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면 끝난다
왼쪽 거울판 잔면은 더는 판이라기보다 젖은 뼈 같았다. 세라 방패에 여러 번 갈린 자리마다 푸른 막이 비늘처럼 들떠 있었고, 그 밑에서는 끊긴 줄들이 아직 가늘게 떨었다. 가운데 홈 아래의 힘줄은 브론이 밀어 넣은 쐐기와 망치 자루에 걸린 채 낮게 울었다. 오른쪽 받침은 리에트가 발끝으로 딛고 있는 턱 밑에서 안쪽으로 천천히 꺼졌다. 위 계단 끝에는 창 하나와 짧은 활 하나가 남아 있었다. 둘은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 중 누가 먼저 어느 칸에서 틀어지는지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움직임을 아끼고 있었다.
아래 석상은 중심핵을 안은 채 한쪽 무릎을 접고 있었다. 멎은 게 아니었다. 다음 박자에 어디를 더 눌러야 착지대 전체가 한쪽으로 꺾이는지 고르는 자세였다. 가슴 앞 푸른 균열은 둥글게 닫힌 핵이 아니었다. 닫혀야 할 힘이 열세 갈래 실금으로 옆으로 새고 있었다. 한 군데를 억지로 누르면 다른 데가 더 길게 터질 모양이었다. 오른쪽 벽 밑에는 브론이 조금 전 열어 둔 점검 홈이 두 손 폭 남짓 벌어져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차갑고 눅눅한 바람이 들락거렸다.
나는 사람 얼굴보다 먼저 무너지는 순서를 읽었다.
왼쪽 거울판.
그다음 가운데 힘줄.
마지막이 오른쪽 받침.
받침이 꺼지면 브론 발밑과 리에트가 딛고 있는 턱이 같이 죽고, 위 계단 손들은 그 박자를 타고 내려붙는다. 점검 홈은 길이 아니라 틈이었다. 그 틈이 다시 닫히면 우리가 빠질 자리는 사라진다.
누가 먼저 다치느냐보다 어디가 먼저 꺾이느냐가 앞섰다.
위쪽 손들도 그 순서를 알고 있었다.
계단 옆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깎인 시야 홈이 세 줄 남아 있었다. 더 아래에는 깊게 눌린 자리 하나가 새로 보였다. 오래 묵은 먼지색이 아니었다. 방금 벗겨 낸 회색 가루가 홈 아래에 얇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 저 자리에서 이 방을 더 잘 내려다보도록 계속 손댄 흔적이었다. 몸부터 밀어 넣는 손이 아니라, 자리를 먼저 찍고 사람은 나중에 들이는 손. 라그나드 쪽 습관과 닮아 있었다.
더 꺼림칙한 건 저 손들이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급한 적은 몸부터 밀어 넣는다. 하지만 저 손들은 시야부터 고치고, 발판부터 읽고, 우리가 누구를 어느 돌 위에 세우는지부터 재고 있었다. 안에서 누가 끝까지 남는지, 누가 다리를 절고, 누가 마지막까지 뒤를 보는지 다 본 다음에야 손을 들이밀겠다는 태도였다.
전투보다 회수에 가까운 습관이었다.
“왼쪽, 가운데, 오른쪽.”
세라가 방패를 더 눌러 세우며 물었다.
“나부터라는 뜻은 아니겠지.”
“아니.”
나는 중심핵 금과 위 계단 활시위를 번갈아 봤다.
“왼쪽 반사는 네가 끊어. 브론은 가운데 힘줄. 리에트는 오른쪽 받침이랑 위 손을 같이 묶어. 미리엘은 마지막 선 순서만 잡아. 난 빠지는 순서를 정한다.”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결국 다들 자기 몫보다 한 박자 더 받으라는 말이군.”
“그래.”
나는 바로 답했다.
“혼자 남기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
잠깐 조용해졌다. 아래 석상도, 위 계단 끝 손들도 우리가 누구를 어느 자리에 세우는지 듣는 듯 움직임을 늦췄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돌가루가 왼쪽 거울판 아래로 계속 흘러내렸다. 방은 무너지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무너지는 중이었다.
세라가 먼저 방패 아랫변을 돌판 경계에 더 깊게 걸었다. 철과 돌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좋아.”
그녀가 짧게 숨을 삼켰다.
“대신 내가 버티는 마지막 박자는 네가 빼앗지 마. 내가 떼는 순간에만 잘라.”
리에트는 활끝을 위로 둔 채 말했다.
“난 위를 죽이는 쪽보다 늦추는 쪽으로 갈게. 대신 바깥이 누구 손인지 보고 나간다.”
미리엘은 은실 구슬을 감아 쥔 손을 더 조였다.
“문장선은 셋이에요. 하나는 중심핵, 하나는 왼쪽 거울판, 하나는 오른쪽 벽 뒤에 숨어 있어요. 마지막 선을 빨리 풀면 출구가 아니라 천장이 먼저 와요.”
브론이 가운데 홈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럼 내 일은 저걸 살려 두는 게 아니라, 어디로 죽게 할지를 고르는 거네.”
“오래 버티게 하는 것도 아니야.”
내가 말했다.
“필요한 만큼만 늦춘다.”
브론 눈빛이 계산 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받침과 힘줄, 위에서 내려올 하중을 차례로 재더니 낮게 말했다.
“좋아. 그 정도면 팔 하나쯤 담보로 걸 값은 있군.”
아래 석상이 먼저 움직였다.
왼쪽 거울판 잔면이 세라 쪽으로 번쩍이며 붉은 줄 하나를 밀어 냈다. 세라 평가장 맨 윗칸의 줄이었다. 실패를 기록하는 선. 세라 어깨가 아주 잠깐 굳었지만, 그녀는 그걸 치워내려 하지 않았다. 방패 각도를 반 치수 비틀어 반사선을 왼쪽 벽으로 흘려 버렸다. 푸른빛이 철면을 타고 미끄러지다 돌벽에 찢겨 박혔다.
동시에 위쪽에서 금속이 짧게 울렸다. 창잡이와 활잡이 둘만의 박자가 아니었다. 더 바깥에서 누군가 이 방의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지금.”
리에트 화살이 위 계단 끝 짧은 활 손목을 긁고 지나갔다. 완전히 떨어뜨리진 못했지만 그 틈에 남은 횃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리에트는 활을 낮추지 않았다. 팔을 맞힌 뒤에도 그녀 눈은 오른쪽 벽 위 시야 홈과 계단 뒤 어둠을 같이 재고 있었다.
미리엘은 가운데 금 앞 은실을 당겼다.
“첫째 선 풀려요. 둘째는 아직 잡혀 있어요.”
브론이 몸을 낮췄다. 망치 자루 끝이 오른쪽 받침과 가운데 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나무와 금속이 같이 우는 소리가 짧게 터졌다. 그는 장비를 세운 게 아니라 자기 몸을 쐐기처럼 박았다. 어깨로 망치 자루를 밀고, 무릎으로 깨진 턱을 눌러, 넘어질 때 힘이 아래가 아니라 오른쪽 벽으로 흐르도록 바꿨다. 큰 힘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무너지는 방향을 고쳐 시간을 사는 사람의 자세였다. 팔뚝 핏줄이 이미 검게 솟아 있었고, 손등 마디마다 먼지와 식은 피가 같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건 세우는 게 아니야.”
브론이 이를 갈며 말했다.
“걸쳐서 넘어지는 방향만 바꾸는 거다.”
그 말대로 받침 떨림이 달라졌다. 한꺼번에 아래로 내려앉을 울림이 아니라 오른쪽 벽 쪽으로 비켜 흐르는 울림이었다. 무너짐이 멈춘 건 아니었다. 대신 우리 다섯을 한 번에 삼킬 죽음이 반 박자 뒤로 밀렸다.
나는 중심핵을 다시 봤다. 푸른 금은 둥글게 닫히지 않았다. 셋째, 여섯째, 열세 번째 갈래에서 같은 박자로 옆으로 샜다. 엘레나 손목에 번지던 성흔열과 닮은 모양이었다. 막으려 모은 힘이 오히려 다른 선을 길게 찢는 식.
미리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건 닫히는 선이 아니에요.”
은실이 그녀 손끝에서 떨렸다.
“가운데를 깨면 끝나는 구조가 아니에요. 막는 힘이 옆으로 새요.”
브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핵을 쳐서 끝내는 건?”
나는 중심핵에서 올라오는 떨림과 발밑 힘줄, 위쪽 천장을 같이 봤다. 브론도 같은 걸 읽었는지 욕설을 삼켰다.
“안 되겠군.”
그가 거칠게 말했다.
“저 핵이 놈 심장이면서 받침줄이야. 정면으로 부수면 위가 먼저 내려앉아.”
세라가 짧게 물었다.
“확실해?”
“확실하지.”
브론이 망치 자루 끝으로 가운데 홈 아래를 가리켰다.
“왼쪽 판이 먼저 꺾이고, 그다음 홈이 죽어. 우린 그대로 깔린다.”
리에트가 활을 내리지 않은 채 낮게 숨을 뱉었다.
“좋네. 빨리 끝내는 선택지는 아예 없다는 거네.”
“그래서 바꾼다.”
나는 아래 석상과 위 계단을 같이 본 채 말했다.
“승리 조건을.”
세라 방패선과 리에트 화살선, 미리엘 손끝, 브론 어깨, 그리고 반쯤 막힌 오른쪽 벽 밑 틈이 한눈에 들어왔다.
“핵 파괴는 버려. 붕괴를 늦추고 빠질 길을 먼저 뚫는다.”
위쪽에서 다시 쇠가 돌을 긁는 소리가 났다. 오른쪽 벽 위, 시야 홈 아래에 새 돌가루가 더 흩어졌다. 누군가 지금도 우리가 어디로 빠질지 보려고 시야를 더 고치고 있었다.
리에트도 그걸 봤다.
“오른쪽 벽.”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저건 싸움을 보는 손이 아니야. 빠지는 길까지 재는 손이야.”
세라가 방패를 더 밀어 올리며 잘랐다.
“그럼 더 빨리 정해.”
“빨리 끝내면 저 손들 앞으로 굴러.”
나는 곧장 답했다.
“우리가 무엇을 들고, 누가 마지막에 빠지는지까지 본 다음에 받을 거야.”
아래 석상이 그 틈을 읽은 듯 상체를 세게 비틀었다. 가운데 거울판이 내 정면을 향해 푸른빛을 토했고, 이번엔 빈 배정 칸 하나가 떠올랐다. 이름 없는 칸. 언제든 다른 줄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 자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세라 방패 끝이 돌판을 짧게 쳤다.
딱.
“에이드리언.”
나는 바로 대답했다.
“가운데.”
“세라.”
“왼쪽 모서리.”
“리에트.”
“위턱 셋째 돌.”
“미리엘.”
“가운데 금 앞.”
“브론.”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오른쪽 받침. 아직 안 죽었어.”
이름과 자리만 오갔다. 격려도 맹세도 없었다. 그런데 거울판이 남이 가장 늦게까지 버릴 수 없는 것을 들이밀수록, 오히려 그 짧은 확인이 더 잘 먹혔다. 몸이 돌아갈 좌표를 먼저 붙들기 때문이었다.
아래 석상이 다시 몸을 틀었다. 왼쪽 거울판은 세라 쪽에서 미리엘 쪽으로 더 기울었고, 가운데 거울판은 내 정면에서 브론 발밑으로 반사를 늘렸다. 오른쪽 거울판은 리에트 활선 아래를 훑으며 위 계단 화살선과 한 줄로 맞아 들어갔다.
나는 빠지는 순서를 다시 계산했다.
브론이 먼저 빠져야 했다. 그가 남으면 힘줄이 먼저 죽는다. 미리엘이 둘째여야 했다. 마지막 선을 완전히 놓지 않은 채 물러나야 다음 둘이 산다. 리에트는 셋째다. 바깥에 누가 기다리는지 확인하고도 살아 빠질 사람이 그녀뿐이다. 세라는 마지막 반 박자다. 끝까지 방패로 빛과 창과 무너짐을 같이 받아낼 사람은 그녀뿐이다. 그리고 나는 세라가 떼는 순간을 잘라 뒤따른다.
말로 세우면 간단한 순서였다. 몸으로 치르면 누구 하나도 멀쩡히 지나갈 수 없는 계산이었다.
브론은 오른손만으로 망치 자루를 쥐고 있지 않았다. 손아귀가 미끄러질 때마다 손등으로 자루를 밀고, 팔꿈치 바깥을 받침 턱에 대 충격을 분산하고 있었다. 다음 한 번만 더 크게 울리면 오른쪽 어깨가 먼저 빠질 거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먼저 나가야 하는 건, 그 어깨가 끊기기 전에 힘줄 쪽 무너짐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뿐이기 때문이었다.
미리엘도 멀쩡하지 않았다. 은실을 쥔 손목 안쪽이 이미 붉게 번져 있었고, 문장선 셋이 서로 다른 박자로 떨릴 때마다 손등 실핏줄이 같이 들썩였다. 마지막 선을 남겨 둔 채 빠진다는 건, 자기가 문을 연 사람처럼 나가는 게 아니라 몸을 반쯤 문턱에 걸친 채 뒤 사람 숨구멍을 끝까지 붙드는 일이었다. 그녀가 둘째여야 하는 이유는 용감해서가 아니라, 가장 늦게까지 선을 읽으면서도 가장 먼저 손을 떼면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리에트는 활을 쏘는 팔보다 눈이 먼저 지쳤다. 위 계단 둘만 보는 게 아니라 오른쪽 벽 바깥의 시야 홈, 말안장 냄새가 번지는 방향, 금속 반사 높이까지 같이 재고 있었다. 틈으로 빠지는 순간에도 누가 기다리는지 보고 나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던전 안에서 겨우 바꿔 놓은 철수 순서가 바깥 회수조 손안에서 다시 다른 줄로 뒤틀린다.
세라는 끝까지 남는 자리가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이번에 맡은 건 혼자 버티는 영웅 자리가 아니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남에게 맡긴 채, 자기가 떼는 박자 하나로 뒤 사람까지 같이 살리는 자리였다. 그건 검으로 돌파하는 것보다 더 불쾌한 종류의 신뢰였고, 세라는 그 불쾌함을 알고도 받았다.
나는 그 넷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내게 마지막 반 박자를 맡긴 사실을 잊지 않으려 했다. 누구 하나 크게 남는 대신, 다섯 사람이 조금씩 더 더러운 계산을 나눠 들었다는 사실. 이 싸움이 끝나도 우리가 예전 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이미 정해졌는지도 몰랐다.
위 계단 창잡이가 무릎을 굽혔다. 짧은 활도 같은 박자로 팔을 들었다. 아래 석상은 무릎을 꺾은 채 상체를 밀어 올리며 중심핵 쪽 금을 더 벌렸다. 푸른 균열이 번질 때마다 착지대 아래 받침선도 함께 울었다.
“세라, 사람 막지 마. 빛 끊어.”
세라가 방패 각도를 바꿨다. 정면 창끝을 받는 대신 왼쪽 거울판과 위 화살선 사이에 철면을 세웠다.
“리에트, 위 오른팔.”
화살이 활 든 팔꿈치를 스쳤다.
“미리엘, 셋째 선 언제 꺾여.”
“둘 뒤.”
“브론, 홈 아래 걸칠 수 있어?”
브론이 이를 갈았다.
“완전히는 못 세워. 반 박자.”
“그걸로 됐다.”
세라 방패가 다시 돌판을 쳤다.
하나.
위 추적선 창끝이 내려왔다.
둘.
미리엘이 외쳤다.
“지금!”
브론이 망치 자루를 비틀어 가운데 홈 아래를 한 번 더 걸쳤다. 동시에 리에트 화살이 왼쪽 거울판 금 간 모서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반사면이 완전히 깨지진 않았지만 세라 앞을 덮던 붉은 줄은 찢겨 나갔다. 세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패를 밀어 창끝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검푸른 석상 상체가 크게 흔들렸다. 중심핵 균열도 함께 벌어지며 푸른빛이 세게 토해졌다.
미리엘이 거의 비명을 삼켰다.
“더 치면 안 돼요!”
브론도 동시에 으르렁거렸다.
“지금부턴 부수는 게 아니라 묶는 거다.”
나는 오른쪽 벽 밑을 다시 봤다. 반쯤 막힌 틈 아래로 마지막 문장선 하나가 스며들고 있었다. 완전히 열린 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을 올바른 순서로 붙들면 사람 하나씩 밀어낼 틈이 된다.
동시에 그 틈 바깥으로도 빛 한 줄이 스쳤다. 횃불빛이 아니라, 덮개 사이로 비친 가느다란 금속 반사였다. 바깥에서도 누군가 같은 틈을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살아서 나간다고 끝이 아니었다.
“미리엘, 마지막 선은 닫지 마.”
“잡아 두기만 하라고요?”
“그래. 열지도 끊지도 말고 숨만 남겨.”
“붙잡아 둘게요.”
“브론, 오른쪽 받침 버리고 가운데 힘줄을 반 박자만 더 걸쳐.”
브론이 내 얼굴을 봤다.
“그러면 내 팔이 먼저 나간다.”
“알아.”
나는 한 박자도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첫 번째다.”
세라가 바로 내 쪽을 봤다.
“그럼 누가 끝을 막지.”
“네가 막아.”
나는 세라와 리에트, 브론, 미리엘을 차례로 봤다.
“브론 먼저. 미리엘 둘째. 리에트 셋째. 세라가 마지막 반 박자. 나는 세라 빠지는 자리만 끊어 주고 뒤따른다.”
말을 내뱉고 나자 그 순서가 각자에게서 무엇을 뜯어 가는지 더 선명해졌다. 브론은 팔과 어깨를 먼저 담보로 걸어야 했다. 미리엘은 마지막 선을 완전히 놓지 않은 채 옆몸으로 비틀려 나가야 했다. 리에트는 제일 안전한 사수 자리를 버리고 바깥 시야를 확인한 다음에야 빠져야 했다. 세라는 끝까지 서서 빛과 창과 무너짐을 같이 받아야 했다. 나는 그 넷 가운데 누구도 영웅처럼 혼자 남지 못하게 반 박자씩 끊어 주는 타이밍을 틀리지 말아야 했다.
위쪽에서 다시 짧은 금속음이 울렸다. 바깥 회수조가 우리 움직임을 맞춰 읽고 있다는 뜻이었다.
브론이 먼저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가 아니라, 손해를 알고도 장부에 도장을 찍는 얼굴이었다.
“이제야 셈이 맞네.”
세라는 숨을 길게 뱉었다.
“내가 마지막이면, 내 발이 떨어질 때까지 뒤에서 명령하지 마.”
“안 한다.”
“말고 자리만 불러.”
“그래.”
리에트가 활촉을 위로 세웠다.
“내가 셋째면 바깥 시야는 보고 빠진다.”
미리엘은 마지막 선을 붙든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브론이 지나갈 만큼은 열어 둘게요. 그다음은 저와 리에트. 세라는 어깨를 낮추면 돼요.”
그녀 말끝이 떨렸지만,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래 석상이 다시 중심핵을 조였다. 푸른 금이 짧게 수축하며 거울판 셋이 한꺼번에 번쩍였다. 세라가 먼저 방패를 한 치 더 앞으로 밀었다. 리에트 화살이 오른쪽 벽 위, 누군가 미리 깎아 둔 시야 홈 가장자리를 후려쳤다. 돌이 깨지며 가루가 아래로 쏟아졌고, 바깥에서 들어오던 빛줄기 하나가 흐려졌다.
미리엘이 외쳤다.
“열려요. 사람 하나씩은 밀어낼 수 있어요!”
“브론, 지금.”
브론은 욕설을 삼킨 채 몸을 틀었다. 망치 자루를 끝까지 걸친 뒤 어깨를 낮춰 틈으로 먼저 몸을 밀어 넣었다. 빠져나가는 순간에도 한 번 뒤를 돌아 받침 떨림을 확인했다. 그 한 박자 때문에 힘줄이 더 울었지만 출구는 닫히지 않았다. 점검 홈 안쪽으로 들어간 그의 오른팔이 벽에 쓸리며 피를 남겼고, 그는 왼손으로 먼저 바깥 돌턱을 잡았다. 망치 자루는 받침 아래 남아 있었다. 공방을 잃은 사람이 마지막 도구까지 놓고 지나가는 소리가 방 안에서 둔하게 울렸다.
“미리엘.”
미리엘은 은실을 놓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선을 완전히 끊지 않고 손목만 틀어 숨구멍처럼 남겨 둔 채 옆몸으로 빠져나갔다. 그녀가 지나간 직후 틈 가장자리가 돌가루를 쏟아 냈다. 은실은 문지방 위에 얇은 물방울처럼 남았다. 바깥으로 넘어간 손이 계속 떨렸지만, 선은 끊기지 않았다.
지나가며 미리엘이 낮게 말했다.
“안쪽은 무너져도 선은 남아요. 바깥에서 다시 열 수 있어요.”
위로가 아니었다. 이 방을 만든 자들이 한 번만 오갈 생각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이 길을 닫힌 길로 만들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들어오고, 다시 꺼내고, 다시 덮을 수 있는 점검 홈으로 남겨 두었다.
“리에트.”
리에트는 마지막 화살 하나를 더 쐈다. 창잡이 뒤 어둠을 노린 게 아니라, 그 뒤에서 반짝인 짧은 금속면을 긁었다. 누군가 몸을 숨긴 채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화살촉이 금속면을 스치자 짧은 욕설이 바깥에서 바로 튀었다. 기사단식도, 성도식도 아닌 거친 억양이었다.
그 한 발이면 충분했다. 누가 있는지 봤다. 더 나쁜 건, 들킨 쪽이 뛰어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바깥 손들은 지금도 우리를 잡으러 달려들기보다, 어느 틈으로 몇 사람이 빠져나오는지 끝까지 재고 있었다.
리에트는 곧바로 몸을 틀어 틈으로 미끄러졌다. 지나가면서도 그녀는 활을 접지 않았다. 활등을 먼저 넘기고, 어깨를 낮추고, 발끝으로 안쪽 돌가루를 한 번 쓸어 뒤 사람 발판을 만들었다. 사수 자리를 버리는 동작이 아니라, 사수 자리를 바깥으로 옮겨 가는 동작이었다.
이제 세라만 남았다.
위 계단 끝 짧은 활이 마지막으로 당겨졌다. 아래 석상도 상체를 더 밀어 올렸다. 상하 압박이 한 줄로 묶이며 세라 방패선으로 몰렸다. 왼쪽에서는 반사선이 철면을 핥았고, 위에서는 창끝과 화살선이 같은 자리를 계속 더듬었다. 아래에서는 중심핵 균열이 벌어질 때마다 돌판 밑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세라.”
나는 이름만 불렀다.
세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위치.”
“왼쪽 모서리 끝.”
세라 발이 그 자리를 정확히 눌렀다. 방패가 마지막으로 반사를 끊는 동안 나는 그녀 뒤 어깨끈을 잡을 준비를 했다. 먼저 끌지 않는다. 그녀가 떼는 순간에만 맞춘다.
창끝이 방패를 긁었다. 화살 하나가 철면을 스치고 튕겼다. 아래 석상 무릎이 착지대를 한 번 더 밀어 올렸다. 세라는 그 힘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비틀었다. 충격이 왼쪽 벽으로 흘렀다. 돌이 깨지며 먼지가 솟았고, 그 가림막 덕분에 위쪽 시야가 반 박자 끊겼다.
세라가 버티는 건 적 하나가 아니었다. 빛, 창, 화살, 무너짐, 그리고 우리가 빠져나간 뒤 남은 공백까지 같이 버티는 자세였다. 끝까지 혼자 서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에야 다른 손이 자기 몸을 당기도록 허락하고 있었다. 혼자 남아 시간을 사는 쪽이 더 익숙한 사람들인데도, 이번에는 각자 자기 마지막 반 박자를 남에게 맡기고 있었다.
“지금.”
세라가 먼저 말했다.
나는 그제야 어깨끈을 잡아 뒤로 당겼다. 세라가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방패 아랫변이 돌판에서 떨어졌고 착지대 경계가 바로 주저앉았다. 반 박자만 늦었어도 그녀 다리가 같이 물렸을 자리였다.
세라가 틈 쪽으로 몸을 던져 들어갔다.
나는 아직 안 빠졌다. 뒤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출구가 닫히지 않았는지, 그리고 바깥에서 어느 손이 먼저 우리를 받을지를 마지막으로 봐야 했다.
오른쪽 벽 틈 바깥으로 횃불 셋이 짧게 흔들렸다. 일정한 간격. 군영식도, 성도식도 아닌, 회수대가 서로 위치를 넘길 때 쓰는 건조한 신호였다. 그 아래에는 젖은 말안장 가죽 냄새와 쇠고리 마찰음이 섞여 있었다. 구하러 오는 발소리가 아니었다. 살아 나온 사람을 자기 몫으로 옮기러 오는 발소리였다.
바람이 틈 안으로 먼저 밀려 들어왔다. 젖은 철 냄새와 말안장 기름 냄새 사이로, 천천히 달군 칼집에서만 나는 미지근한 기름 냄새가 따라왔다. 기다리던 손들이 무장을 풀지 않은 채 서 있다는 뜻이었다.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진술이 아니라 구분이었고, 치료가 아니라 인계였고, 귀환이 아니라 회수였다.
그리고 그 인계는 우리 다섯을 한 덩어리로 받으려는 모양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나오느냐, 누가 다쳤느냐, 누가 똑바로 서 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질 냄새가 이미 섞여 있었다. 먼저 끌려가는 사람은 증언보다 신분을 확인당할 것이고, 마지막까지 버틴 사람은 살아남은 이유부터 캐물어질 것이다. 던전 안쪽에서 겨우 벗어나도, 바깥에서는 우리를 다시 각자 다른 칸에 집어넣으려 할 게 분명했다.
돌아가면 끝난다.
수련원으로 돌아가도, 성도로 돌아가도, 숲으로 빠져도, 이미 누군가가 우리를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회수 대상으로 먼저 보고 있다. 브론은 금지 합금과 불법 진입 때문에, 미리엘은 삭제 교리와 보관자 기록 때문에, 리에트는 숲 바깥 개입과 추적 흔적 때문에, 세라는 보고 지연과 감시 문서 파기 때문에 따로 끌려갈 수 있었다. 나는 이름보다 먼저 반응자로 불릴 것이다. 같이 있으면 위험한 게 아니었다. 각자 흩어지면 더 빨리 끝난다.
엘레나 치료 시한도, 로웬이 남긴 메모도, 성도와 왕국이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며 덮어 온 기록도 결국 한 점으로 모였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누구 손에 먼저 잡히느냐에 따라, 방금 본 것의 이름까지 다시 빼앗길 수 있다.
나는 발끝으로 열세 번째 잔선 가장자리를 한 번 더 눌렀다. 무너지는 자리와 바깥 신호를 같이 기억해 두려는 듯 돌이 아주 작게 떨렸다. 보관자라는 말이 아직 귀 뒤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말보다 먼저 남은 건 네 방향에서 되돌아온 자리 확인이었다. 가운데. 왼쪽 모서리. 위턱 셋째 돌. 오른쪽 받침. 나는 그 짧은 말들을 놓치지 않은 채 몸을 틀었다.
돌틈 안쪽 공기는 더 차갑고 더 눅눅했다. 어깨와 팔꿈치가 양쪽 돌에 동시에 긁혔고, 뒤꿈치가 걸릴 때마다 무너진 가루가 종아리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앞에서는 브론이 낮게 욕설을 삼키며 자리를 만들고 있었고, 리에트는 바깥 숨소리를 세고 있었고, 미리엘은 아직 남겨 둔 선의 떨림을 손끝으로 재고 있었다. 세라는 내 바로 앞에서 한 번도 뒤돌지 않은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모두가 살았다는 안도보다, 아직 누구 손에 안 넘어갔다는 경계가 먼저 흐르는 숨이었다.
등 뒤에서 착지대가 크게 주저앉았고, 그 소리 위로 바깥 회수조의 금속 신호가 다시 또렷하게 울렸다. 금속이 서로 닿는 박자가 일정했다. 셋 끊고 둘, 다시 하나. 바깥 손들은 우리가 몇 명인지보다 누가 먼저 나오는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론이 앞에서 낮게 말했다.
“나가면 어느 쪽이냐.”
리에트가 숨을 세며 답했다.
“왼쪽은 말안장 냄새. 오른쪽은 봉함 종이. 정면은 비워 뒀어. 비워 둔 길이 제일 나빠.”
미리엘의 은실이 손끝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선은 뒤에서 아직 살아 있어요. 이쪽에서 닫으면 저쪽에서 다시 열 수 있어요.”
세라가 방패를 돌틈에 세워 뒤를 가렸다.
“그럼 나가서 흩어지면 각자 잡힌다.”
나는 좁은 틈 안에서 고개를 끄덕일 공간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서 흩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 처음으로 명령보다 약속처럼 들렸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불러 살아남았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내지 않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수련원, 성도, 숲, 공방, 왕국 보고선. 그 모든 길은 이미 누군가의 손에 놓인 이름표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산 건 탈출이 아니었다.
다음 포위와 맞붙을 자리 하나였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