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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기 전에 서방으로

배수 통로 끝에서 몸을 비틀어 나오자 새벽 공기가 목 안쪽을 거칠게 긁었다. 뒤쪽에는 우리가 빠져나온 낮은 구멍이 검은 입처럼 벌어져 있었고, 정면 아래쪽에는 얕은 개울물이 폐수문의 진흙을 얇게 훑고 흘렀다. 왼쪽에는 지붕 한쪽이 주저앉은 점검 막사가 기울어 서 있었고, 오른쪽 둔덕 너머로는 왕도 성벽의 윗선이 흐린 잿빛으로 눌려 보였다. 아직 빛은 낮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우리를 숨겨 주기에는 지하에서 끌고 나온 냄새가 너무 짙었다.

리에트는 가장 먼저 둔덕 아래에 엎드렸다. 활을 잡지 않고 풀이 누운 방향과 진흙 위 발자국을 읽었다. 브론은 내 품 쪽을 보며 손을 내렸다. 여기서 기록을 꺼내지 말라는 신호였다. 미리엘은 통로 입구 옆 물웅덩이와 막사 문턱을 번갈아 봤고, 세라는 맨 마지막으로 빠져나와 무너진 수문판을 두 손으로 당겼다. 젖은 널빤지가 돌에 한 번 걸렸다가, 낮은 소리를 내며 입구 절반을 가렸다.

위쪽 왕도에서는 경계뿔이 아직 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우리가 앞서 나와서가 아니라, 저들이 아직 무슨 이름으로 우리를 부를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도는 젖은 기록을 수습한다고 말할 것이다. 왕국은 무단 잠입과 증거 탈취를 말할 것이다. 말이 정해지면 발도 빨라진다. 그전까지 이 폐수문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들고 나온 것을 다시 나눠야 했다.

브론이 턱짓으로 막사 안쪽을 가리켰다.

“마른 널판부터.”

대답할 틈도 없이 그가 움직였다. 점검 막사 안은 비좁았다. 중앙에는 뒤집힌 상자 하나가 있었고, 오른쪽 바닥에는 모래가 밀려 들어와 물기를 조금 잡아 주고 있었다. 왼쪽 벽에는 녹슨 갈고리 둘이 비뚤게 매달렸고, 지붕이 꺼진 틈으로 새벽빛이 얇게 들어왔다. 빛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젖은 종이에서 어느 부분이 더 번지는지 볼 정도는 됐다.

세라는 막사 안으로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턱 안쪽에 비스듬히 서서 바깥 둔덕과 우리 손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검집 끝만 낮췄다. 문서고 안에서처럼 그녀는 싸움을 시작하기보다 추격의 박자를 늦출 자리를 먼저 골랐다.

브론은 뒤집힌 상자를 세웠다. 상자 윗면에는 오래된 기름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기 겉옷 안쪽에서 얇은 천을 꺼내 상자 위에 깔았다. 미리엘은 소매 끝으로 천 가장자리의 물기를 눌러 빼고, 손가락으로 네 모서리를 가볍게 고정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각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우리는 아직 안전하지 않았고,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부터 다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품 안쪽에서 로웬의 기록 튜브를 꺼냈다. 지하에서 감싼 기름먹인 천은 차갑게 젖어 있었지만, 안쪽 먹물은 더 번지지 않았다. 브론은 물막 조각과 철판 조각을 같은 상자 위에 두지 말라고 했다. 그는 갈고리 아래에 있던 부서진 널빤지 하나를 더 가져와 세 손가락 너비만큼 거리를 벌렸다.

“종이와 철을 붙이지 마. 눌림이 섞인다.”

“여기서 다 보지 않아.”

내가 먼저 말했다.

미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표식, 첫 줄, 끝 경고, 번호.”

“그 순서로만.”

나는 튜브 끝 봉함끈을 아주 조금 풀었다. 종이가 스스로 벌어질 만큼만. 더 펼치면 욕심이었다. 로웬이 남긴 건 긴 고백이 아니었다. 잘못 읽으면 다시 저쪽 칸에 붙잡히는 순서였다.

검게 흐린 첫 줄이 보였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그 아래 줄은 물을 먹어 가장자리가 번졌지만, 방향은 살아 있었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막사 안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하에서 보았을 때보다, 바깥에서 보니 문장은 더 냉정했다. 왕도 아래를 더 파지 말 것. 서쪽에서 먼저 맞출 것. 남은 것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먼저 읽을 자리를 고르라는 지시였다.

미리엘은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녀는 줄 간격과 접힌 자국을 먼저 따라갔다. 손톱 끝이 종이에 닿기 직전 멈췄다.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그녀가 낮게 읽었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읽는 순서예요. 성도 문서는 윗칸부터 보게 만들어요. 큰 제목을 붙이고, 그 안에 사람을 넣고, 그다음 끝번호로 닫죠. 로웬은 반대로 남긴 거예요. 큰 제목을 보지 말고, 바깥 자리에서 먼저 맞춰 보라고.”

브론은 철판 조각을 비스듬히 세워 새벽빛을 받게 했다. 젖은 표면 아래 눌린 홈이 아주 약하게 살아났다. 그는 글자가 아니라 감긴 방향을 보았다.

“급히 숨기려고 접은 게 아니다.”

그가 말했다.

“다음 손이 펼칠 자리를 남겨 두고 감았어. 혼자 보고 태울 기록이면 이렇게 안 접어.”

리에트가 둔덕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막사 문턱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시선은 첫 줄이 아니라 튜브 모서리에 남은 가는 잎맥 문양에 꽂혔다. 물을 먹어 흐렸지만, 선이 갈라지는 결은 분명했다.

“장례 문양이 아니야.”

“숲 쪽 표식?”

내가 묻자 리에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튜브를 보다가 막사 밖 기둥을 봤다. 폐수문 기둥 안쪽, 이끼 사이에 비슷한 긁힘이 하나 더 있었다. 누가 오래전 손톱이나 얇은 칼끝으로 남긴 듯한 선이었다.

“우회 길을 남길 때 쓰는 방식이야. 첫 던전 벽화 가장자리에도 같은 결이 있었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손안의 튜브 무게를 다시 느꼈다. 첫 던전에서 보았던 희미한 선, 회색 종루에서 들은 끊긴 말, 문서고 안의 공동 서명 원문, 그리고 지금 이 폐수문 기둥의 긁힘이 같은 방향으로 이어졌다. 로웬은 문장을 숨긴 사람이 아니었다. 길을 갈라 놓은 사람이었다.

미리엘은 물막 조각을 빛 쪽으로 기울였다. 글자는 거의 풀렸지만 두 어절이 남아 있었다.

`서쪽 열람 후`

브론은 그 조각을 받지 않았다. 손바닥의 열에 먹물이 더 풀릴까 봐서였다. 대신 상자 모서리에 얇은 나무 조각을 끼워, 물막 조각이 천에 바로 눌리지 않게 띄웠다.

“문장보다 지지대가 먼저다.”

그 말은 투박했지만 맞았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해석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록이 다음 장소까지 살아남게 만드는 것이었다.

튜브 안쪽 아래에 더 짧은 경고가 남아 있었다.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나는 그 줄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또 문장에 묶인다. 지금은 문장이 아니라 사람 배치를 바꿔야 했다.

“한 손에 모으지 않는다.”

내가 말했다.

“튜브는 내가 들고, 물막 조각은 미리엘. 철판에 남은 눌림은 브론. 리에트는 길 표식을 기억해. 세라는 아무것도 들지 마.”

세라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나만 빈손이군.”

“빈손이어야 막는다.”

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 검집 끈을 다시 조였다. 이름값이나 자존심을 꺼낼 자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아무것도 들지 않는다는 건, 뒤에서 달려드는 손을 자기 몸으로 먼저 받겠다는 뜻이었다.

미리엘은 젖은 격리 기록 조각을 따로 펼쳤다. 얇은 장부 끝, 거의 지워진 줄, 끊긴 번호 흔적. 그녀는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않았다. 눈이 글자를 따라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이건 처형 완료 줄이 아니에요.”

세라가 바로 돌아봤다.

“확실해?”

“완료 줄이면 끝번호가 이렇게 안 남아요. 이건 끝낸 줄이 아니라 다른 데서 한 번 더 맞추라고 남겨 둔 줄이에요. 서방 대조 전 보류. 그쪽에 더 가까워요.”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갈라졌다. 그러나 손은 종이를 누르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로 모서리만 살짝 받쳐, 젖은 종이가 자기 무게로 찢어지지 않게 했다.

“스승님 기록 같아요.”

그 말은 막사 안을 한 번 더 차갑게 만들었다. 미리엘이 잃어버렸다고 여긴 사람. 성도 장부에서 끝난 줄로 덮인 사람. 그 이름이 처형 완료 줄이 아니라 서쪽에서 다시 맞춰야 할 끝나지 않은 줄로 남아 있다면, 우리가 들고 나온 것은 죄목의 증거가 아니었다. 살아 있을지 모르는 증언의 방향이었다.

브론이 몸을 가까이 숙였다. 그는 글자 대신 종이 두께와 먹물이 밴 결을 봤다.

“윗칸이 덧대졌다.”

그가 낮게 말했다.

“원래 장부 한 장이 아니야. 누가 끝난 칸처럼 보이게 덮었지만, 아래 번호는 남겨 뒀다. 지우고 싶었으면 번호도 같이 눌러 없앴겠지.”

미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녀가 울지 않으려고 참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울 시간도 없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성도에서 배운 분류법이 그녀를 묶었던 만큼, 이제 그 기술은 같은 장부를 거꾸로 읽는 칼이 됐다.

멀리서 첫 경계뿔이 울렸다. 왕도 안쪽에서 길게 한 번, 서문 쪽에서 짧게 한 번. 리에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밖으로 나갔다. 세라는 문턱을 비웠다가 다시 막았다. 막사 안에서 움직이던 우리 손이 동시에 멈췄다.

리에트는 금방 돌아왔다. 숨이 조금 빨랐다.

“빠르다.”

그녀는 막사 바닥 모래를 갈고리 끝으로 긁었다. 폐수문, 둔덕, 서문, 인부길, 버드나무 제방, 서쪽 우회 보급길이 거친 선으로 이어졌다. 성도 수거반은 낮은 배수로 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왕국 병사들은 서문 쪽 마른 길을 막는 중이었다. 둘은 같은 깃발 아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를 묶는 방향은 같았다. 아래에서는 손을 뒤지고, 위에서는 얼굴을 확인한다.

“성도는 침수 사고 수습이라고 할 거야.”

리에트가 모래 위 수문 쪽을 짚었다.

“왕국은 문서고 사고 연루와 무단 잠입을 말하겠지. 둘 다 묻는 말은 하나야. 누가 무엇을 들고 나왔느냐.”

세라가 서문 쪽을 보며 물었다.

“벨로네 깃발은?”

“멀리. 아직 서문 안쪽.”

세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가 가문 이름을 쓰면 문이 잠깐 열릴지 모른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더 큰 문장 안으로 들어간다. 공인, 보호, 조사 협조, 동행 명령. 멋있게 포장된 말들은 전부 움직일 권리를 뺏는 손이 된다.

“이번엔 이름 안 쓴다.”

세라가 말했다.

그 말은 포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기 이름으로 남을 가릴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이 지금 우리를 더 빨리 묶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소리였다. 세라는 앞에 서는 대신 뒤를 막기로 했다. 얼굴이 아니라 그림자가 되는 쪽을 택했다.

브론은 막사 앞 진흙길에 나가 바퀴 자국을 손등으로 훑었다. 깊게 팬 두 줄이 인부길 쪽으로 비스듬히 쏠려 있었다. 그는 흙을 조금 헤집어 잘게 부서진 짚과 말굽 못 하나를 꺼냈다.

“정규 보급로 자국이 아니다.”

그가 말했다.

“짐말이 휘청인 흔적이야. 라그나드 쪽이 정면만 보는 게 아니군. 사람을 서문으로 몰고, 옆길에서 짐과 증거를 잡는 식이다.”

라그나드 전초군. 그 이름이 나오자 막사 바깥 길이 더 좁아졌다. 왕국과 성도만이 아니었다. 전초군은 칼로 문을 부수기보다 길의 간격을 흔들었다. 보급을 늦추고, 피난 줄을 틀고, 누가 어느 손에 무엇을 들었는지 보게 만든다. 우리가 정규 길로 나가면 세 세력의 시선이 한꺼번에 붙을 것이다.

나는 성벽 쪽을 한 번 봤다. 아직 빛이 다 오르지 않았는데도 창끝 몇 개가 서문 근처에서 움직였다. 저 빛은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 피난민, 잠입자, 증거 운반자, 귀족 가문의 문제아. 큰 말 하나가 붙는 순간 우리는 모두 같은 줄에 오른다.

“정규 길은 버린다.”

세라가 바로 물었다.

“서쪽 인부길?”

“응.”

리에트가 기다렸다는 듯 둔덕 아래를 가리켰다. 갈대와 버드나무 사이로 사선으로 꺾여 나가는 좁은 길이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서면 어깨가 닿을 만큼 좁고,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서문은 얼굴을 본다.”

리에트가 말했다.

“저 길은 발을 봐. 발은 속이기 어렵지만, 이름보다는 늦게 잡혀.”

우리는 막사 안에서 짐을 다시 나눴다. 나는 튜브를 왼팔 안쪽에 눌러 고정했다. 손으로 쥐면 넘어질 때 놓친다. 팔로 안으면 몸이 먼저 구른다. 미리엘은 격리 기록 조각을 오른쪽 안주머니에 넣고, 안감을 한 번 접어 물기가 위로 올라오지 않게 막았다. 브론은 철판 조각을 따로 감았다. 천 끝을 비틀어, 젖은 손으로도 다른 물건과 헷갈리지 않게 했다.

“넘어지면 순서부터 확인해.”

브론이 말했다.

“사람, 튜브, 물막, 철판. 다만 미리엘이 오른쪽으로 넘어지면 물막부터 빼. 몸을 당기다가 조각을 찢으면 둘 다 잃는다.”

“사람이 먼저야.”

내 말은 거의 반사였다.

미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살리려고 나눈 거잖아요. 제가 넘어지면 오른쪽 안주머니부터 꺼내요. 저를 끌어내는 손은 그다음이에요. 둘을 헷갈리면 저쪽이 이겨요.”

세라의 손이 검집 위에서 한 번 굳었다. 그녀는 미리엘을 꾸짖지 않았다. 대신 뒤에 설 위치를 반 걸음 바꿨다. 미리엘이 넘어질 때 어느 손을 먼저 가려야 하는지 몸으로 계산한 것이다.

나는 배치를 다시 불렀다.

“리에트가 선두. 내가 둘째. 미리엘 셋째. 브론 넷째. 세라 후미. 길이 막히면 리에트는 돌아오지 말고 앞쪽에서 새 길을 찾아. 내가 미리엘 오른쪽을 본다. 브론은 조각 간격부터 확인해. 세라는 손이 아니라 시선을 끊어.”

누구도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자기 끈과 발 위치를 고쳤다. 이것은 도망 순서가 아니었다. 누가 어느 순간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지 미리 정하는 순서였다.

막사를 나오자 새벽빛이 조금 올라와 있었다. 버드나무가 낮게 늘어져 길 위 그림자를 누르고, 갈대 끝에는 밤새 맺힌 물방울이 떨렸다. 오른쪽 얕은 수로의 물은 느리게 흘렀고, 왼쪽 진흙 평지에는 굳은 수레 바퀴 자국이 오래된 상처처럼 남아 있었다.

제방 첫 굽이에는 썩은 말뚝 셋이 비뚤게 박혀 있었다. 그냥 지나치면 버려진 표식처럼 보였지만, 리에트는 각도부터 보았다. 첫 말뚝은 길을 숨기고, 둘째는 짐이 지나간 높이를 남기고, 셋째는 물이 찼을 때 돌아 나가라는 경고라고 했다. 로웬의 문장과 닮았다. 정답을 적지 않고, 다음 손이 스스로 맞춰 읽게 만드는 방식.

나는 말뚝 사이를 지나며 튜브가 갈비뼈에 부딪치지 않게 팔꿈치를 더 안으로 접었다. 미리엘은 뒤에서 낮게 되뇌었다.

“잎맥 표식. 서쪽 우선. 끝 경고. 번호 나중.”

암송이 아니라 못질 같았다. 젖은 종이가 찢기더라도 순서만은 흩어지지 않게 자기 안쪽에 박아 넣는 목소리였다.

브론은 길바닥에 반쯤 묻힌 철편을 발끝으로 눕히고 지나갔다. 세라가 밟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미리 길을 고친 것이다. 세라는 맨 뒤에서 후방을 살피며 움직였다. 한 번은 검집 끝으로 수로 위의 얇은 가지를 건드려 물 흐름을 틀었고, 한 번은 무너진 말뚝을 발로 눕혔다. 누가 따라오면 반 박자라도 늦어질 자리였다.

길이 넓어지는 곳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왼쪽은 넓은 진흙 평지, 오른쪽은 얕은 물길, 가운데는 사람 둘이 겨우 스치는 둑길이었다. 첫 던전에서 함정판을 밟기 전의 감각이 몸 안에서 올라왔다. 어디를 죽은 길로 만들고, 어디를 산 길로 남길지 먼저 봐야 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오른쪽으로 몸을 넘긴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왼쪽은 진흙이 깊다. 짐이 같이 빠져. 오른쪽은 얕아. 몸이 먼저 구르고, 손은 안쪽으로 말아.”

브론이 짧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앞쪽에 세운다.”

세라는 말없이 뒤쪽 발놀림을 바꿨다. 내가 고른 방향에 맞춰 박자를 늦춘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물건을 지키는 무리가 아니었다. 각자 다른 것을 나눠 들고, 같은 위험을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차이를 놓치면 로웬의 경고가 다시 문장으로만 남는다.

제방 중간쯤에서 리에트가 멈췄다. 그녀는 서쪽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아직 유리숲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쪽 하늘만, 유리 가루를 얇게 섞은 것처럼 흐릿하게 번들거렸다.

“같다.”

세라가 낮게 물었다.

“무엇이.”

리에트는 갈대 너머를 보며 말했다.

“예전 원정 때 맡았던 냄새. 썩은 물 냄새가 아니야. 오래 눌린 기억이 젖을 때 나는 냄새.”

그 한마디에 서쪽 길이 목적지에서 현장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유리숲에 가서 진실을 찾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냄새가 벌써 왕도 바깥 제방까지 와 있다면, 진실보다 먼저 피해가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더 가자 길 아래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울음, 쉰 기침, 바퀴 축이 삐걱이는 소리, 물통이 넘어졌다가 다시 구르는 소리. 리에트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제방턱 아래로 몸을 낮췄다.

갈대 사이로 내려다본 아래쪽에는 임시 피난처가 어지럽게 꾸려져 있었다. 뒤집힌 손수레 둘, 젖은 담요 더미, 바퀴 빠진 마차 한 대. 몇 사람은 상처를 붙든 채 앉아 있었고, 몇 사람은 멀쩡히 서 있는데도 같은 끝칸에서 나온 듯한 말을 입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사람 수에 비해 물통은 적었고, 담요에는 성도 보급 매듭과 사제단 꼬리표가 뒤섞여 있었고, 꼬리표의 출처도 제각각이었다.

가장 바깥쪽에는 발목까지 진흙에 잠긴 노인이 서 있었다. 앞사람 어깨를 잡아야 겨우 버티면서도 손가락은 허공에서 칸을 긋듯 움직였다. 그 옆에는 젖은 장부끈 같은 헝겊을 손목에 감은 아이가 담요 끝만 만지작거렸다. 아이의 입술은 계속 달싹였지만, 자기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열 번째 줄은 비워 둬.”

“둘째 칸은 건드리지 마.”

“서명칸이 비었는데… 왜 위에 올렸지.”

말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끝이 같았다. 이름 대신 줄, 얼굴 대신 칸, 기억 대신 반복. 누군가 오래 같은 말로 이 사람들을 눌러 놓았다.

나는 제방 아래로 내려갔다. 한 사내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초점은 다른 곳에 걸려 있었다. 손톱 밑에는 검은 흙이 가득했고, 손목에는 줄로 묶였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왜 올렸지?”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래에 두면 됐는데… 왜 위로 올렸어?”

나는 대답보다 그의 손 움직임을 먼저 봤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줄을 긋고, 접고, 위로 밀었다. 미리엘이 내 옆에 내려와 사람 수와 담요 수, 물통 수를 빠르게 셌다. 장부에 적힐 숫자와 실제 사람 수가 어긋난 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미리엘은 가장 심하게 젖은 아이부터 봤다. 맥을 오래 짚지 않았다. 눈꺼풀 떨림, 입술 색, 손끝의 차가움, 젖은 붕대 아래 번지는 냄새를 먼저 확인했다. 완전히 치료할 시간도, 안전한 자리도 없었다. 그녀는 젖은 붕대를 다 풀지 않고 새 천만 덧댔다.

“열병만은 아니에요.”

미리엘이 아주 낮게 말했다.

“같은 말에 오래 눌렸다가 풀려난 사람들 같아요. 기억이 줄째로 접혀 있어요.”

브론은 바로 손수레 하나를 세웠다. 휘어진 축이 삐걱였지만, 그는 한 번에 세우지 않았다. 반쯤 들고 멈췄다가, 세라가 도로 쪽에서 오는 시선을 자기 망토로 끊는 박자에 맞춰 마저 세웠다. 수레판이 제방 홈 앞을 가렸다. 세라는 검을 뽑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깥 도로를 보려 할 때마다 시선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싸움보다 노출을 막는 움직임이었다.

리에트는 웅덩이 가장자리의 흙을 만져 보았다. 마차 바퀴에 묻은 희미한 가루와 경계석 표면의 얇은 번들거림을 함께 봤다. 경계석 한쪽은 유리처럼 굳어 금이 가 있었다. 햇빛이 닿지 않았는데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여기서 처음 번진 게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위에서 내려온 흔적이 있어. 피난민이 이걸 끌고 온 게 아니라, 이걸 밟고 밀려난 거야.”

그 말에 나는 사내의 손을 다시 봤다. 그는 내 옷자락을 놓지 못한 채,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위칸을 만들었다.

“서명칸이 비었는데… 위에 올리면 안 되는데… 그 줄만…”

말끝은 흐려졌다. 그러나 손동작은 정확했다. 위로 올림, 접기, 밀어 넣기. 문서고에서 보았던 줄과 닮았다. 사람 몸 안에 장부의 동작이 박혀 있었다.

리에트가 피난민들 사이의 공기를 한 번 더 맡았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맞아.”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닿았다.

“내가 실패했던 그 냄새다.”

세라가 주변을 훑었다. 제방 위 길에는 아직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발이 없었다. 그러나 멀리 성벽 쪽 먼지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성도 수거반도 더 넓게 퍼져 내려올 것이다. 피난민들이 바깥길을 보며 굳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저들은 도움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시 불릴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지?”

세라가 물었다.

답은 튜브 안에 없었다. 사내의 떨리는 손, 아이의 젖은 담요, 유리처럼 금 간 경계석 위에 있었다.

“전부 데리고 달리지는 못한다.”

나는 말했다.

말이 나오자 목 안쪽이 더 아팠다. 그러나 거짓 약속보다 짧은 판단이 필요한 자리였다.

“대신 지금 보이는 사람부터 숨긴다. 정식 길 말고 제방 아래 홈. 이름 부르지 말고, 숫자 세지도 말고, 손목 잡고 움직이게 해.”

미리엘이 바로 더 짧게 다듬었다.

“윗길 말고 아래길. 바람이 덜 드는 쪽. 멈추면 눈감고 숨부터 고르세요.”

그녀는 같은 말을 피난민 둘의 귀에 낮게 심었다. 반복이었지만 설명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박자였다. 세라는 망토 끝을 한 사람의 어깨 위로 덮어, 밖에서 사람 수가 적어 보이게 했다. 브론은 손수레 두 대의 각도를 바꿔 홈 안쪽 사람과 물통을 따로 가렸다. 리에트는 둔덕 위를 보며 몇 명이 이쪽을 내려다보는지 계속 셌다.

나는 옷자락을 붙잡고 있던 사내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리고 그가 허공에 그리던 칸을 그대로 따라 그리며, 내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위로 안 올린다.”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말했다.

“지금은 아래에 숨긴다.”

사내의 손끝 떨림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아이는 담요 끝을 쥔 채 여전히 입술을 달싹였지만, 조금 전처럼 끝번호를 뱉지는 않았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공포가 다음 사람에게 옮겨 붙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브론이 손수레에서 바퀴를 빼내 반쯤 세우며 나를 보았다.

“우리가 남길 말은?”

나는 제방 홈, 버드나무 뿌리, 서쪽 바람, 성벽 쪽 먼지를 차례로 봤다. 문서고에서 가져온 첫 줄이 피난민들의 숨과 맞닿았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그 말은 이제 기록 열람 순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동선이 됐다.

“구호대가 오면 다 말하지 말라고 해.”

내가 말했다.

“자기 이름을 먼저 말하지 말고, 누구 손목을 잡았는지부터 기억하라고. 줄과 칸이라는 말이 나오면 눈을 감고 아래길만 떠올리라고.”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말도 더 짧게 쪼갰다. 그녀는 피난민들의 입에 성도식 문장을 더 넣지 않았다. 어려운 설명 대신 움직일 말만 남겼다.

세라는 제방 위쪽에 일부러 발자국 둘을 더 냈다. 아직 여러 사람이 길 위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흔적이었다. 그리고는 망토 끝을 걷어 올리며 우리 쪽을 보았다.

“더 있으면 같이 잡힌다.”

그녀가 말했다.

“이 사람들도 우리도.”

리에트는 서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린 유리 조각 같은 빛이 조금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아직 숲은 멀었다. 그런데 냄새와 흔적과 사람들의 말은 이미 여기까지 내려와 있었다.

“늦으면,”

리에트가 말했다.

“저 냄새가 사람 이름부터 먹어. 위칸에 먼저 올라간 이름부터.”

나는 품 안쪽의 튜브를 한 번 눌렀다. 로웬이 남긴 문장은 끝난 기록이 아니었다.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다시 열리는 길이었다. 다만 길은 저절로 열리지 않았다. 우리가 어느 길을 버리고, 누구를 먼저 숨기고, 무엇을 나눠 들지 정할 때만 조금씩 생겼다.

우리는 제방 아래 홈에 피난민 두 무리를 더 들여보내고, 물통을 가장 안쪽으로 옮겼다. 브론은 수레판을 마지막으로 기울여 바깥 시야를 막았다. 미리엘은 떨림이 심한 아이의 손목과 다른 피난민의 손목을 묶지는 않고, 천으로 느슨하게 이어 서로 놓치지 않게만 했다. 세라는 검집 끝으로 길 위 발자국을 흐렸다. 리에트는 가장 앞에서 버드나무 끝의 매듭을 확인했다.

“이쪽이면 숲 바깥 경계로 이어진다.”

리에트가 말했다.

“하지만 경계가 우리를 들여보내 준다는 뜻은 아니야.”

“허가를 받으러 가는 게 아니야.”

나는 대답했다.

“증언을 들고 간다.”

말하고 나서야 그 차이가 몸에 들어왔다. 허가는 위에서 내린다. 증언은 아래에서 올라온다. 왕국과 성도가 위칸으로 사람을 올려 닫으려 했다면, 우리는 아래에서 남은 손목과 젖은 조각을 붙들고 가야 했다.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정규 길은 버리고, 제방 아래 낮은 홈을 따라 서쪽으로 붙었다. 뒤에는 아직 피난민들의 거친 숨이 남아 있었고, 앞에는 유리처럼 번지는 새벽빛이 있었다. 로웬이 남긴 순서는 더는 문서 안에만 있지 않았다. 우리 발밑 진흙과 사람들의 숨 사이에서 이미 우리를 밀고 있었다.

서방으로 가야 했다.

너무 늦기 전에.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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