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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기 전에 서방으로

배수 통로 끝 돌턱을 넘어 나오자 새벽 공기가 목 안을 먼저 긁었다. 지하에 엉겨 있던 썩은 물 냄새와 쇠비린내 대신, 바깥에는 젖은 흙과 눅은 갈대 냄새가 떠돌았다. 왕도 서쪽 외곽의 폐수문이었다. 돌 아치 한쪽이 내려앉아 위로는 부러진 수레축과 잡초가 걸려 있었고, 아래로는 얕은 개울물이 검은 진흙을 얇게 핥고 지나갔다. 배수 입구는 사람 하나가 겨우 어깨를 비틀어 빠져나올 높이였다. 왼쪽에는 점검 막사가 기울어 서 있었고, 오른쪽 둔덕 너머로는 성벽 윗선이 잿빛 새벽 아래 눌려 있었다.

리에트가 먼저 몸을 낮췄다. 활은 들지 않았다. 둔덕 위 풀이 어느 쪽으로 눕는지, 진흙에 남은 발자국이 어디서 끊기는지부터 읽었다. 세라는 맨 마지막으로 밖에 나와 무너진 수문판을 두 손으로 당겼다. 젖은 널빤지가 돌을 긁는 둔한 소리가 한 번 났고, 통로 입구는 다시 반쯤 가려졌다. 브론은 곧장 내 품 쪽을 가리켰다.

“여기서 꺼내지 마.”

그는 막사 안쪽을 턱으로 짚었다.

“돌바닥에 닿는 순간 눌림부터 번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트는 둔덕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갔고, 곧 손 두 개를 펴 보였다. 정식 수색선 둘. 아직 이쪽까지는 닿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점검 막사 안에는 마른 자리가 손바닥 몇 장 넓이만 남아 있었다. 중앙엔 뒤집힌 상자 하나가 있었고, 오른쪽은 모래가 밀려 들어와 바닥 물기를 조금 잡아 주고 있었다. 브론이 상자를 바로 세워 임시 작업대로 만들었다. 미리엘은 소매를 걷어 상자 윗면의 물기를 먼저 훑어 냈다. 세라는 문턱 안쪽에 비스듬히 서서 바깥 길과 막사 안을 함께 보이는 자리를 잡았다.

나는 품 안쪽에서 로웬의 기록 튜브를 꺼냈다. 기름먹인 천 안쪽에 받은 덕에 먹이 더 번지지는 않았다. 브론은 물막 조각과 철판 조각을 따로 놓게 했다. 서로 포개면 눌린 자국이 섞인다고 했다. 미리엘은 내 손의 튜브를 보다가 낮게 말했다.

“다 펴지 말죠.”

“안 펴.”

나는 상자 가장자리에 튜브를 눕혔다.

“표식 보고, 줄 보고, 번호 맞춘다. 여기서 해석 욕심내면 길부터 막혀.”

문밖을 보던 세라가 물었다.

“정말 왕도 안으로는 안 돌아가?”

짧은 말이었지만 뜻은 무거웠다. 아래 어딘가에는 아직 남은 줄이 있다. 지금 되돌아가면 더 많은 걸 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문장을 쫓는 사람의 욕심이었다. 로웬은 먼저 볼 곳을 남겼다. 한곳에서 다 보려 들지 말라고.

미리엘은 큰 제목이 아니라 끝 칸과 줄 간격부터 보자고 했다. 성도 문서는 늘 윗줄 얼굴부터 읽게 만들어 사람을 묶어 둔다고도 했다. 브론은 철판 조각을 비스듬히 세워 새벽빛을 받게 했다. 흐린 빛이 젖은 자국 아래로 스미자, 뭉개져 있던 눌림 홈이 조금 살아났다.

나는 봉합끈을 아주 조금만 풀었다. 종이가 스스로 벌어질 만큼까지만. 첫 줄과 그 아래 짧은 덧문이 보일 만큼까지만.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그 아래 줄은 번져 있었지만 방향은 남아 있었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막사 안 공기가 잠깐 멈췄다. 미리엘은 문장보다 옆줄 간격과 번호 자국을 먼저 따라갔다.

“여기요.”

그녀 손톱 끝이 튜브 옆줄을 가볍게 짚었다.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이건 해설이 아니라 열람 순서예요. 큰 분류를 읽지 말고, 다른 자리에서 먼저 맞춰 보라는 뜻이에요.”

브론이 철판 조각의 눌린 홈을 보며 중얼거렸다.

“감긴 방향도 같군.”

그는 내 손의 튜브를 가리켰다.

“급히 숨긴 접기가 아니다. 다음 손이 열 자리 남기고 감았어. 혼자 읽고 태울 거면 이렇게 안 해.”

리에트가 둔덕에서 내려와 상자 옆에 섰다. 그녀 시선은 문장이 아니라 튜브 모서리에 남은 가는 문양에 머물렀다.

“숲 장례문양 아니야.”

그녀가 낮게 말했다.

“우회선 남길 때 쓰는 손이야. 첫 던전 벽화 가장자리에도 같은 결이 있었지.”

미리엘은 물막 조각 하나를 들어 빛에 기울였다. 거의 녹아버린 글자 사이로 두 어절이 남아 있었다.

`서쪽 열람 후`

짧은 파편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파편이 지금은 어느 죄목보다 무거웠다. 로웬은 내용을 다 넘기지 않았다. 대신 덜 속는 순서를 남겼다.

세라가 문밖을 본 채 말했다.

“문서고가 절반이란 소리네.”

“문서고가 절반인 게 아니야.”

나는 말을 고쳐 잡았다.

“절반만 읽게 만드는 자리였어.”

브론이 짧게 숨을 뱉었다.

“그제야 장부 말투가 덜 난다.”

미리엘은 젖은 격리 기록 조각을 펼쳤다. 얇은 장부 끝, 거의 지워진 줄, 끊긴 번호 흔적. 그녀는 오래 보지 않았다. 숫자 간격과 칸 높이만 먼저 읽었다. 그러다 손끝이 멈췄다.

“이건 처형 완료 줄이 아니에요.”

세라가 돌아봤다.

“확실해?”

“완료 줄이면 끝번호가 이렇게 안 남아요. 보류나 대조 쪽이에요. `서방 대조 전` 같은 칸이 끼어 있어요.”

미리엘은 조각을 상자 위에 바로 펴지 않고, 손가락 두 개로 모서리만 살짝 눌렀다. 젖은 종이가 들러붙은 자리와 한 번 떨어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같은 칸폭 위로 선을 다시 그은 흔적도 있었다.

“여기 보세요. 위칸은 한 번 지우고 다시 적었어요. 처형 완료 줄이면 이렇게 덮어쓸 이유가 없어요. 끝번호도 같은 자리에 안 멈춰요. 보류면 달라요. 사람을 끝낸 줄이 아니라, 다른 데서 한 번 더 맞춰 보라고 붙잡아 둔 줄이에요.”

브론이 몸을 더 가까이 숙였다. 그는 글자를 읽기보다 종이 두께와 먹이 밴 결부터 봤다.

“종이도 다른 걸 덧댔군.”

그가 낮게 말했다.

“원래 장부 한 장이 아니다. 급히 붙인 수선이 아니라, 일부러 윗칸만 바꿔 맞춘 손이야.”

미리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스승님 기록일 가능성이 커요.”

그 말이 막사 안 온기를 한 겹 걷어 냈다. 문서고에서 건진 건 죽은 이름 정리가 아니었다. 아직 끝까지 지워지지 않은 사람 쪽으로 이어지는 미완 줄이었다. 왕도 안에서 더 파면 진실을 얻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먼저 깔아 둔 얼굴만 더 보게 될지 모른다.

그때 멀리서 경계뿔이 울렸다. 길고 거친 소리가 성벽 안쪽에서 한 번, 서문 쪽에서 한 번 이어졌다. 리에트가 바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빠르다.”

그녀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성도 흰 띠는 수문 아래까지 퍼지고, 왕국은 서문 검문을 늘려.”

그녀는 막사 벽에 기대 있던 부러진 갈고리로 바닥 모래를 긁어 간단한 지도를 그렸다. 수문, 둔덕, 서문 쪽 길, 인부길, 버드나무 제방, 서쪽 보급 우회선. 성도 수거반은 수문 아래 낮은 길을 따라 넓게 퍼지고, 왕국 병사는 서문 쪽 사람 얼굴과 짐칸을 먼저 잡아 세울 거라고 했다. 둘 다 같은 자리를 닫는 게 아니었다. 한쪽은 아래에서 끌어올리고, 다른 쪽은 위에서 막아 세우는 식이었다.

“성도는 기록이 젖었다는 핑계로 손부터 뒤질 거야.”

리에트가 모래 위 수문 아래쪽을 짚었다.

“왕국은 무단 잠입과 증거 탈취를 말하겠지. 둘 다 다른 말을 하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해. 누가 뭘 들고 나왔느냐.”

세라가 턱을 굳혔다.

“가문 깃발은?”

“서문 쪽 멀리.”

세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장갑 낀 손으로 검집 끈을 다시 조였다.

“그럼 이번엔 이름 안 쓴다.”

브론은 막사 앞 진흙길에 남은 마차 홈을 손등으로 훑었다. 두 줄로 깊게 팬 자국이었다.

“이것도 이상해.”

그가 말했다.

“정규 보급로 자국이 아니야. 짐이 인부길 쪽으로 쏠렸어. 누가 길을 흔들고 있다.”

그는 발끝으로 자국 하나를 더 헤집었다. 진흙 아래에서 잘게 부서진 짚과 말굽 못 하나가 나왔다. 정규 군마보다 짐말에 가까운 흔적이었다.

“서쪽 우회로가 그냥 비어 있는 길이 아니란 소리지. 누가 먼저 지나갔든, 누가 일부러 흔들었든, 정면에 사람을 몰고 옆길에서 짐을 잡는 식이야.”

그 말이면 충분했다. 라그나드 전초군은 늘 칼부터 들이밀지 않았다. 간격을 흐트러뜨리고, 보급을 비틀고, 사람이 어디로 쫓겨나는지부터 읽었다.

나는 문턱에 서서 성벽 쪽을 한 번 봤다. 왕국은 무단 잠입과 증거 탈취를 핑계로 줄을 닫을 것이다. 성도는 침수 사고 수습을 핑계로 이름을 덮을 것이다. 둘은 서로 다른 얼굴을 내세우겠지만, 결국 우리가 들고 나온 조각을 같은 칸에 다시 눌러 넣으려 든다.

“정규 길은 버린다.”

세라가 곧장 물었다.

“서쪽 인부길?”

“응.”

리에트가 기다렸다는 듯 둔덕 아래를 가리켰다. 갈대와 버드나무 사이로 사선으로 꺾여 나가는 좁은 길이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서면 어깨가 닿을 만큼 좁았다.

“정식 길보다 험해 보여도 지금은 이쪽이 빨라.”

그녀가 말했다.

“서문은 얼굴을 본다. 저 길은 발자국을 본다.”

우리는 막사 안에서 물건부터 나눴다. 한 손에 다 몰리지 않게. 로웬이 남긴 경고를 그대로 운반 규칙으로 바꾸는 셈이었다. 기록 튜브는 내가 품었다. 격리 기록 조각은 미리엘이 안주머니에 넣었다. 철판과 눌림 흔적은 브론이 따로 감쌌다. 서로 겹치지 않게 감는 방향까지 달랐다. 세라는 일부러 아무 기록도 들지 않았다. 손이 비어야 막을 수 있었다.

브론은 천 조각 세 장을 다시 꺼내 각각 다른 매듭으로 묶었다. 하나는 바로 풀 수 있게 느슨하게, 하나는 넘어져도 물건이 튀어나오지 않게 짧게, 하나는 젖은 손으로도 감촉만으로 구분되게 끝을 비틀어 두었다.

“헷갈리면 끝이야.”

그가 말했다.

“누가 물에 빠지든, 누구 손이 먼저 미끄러지든, 같은 걸 다시 같은 순서로 찾을 수 있어야 해.”

미리엘도 자기 품 안쪽에서 조각을 한 번 더 눌러 위치를 잡았다.

“제가 넘어지면 이건 오른쪽으로 빠져요. 튜브는 왼쪽. 헷갈리지 말아요.”

그 말이 우스운 약속처럼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문장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젖은 종이 하나가 어느 몸에서 어떻게 떨어지는지까지 계산해야 하는 자리로 밀려 나와 있었다.

“길이 막히면 내가 얼굴 끈다.”

세라가 말했다.

“너희는 물건부터 빼.”

“무리하지 마.”

내가 말하자 세라는 짧게 대꾸했다.

“무리 안 해. 시간만 산다.”

브론은 사람 운반선과 물건 운반선을 따로 짰다. 누가 넘어져도 전부 한쪽 진흙으로 쏟아지지 않게 하려는 배치였다. 리에트가 선두. 내가 둘째. 미리엘이 셋째. 브론이 넷째. 세라가 마지막. 앞은 소리를 줄여야 하고, 뒤는 시선을 끊어야 했다.

길에서 다시 멈추게 되면 누가 무엇을 먼저 넘길지도 짧게 정했다. 리에트는 표식을 남기지 않는 대신 길을 읽고, 나는 손이 비면 미리엘 쪽을 먼저 돕고, 브론은 사람보다 포장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세라는 끝까지 뒤를 본다. 전투 배치가 아니라 운반 배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지금 파티답다고 느껴졌다.

막사를 나오자 새벽빛이 조금 더 올라왔다. 그래도 서쪽 길은 어두웠다. 버드나무가 낮게 늘어져 길 위 그림자를 눌렀고, 갈대 끝에는 밤새 맺힌 물방울이 떨렸다. 오른쪽 얕은 수로는 느리게 흘렀고, 왼쪽 진흙 평지에는 오래된 수레 바퀴 자국이 굳어 있었다.

제방 첫 굽이에는 썩은 말뚝 셋이 비뚤게 박혀 있었다. 그냥 넘기면 쓰레기처럼 보이는 자리였지만, 리에트는 그 각도를 하나씩 짚었다. 첫 말뚝은 길을 숨기고, 둘째는 사람이 아니라 짐이 지나간 높이를 남기고, 셋째는 물이 찼을 때 돌아 나가라는 경고라고 했다. 에이드리언인 나조차 듣고 나서야 그 선이 눈에 들어왔다. 로웬이 남긴 문장과 비슷했다. 정답을 써 두는 대신, 다른 손이 스스로 맞춰 읽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수로를 끼고 몇 걸음 더 가자 낡은 짐끌개 자국이 갈대뿌리 사이에서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브론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진흙 속 나뭇결을 긁어 보더니, 바퀴를 끌던 짐줄이 중간에 한 번 갈아엎어졌다고 했다. 같은 길을 오래 쓴 흔적이 아니라, 누군가 들킨 물건을 급히 다른 쪽으로 넘긴 자리 같다고도 했다. 미리엘은 말없이 그 자리 위 물빛을 보다가, 종이 냄새가 아직 안 사라졌다고 했다. 길 하나를 따라 사람, 짐, 기록이 함께 움직여 왔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정규 길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비뚤게 박힌 말뚝 셋 사이를 지나, 천 조각이 묶인 썩은 가지 앞에서 멈췄다. 누런 헝겊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매듭 방향만 보고 길을 읽었다.

“이쪽.”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숲 바깥 생존선에서 쓰던 우회 표시야.”

나는 그 말뚝을 지나며 튜브가 품 안에서 부딪치지 않게 팔꿈치를 더 안으로 말았다. 미리엘은 뒤에서 거의 숨도 안 쉬는 듯 따라왔다. 그녀는 낮게 끊어 되뇌고 있었다.

“잎맥표식. 서쪽 우선. 끝 경고. 번호는 나중.”

암송이 아니라 거의 못질 같았다. 젖은 종이가 찢어져도 순서만은 흩어지지 않게 박아 두는 말이었다.

브론은 앞쪽 진흙에 반쯤 묻힌 철편 하나를 발끝으로 눕히고 지나갔다. 세라가 밟을 자리에서 소리 나지 않게 미리 길을 고친 것이다. 세라는 마지막까지 뒤를 보고 움직였다. 한 번은 검집 끝으로 수로 위 얇은 가지를 건드려 물 흐름을 틀었고, 한 번은 무너진 말뚝을 발로 눕혀 두었다. 누가 따라오면 반 박자라도 늦어지게 만드는 손이었다.

길이 조금 넓어지는 자리에서는 내가 잠깐 앞을 멈췄다. 왼쪽은 진흙 평지, 오른쪽은 낮은 물길, 가운데는 사람 둘이 겨우 스치는 둑길이었다. 첫 던전에서 함정판을 밟기 전, 어디를 죽은 길로 만들고 어디를 산 길로 남길지 재던 감각이 몸 안에서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도 같았다. 칼을 휘두를 자리가 아니라, 누구 발이 먼저 미끄러지고 무엇이 어느 쪽으로 떨어질지를 먼저 정해야 하는 길이었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오른쪽으로 넘긴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왼쪽으로 쓰러지면 짐이 진흙에 같이 빠져. 오른쪽은 얕아. 사람부터 살릴 수 있어.”

브론이 짧게 콧숨을 뱉었다.

“이래서 내가 너를 앞칸에 세우는 거야.”

세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뒤쪽 발놀림이 한 번 바뀌었다. 내가 고른 쪽으로 박자를 맞춘다는 뜻이었다.

제방길 중간쯤에서 리에트가 갑자기 멈췄다. 그녀는 바람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같다.”

세라가 낮게 물었다.

“뭐가.”

리에트는 갈대 너머 서쪽을 보았다. 아직 유리숲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쪽 하늘만 유리 가루를 섞은 듯 흐릿하게 번들거렸다.

“예전 원정 때 맡았던 냄새.”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썩은 물 냄새가 아니야. 기억이 오래 눌렸다가 젖을 때 나는 냄새지.”

그 말을 듣자 우리는 걸음을 더 재촉했다. 유리숲은 아직 멀다. 그런데 그 냄새가 벌써 여기까지 와 있다면, 서쪽은 목적지이기 전에 이미 피해를 밀어 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 더 가자 길 아래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울음, 쉰 기침, 바퀴 축 삐걱임, 물통 넘어지는 소리. 리에트가 손을 들자 우리는 제방턱 아래로 몸을 낮췄다.

갈대 사이로 내려다본 아래쪽에는 임시 피난 자리가 엉켜 있었다. 뒤집힌 손수레 둘, 젖은 담요 더미, 바퀴 빠진 마차 한 대. 몇 사람은 상처를 붙든 채 앉아 있었고, 몇 사람은 멀쩡히 서 있는데도 입안에서 같은 끝칸 말만 흘리고 있었다.

가장 바깥쪽에는 발목까지 진흙에 잠긴 채 멍하니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앞사람 어깨를 잡아야 겨우 서 있으면서도, 손가락으로 허공에 칸을 긋듯 움직였다. 그 옆에는 젖은 장부끈 같은 헝겊을 손목에 감은 아이가 담요 끝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급히 싸맨 붕대에는 약 냄새보다 오래 눅은 종이 냄새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열 번째 줄은 비워 둬.”

“둘째 칸은 건드리지 마.”

사람 이름이 아니었다. 경고도 아니었다. 겪은 일이 장부 끝말로 굳어 버린 입이었다.

나는 제방 아래로 먼저 내려갔다. 한 사내가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초점은 다른 데 걸려 있었다.

“그런데 왜 올렸지?”

그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위로 올렸어?”

나는 대답보다 그의 손목과 손톱 밑 흙을 먼저 봤다. 오래 걸은 사람의 떨림이었다. 미리엘이 내 옆에 내려와 눈으로 사람 수와 담요 수, 물통 수를 차례로 셌다. 장부에 적힐 숫자와 실제 사람이 벌써 어긋난다는 걸 읽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바로 가장 심하게 젖은 아이부터 봤다. 맥을 짚기 전에 눈꺼풀 떨림과 입술 색부터 보고, 젖은 붕대를 풀지 않은 채 새 천만 덧댔다. 완전히 치료할 시간도, 안전한 자리도 없다는 걸 안 손놀림이었다.

“열은 아니에요. 그런데 기억이 줄째로 엉켜 있어요.”

미리엘이 아주 낮게 말했다.

“누가 같은 말로 오래 눌렀다가 풀어 놓은 사람들 같아요.”

브론은 곧장 손수레 하나를 바로 세워 가림막처럼 돌렸다. 세라는 검을 뽑지 않고 사람들 시선을 바깥 도로에서 떼어 놓았다. 누가 길 위를 보려 하면 자기 쪽으로 시선을 받았다. 싸움이 아니라 노출부터 막는 움직임이었다.

리에트가 웅덩이 가장자리 흙을 만져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마차 바퀴에서 묻어 나온 희미한 가루와 경계석에 얇게 번진 유리빛까지 함께 보고 있었다.

“여기서 처음 번진 게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위에서 내려온 흔적이 있어. 피난민이 끌고 온 게 아니라, 피난민이 이걸 밟고 밀려난 거야.”

그 말에 나는 다시 사내 쪽을 봤다. 그는 내 옷자락을 놓지 못한 채, 이번에는 다른 문장을 더듬었다.

“서명칸이 비었는데… 왜 위에 올렸지… 왜 그 줄만…”

말끝은 흐려졌지만, 손은 계속 허공에서 같은 칸을 접었다 폈다. 누군가 그에게 공포를 남긴 방식이 칼이나 불보다 장부와 줄이었다는 뜻이었다.

리에트가 마지막으로 피난민들 사이 공기를 맡더니 천천히 말했다.

“맞아.”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가 실패했던 그 냄새다.”

갈림길 아래 경계석 하나는 유리처럼 얇게 번들거리며 금이 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광택이 아니었다. 안에서부터 눌린 기억이 표면만 굳은 것 같은 빛이었다. 유리숲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쪽에서 밀려난 피해는 벌써 사람들 입과 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세라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피난민들이 바깥길을 마주 보지 않게 손수레 위치와 담요 방향까지 바꿨다. 브론은 넘어져 있던 물통 둘을 세워 아직 남은 물을 한곳에 모았고, 나는 마차 바퀴를 조금 비틀어 제방길 아래쪽 시야를 더 가렸다. 잠깐뿐이어도, 이 자리가 그냥 버려진 웅덩이가 아니라 사람이 숨을 돌릴 칸처럼 보이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세라가 낮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지?”

나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튜브 문장 안이 아니라 눈앞 사람들 쪽에서.

미리엘이 젖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서방으로 가야 해요. 빨리.”

“이 사람들도 움직여야 해.”

내가 말했다.

“적어도 정식 길 말고, 바람 덜 맞는 쪽으로.”

세라는 바로 고개를 돌려 피난민들 뒤편 제방턱을 봤다. 버드나무 뿌리 아래로 몸을 숨길 만한 얕은 홈이 두 줄 있었다. 길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물은 덜 차고 바람도 덜 들어오는 자리였다. 그녀는 말 대신 손으로 두 번 짧게 가리켰다. 먼저 저리로 옮기자는 뜻이었다.

브론이 손수레 바퀴를 다시 들어 올렸다. 휘어진 축이 끼익 소리를 냈지만, 그는 이번에는 일부러 한 번에 끝까지 세우지 않았다. 소리가 더 커지지 않게 반쯤 들고 멈췄다가, 세라가 주변 시선을 끊는 박자에 맞춰 나머지를 밀어 넣었다. 리에트는 갈대 바깥 도로와 둔덕 위를 번갈아 보며 누가 이쪽을 내려다보는지부터 확인했다.

미리엘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무너질 둘만 골랐다. 전부를 구호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더 잔인해 보이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쓰러지면 나머지까지 같이 엉킬 자리였다. 그녀는 담요를 찢어 얇게 접은 뒤 손목과 목덜미에만 덧댔다. `젖은 걸 먼저 떼지 말고 바깥 열부터 막아야 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보다 떨림이 심한 사람부터 제방 홈 쪽으로 앉혔다.

나는 붙잡고 있던 사내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리고 그가 계속 허공에 그리던 칸을 그대로 따라 손가락을 내려 줬다.

“위로 안 올린다.”

나는 그에게 들릴 만큼만 말했다.

“지금은 아래로 숨긴다.”

그 말이 무슨 약속처럼 들렸는지, 사내 손끝 떨림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그는 내 손목을 한 번 더 붙잡으려다가 멈췄다. 옆의 아이는 담요 끝을 쥔 채 여전히 입술을 달싹였지만, 조금 전처럼 끝번호를 또렷하게 토해 내지는 않았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라기보다, 공포가 더 앞으로 번지지 않게 잠깐 덮어 두는 말이었다.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길 위 시선 둘. 아직 내려오진 않아.”

세라는 피난민들을 제방 홈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검집을 빼지 않았다. 대신 자기 망토 끝을 한 사람 어깨에 덮어 바깥에서 숫자가 덜 보이게 했다. 그 손길은 다정해서가 아니라 계산이 빨랐다. 멀리서 보면 여기 있는 사람이 몇인지, 누가 다쳤는지, 누가 움직일 수 없는지 덜 읽히게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

브론은 손수레 하나를 눕혀 제방 홈 앞을 막고, 다른 하나는 바퀴를 빼 반쯤 세워 시야를 끊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낮게 물었다.

“우리가 다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안다.”

“그럼 남길 말부터 정해.”

나는 잠깐 서쪽 길과 제방 홈, 둔덕 위 말뚝, 피난민들의 젖은 발을 차례로 봤다. 지금 필요한 건 구원 약속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한 시간을 넘길 동선이었다.

“정식 길 가지 말라고 해.”

나는 말했다.

“제방 아래 홈 따라 버드나무 끝까지 붙어 가라고. 이름 부르지 말고, 숫자 세지도 말고, 서로 손목만 잡고 움직이라고.”

미리엘이 그 말을 받아 더 짧게 다듬었다.

“바람 적은 쪽으로만 가요. 위길 말고 아래길. 멈추면 눈감고 숨부터 고르세요.”

그녀는 피난민 두 사람 귀에 거의 속삭이듯 같은 말을 다시 넣어 주었다. 이번 반복은 설명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한 박자였다. 세라는 그사이 제방 바깥에 발자국 둘을 일부러 더 내어, 아직도 여러 사람이 길 위에 남아 있는 것처럼 흔적을 흐려 놓았다.

브론은 떨리는 물통을 붙잡은 손으로 짧게 말했다.

“이제 문장만 쫓을 때는 지났군.”

리에트는 서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린 유리 조각 같은 빛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늦으면,”

그녀가 말했다.

“저 냄새가 사람 이름부터 먹을 거야.”

나는 품 안쪽의 튜브를 한 번 눌렀다. 로웬이 남긴 순서는 결국 이 사람들 쪽으로 열리고 있었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 살아 있는 증언, 늦기 전에 붙들어야 할 흔적 쪽으로.

우리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 서방으로 가는 길은 더는 지도 위에만 있지 않았다. 우리 발밑 진흙과 이 사람들 숨 사이에서, 이미 열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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