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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기억

위 계단 끝은 이미 사람 발에 다시 닳고 있었다. 사선으로 꺾여 내려온 돌단 가장자리에는 방금 박힌 화살촉 하나가 떨리고, 그 아래 착지대는 세라 방패 끝이 찍어 놓은 흠집을 기준으로 얇게 갈라져 있었다. 왼쪽 거울판은 모서리에 금이 간 채 세라 무릎 높이에서 비스듬히 매달렸고, 가운데 거울판은 내 얼굴선보다 조금 위에서 흔들리며 세 장 중 가장 깊은 푸른빛을 토하고 있었다. 오른쪽 거울판 아래에는 리에트가 딛고 선 턱이 있었다. 턱 끝 돌가루는 이미 한 번 쓸렸고, 그 밑으로 브론이 쐐기를 박아 둔 받침선이 가늘게 울었다. 더 아래, 검푸른 석상은 한쪽 무릎을 꺾은 채 상체를 틀고 있었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 다음 박자를 다시 세우기 위해 몸을 고쳐 잡는 자세였다.

세라는 내 왼쪽 반 걸음 앞에서 방패를 세우고 있었다. 방패 아랫변은 착지대와 가운데 돌판 경계에 닿아 있었고, 윗변은 위 계단에서 내려올 화살선을 겨우 끊을 만큼만 들려 있었다. 리에트는 오른쪽 턱에서 활을 내리지 않은 채 위쪽 짧은 활 둘과 아래 반사면 사이를 재고 있었다. 미리엘은 가운데 돌판 가장자리에서 은실 구슬을 감아 쥔 손끝으로 문장선 떨림을 짚고 있었고, 브론은 오른쪽 받침과 천장 응력 틈을 번갈아 올려다보며 망치 자루를 뒤집어 쥐고 있었다.

아래 석상이 거울판 셋을 다시 세웠다.

이번에는 빛보다 저림이 먼저 왔다. 손등이 먼저 시큰하게 울리고, 잇몸 안쪽이 따라 떨렸다. 가운데 거울판에 길게 번진 반사는 내 빈 칸을 비추지 않았다. 대신 세라 방패 옆으로 엘레나의 창백한 손이 한번 스치고, 그 뒤로는 미리엘 장부 줄이 겹쳤다. 왼쪽 거울판에는 리에트가 놓친 숲길 불빛이 아니라 브론 공방 바닥의 붉은 불꽃이 걸렸고, 오른쪽 거울판에는 세라 평가장의 그림자가 활시위 위로 미끄러졌다.

자기 상처가 아니었다. 남의 가장 늦게 버릴 수 없는 것이 먼저 내 눈앞으로 던져졌다.

리에트가 가장 먼저 욕설을 삼켰다.

“위 둘이 아니라 아래가 먼저 먹는다.”

그녀는 시선을 거울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내 쪽 반사가 아니야. 세라 쪽 그림자를 내 활선으로 끌어오고 있어.”

세라가 방패를 더 낮췄다. 팔 힘으로 막는 대신 방패 모서리를 돌판에 박아 넣듯 눌렀다.

“나도 보여.”

짧게 말한 뒤,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저건 내가 볼 게 아니야. 어디를 세면 돼?”

나는 거울 대신 위치를 다시 읽었다. 위 계단 끝 창잡이는 왼쪽으로 조금 더 나와 있었고, 짧은 활 둘은 같은 각도로 우리 착지대 중심을 재고 있었다. 아래 석상의 중심핵은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가슴 앞 검푸른 틈 사이로 푸른 금 하나가 숨을 쉬듯 벌어졌다 닫혔다. 그 금은 둥글게 퍼지지 않았다. 상처처럼 한 줄로 찢어진 뒤, 다시 열세 갈래의 가는 실금으로 옆으로 새고 있었다. 가운데로 닫혀야 할 힘이 끝마다 미끄러지며 옆살을 더 찢는, 엘레나의 손목에서 보았던 갈라짐과 닮은 금이었다.

미리엘이 그걸 보고 숨을 삼켰다.

“저 갈라짐…”

그녀 손끝의 은실이 떨렸다.

“닫히는 선이 아니에요. 성흔열이 벌어질 때처럼, 가운데를 막아도 옆으로 샙니다.”

브론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병자국이랑 같단 소리냐?”

“완전히 같다고는 못 해요. 그런데 간격이 같아요. 셋째, 여섯째, 열세 번째.”

미리엘은 기도문이 아니라 실무 장부를 읽듯 말했다.

“정화선이 붙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요. 엘레나의 상처도 그랬어요.”

엘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세라 손등 힘이 잠깐 흔들렸다. 거울판은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세라 앞 반사면에 떠오른 창백한 손이 이번엔 내 소매를 붙잡는 모양으로 겹쳤다. 방패를 드는 손이 아니라 구하지 못하는 손의 기억을 강제로 만들어 내는 방식이었다.

“세라.”

나는 그녀 이름만 먼저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 있어.”

“왼쪽 모서리.”

세라의 왼발이 바로 착지대 모서리를 찾았다.

“리에트.”

“위턱 셋째 돌.”

그녀는 내가 끝까지 말하기도 전에 제 자리를 먼저 말했다.

“미리엘.”

“가운데 금 앞.”

“브론.”

브론이 망치 자루를 돌리며 씩 웃었다.

“오른쪽 받침. 안 죽었어.”

이름과 현재 자리만 오갔다. 위로도 맹세도 없었다. 하지만 거울이 던진 남의 상처는 그 순간만큼은 밀려났다. 몸이 돌아올 자리를 먼저 찾았기 때문이다.

아래 석상이 그걸 배운 듯 몸을 더 틀었다. 왼쪽 거울판이 세라 쪽이 아니라 미리엘 쪽으로 조금 더 기울고, 가운데 거울판은 내 정면에서 브론 발밑으로 반사를 늘렸다. 오른쪽 거울판은 리에트 활선 아래를 훑으며 위 계단 화살선과 한 줄로 맞아 들어갔다.

“자리 부르는 것까지 베낀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이제 그냥 맞박자론 안 돼.”

“그러니까 더 짧게 간다.”

나는 곧장 잘랐다.

위 계단 창잡이가 무릎을 굽혔다. 짧은 활 둘도 같은 박자로 팔을 들었다. 아래 석상은 무릎을 꺾은 자세 그대로 상체를 밀어 올리며 중심핵 쪽 금을 더 벌렸다. 푸른 균열이 거울판 뒤로 퍼질 때마다 착지대 아래 받침선도 함께 울었다. 왼쪽 발판이 먼저 꺼지고, 반 박자 늦게 가운데 홈 아래 힘줄이 따라 비틀렸다.

브론 시선이 그쪽으로 확 꺾였다.

“잠깐.”

그는 받침과 천장을 한 번에 보고 이를 드러냈다.

“저 핵, 지금 정면으로 박살 내면 안 된다.”

세라가 짧게 물었다.

“왜.”

“핵이 받침이야.”

브론 망치 자루 끝이 가운데 돌판 아래로 향했다.

“저 갈라진 놈이 보스 심장인 동시에 천장 응력 묶는 목줄이야. 지금 저걸 힘으로 깨면 놈보다 위가 먼저 내려앉아. 왼쪽 판부터 꺾이고 가운데 홈이 꺼져. 저 위 추적선까지 같이 처묻히겠지만, 우리도 끝이야.”

미리엘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선도 같아요. 핵으로 모이는 게 아니라 핵을 지나 바깥 벽으로 퍼져요. 부순다고 잠잠해질 놈이 아니에요. 묶인 게 한꺼번에 풀릴 거예요."

리에트가 숨을 얇게 뱉었다.

“좋네. 죽여도 바로 못 죽이고, 살려 두면 우릴 먹는다는 거지.”

“안 부수고 꺼내야 해.”

내 말에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말은 쉽다.”

“그래서 네가 필요해.”

브론 눈이 잠깐 번뜩였다. 거울판이 또 한 번 그 표정을 잡아먹으려 들었지만, 그는 이번엔 반사를 보지 않고 받침만 봤다.

“좋아. 그 말은 마음에 든다.”

위쪽에서 활시위 소리가 먼저 울렸다.

“리에트, 위 하나.”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아도 리에트가 쐈다. 첫 화살이 창잡이 손목 아래를 스치고, 두 번째 화살은 오른쪽 거울판 매단 줄과 위쪽 화살선이 겹치는 지점을 훑었다.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지만 반사면 각도가 반 치수 틀어졌다.

그 틈에 세라가 방패를 들어 올리는 대신 앞으로 밀었다. 방패 윗변이 내려오는 화살 하나를 긁어 내리며 아래 석상 상체를 살짝 비껴 세웠다. 반사가 정면으로 모이지 못하고 방패 철면을 타고 옆으로 새자, 미리엘이 곧바로 외쳤다.

“지금, 가운데 금 열려요!”

브론이 기다렸다는 듯 망치 자루를 돌판 아래 틈에 밀어 넣었다. 대신 눌린 받침이 한 박자 늦게 주저앉으며 석상 가슴 앞 균열이 더 드러났다.

나는 처음으로 그 안쪽을 똑바로 봤다.

푸른 금은 원형 핵처럼 매끈하지 않았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은 열세 갈래가 한 번씩 어긋나며, 붙어야 할 선이 끝마다 미세하게 떠 있었다. 상처를 다잡으려 모인 힘이 오히려 옆으로 새며 금을 더 길게 찢어 놓고 있었다. 던전 아래 이 보스와 도시 안 병상 위 엘레나가 같은 상처 계열로 묶여 있다는 감각이 설명보다 먼저 목 안으로 넘어왔다.

거울판이 그걸 읽었는지, 이번에는 내 앞에 엘레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띄우지 않았다. 대신 미리엘 손끝 위로 보류 도장이 찍히는 장부 칸을 보여 줬다. 엘레나를 직접 비추는 쪽보다, 나를 늦추는 데 그 장면이 더 잘 먹힌다는 걸 아는 것처럼.

심장이 비어 버릴 듯 내려앉았다.

하지만 곧바로 세라 방패 끝이 돌판을 치는 소리가 났다.

딱.

“에이드리언, 가운데.”

이번엔 세라가 내 이름과 자리를 같이 붙들었다.

리에트도 거의 동시에 쏘아붙였다.

“눈 들지 마. 위턱은 내가 본다.”

미리엘 목소리는 더 짧았다.

“금은 아직 살아 있어요.”

브론은 아예 명령처럼 잘랐다.

“발 오른쪽 안 무너진다. 그러니 생각 말고 서.”

내가 그들을 붙잡던 방식이 그대로 돌아왔다. 이름과 현재, 그리고 지금 버틸 수 있는 자리. 거울판이 남의 상처를 가져다 던질수록 오히려 그 방식만 또렷해졌다.

아래 석상이 한쪽 무릎으로 착지대를 더 밀어 올렸다. 위 계단 추적선 둘도 동시에 내려붙었다. 하나는 세라 방패선을 넘기 위해 창을 길게 빼 들었고, 다른 하나는 리에트 시야를 끊으려 짧은 활을 아래로 눌렀다. 상하 압박이 다시 한 줄로 물렸다.

“세라, 사람 막지 마. 빛 끊어.”

세라가 즉시 방패 각도를 바꿨다. 창끝을 정면으로 받는 대신 왼쪽 거울판과 위 화살선 사이에 철면을 세웠다.

“리에트, 위 오른쪽 팔.”

리에트는 활 든 팔꿈치를 먼저 긁어 시야를 틀었고, 화살 하나가 빗나가자 곧장 아래 왼쪽 거울판 금 간 모서리로 두 번째 화살을 보냈다. 세라의 방패가 반사를 반 치수 늦춘 바로 그 박자였다. 화살촉은 거울 모서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고, 세라 앞에 겹치던 장부 줄이 먼저 찢겨 나갔다.

“미리엘, 셋째 선 언제 꺾여.”

“둘 뒤.”

“브론, 홈 아래 뽑을 수 있나.”

브론이 받침 틈을 재며 이를 갈았다.

“완전히는 못 빼. 대신 걸치게는 만들 수 있어.”

“그걸로 됐다.”

세라 방패가 다시 돌판을 쳤다.

하나.

위 추적선 창끝이 내려왔다.

둘.

미리엘이 외쳤다.

“지금!”

브론이 망치 자루를 비틀어 가운데 홈 아래를 한 번 걸쳤다. 동시에 리에트 화살이 왼쪽 거울판 금 간 모서리를 더 깊게 파고들었다. 반사면이 완전히 깨지진 않았지만 세라 앞에 겹치던 장부 줄과 창백한 손이 찢겨 나갔다. 세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패를 앞으로 밀어 창끝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검푸른 석상 상체가 흔들렸다. 중심핵 균열도 함께 벌어지며 푸른빛이 한 번 세게 토해졌다.

미리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 치면 안 돼요!”

“알아.”

브론도 거의 동시에 으르렁거렸다.

“지금부턴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묶어야 해.”

위쪽 추적선 하나가 발을 헛디뎠다. 리에트 화살이 만든 빈 박자 덕이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여전히 계단 끝에서 우리를 누르고 있었다. 아래 석상도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갈라진 중심핵을 안으로 감추듯 몸을 웅크리며 다음 반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짧게 고른 뒤 말했다.

“승리 조건 바꾼다.”

세라가 물었다.

“어떻게.”

“핵을 부수는 게 아니다.”

내 시선은 중심핵과 받침, 위 추적선 발, 세라 방패선, 리에트 턱, 미리엘 손끝, 브론 쐐기를 차례로 훑었다.

“저걸 버티게 묶은 채 꺼낼 길을 만들어야 한다. 왼쪽 반사를 먼저 죽이고, 홈 아래 힘줄을 걸친 채, 위 추적선을 늦추면서 빠져나간다. 안 그러면 여기서 같이 깔린다.”

잠깐 정적이 왔다. 다들 같은 계산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돌리는 틈이었다.

브론이 먼저 침을 뱉듯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는 보스 사냥이 아니라 붕괴 지연이다.”

미리엘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받았다.

“문장선은 제가 잡을게요. 풀리는 순서만 안 놓치면 돼요.”

리에트는 이미 다음 화살을 걸고 있었다.

“위쪽은 내가 늦춰.”

세라는 방패를 더 깊게 세우며 내 옆에 발을 맞췄다.

“넌 자리만 계속 불러.”

거울판 셋이 다시 들렸다. 갈라진 왼쪽 면에는 미리엘 장부가, 가운데에는 브론 공방 불꽃이, 오른쪽에는 엘레나의 창백한 손이 번졌다. 적은 우리가 방금 바꾼 판단까지 곧바로 읽어 낸 듯했다. 이제는 단순히 누군가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 때문에 끝까지 자리를 못 버리는지 그 순서를 더 깊게 찌르려는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위 계단 끝 활시위가 다시 당겨졌다. 아래 석상 몸통이 갈라진 중심핵을 감싸며 마지막 남은 거울면 각도를 조였다. 착지대 아래 받침선도 함께 울었다.

부수면 끝나는 싸움이 아니었다.

잘못 건드리면 던전 전체가 먼저 무너진다. 그러니 이제부터 이 전투의 목적은 적을 깨뜨리는 일이 아니라, 무너질 것을 버티게 붙들고 그 안에서 살아 나갈 길을 뜯어내는 일이었다.

나는 세라 방패 윗변과 리에트 활끝, 미리엘 은실, 브론 쐐기, 내 발밑 열세 번째 잔선을 다시 한 줄로 묶었다.

“세라, 왼쪽 모서리.”

“여기.”

“리에트, 위턱 셋째 돌.”

“보고 있어.”

“미리엘, 가운데 금.”

“살아 있어요.”

“브론, 오른쪽 받침.”

브론이 짧게 웃었다.

“안 무너진다. 아직은.”

거울판이 한 번 더 번쩍였다.

이번엔 우리가 그 빛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도 버텨 낼 수 있는지, 그리고 무너뜨리지 않고 빼낼 방법을 찾을 때까지 서로의 자리를 얼마나 오래 붙들 수 있는지를 시험하려는 반짝임이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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