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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혀 온 사람

보스실 중앙의 착지대는 둥근 돌판 세 장이 어긋나 겹친 모양이었다. 앞쪽은 검게 파인 중심핵, 왼쪽은 깨진 거울판과 세라의 방패, 오른쪽은 무너진 받침 기둥과 브론의 망치가 버티는 자리였다. 위 계단에서는 짧은 쇠발굽 소리가 내려왔고, 뒤쪽 통로는 이미 갈라진 돌가루와 푸른 빛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중앙보다 반걸음 뒤에 섰다. 세라는 내 왼앞에서 방패를 낮게 세우고, 리에트는 오른쪽 턱 위에 한쪽 무릎을 걸친 채 위 계단을 겨눴다. 미리엘은 내 뒤 왼편에서 은실 구슬을 손바닥에 감아 쥐었다. 브론은 오른쪽 받침 밑에 어깨를 밀어 넣고, 망치 자루를 돌 틈에 깊게 박았다. 우리 사이 거리는 넓지 않았다. 누가 한 걸음만 비틀려도 거울빛이 빈틈을 찌를 거리였다.

두 번째 손이 내려왔다. 석상 팔처럼 보였던 것은 팔이 아니었다. 갈라진 중심핵에서 뻗은 푸른 줄기들이 서로 감겨 만든 거대한 갈퀴였다. 갈퀴 끝마다 작은 거울 조각이 붙어 있었고, 그 조각들은 우리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얼굴보다 먼저 각자의 뒤에 달라붙은 실패, 빚, 보류 도장, 미처 말하지 못한 이름을 비췄다.

세라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철면 위로 붉은 줄 하나가 먼저 번졌다. 훈련장 바닥, 구경꾼의 숨소리, 벨로네가 아닌 성을 부르던 심판석. 세라의 손목이 한순간 굳었다. 갈퀴는 바로 그 틈을 타고 방패 위쪽을 긁었다. 쇳소리가 짧게 튀었고, 방패가 반 치수 밀렸다.

나는 세라를 달래지 않았다. 달래는 말은 늦었다. 지금 필요한 건 그녀가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붙들어 주는 말이었다.

“세라. 왼쪽 모서리 낮춰. 방패 아랫변으로 돌판 경계를 물어.”

세라는 대답보다 먼저 움직였다. 무릎이 내려가고, 방패 아랫변이 왼쪽 돌판의 깨진 선을 깊게 눌렀다. 갈퀴 끝이 빗나가 거울판 모서리를 때렸다. 푸른 파편이 그녀 어깨 위로 튀었다.

위 계단에서 짧은 화살이 내려왔다. 리에트가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몸을 세우지 않고 턱 위에 걸친 발목만 돌렸다. 화살은 리에트의 귀 옆을 스치고 뒤쪽 벽에 박혔다. 그 순간 오른쪽 거울 조각이 리에트 앞에 숲길을 펼쳤다. 비에 젖은 길, 뒤돌아보지 못한 사람, 보고서에 남지 않은 발자국.

리에트의 눈이 아주 잠깐 멀어졌다.

나는 바로 불렀다.

“리에트. 위 계단 셋째 돌. 발로 먼저 끊어.”

리에트는 숨을 들이켰다. 손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오른발 뒤꿈치가 턱 위 셋째 돌을 밟아 눌렀고, 활은 그다음에 따라왔다. 날아간 화살은 위 계단 끝의 창잡이 손목이 아니라 발등을 긁었다. 놈은 창을 놓치지 않았지만, 발을 빼느라 박자를 잃었다. 아래로 내려오던 압박이 한숨 늦어졌다.

미리엘 쪽 거울은 소리를 냈다. 종이 넘기는 소리였다. 보스실 한가운데에서 종이가 있을 리 없는데, 그 소리는 성도 서고 깊은 방처럼 건조했다. 푸른 조각 안에 장부 칸이 떠올랐다. 이름보다 먼저 분류가 붙고, 분류보다 먼저 봉인 번호가 박혔다. 미리엘의 손가락이 은실 구슬을 너무 세게 쥐었다. 손톱 밑이 하얗게 질렸다.

“미리엘. 글자 보지 마. 금만 봐.”

내 말에 미리엘이 눈을 내렸다. 그녀는 거울 속 장부가 아니라 중심핵의 갈라진 금을 보았다. 검은 핵 표면 위로 열세 갈래 푸른 금이 퍼져 있었다. 굵은 가지 셋, 가는 가지 아홉, 그리고 한 줄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얇게 돌아 우리 발밑까지 이어졌다. 미리엘의 숨이 짧아졌다.

“엘레나 님의 상처랑 같아요.”

그녀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보스실 안쪽 돌벽까지 차갑게 번졌다.

브론이 받침 밑에서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 얘긴 좋은 얘긴가, 나쁜 얘긴가.”

“나쁜 쪽이 먼저예요. 저 금을 그냥 끊으면 아래가 같이 무너져요.”

브론은 욕을 삼켰다. 그는 받침을 들어 올리려 하지 않았다. 망치 자루를 더 깊게 밀어 넣고, 어깨를 비틀어 힘의 방향을 바꿨다. 무너지는 것을 세우는 자세가 아니었다. 무너질 때 어디로 넘어질지 정하는 자세였다. 돌가루가 그의 목덜미로 쏟아졌다.

갈퀴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누구 한 사람을 때리지 않았다. 세라 방패 위에는 붉은 줄, 리에트 앞에는 젖은 숲길, 미리엘 손끝에는 장부 칸, 브론 뒤에는 공방 불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내 앞에는 빈 칸이 떴다. 이름이 들어갈 자리도 아니었다. 이미 이름을 지운 뒤 남은 칸이었다.

보관자.

목소리는 밖에서 들리지 않았다. 내 머리 뒤쪽, 오래 접힌 종이 사이에서 올라왔다.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보관된 사람. 필요할 때 꺼내 쓰고, 필요하지 않으면 덮어 두는 사람. 그 말은 거짓이라서 아프지 않았다. 너무 많은 장면에서 이미 본 방식이라서 아팠다.

갈퀴는 그 통증을 알고 있었다. 놈은 우리를 죽이기 전에 먼저 읽었다. 누가 어느 말에 멈추는지, 누가 누구의 이름을 들으면 발을 빼는지, 누가 어떤 장부를 보면 손을 놓는지. 적은 힘으로 우리를 찢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었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흩어지게 만드는 순서를 찾고 있었다.

나는 빈 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빈 칸을 지우려 들면 더 깊게 빨려 들어간다. 지금은 지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붙드는 시간이었다.

“전부 자리만 들어.”

내 목소리가 처음보다 낮게 나갔다.

“기억이 아니라 지금 발 밑. 세라, 왼쪽 돌판 경계. 리에트, 위 계단 셋째 돌. 미리엘, 중심핵 열세 금. 브론, 오른쪽 받침 아래 홈. 나는 중앙 잔선.”

세라가 방패 뒤에서 짧게 숨을 뱉었다.

“왼쪽 경계.”

리에트가 턱 위에서 활을 다시 걸었다.

“셋째 돌.”

미리엘이 은실 구슬을 놓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열세 금.”

브론이 받침 밑에서 망치 자루를 한 번 비틀었다.

“오른쪽 홈.”

마지막으로 내가 내 발밑을 봤다. 열세 번째 잔선은 내 왼발 앞에서 아주 얇게 빛났다. 중심핵에서 흘러나온 줄이 아니었다. 던전 바닥 깊은 곳에서 올라와 중심핵을 붙들고 있는 줄이었다. 깨뜨리면 길이 열리는 줄이 아니라, 아직까지 무너짐을 늦춰 온 줄.

“중앙.”

내가 스스로 대답했다.

그 순간 거울빛이 한 번 꺾였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각자의 상처를 잡아당기던 힘이 아주 조금 헐거워졌다. 세라는 방패를 다시 앞으로 밀었고, 리에트는 위쪽 활잡이의 두 번째 동작을 겨눴다. 미리엘은 은실을 핵 쪽으로 바로 던지지 않고, 공중에서 한 번 접어 금의 흐름만 더듬었다. 브론은 받침을 버티며 오른쪽 어깨를 벽 쪽으로 밀었다.

보스는 우리가 다시 현재로 돌아온 것을 싫어했다. 갈퀴 끝의 거울 조각들이 더 날카롭게 울었다. 이번에는 장면이 더 가까웠다. 세라 앞에는 평가장이 아니라 누군가를 뒤에 세운 채 문을 막던 밤이 비쳤다. 리에트 앞에는 젖은 숲길 끝에 남겨진 깃 조각이 흔들렸다. 미리엘 앞에는 성도 봉인국의 하얀 손들이 장부를 덮었다. 브론 앞에는 공방 바닥에서 꺼져 가는 불꽃이 번졌다.

내 앞에는 엘레나의 손이 나타났다.

마른 손목. 열세 갈래로 갈라진 푸른 상처. 누군가 치료라고 부른 봉인. 누군가 보호라고 적은 감금. 나는 그 손을 잡지 못했던 기억이 아니라, 그 손을 보고도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먼저 이를 악물었다.

“미리엘.”

“네.”

“엘레나 상처랑 같은 양식이면, 저건 병이 아니라 연결 흔적이야?”

미리엘의 시선이 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보여요. 병이 먼저가 아니에요. 봉인이 먼저였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봉인을 고치다가 병처럼 남겼거나요.”

위 계단에서 쇳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이번엔 보스 패턴의 소리가 아니었다. 바깥쪽 장비의 걸쇠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누군가 보스실 위쪽 접근로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회수대든 성도 쪽 사람이든, 이 방 안의 전투가 끝나길 기다리는 손들이었다.

리에트가 눈만 돌렸다.

“위쪽, 사람이 더 붙었어. 화살만이 아니야. 방패에 검은 끈 달린 놈 둘.”

검은 끈. 왕국 회수대가 던전 안에서 쓰는 표식이었다. 실종자 수색보다 물건 확보를 먼저 할 때 달던 끈. 내가 알던 규정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사람을 데려오는 부대와 물건을 가져가는 부대는 장비가 다르다. 위에서 내려오는 건 우리를 살리러 오는 줄이 아니었다.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빨리 끝내야겠네.”

“아니.”

내 말이 너무 빨리 나갔다. 세라의 시선이 방패 너머로 나를 찔렀다. 나는 중심핵을 보았다. 푸른 금 속에서 열세 번째 잔선이 더 가늘게 떨렸다. 브론의 받침 아래 홈도 같은 박자로 울었다.

“빨리 부수면 우리가 먼저 죽어.”

브론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새는 소리였다.

“좋지 않은 말만 정확히 하는군.”

“저 핵은 심장이 아니라 못이야. 뽑으면 방 전체가 내려앉아.”

미리엘이 바로 받았다.

“맞아요. 셋째 금과 여섯째 금이 붕괴를 잡고 있어요. 열세 번째는 더 아래에 묶여 있어요. 전부 끊으면 바닥부터 접혀요.”

리에트가 위 계단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부수지 말고 어떻게 이겨?”

나는 거울 조각이 내 빈 칸을 다시 비추는 것을 보았다. 이긴다. 그 말이 이 방에서는 너무 가벼웠다. 이 방은 승리를 달라고 만든 곳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무너질지 묻는 곳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적의 이름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우리 이름이 적의 칸으로 넘어가지 않게 버티는 일이었다.

“이기는 게 아니라 빠져나간다.”

내가 말했다.

“핵은 일부만 묶고, 받침은 무너지는 방향을 바꾸고, 위쪽은 늦춘다. 길이 열릴 때까지 전부 살아 있어야 해.”

세라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패를 더 낮추며 중심핵과 위 계단, 내 발밑 잔선을 차례로 보았다. 벨로네식 정면 돌파가 먹히지 않는 방이라는 걸 그녀도 이미 느꼈다. 리에트는 위쪽을 겨누면서도 입꼬리를 비틀었다.

“도망을 전술이라고 말하는 얼굴이 점점 뻔뻔해지네.”

“살아 있으면 다음 선택이 남아.”

“그건 마음에 들어.”

미리엘은 구슬을 조금 풀었다. 은실이 공중에서 가늘게 펴졌지만, 핵을 향해 직선으로 가지 않았다. 열세 금 위에 바로 닿지 않고, 주변 공기를 둥글게 감싸듯 돌아갔다. 그녀는 봉인을 푸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 끊지 말아야 할 줄을 표시하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브론이 받침 밑에서 말했다.

“나한텐 무슨 일을 시킬 거냐.”

“세우지 마. 걸쳐.”

“그건 방금부터 하고 있다.”

“더 오른쪽으로 흘려. 천장이 내려오면 중앙 말고 오른쪽 벽을 먼저 깨게 만들어.”

브론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망치 자루를 조금 빼고, 다시 다른 각도로 밀어 넣었다. 그의 어깨가 받침과 벽 사이에 끼었다. 돌가루가 쏟아지고, 그의 왼팔 근육이 떨렸다. 그래도 받침의 울림이 바뀌었다. 아래로 바로 떨어지던 힘이 오른쪽 벽으로 기울었다.

“한 번은 된다.”

브론이 말했다.

“두 번은 안 된다.”

“한 번이면 길을 만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이 없었다. 확신 대신 필요한 순서만 있었다. 세라가 왼쪽 반사를 끊는다. 리에트가 위 계단을 늦춘다. 미리엘이 남길 금을 고른다. 브론이 받침의 죽는 방향을 바꾼다. 나는 철수 순서를 자른다. 누구를 먼저 빼고, 누가 마지막까지 남으며, 어느 이름을 어느 자리에서 놓치지 않을지.

갈퀴가 다시 내려왔다. 이번엔 중심핵을 감싸는 거울 조각들이 안쪽으로 접히며 우리 사이를 갈랐다. 세라와 나 사이에 붉은 줄이, 리에트와 미리엘 사이에 젖은 숲길이, 브론과 중심핵 사이에 공방 불꽃이 놓였다. 적은 거리를 찢는 대신 관계를 찢었다. 서로를 보면서도 바로 닿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발밑 잔선이 뜨거웠다. 갈퀴 끝이 내 어깨를 향해 비틀렸다. 거울 조각 속 빈 칸이 커졌다. 그 칸이 내 시야를 삼키기 전에, 나는 가장 가까운 이름부터 불렀다.

“세라.”

세라는 대답 대신 방패를 세웠다.

“내 왼쪽 두 걸음. 나보다 반걸음 앞. 네 뒤에 미리엘 있다.”

방패가 흔들리다 멈췄다.

“알아.”

“리에트.”

오른쪽 턱 위에서 활줄이 당겨졌다.

“네 위에 회수대 둘. 네 아래 브론 어깨. 화살은 위쪽 손목 말고 발목.”

“봤어.”

“미리엘.”

은실이 떨렸다.

“장부 말고 금. 네 뒤는 아직 비어 있지 않아. 내가 중앙에 있다.”

미리엘의 턱이 작게 내려갔다.

“네.”

“브론.”

받침 밑에서 거친 숨이 터졌다.

“네 힘은 받침을 살리는 게 아니야. 우리 길을 죽지 않게 미루는 거야.”

브론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비싸게 부려먹는군.”

“살아서 따져.”

말이 끝나자마자 세라가 움직였다. 그녀는 방패로 갈퀴를 정면에서 받지 않았다. 방패 아랫변으로 왼쪽 돌판 경계를 긁어 반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푸른 빛이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며 내 발 앞 잔선 바로 옆에서 찢겼다. 내가 한 걸음 잘못 디뎠다면 발목이 잘렸을 빛이었다.

리에트의 화살이 그 틈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적의 살을 노리지 않았다. 위 계단 셋째 돌 위에 박혀 있던 낡은 쇠못을 맞혔다. 쇠못이 튀며 작은 소리를 냈고, 회수대 둘 중 하나가 발을 멈췄다. 그들이 내려오는 속도가 반 박자 늦어졌다. 리에트는 바로 두 번째 화살을 걸었다. 손보다 눈이 먼저 웃었다.

미리엘의 은실이 중심핵 주위를 감았다. 핵에 닿지 않는 거리, 하지만 금의 떨림을 놓치지 않는 거리였다. 은실이 셋째 금 앞에서 잠깐 떨리고, 여섯째 금 앞에서 한 번 더 내려앉았다. 열세 번째 잔선 근처에서는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미리엘은 그 줄을 건드리지 않았다.

“셋째와 여섯째는 잡아도 돼요. 열세 번째는 건드리면 안 돼요.”

“남길 줄은?”

“열세 번째요. 하지만 그냥 남기면 우릴 붙잡아요. 길을 만들 때까지 느슨하게 묶어야 해요.”

브론이 받침을 벽 쪽으로 더 밀었다. 돌 하나가 그의 어깨 옆으로 떨어져 깨졌다. 피가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목깃이 찢어지고, 피부 위로 가는 돌가루 줄이 생겼다. 그는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아플 겨를도 없었다.

“벽 뒤가 빈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오른쪽 안쪽에 숨은 틈이 있다. 사람이 바로 지나갈 폭은 아니지만, 무너지는 방향만 더 틀면 뜯긴다.”

내가 오른쪽 벽을 보았다. 겉으로는 평평한 돌벽이었다. 하지만 브론이 받침을 기울일 때마다 벽 중간의 이음매가 아주 작게 벌어졌다. 그 안쪽에서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다. 출구라고 부르기엔 좁았다. 하지만 막힌 방에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보스도 그 틈을 알아챘다. 중심핵 안쪽 푸른 불이 짧게 꺼졌다가 다시 타올랐다. 갈퀴가 더 낮게 내려오고, 거울 조각들이 모두 내 쪽을 향했다. 이제 적은 세라의 실패도, 리에트의 숲길도, 미리엘의 장부도, 브론의 공방도 앞세우지 않았다. 내 빈 칸만 방 전체에 펼쳤다.

바닥, 벽, 위 계단, 방패 철면까지 전부 빈 칸으로 덮였다. 나는 한순간 발밑을 잃었다. 내가 누구를 불러야 하는지 알면서도, 내 이름만 빠진 줄 사이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보관자라는 말이 다시 올라왔다. 너는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이 지워진 뒤 남는 물건이다. 너는 누군가를 살리는 대가로 더 깊은 칸에 들어갈 사람이다.

그때 세라가 내 앞을 가렸다. 방패가 빈 칸 한가운데를 찍었다. 철면이 울리고, 세라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중앙.”

그 한마디가 나를 당겼다.

리에트가 위쪽에서 말을 이었다.

“셋째 돌, 아직 버틴다.”

미리엘이 숨을 삼키며 말했다.

“열세 금, 아직 살아 있어요.”

브론이 받침 밑에서 짧게 으르렁댔다.

“오른쪽 홈, 아직 안 죽었다.”

나는 빈 칸 속에서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내가 그들을 불렀다. 이번에는 그들이 내 자리를 되돌려 줬다. 거울 조각이 내 이름을 지우려 들었지만, 그 지움보다 빠르게 네 방향의 목소리가 나를 현재에 묶었다.

내 손이 떨렸다. 부끄러운 떨림은 아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검 손잡이를 다시 잡고, 발끝으로 열세 번째 잔선 옆 돌가루를 밀었다. 선을 밟지 않고 선 옆에 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좋아.”

내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우린 지금부터 저놈을 죽이는 게 아니라, 저놈이 잡고 있는 무너짐을 훔친다.”

세라가 방패를 더 깊게 세웠다.

“말이 길어.”

“세라, 왼쪽 반사 세 번만 더 끊어. 세 번째 뒤에는 뒤로 빠져.”

“빠지는 방향은?”

“내 뒤가 아니라 미리엘 왼쪽. 그녀가 은실 접는 순간 네 방패가 천장 파편을 받는다.”

세라의 눈이 짧게 움직였다. 미리엘 위치, 천장 금, 내 발밑 잔선. 그녀는 계산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리에트, 위 계단은 죽이지 말고 묶어. 회수대가 우리보다 먼저 핵에 닿으면 끝이다.”

리에트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놈들, 사람 보고 내려오는 게 아니네.”

“응. 핵과 기록을 보고 내려와.”

“그럼 발을 쏜다.”

“손도 살려 둬. 나중에 누가 명령했는지 말해야 하니까.”

리에트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건 더 마음에 드네.”

“미리엘, 셋째와 여섯째는 네가 묶어. 열세 번째는 표시만 해. 끊지 마.”

미리엘은 이미 은실을 다시 나누고 있었다.

“표시만 하면 우리 발을 따라올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중앙에서 끌고 간다. 빠질 때까지 나를 물게 둬.”

세라의 고개가 바로 돌아왔다.

“그건 안 돼.”

“죽으러 남는 게 아니야. 물릴 시간을 정하는 거다.”

“말은 그럴듯하지.”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하지만 그 분노는 나를 막는 분노가 아니었다. 내 말이 또 혼자 남는 방식으로 기울어지는지 재는 분노였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희가 내 자리를 계속 불러야 해. 내가 선에 끌려가면 바로 끊어.”

세라는 이를 악문 채 방패를 앞으로 돌렸다.

“한 박자 이상 늦으면 끌어낸다.”

“좋아.”

“농담 아니야.”

“알아.”

브론이 받침 밑에서 끼어들었다.

“내 차례는?”

“오른쪽 벽 틈이 두 손 폭이 될 때까지만 버텨. 그 뒤엔 망치 버리고 빠져.”

브론의 눈이 번쩍했다.

“망치 버리라는 말이 너무 쉽게 나오는데.”

“망치 들고 깔리면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브론은 잠깐 내 얼굴을 보았다. 공방을 잃은 사람에게 도구를 놓으라는 말이 어떤 무게인지 내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감상으로 받지 않았다. 오른쪽 벽 틈, 받침 각도, 자기 팔 길이를 차례로 재더니 낮게 욕을 한 번 했다.

“두 손 폭이면 놓는다. 한 손 폭이면 안 놓아.”

“두 손 폭으로 만든다.”

“좋아. 그럼 네가 그 폭을 봐.”

보스의 세 번째 울림이 시작됐다. 중심핵 안쪽에서 푸른 불꽃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꺼질 때마다 방 안의 상처 장면도 사라졌고, 켜질 때마다 더 선명하게 돌아왔다. 적은 우리가 세운 역할을 다시 읽고 있었다. 이번엔 누가 누구를 위해 한 박자 늦어질지 찾는 눈이었다.

왼쪽 반사가 먼저 폭발했다. 세라는 몸을 낮춰 방패 아랫변으로 빛을 밀었다. 첫 번째는 바닥으로 흘렸다. 두 번째는 왼쪽 벽으로 꺾었다. 세 번째가 오기 전에 위쪽 화살이 같이 내려왔다. 리에트가 발을 비틀며 화살을 쐈다. 위 계단 회수대의 무릎 끈이 끊어지고, 놈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창끝이 세라 방패에 닿기 직전, 세라가 방패를 안쪽으로 말아 창을 흘렸다.

“하나.”

내가 세었다.

미리엘의 은실이 셋째 금을 감았다. 핵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보스실 바닥 전체가 낮게 울었다. 셋째 금을 묶자 왼쪽 돌판 아래의 빈 공간이 잠깐 드러났다. 그 아래에는 검은 흙이 아니라 오래된 철제 고리들이 박혀 있었다. 누군가 이 방을 처음 만들 때, 무너짐을 완전히 막지 않고 일정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만든 흔적이었다.

“둘.”

여섯째 금이 묶였다. 오른쪽 벽 이음매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벌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더 세게 흘러나왔다. 브론이 받침을 밀며 으르렁댔다. 그의 발이 돌가루 위에서 미끄러졌지만, 망치 자루는 빠지지 않았다.

“아직 한 손 폭이다.”

“더.”

“알고 있다!”

갈퀴가 내 앞까지 내려왔다. 빈 칸이 다시 커졌다. 이번에는 칸 안에 내 이름이 어렴풋이 적혔다. 에이드리언. 바로 그 아래에는 보관, 이송, 봉인 같은 단어들이 차례로 찍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척하면서 다시 칸으로 밀어 넣는 방식이었다. 나는 그 글자를 읽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읽혔다. 읽히는 순간 발밑 열세 번째 잔선이 내 발목을 감았다.

세라가 바로 외쳤다.

“중앙!”

리에트가 이어 외쳤다.

“발 빼!”

미리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열세 금이 대장님을 물어요!”

브론은 말 대신 받침을 한 번 더 비틀었다. 오른쪽 벽이 둔하게 울렸다. 그 울림이 내 발밑까지 밀려왔다. 나는 그 흔들림을 이용해 발을 옆으로 뺐다. 열세 번째 잔선은 내 발목을 놓치고 바닥을 긁었다. 발목 가죽끈이 끊어졌지만 뼈는 남았다.

“셋.”

내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세라가 약속대로 뒤로 빠졌다. 그녀는 내 뒤가 아니라 미리엘 왼쪽으로 갔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조각 셋이 방패 위에 부딪혔다. 미리엘은 은실을 접었다. 접힌 은실이 셋째와 여섯째 금을 느슨하게 묶고, 열세 번째 잔선은 건드리지 않은 채 표시만 남겼다. 그 표시가 내 발끝에서 오른쪽 벽 틈까지 가늘게 이어졌다.

리에트는 위 계단을 향해 두 발째를 쐈다. 죽이는 화살이 아니었다. 무릎 끈, 발등, 손잡이 아래 쇠고리. 회수대 둘은 살아 있었지만 내려오지 못했다. 그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우리를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빨리 확보해야 할 물건으로 보던 눈이 처음으로 계산을 잃었다.

브론이 마지막 힘을 넣었다. 받침 아래 홈이 찢어지고, 망치 자루가 반쯤 갈라졌다. 오른쪽 벽 틈이 두 손 폭으로 벌어졌다. 그 안쪽으로 검은 통로가 아니라 좁은 점검 홈이 드러났다. 사람이 서서 걷는 길은 아니었다. 몸을 옆으로 접고, 장비를 나눠 들고, 한 명씩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두 손 폭!”

내가 외쳤다.

브론은 망치를 놓지 않았다. 반 박자 늦었다. 그의 눈이 망치 자루 끝에 붙었다. 공방 불빛이 거울 조각에 다시 번졌다. 그가 잃은 사람들, 잃은 일터, 잃지 않으려던 도구가 한꺼번에 그를 붙잡았다.

나는 브론을 향해 뛰지 않았다. 뛰면 중앙이 비었다. 대신 이름을 불렀다.

“브론 카르트.”

브론의 눈이 나를 향했다.

“망치는 네가 아니야.”

그의 턱이 굳었다.

“놓아.”

브론은 이를 갈았다. 망치 자루가 그의 손에서 빠졌다. 다음 순간 받침이 내려앉으며 망치를 삼켰다. 무너짐은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 벽으로 흘렀다. 벽 틈이 더 벌어지고, 차가운 바람이 우리 얼굴을 때렸다.

브론은 맨손으로 뒤로 굴렀다. 세라가 방패로 그를 받아 냈고, 리에트가 위 계단에서 내려오는 창끝을 한 발 더 늦췄다. 미리엘은 열세 번째 잔선 표시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중앙에 남아 그 선이 누구를 물려 하는지 지켜봤다.

보스실이 흔들렸다. 이 흔들림은 패턴이 아니었다. 실제 붕괴였다. 위쪽 돌판 하나가 내려앉고, 왼쪽 거울판 절반이 깨졌다. 깨진 조각마다 우리 얼굴이 아니라 우리 자리가 비쳤다. 왼쪽, 오른쪽, 위, 뒤, 중앙. 우리는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

핵을 부수면 끝난다고 믿고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건 다른 결말이었다. 핵은 끝이 아니라 잠금못이었다. 갈퀴는 칼이 아니라, 무너지는 방이 마지막까지 사람을 붙잡도록 만든 손이었다. 엘레나의 열세 갈래 상처도, 이 방의 열세 금도, 누군가가 오래전에 같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붙들어 둔 흔적이었다.

그 사실을 지금 다 풀 수는 없었다. 풀 시간이 없었다. 위에서는 회수대가 다시 자세를 잡고 있었고, 아래에서는 중심핵이 마지막 남은 갈퀴를 우리 쪽으로 모았다. 오른쪽 점검 홈은 아직 좁았다. 한 명이 겨우 몸을 접어 들어갈 폭. 전부 빠져나가려면 순서가 필요했다. 누군가 맨 앞에서 틈을 넓히고, 누군가 뒤에서 반사를 막고, 누군가 열세 번째 잔선을 달고 중앙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숨을 골랐다. 보관자라는 말이 아직 귀 뒤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말보다 먼저 들린 네 목소리도 남아 있었다. 중앙. 셋째 돌. 열세 금. 오른쪽 홈. 그 말들이 나를 빈 칸 밖으로 끌어냈다.

이 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혼자 남아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 이름을 칸에 넘기지 않고, 모두의 이름을 끝까지 현재에 붙들고, 무너지는 방의 박자 안에서 빠져나갈 순서를 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검을 낮췄다. 벨 수 없는 것을 베려고 들면 죽는다. 대신 발밑의 잔선과 오른쪽 점검 홈, 위 계단 회수대와 세라 방패의 위치를 한 줄로 이었다.

“철수 설계로 바꾼다.”

세라가 방패 뒤에서 나를 보았다.

“순서 말해.”

“브론이 오른쪽 홈을 먼저 넓힌다. 맨손으로 된다. 망치는 버렸다.”

브론이 손등으로 피와 돌가루를 훔쳤다.

“그 말 두 번 하지 마라.”

“미리엘은 열세 번째를 표시한 채 내 뒤로 붙어. 끊지 말고 늦춰. 리에트는 위쪽을 발에서 무릎까지 묶어. 죽이면 시체가 굴러 내려와 길을 막는다.”

“알아.”

“세라는 마지막 반사 세 번만 더 받아. 세 번째 뒤엔 내가 아니라 홈 쪽으로 빠져.”

세라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너는?”

나는 중심핵을 보았다. 갈퀴가 다시 들렸다. 푸른 거울 조각들은 이번에도 내 빈 칸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칸 안에는 나 혼자만 있지 않았다. 각자의 목소리가 그 칸 가장자리에 못처럼 박혀 있었다.

“나는 열세 번째가 누구를 물고 있는지 보면서 제일 늦게 움직인다. 대신 혼자 남지 않는다.”

세라가 짧게 숨을 뱉었다.

“그 말 기억해.”

“기억한다.”

리에트가 위쪽을 겨누며 말했다.

“위에서 넷 더 붙는다. 검은 끈 둘, 하얀 봉함 하나, 얼굴 가린 놈 하나.”

하얀 봉함. 성도 쪽이다. 회수대와 성도 봉인국이 같은 방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서로 다른 명분을 든 손들이 같은 중심핵, 같은 기록, 같은 사람을 노렸다. 우리가 핵을 부수든 실패하든, 끝난 뒤 우리 몸과 엘레나의 흔적과 이 던전의 금을 나눠 가져갈 손들이었다.

“더 빨라져야겠네.” 리에트가 말했다.

“빨라지되, 줄이지 않는다.”

내가 대답했다.

“누구도 물건처럼 넘기지 않는다. 핵도, 기록도, 사람도. 가져갈 건 우리가 보고 나눠서 든다.”

미리엘이 은실을 다시 당겼다.

“그러려면 살아 나가야 해요.”

“그래서 지금부터 이 방의 목적은 하나다.”

나는 오른쪽 점검 홈을 가리켰다. 그 안쪽에서 찬 바람이 또 한 번 불었다. 넓지는 않아도 길이었다. 완성된 출구가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뜯어내야 할 틈이었다.

“부수지 않는다. 늦춘다. 이름부터 부른다. 그리고 저 틈을 길로 만든다.”

중심핵이 대답하듯 울었다. 갈퀴가 내려왔고, 위 계단에서 회수대의 발소리가 빨라졌다. 왼쪽 거울판은 다시 세라의 붉은 줄을 비췄고, 오른쪽 조각은 브론이 놓은 망치를 삼키는 받침을 비췄다. 미리엘 앞에는 덮이는 장부가, 리에트 앞에는 젖은 숲길이, 내 앞에는 빈 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움직였다.

세라가 방패를 낮췄다. 리에트가 발목을 겨눴다. 미리엘이 열세 번째 잔선에 표시만 남겼다. 브론이 맨손으로 오른쪽 홈의 깨진 돌을 밀었다. 나는 중앙에서 네 이름과 내 이름을 차례로 다시 불렀다.

빈 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칸이 우리를 먼저 삼키기 전에, 우리가 그 안쪽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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