렸다.”
미리엘은 거의 동시에 병목 홈 위에 코를 가까이 대지 않은 채 냄새 변화를 읽었다.
“가운데만 열리면 안 돼요. 위칸 봉함도 반응했어요. 음성 조각이 다음 줄을 깨우는 거예요.”
나는 금속통을 더 누르려 했지만 세라가 바로 막았다.
“한 줄 더 열었다가 순서 틀리면?”
미리엘이 대신 답했다.
“봉함이 엉킬 수 있어요. 병 조건이 먼저 맞아야 해요.”
그 순간 위 반턱에서 짧은 쇳소리가 터졌다. 갈고리 못 하나가 날아와 리에트 왼쪽 뒤 돌면에 박혔다. 살을 노린 각도가 아니라 시야를 한순간 틀게 만드는 투척이었다. 리에트는 몸을 빼지 않고 바로 화살 하나를 되쏘아 위 돌턱 끝을 긁었다. 석분이 쏟아졌고, 위쪽 손 그림자가 반걸음 물러났다.
“한 번 더 오면 맞추려 든다.”
리에트가 말했다.
세라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전에 연다.”
브론이 왼편 받침 아래를 더듬다가 아주 얇은 홈 하나를 찾아냈다. 그는 손톱으로 안쪽 먼지를 긁어 내고 혀를 찼다.
“받침 밑에 보조 고정핀 구멍 있다. 병만 맞추는 게 아니라 석편 깊이도 잠가야 해.”
“무슨 걸로?”
브론은 내 손에 들린 금속통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건 음성용. 더 얇은 게 필요해.”
미리엘이 분류표를 접어 들고 망설였다.
“종이로는 안 돼요.”
세라가 허리춤을 더듬어 은장 고리 하나를 뽑아 브론에게 던졌다. 조금 전 아래 작업칸에서 속임수 신호선에 썼던 것과 같은 계열의 얇은 고리였다.
“이건?”
브론이 받아 구멍에 대 보더니 눈이 번뜩였다.
“맞는다.”
그는 고리를 구멍에 반쯤 밀어 넣고 석편을 다시 눌렀다. 걸림이 맞는 순간, 왼편 틈 안쪽에서 묵직한 잠금 소리가 한 번 더 돌아갔다. 이번엔 오른쪽 병목 홈 맨아래칸도 아주 미세하게 앞으로 밀렸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이제 병이에요.”
“병은 없잖아.”
세라 말에 나는 금속통과 분류표, 그리고 미리엘 품 안의 유리 파편을 동시에 떠올렸다. 완성형 본체는 없지만, 이 문은 진짜 약병보다 거기에 남은 흔적이랑 순서를 먼저 읽는 놈일 수도 있었다. 북하단도 그랬다. 병, 기록, 기준 조각. 완전한 물건보다 그 조합과 순서가 더 중요했다.
“파편.”
미리엘은 바로 이해했다. 그녀는 천에 감싸 둔 유리 파편을 꺼냈다. 완성형 백은 수액이 남긴 은회색 막이 가장자리에 아직 얇게 붙어 있었다.
“이걸 홈에 눕히면 깨질 수 있어요.”
“안 깨지게 받쳐.”
세라가 방패를 더 낮췄다. 브론은 남은 손으로 병목 홈 가운데 홈의 폭을 재고 파편 각을 보정했다.
“그대로 밀어 넣지 마. 왼쪽부터 눕혀.”
미리엘이 숨을 한 번 고른 뒤 파편을 홈 가운데 가장자리에 먼저 걸쳤다. 은회색 막이 돌면과 맞닿는 순간, 홈 안쪽에서 싸한 냄새가 확 퍼졌다. 파편이 깨질 듯 떨렸지만 세라 방패 끝이 아래 홈 받침 역할을 하며 각을 잡아 줬다. 브론은 왼편 석편을 더 깊게 눌렀고, 나는 중앙 줄 위에서 금속통을 가슴 높이로 고정했다. 리에트는 뒤를 보며 활을 내려놓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이번엔 분명한 연동음이 돌았다. 하나, 둘, 셋. 병목 홈 셋이 차례로 얕게 물러났고, 왼편 틈 아래 받침 둘이 동시에 잠겼다. 바닥 반원 줄 끝을 타고 차가운 전류 같은 감각이 한 바퀴 돌더니 중앙에서 멈췄다.
금속통 윗면 두 번째 줄이 스스로 반쯤 풀렸다.
“지금이에요. 두 번째 줄.”
나는 곧바로 눌렀다.
이번엔 잡음이 훨씬 줄었다.
`…유예는 치료가 아니라 관리다. 열세 번째 줄은 병으로 남기지 마라. 북하단을 비우면 상층에서 사람 줄을 먼저 맞춰라…`
목소리는 거기서 다시 갈라졌지만 마지막 두 단어가 전에 없던 무게로 남았다.
사람 줄.
세라도 들었다. 브론도, 미리엘도, 리에트도 같은 순간 숨이 달라졌다. 이 문이 우리를 시험하는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래 그늘 쪽에서 밧줄이 확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망가뜨린 줄 대신 다른 홈을 타고 누군가 몸을 올리고 있었다. 위 반턱 손도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돌면 너머에서 짧은 발소리가 옮겨 붙었다.
“양쪽 다 온다.”
리에트가 말했다.
세라는 선택을 미루지 않았다.
“줄 유지.”
그 한마디로 모든 역할이 다시 고정됐다.
브론은 왼편 받침과 석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미리엘은 병목 홈에 걸친 파편이 흔들리지 않게 손등으로만 바람을 막았다.
리에트는 줄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몸만 틀어 위 반턱과 아래 사면을 번갈아 쏠 수 있는 각을 잡았다.
세라는 오른쪽 바깥 자리에서 방패를 문과 리에트 사이 중간에 눕혀, 날아오는 투척이 병목 홈을 직접 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중앙 줄 위에서 금속통을 두 손으로 올린 채 마지막 남은 봉함이 어디서 열릴지 기다렸다.
문 아래 바닥선이 천천히 갈라졌다.
돌문이 활짝 열리는 건 아니었다. 먼저 중앙 세로선 하나가 어둡게 벌어졌고, 그 틈 사이로 안쪽 공기가 훅 밀려 나왔다. 북하단 보관칸보다 더 차갑고, 약재 냄새보다 금속 냄새가 짙은 공기였다.
틈 안쪽 첫 칸에는 허리 높이 선반이 바로 붙어 있었다. 선반 정중앙엔 은빛 막이 얇게 서린 길쭉한 유리 용기가 쇠고리에 눕혀 고정돼 있었다. 북하단 빈 병자리 찌꺼기보다 훨씬 맑고, 훨씬 무거운 빛이었다. 그 뒤 반걸음쯤 물러난 자리엔 사람 팔뚝만 한 기록축이 세워져 있었고, 축 끝 금속패 아래엔 긁힌 글자가 세로로 반쯤 남아 있었다. 더 안쪽 오른편에는 손 하나 들어갈 만한 좁은 보관칸이 덧붙어 있었지만, 중앙 줄에서 몸을 빼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미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안쪽에 본체가 있어요.”
완성형 백은 수액 병인지, 그 병을 고정한 다른 용기인지는 아직 전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은회색 액막이 빛을 한 줄 붙잡는 모양은 북하단 빈 병자리 찌꺼기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 옆 기록축 금속패엔 긁힌 글자가 반쯤 더 읽혔다.
`…열세 번째 줄…`
브론이 이를 악물었다.
“문 더 열려야 꺼낼 수 있다.”
“얼마나?”
세라가 묻자 브론은 잠금 소리를 들으며 답했다.
“누가 줄에서 빠지면 바로 닫힐 만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래 사면에서 짧은 쇳소리가 튀었다. 누군가 마지막 홈에 갈고리를 걸었다. 위 반턱에서도 그림자 하나가 낮게 몸을 던질 준비를 했다. 리에트 화살이 먼저 날아가 위쪽 돌면을 깨뜨렸고, 세라 방패엔 아래서 던진 얇은 못 하나가 박혔다. 충격이 방패를 타고 울렸지만 그녀는 자리를 지키고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드리언.”
세라가 낮고 단단하게 불렀다.
“순서 잡아.”
나는 안쪽 선반과 본체, 반걸음 뒤 기록축, 더 안쪽 좁은 보관칸, 그리고 우리 다섯의 줄을 한 번에 보았다. 문은 열리기 시작했지만 이 장치는 마지막까지 한 사람만 안으로 들여보내는 식으로 설계됐을 가능성이 컸다. 누군가 줄을 지켜야 하고, 누군가가 손을 넣어 가져와야 한다. 잘못 고르면 문이 닫히거나 병이 깨지거나, 기록축만 빼고 사람을 잃는다.
금속통 안쪽에서 마지막 봉함선이 아주 얇게 떨렸다. 아직 다 풀리진 않았지만 안의 목소리가 남은 말을 겨우 밀어 올리듯 숨을 긁었다.
`…먼저 들어가는 자보다… 줄을 남기는 자를…`
목소리는 거기서 꺼졌다.
세라가 방패를 더 눌렀다. 브론이 왼편 받침을 놓지 않은 손에 힘을 주었다. 미리엘은 병목 홈에 걸친 파편을 감싼 손끝을 떨지 않게 숨을 멈췄고, 리에트는 두 번째 화살을 걸며 위아래 손의 박자를 동시에 읽었다.
그 순간 위 반턱에서 더 큰 그림자가 미끄러졌다. 사람이 아니라 줄 끝에 묶인 검은 모래주머니였다. 문 앞 반원 줄을 직접 무너뜨리진 못해도, 우리 시야와 발목을 동시에 흔들어 하나를 줄 밖으로 빼내려는 수였다.
“위!”
리에트 화살이 먼저 날아가 모래주머니 한쪽을 찢었다. 검은 가루가 허공에 퍼졌지만 완전히 꺾이진 않았다. 세라가 방패 윗선을 치켜올려 내 정면 위로 떨어질 각을 살짝 바꾸자, 주머니는 중앙이 아니라 오른편 줄 바깥으로 비껴 떨어졌다. 그래도 충격이 돌바닥을 때리며 반원 줄 끝을 거칠게 울렸다.
차가운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흔들렸다. 안쪽 틈새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다시 좁아졌다.
“한 번 더 맞으면 닫힌다.”
브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래 사면 쪽 손도 그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갈고리 하나가 턱 아래 걸리며, 누군가 몸을 세우는 소리가 더 분명해졌다. 그쪽은 문을 열 능력이 없었다. 대신 우리가 다 열어 놓은 틈에 손을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충분해 보였다.
세라가 짧게 말했다.
“가져갈 순서만 정해. 막는 건 우리가 한다.”
나는 틈 안쪽 선반 높이를 다시 봤다. 본체 용기는 쇠고리에 눕혀 고정돼 있었고, 기록축은 그보다 뒤에 반걸음 물러나 있었다. 좁은 보관칸은 더 안쪽으로 틀어져 있어서 손을 깊이 넣지 않으면 닿지 않았다. 본체를 먼저 잡으면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릴 것이다. 기록축을 먼저 빼면 뒤 잠금이 풀릴 수 있지만, 그 순간 앞 병 고리가 다시 잠길지 알 수 없었다.
미리엘이 틈을 들여다본 채 입술만 움직였다.
“병을 먼저 건드리면 깨질 수 있어요. 은막이 아직 살아 있어요.”
브론이 곧바로 받았다.
“기록축도 그냥 잡아 빼면 안 돼. 받침 쪽이 뒤에서 버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세라는 방패를 고정한 채 고개만 미세하게 틀었다.
“둘 다 못 잡으면?”
“줄만 남는다.”
내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 대답이 지금 제일 싫은 진실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금속통을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 병, 석편, 음성, 사람 위치. 여기까지는 문을 여는 순서였다. 안쪽에선 그 순서가 뒤집힐 수 있었다. 무엇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느냐보다, 무엇을 남겨도 문이 닫히지 않느냐가 더 중요했다.
기록축 금속패에 남은 긁힌 줄이 눈에 걸렸다. 글자 절반은 닳아 있었지만, 마지막 세 글자만은 분명했다.
`…인계 전`
인계 전 보관칸.
이 방이 최종 보관실이 아니라면, 본체를 옮기기 전에 반드시 기록을 한 번 더 맞춰 보는 자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눈앞 본체가 전부가 아니라, 사람과 기록을 먼저 맞춘 뒤 마지막 고정이 풀릴 가능성이 더 컸다.
“기록이 먼저야.”
세라 눈이 바로 나를 향했다.
“이유.”
“이건 최종 칸이 아니야. 인계 전 칸이면 기록축이 잠금 순서를 쥐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병을 먼저 건드리면 고리째 물릴 수 있어.”
브론이 잠깐 틈 안쪽을 노려보더니 낮게 침을 뱉었다.
“맞아. 고리 아래쪽에 힘줄 하나 더 있어. 앞 병만 당기면 뒤 받침이 잠긴다.”
미리엘은 안도와 두려움이 반쯤 섞인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기록에 분류명이 남아 있으면, 백은 수액이 어떤 조건으로 다뤄졌는지도 같이 나올 거예요.”
세라가 바로 결론을 냈다.
“좋다. 기록축 먼저. 하지만 줄은 안 비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록축은 틈 안으로 반걸음 들어간 자리에 서 있었다. 줄에서 완전히 빠지지 않고 닿을 방법이 필요했다.
브론이 먼저 대안을 던졌다.
“내 짐줄.”
그는 허리 뒤로 감아 두었던 짧은 갈색 줄을 한 손으로 끌어냈다. 끝엔 납작한 쇠걸이 하나가 묶여 있었다. 짐을 세로로 당길 때 쓰는 고리였다.
“축 끝 고리에 걸면 끌어올 수 있어.”
“길이가 부족해.”
리에트가 위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한 뼘만 더 있으면 닿는다.”
세라는 방패를 움직이지 못했다. 미리엘 손도 병목 홈을 떠날 수 없었다. 내가 중앙에서 금속통을 놓으면 마지막 봉함 반응이 꺼질 수 있었다.
순간, 내 팔목에 감겨 있던 균열난 성철 부적 끈이 눈에 들어왔다. 로웬이 남긴 그 가느다란 끈은 여러 번 꿰맨 자국 때문에 보기보다 질겼다. 부적 본체는 여전히 내 손목 안쪽에서 차갑게 닿아 있었다.
나는 짧게 말했다.
“이거 붙여.”
브론이 내 손목 쪽을 힐끗 봤다.
“부적 끈?”
“끈만. 부적은 남겨.”
세라가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왼손으로 금속통을 조금 더 끌어안고 오른손 팔목을 내밀자, 브론은 이를 다문 채 성철 부적 끝 매듭 하나만 재빠르게 풀었다. 금속 조각 자체는 내 손목 안에 남기고, 덧댄 끈 부분만 자기 짐줄 쇠걸이에 묶었다. 길이는 한 뼘 조금 넘게 늘어났다.
“딱 된다.”
브론이 말했다.
리에트가 아래를 노려보며 덧붙였다.
“빨리.”
아래 손이 이제 턱 가까이 올라왔다. 그림자 너머로 장갑 낀 손등이 한 번 번뜩였다. 왕국 회수대 장갑도, 성도 봉인국 장갑도 아니었다. 손가락 관절마다 얇은 금속 덧댐이 있는, 사람을 붙잡기보다 틈새에 먼저 걸어 들어가는 손이었다.
세라도 그걸 봤다.
“아래는 물건보다 줄 끊는 쪽이다.”
그 한마디로 더 망설일 틈이 없어졌다.
브론은 쇠걸이를 내게 건넸다.
“내가 던지면 각 틀어진다. 네가 중앙에서 뻗어.”
나는 금속통을 품 안과 턱 사이에 고정했다. 두 손을 다 쓰지 못하는 자세였지만, 어차피 완전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중앙 줄 위에서 반 발짝만 더 밀어 넣고, 쇠걸이를 기록축 끝 고리에 걸어야 했다.
“세라.”
“버틴다.”
“브론.”
“받침 유지.”
“미리엘.”
“병막 안 흔들리게 붙들어요.”
“리에트.”
“위아래 박자 끊는다.”
답은 다 짧았다. 그래서 더 믿을 만했다.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무릎을 굽혔다. 중앙 줄은 그대로 밟되, 상체만 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차가운 금속 냄새가 얼굴을 스쳤고, 기록축 끝 고리가 예상보다 조금 더 뒤에 있다는 걸 바로 알았다. 한 치만 더.
그 순간 아래서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튀었다. 누군가 갈고리 끝을 문턱 아래로 던져 반원 줄을 직접 당기려 했다. 리에트 화살이 아래로 먼저 날아가 돌면을 치고 튕겼다. 완전히 막진 못했지만, 갈고리 각은 살짝 틀어졌다.
“계속.”
리에트가 낮게 내뱉었다.
나는 쇠걸이를 더 밀어 넣었다. 팔꿈치가 떨렸고, 중앙 줄에서 발뒤꿈치가 미세하게 들렸다. 곧바로 바닥 진동이 싸늘하게 반응했다. 줄이 내 무게 변화까지 읽고 있었다.
세라 방패가 옆에서 더 낮게 깔렸다. 그녀는 자리를 비우지 않은 채 몸만 숙여 내 오른쪽 허벅지 옆을 떠받쳤다. 내가 줄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방패 옆면으로 무게를 받쳐 준 것이다.
“지금.”
브론이 속삭였다.
쇠걸이 끝이 금속에 닿았다. 한 번 미끄러졌다. 다시 밀어 넣자, 이번엔 얇은 고리 하나가 걸리며 아주 작은 울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잡았다.
“걸렸어.”
브론이 곧장 줄 반대쪽 끝을 잡았다.
“당기지 마. 비틀어.”
나는 쇠걸이를 살짝 비틀었다. 기록축 받침 아래에서 짧은 마찰음이 났다. 뒤 잠금 하나가 풀렸다는 소리였다. 동시에 문 안쪽 선반 아래 어딘가에서 작은 톱니가 돌아가는 기색이 느껴졌다.
미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병 고리가 같이 움직여요.”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잠기나?”
“아니요. 반대로 풀리는 쪽이에요.”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맞췄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위 반턱에서 두 번째 모래주머니가 아니라, 짧은 사슬 끝에 묶인 철추가 날아왔다. 이번엔 세라 방패를 노린 각이었다. 방패가 들리면 병목 홈 받침이 먼저 풀린다. 리에트가 늦지 않게 위쪽 손목 근처로 화살을 꽂아 넣자 철추 궤도가 크게 틀어졌지만, 끝이 세라 방패 가장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충격에 방패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들렸다.
병목 홈 맨아래 버팀이 떨렸다. 미리엘 손등 위로 유리 파편이 미세하게 긁혔다.
“세라.”
내가 부르기도 전에 그녀가 다시 방패를 눌렀다. 손등에 철추 자국이 붉게 번졌지만, 힘은 풀리지 않았다.
“빼.”
짧은 명령이었다.
나는 기록축 쪽 쇠걸이를 한 번 더 비틀었다. 브론이 반대쪽에서 줄을 아주 천천히 당겼다. 기록축이 반걸음 뒤 자리에서 앞으로 한 치 움직였다. 먼지가 떨어지고, 금속패 아래 숨은 두 번째 줄이 드러났다.
`…보관자 단독 인계 금지…`
미리엘 입술이 굳었다.
“단독 인계 금지?”
세라도 그 말을 바로 삼켰다.
호의가 아니라 절차였다. 누군가를 따로 떼어 상층으로 올리는 걸 금지하는 문장. 적어도 이 기록을 만들던 시기엔 그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성도와 기사단이 쓰는 언어가 얼마나 뒤틀렸는지 선명해졌다. 보호, 협조, 유예. 겉말은 달라도 하는 일은 사람을 혼자 떼어 올리는 쪽으로만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문장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아래 손이 결국 턱 위로 하나 올라왔다. 어둠 속에서 검은 두건 끝이 보였고, 금속 덧댄 장갑이 문틈을 향해 곧장 뻗었다. 놈은 우리를 찌르지 않았다. 먼저 기록축 줄이나 병목 홈 쪽 손을 치면 충분하다는 걸 아는 움직임이었다.
리에트 화살이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이번엔 돌을 튕기지 않고 장갑 바로 앞 턱을 찍었다. 석분이 터지며 손이 잠시 멈췄지만, 완전히 떨어지진 않았다.
“하나 더는 못 막아.”
리에트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나는 기록축 끝을 손가락으로 겨우 당겨 보았다. 조금 더. 한 치만 더 앞으로 오면, 손을 깊이 넣지 않고도 금속패를 잡아 꺼낼 수 있다.
브론이 받침을 누른 채 말했다.
“축 빼면 병 고리도 더 풀릴 거다. 대신 줄 흔들린다.”
“흔들려도 해.”
세라가 잘라 말했다.
미리엘이 곧장 덧붙였다.
“기록 먼저 확인하면 병을 옮길 각도도 알 수 있어요.”
내가 마지막 힘을 주려던 순간, 금속통 안쪽 마지막 봉함선이 마침내 스스로 풀렸다. 아무도 누르지 않았는데도 아주 짧은 숨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병은 사람을 살리는 척 남는다. 줄을 남긴 자만 기록을 꺼내고, 기록을 읽은 자만 병을 옮겨라…`
이번엔 말이 분명했다.
브론이 헛웃음을 삼켰다.
“됐네. 둘 다 순서 박았다.”
세라가 더 짧게 말했다.
“기록.”
나는 그대로 힘을 줬다. 브론이 줄을 받아 당기고, 세라가 내 하중이 줄 밖으로 빠지지 않게 방패 옆면으로 버텼다. 기록축이 드디어 앞 선반 가까이 미끄러져 나왔다. 금속패가 틈 바깥 빛을 받는 순간, 더 아래 숨었던 세 번째 줄까지 드러났다.
`…백은 수액 본체 / 왕좌 계열 반응자 관리용 / 치료 전용 아님…`
미리엘 숨이 끊기듯 멎었다.
“관리용…”
엘레나 얼굴이 번개처럼 스쳤다. 치료라 불렸던 것, 유예라 불렸던 것, 보호 명부라 불렸던 것이 전부 사람을 살리기보다 반응자를 오래 붙들고 분류하려는 일이었다.
분노가 올라왔지만, 지금 붙잡을 건 감정이 아니었다. 손을 놓는 순간 기록축은 다시 안으로 미끄러질 수 있었다.
아래 장갑 손이 그 틈을 노리고 문턱에 바짝 붙었다. 놈은 이번엔 갈고리가 아니라 짧은 칼날 하나를 뒤집어 쥐고 있었다. 줄을 끊을 생각이었다.
“리에트.”
“본다.”
화살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칼날 옆 돌면을 찍으며 튀긴 석분이 장갑 등짝을 때렸다. 놈 손이 움찔했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위 반턱 쪽에선 세 번째 그림자가 이미 몸을 던질 각을 재고 있었다.
세라가 처음으로 내게 소리를 낮춰 물었다.
“지금 뭘 빼?”
기록축은 거의 손에 닿았다. 본체 용기는 아직 고리에 눌려 있었다. 좁은 보관칸 안쪽은 어둡지만, 뭔가 얇은 금속편 하나가 세로로 꽂혀 있는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였다. 셋 다 한 번에 챙길 순 없었다.
나는 기록축 끝에 쇠걸이를 건 채 대답했다.
“기록축 먼저. 본체는 다음 박자.”
“왜?”
“병은 관리용이라도 엘레나한테 쓸 길이 있을 수 있어. 그런데 각도 모르면 깨져. 기록이 옮기는 법을 쥐고 있어.”
브론이 이를 갈며 동의했다.
“맞다. 지금 병 먼저 당기면 고리 걸린 채 목 부러질 수 있어.”
세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럼 기록축.”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위 반턱 그림자가 결국 몸을 던졌다. 사람 하나가 아니라 짧은 밧줄에 몸을 맡긴 채, 우리 오른편 줄 바깥으로 낮게 스쳐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문 바로 앞이 아니라 세라 방패 뒷각, 병목 홈 받침이 비는 자리를 노린 진입이었다.
리에트가 마지막까지 아껴 둔 두 번째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놈 어깨를 꿰지 못하고 소매만 찢었지만, 몸의 축을 비틀기엔 충분했다. 세라가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방패 옆날로 놈 팔목을 밀어 냈다. 사람은 줄 안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오른편 바깥 턱에 어깨부터 부딪힌 채 미끄러졌다.
그래도 충격은 컸다. 병목 홈 버팀이 다시 한 번 흔들렸고, 미리엘 손끝 위 유리 파편에서 미세한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오래 못 버텨요.”
미리엘 목소리가 떨렸지만 손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그 한계가 오기 전에 끝내야 했다.
나는 기록축 금속패를 손끝으로 잡았다. 차갑고 끈적한 먼지가 손바닥에 묻었다. 한 번에 뽑지 않고, 브론이 만든 쇠걸이 각에 맞춰 살짝 들어 올리자 축 밑면이 선반 아래 홈에서 빠져나오는 감각이 전해졌다.
“나온다.”
브론이 줄을 당겼고, 세라가 내 하중을 받쳤다. 기록축이 반쯤 틈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동시에 본체 용기를 누르던 쇠고리도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문 안쪽 어디선가 마지막 잠금 하나가 낮게 풀렸다.
기록축이 완전히 빠져나온 순간, 내 품 안 금속통과 문 안쪽 본체 용기 사이에서 미세한 공명음이 겹쳤다. 서로 같은 줄에 묶인 물건끼리 뒤늦게 맞물리는 듯한 소리였다.
기록축은 예상보다 무거웠다. 팔뚝만 한 길이였지만 안쪽에 금속심이 든 듯 묵직했다. 축 표면엔 오래된 검푸른 칠이 벗겨져 있었고, 가운데를 감싼 띠엔 로웬이 남긴 메모 끝 사선과 닮은 흠집이 세 줄 나 있었다.
로웬이 여기까지 왔거나, 적어도 이걸 본 누군가와 닿아 있었다.
아래 장갑 손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이번엔 문틈이 아니라 브론 쪽 줄을 노렸다. 리에트가 활몸으로 각을 쳐내며 물러서지 않는 대신 줄 안에서 몸을 틀었다. 화살은 이미 다 쓴 상태였다.
“끝내.”
리에트가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기록축을 품으로 끌어안고 중앙 줄 위로 상체를 되돌렸다. 그 순간 문 안쪽 본체 용기 뒤, 좁은 보관칸 어둠에서 반쯤 튀어나온 금속편 하나가 잠깐 빛을 받았다. 길쭉한 얇은 패였다. 그리고 그 윗면엔 글자 하나가 거의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엘`
엘레나 이름의 첫 글자와 같다고 단정할 순 없었다. 하지만 너무 짧고, 너무 노골적으로 마음을 잡아당기는 표식이었다.
미리엘도 그걸 봤다.
“안쪽 칸에도 있어요.”
세라가 바로 물었다.
“본체 말고?”
“얇은 패 하나. 환자표나 분기표 같아요.”
브론이 기록축을 내 손에서 받아 옆구리에 끼며 낮게 말했다.
“그거 건드리려면 누가 더 들어가야 해.”
세라는 여전히 줄을 비우지 않은 채 문 안쪽과 위아래 추적 손을 번갈아 봤다. 판단은 빨랐지만 억지로 서두르진 않았다.
“오늘 여기서 다 못 가져간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기록축 하나를 빼는 동안에도 줄은 두 번이나 닫힐 뻔했고, 미리엘 손밑 파편은 이미 금이 갔다. 본체와 안쪽 패까지 같은 박자 안에 챙기려 들면 누군가는 줄을 놓치고, 누군가는 손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닫고 나갈 수도 없었다. 기록축에 적힌 첫 줄만으로도 이미 돌아갈 길이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백은 수액 본체는 치료 전용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종루를 만든 쪽은 그렇게 적어 두지 않았다.
나는 기록축 띠를 엄지로 눌렀다. 딱딱한 금속 감촉 아래, 아주 얇은 틈 하나가 더 있었다. 열쇠가 없어도 손톱만 넣으면 비틀 수 있게 돼 있었다.
“축부터 연다.”
세라가 짧게 물었다.
“지금?”
“지금. 병 옮기는 법이 안에 있으면 다음 박자 바로 잡을 수 있어.”
브론이 중앙 줄 안쪽으로 몸을 더 붙였다.
“그 사이 내가 받침은 잡는다.”
미리엘은 갈라진 파편을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버틸게요.”
리에트는 활대 끝으로 아래 장갑 손을 다시 밀어내며 씹듯 말했다.
“길게는 안 된다.”
나는 기록축 가운데 띠를 비틀었다. 오래 눌려 있던 금속이 마찰음을 내며 반 바퀴 돌아갔다. 축 끝 작은 틈이 벌어졌고, 그 안에서 얇게 말린 회백색 막대 하나와 짧은 금속패 반쪽이 밀려 나왔다.
먼저 보인 건 글자가 아니라 도식이었다. 병을 눕힌 선반, 그 뒤 기록축 자리, 더 안쪽 좁은 칸, 그리고 바닥 반원 줄 다섯 자리. 마지막엔 화살표 하나가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 바깥 자리에서 안쪽 칸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라 자리였다.
그리고 그 아래 짧은 문장 하나.
`줄을 남기는 방패가 안쪽 분기표를 뽑는다.`
세라 눈빛이 바로 굳었다. 그녀 역시 그 문장을 읽었다.
본체를 옮기는 순서보다 먼저, 안쪽 좁은 칸 패를 뽑는 사람은 중앙의 나도, 기록을 든 브론도 아니었다. 줄을 남기는 방패. 지금 오른쪽 바깥 자리를 지키는 세라였다.
위 반턱에서 다시 돌가루가 쏟아졌다. 아래 장갑 손은 세 번째 갈고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엘 손밑 파편의 금도 더 길어졌다. 시간이 없다는 사실만은 모두가 같은 무게로 느꼈다.
세라가 방패를 더 눌러 문턱을 버티며 나를 보았다.
“다음은 내 차례냐.”
나는 기록축 속 도식과 안쪽 보관칸, 본체 용기, 그리고 그녀 발밑 줄을 동시에 봤다. 방패를 든 사람이 줄을 남긴 채 안쪽 분기표를 뽑으려면, 지금보다 더 위험한 자세를 버텨야 했다. 잘못하면 방패 받침이 풀리고 문도 같이 닫힌다.
그래도 그 길 외엔 없었다.
“그래.”
나는 대답했다.
“본체보다 먼저, 안쪽 칸이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