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실의 파편
돌틈 끝에서 밤공기보다 먼저 쇠비린내가 밀려왔다.
좁은 통로는 사람 허리를 억지로 눌러 빠져나가게 만든 뒤 안쪽에서 한 번 꺾였다. 그 끝에는 보상실이라 부르기엔 너무 낮고, 창고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깨끗한 방이 붙어 있었다. 왼쪽 벽에는 녹슨 고정대 셋이 박혀 있었고, 그 밑에는 목이 잘린 유리관과 말라붙은 흰 막이 흩어져 있었다. 정면 바닥은 얕게 내려앉아 웅덩이가 되었으며, 물가에는 은빛 가루가 진흙과 섞이지 못한 채 얇은 막처럼 붙어 있었다. 오른쪽 선반 위에는 금 간 석판과 접힌 금속판이 서로 기대어 서 있었고, 우리 뒤쪽 틈 위에는 바깥을 내다보는 좁은 관측 구멍이 파여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낮은 턱이 하나 있었다. 발을 멈추게 하려는 턱이었다. 들어온 사람을 쉬게 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무엇을 들고 나왔는지, 누가 먼저 밖으로 넘겨질지 잠깐 세워 두는 자리처럼 보였다. 바깥에서는 젖은 말안장 냄새와 횃불 기름 냄새가 번갈아 스며들었다. 던전 안쪽보다 숨은 트였지만, 위험은 줄지 않았다. 위험의 모양만 바뀌었다.
브론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낮게 욕했다.
“보물방은 아니군.”
그는 웅덩이 가장자리의 은빛 가루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가루는 물에 풀리지 않았다. 끈적한 쇠 냄새만 남긴 채 손톱 밑에 얇게 들러붙었다.
“광석 찌꺼기도 아니야. 약재 반응이다. 오래됐지만 비싼 쪽이군.”
미리엘이 곧장 그의 손목을 눌렀다.
“입 가까이 가져가지 마세요.”
그녀는 깨진 유리관 하나를 들어 안쪽을 비췄다. 흰 막은 정화약이 마른 흔적처럼 보였지만, 손끝이 거기에 닿기 직전에 그녀 눈빛이 달라졌다.
“정화약보다 무거워요. 성도에서 일반 환자에게 쓰는 약은 아니에요.”
나는 선반 쪽으로 갔다. 금 간 석판 아래, 돌가루 사이에 작은 홈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손가락을 넣자 차가운 유리가 걸렸다. 천천히 빼냈다. 위쪽은 깨졌고, 바닥만 남은 작은 병이었다. 병 안에는 은빛 액체가 한 손가락 마디도 안 되게 고여 있었다. 흔들자 빛보다 무게가 먼저 움직였다. 물처럼 찰랑이지 않았다. 피보다 더 느리고, 금속보다 더 질긴 흐름이었다.
백은 수액.
엘레나 침상 옆에서 한 번 맡았던 냄새가 목 안쪽을 세게 조였다. 성도 의사가 병을 열지도 않은 채 보여 주며, 정식 허가 없이는 만질 수조차 없다고 말하던 그 냄새였다. 그때 병은 작았고 값은 사람 목숨보다 컸다. 지금 내 손에 남은 건 반쪽뿐이었다.
손이 먼저 굳으려 했다. 그러나 감상에 붙들릴 틈은 없었다.
이걸 빼앗기면 엘레나의 시간도 같이 줄어든다. 하지만 병 하나만 품고 멈춰 서도 끝이다. 바깥 손들이 노리는 건 약병 한 조각만이 아니다. 누가 그걸 알아보고, 누가 숨기고, 누가 먼저 살아 나오는지까지 보려 한다.
나는 병 반쪽을 옷 안쪽 깊은 주머니에 넣고 끈을 한 번 더 눌러 묶었다.
세라가 그 손짓을 봤다.
“아는 물건이야?”
“알아.”
“확실해?”
“확실하니까 지금은 안 보여 준다.”
세라는 관측 구멍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패 손잡이를 다시 잡는 손이 느리게 조여졌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챙긴 물건의 이름보다, 그 이름을 들은 뒤 누가 어떤 명분으로 우리를 묶을지가 더 급했다.
리에트는 이미 관측 구멍에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숨소리도 줄인 채 바깥 불빛과 그림자 움직임을 세었다.
“아래 길목에 둘. 말은 왕국식인데 안장 장식은 가렸어.”
그녀의 손가락이 왼쪽 낮은 턱 쪽으로 움직였다.
“왼편엔 성도 봉인국. 횃불 간격이 너무 가지런해. 오른쪽 사면에는 셋. 복식이 섞였고, 말보다 사람이 먼저 움직인다.”
브론이 혀를 찼다.
“셋이 한패는 아니란 말이지.”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누가 먼저 손을 넣을지 서로 재고 있어. 우릴 죽이려 했다면 이미 쐈다.”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죽이지 않고 기다리는 손이 더 나쁠 때도 있다. 사람을 살려 둔 뒤 이름표를 먼저 붙이는 손이다.
미리엘은 선반 아래에 쓰러져 있던 금속판을 뒤집었다. 판 안쪽에는 얇은 홈이 여러 줄로 접혀 있었다. 지도라기엔 방향 표시가 너무 많고, 장부라기엔 칸이 깊었다. 브론이 곁으로 와 모서리를 툭 건드렸다.
“이건 배치도가 아니다.”
“그럼요?”
“운반 중에 접어 쓰는 인계판이야. 어느 물건을 바깥 길로 돌리고, 어느 사람을 안쪽 담당에게 넘기는지 표시하는 판. 접는 방향에 따라 문이 아니라 손이 바뀐다.”
나는 방을 다시 보았다.
보상실이 아니었다. 던전이 준 것을 축하하며 꺼내는 방이 아니라, 던전에서 나온 것을 밖의 손들이 나눠 갖기 전에 잠깐 세워 두는 방이었다. 병, 석판, 금속편, 살아 나온 사람까지. 여기서는 이름보다 칸이 먼저였고, 상처보다 넘길 순서가 먼저였다.
세라의 얼굴도 같은 결론에 닿았다.
“그래서 탈출로가 여기로 이어졌군.”
“탈출로라기보다 검수 자리겠지.” 브론이 말했다. “살아서 나온 놈을 한 번 더 세우고, 뭘 들었는지 보고, 누구에게 넘길지 정하는 곳.”
미리엘이 금 간 석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석판 중앙 위쪽만 이상하게 깨끗했다. 먼지가 쌓일 만큼 오래 버려졌는데도 그 부분은 최근에 손으로 쓸어 낸 듯했다. 그녀는 소매 끝으로 표면을 닦았다.
위에서부터 얕게 새겨진 선이 열둘 있었다.
그 옆, 열세 번째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망치 자국만 남아 있었다. 긁어 지운 흔적이 아니었다. 글자의 모양을 남기지 않으려고 눌러 깨부순 흔적이었다.
나는 주머니 속 병을 무의식적으로 눌렀다.
미리엘은 더 아래 문장을 읽으려 입술을 움직였다. 갈라진 글자 사이로 남은 한 줄이 있었다.
“구원은…”
세라가 바로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지?”
미리엘은 숨을 한 번 고른 뒤 읽었다.
“구원은 감춤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방 안에 말이 얇게 걸렸다.
브론이 낮게 웃었다.
“그 말을 적어 놓고 열세 번째 줄을 깨부쉈다고?”
미리엘은 웃지 못했다.
“성도 장부에서는 반대로 봤어요. 감춤이 질서를 지킨다고. 이 문장은… 누군가 일부러 남긴 쪽이에요.”
“또 누군가는 일부러 부순 쪽이고.” 내가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판 아래 홈에는 작은 돌조각 셋과 얇은 금속편 하나가 더 끼어 있었다. 금속편에는 홈 두 개와 방향 표시 하나가 남아 있었다. 로웬이 남긴 부적 뒷면의 선과 닮은 각도였다.
미리엘이 보자마자 말했다.
“남쪽 표기가 아니에요. 일반 성도 배치와 반대로 접혀 있어요.”
리에트가 관측 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받았다.
“북서. 능선 뒤 배수로로 빠지는 표식이야.”
북서.
로웬의 메모가 가리키던 방향. 부적이 도시 바깥에서 더 세게 떨던 방향. 백은 수액 반쪽과 지워진 열세 번째 줄, 그리고 바깥의 기다리는 손들이 한 방향으로 묶였다.
세라가 나를 봤다.
“처음부터 그쪽으로 빼돌릴 생각이었나?”
“빼돌렸든 숨겼든.” 나는 금속편을 봤다. “정식 길보다 이 방향을 먼저 아는 사람이 있었어.”
바깥에서 금속이 세 번 끊겨 울렸다.
셋. 둘. 하나.
잠깐 쉬고 다시 두 번.
기사단 훈련장에서 듣던 신호도, 성도 의식에서 쓰는 종소리도 아니었다. 위치를 넘기는 사람들끼리 쓰는 건조한 박자였다.
세라의 턱이 굳었다.
“기사단 신호가 아니야.”
“성도 것도 아니에요.” 미리엘이 말했다.
리에트는 관측 구멍 바깥을 노려보며 낮게 덧붙였다.
“오른쪽 사면 셋이 움직였다. 아래 둘은 길을 벌리고, 위 하나는 아직 안 내려온다.”
“보고만 있군.”
내 말에 리에트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우리가 어디로 몸을 돌리는지 확인하려는 쪽이야.”
죽이려면 이미 쐈을 자들이다. 그런데 기다린다. 누가 병을 숨기고, 누가 석판을 읽고, 누가 선두에 서며, 누가 다친 팔을 아끼지 않는지까지 본 뒤 움직이려 한다.
세라는 방패 손잡이를 내려다봤다. 조금 전 무너지는 방에서 빛과 창을 막던 손이었다. 지금 그 손은 다른 것을 재고 있었다. 다시 기사단 쪽으로 걸어 나가면, 저들은 그녀를 먼저 묶지 않을지도 모른다. 명문 벨로네의 차녀니까. 대신 보고가 왜 늦었는지, 감시 문서를 왜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는지, 에이드리언을 왜 따로 넘기지 않았는지 쓰게 할 것이다.
“내가 기사단으로 돌아가면,” 세라가 아주 낮게 말했다. “너희는 보호 대상이 아니라 인계 대상이 돼.”
브론이 인계판을 접으며 말했다.
“나는 조합 문으로 가도 끝이야. 금지 합금 봤고, 허가 없는 길로 들어갔고, 왕국 물건 같은 걸 손댔지. 공방이 아니라 심문실로 보내질걸.”
미리엘은 석판 조각을 손끝으로 감쌌다.
“성도는 저를 살려 둘 거예요. 대신 제가 뭘 읽었는지 다시 쓰게 만들겠죠. 이 문장도 못 본 사람처럼.”
리에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숲으로 바로 빠져도 인간 쪽 흔적이 먼저 붙어. 여기까지 온 발자국을 의회가 그냥 넘길 리도 없고.”
각자 돌아갈 길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길이 아니었다. 각자 다른 손에 넘겨지는 순서만 다를 뿐이었다.
나는 석판, 인계판, 금속편, 주머니 속 병, 바깥의 세 갈래 불빛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결론은 감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방의 생김새, 바깥 움직임, 각자의 소속이 우리 몸에 걸어 둔 줄에서 바로 나왔다.
따로 흩어지면 더 빨리 끝난다.
“듣고 있어.”
내가 말하자 네 사람이 모두 나를 봤다.
“여기서 각자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먼저 잡히는 손만 달라진다. 세라는 기사단 보고서에 묶이고, 미리엘은 성도 기록실에 묶이고, 브론은 조합 심문에 묶이고, 리에트는 인간과 숲 양쪽에 흔적을 잡혀. 나는 반응자라는 이름으로 따로 떨어진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같이 나가야 한다. 누구 손에도 한 번에 넘어가지 않는 방식으로.”
세라가 눈썹을 찌푸렸다.
“말은 쉽지.”
“쉬워서 하는 말 아니야.”
나는 젖은 먼지 위에 돌조각으로 선을 그었다. 우리가 나온 틈, 바깥 아래 길목, 왼쪽 성도 횃불, 오른쪽 사면의 세 그림자, 그리고 북서로 빠지는 배수 홈. 선은 허술했지만, 어디가 넓고 어디가 좁은지는 보였다.
“넓은 길로 나가면 말이 먼저 붙는다. 왼쪽은 봉인국이 기다리고, 아래쪽은 기사단이 문서부터 내밀 거야. 오른쪽 사면의 셋은 우릴 바로 잡지 않고 따라붙는다. 북서 배수 홈은 좁다. 그래서 아직 막지 못했다.”
브론이 무릎을 꿇고 선을 보았다.
“말은 못 들어오겠군. 사람도 둘이 나란히 못 간다.”
“그래서 쓴다.”
리에트가 바로 받았다.
“위쪽 시야는 내가 한 번 끊어. 오래는 못 해.”
미리엘은 금속 고리 하나와 은실을 집어 들었다.
“방 안 반응을 잠깐 남겨 둘 수 있어요. 우리가 아직 석판 앞에 있는 것처럼. 오래 버티진 못해요.”
브론은 녹슨 걸쇠 둘을 발끝으로 끌어왔다.
“배수 홈 입구가 막혔으면 내가 연다. 조용하진 않다.”
세라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관측 구멍과 내가 그린 선, 그리고 바깥 기사단 말 그림자를 차례로 봤다. 그 뒤 방패를 천천히 세웠다.
“내가 기사단 쪽으로 먼저 나가면 저들은 멈추는 척은 할 거야.”
그녀 목소리는 고요했다.
“그리고 그 사이 널 따로 떼겠지.”
“그럼 그건 길이 아니네.”
세라는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전투가 끝난 사람의 숨이 아니었다. 보고서에 자기 이름이 어떻게 남을지 알면서도 다른 길을 고르는 사람의 숨이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기사단 쪽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이제야 방패가 길을 보는군.”
세라는 그를 보지도 않고 잘랐다.
“대신 각자 맡은 일은 분명히 해.”
나는 먼지 위에 다섯 점을 찍었다. 선두에 세라. 그 뒤에 브론. 가운데는 나. 넷째는 미리엘. 맨 뒤는 리에트. 방 안에서 먼저 정해야 할 건 누가 어떤 증거를 드는지가 아니라, 어느 위험을 누가 몸으로 받느냐였다.
“세라는 선두. 좁은 턱에서 길을 열어. 기사단 깃발 쪽으로 먼저 부딪치진 마. 보호 명목을 주면 우리가 묶인다. 브론은 둘째. 막힌 돌이나 받침은 네가 푼다. 나는 가운데에서 간격을 맞추고 증거를 나눠 가진다. 미리엘은 넷째. 방 안 흔적을 늦추고,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반응을 지워. 리에트는 후미. 오른쪽 사면과 위쪽 시야를 끊는다. 따라붙는 놈이 있으면 발이 아니라 눈을 먼저 빼앗아.”
미리엘이 물었다.
“증거를 나눠 가진다고요?”
“한 사람이 다 들면 그 사람부터 끌려간다.”
나는 석판 조각을 둘로 나눴다. 문장 끝이 남은 조각은 미리엘에게 넘겼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가져야 했다. 방향 홈이 있는 금속편은 리에트에게 줬다. 길을 보는 손이 가져야 했다. 접힌 인계판은 브론에게 줬다. 그런 판을 읽고 숨길 줄 아는 놈이 들고 있어야 했다. 세라에게는 물증을 쥐여 주지 않았다. 선두에서 검문당할 사람이 증거까지 매달고 있으면, 저쪽은 더 쉽게 명분을 얻는다. 백은 수액 반쪽은 내가 품었다.
세라가 그걸 보고 말했다.
“그 병은 네가 드는 게 맞다.”
엘레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병이야말로 누가 우리를 먼저 갈라놓으려 할지 알려 줄 물건이었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어왔다.
“…보호 대상 우선 확인.”
기사단 쪽이었다.
잠깐 뒤, 왼편에서 더 딱딱한 말이 이어졌다.
“…분리 확보 후 봉인국 이송.”
성도였다.
오른쪽 사면 아래에서는 낮고 거친 말이 새었다.
“먼저 걸어 나오는 놈부터 잡아.”
그 목소리에는 명분도 의식도 없었다. 넘겨받을 대상을 고르는 사람의 말이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리에트가 활을 들었다.
“오른쪽 위 불빛 하나는 내가 끈다.”
브론은 걸쇠와 망치 자루를 허리춤에 꽂았다.
“받침 셋이면 두 개는 깨고 하나는 밀면 돼. 받침이 넷이면 욕 좀 하면서 다시 본다.”
미리엘은 은실을 금속 고리에 감았다.
“석판 쪽에 떨림을 남겨 둘게요. 저쪽이 안쪽을 먼저 확인하게 만들면 한 박자는 벌어요.”
나는 방을 한 번 더 봤다. 보상실이라는 이름은 이제 맞지 않았다. 여긴 파편을 나눠 갖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 파편과 사람을 다시 나누려 만든 곳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나눠야 했다. 빼앗기기 전에, 우리가 정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내 말이 떨어지자 리에트가 관측 구멍 쪽으로 마지막 화살 하나를 겨눴다. 화살은 사람을 노리지 않았다. 횃불 걸쇠의 금속 고리를 긁고 지나갔다. 짧은 파열음과 함께 오른쪽 위 불빛이 꺼졌다. 바깥에서 욕설이 터졌다. 그래도 아무도 곧장 뛰어들지 않았다. 먼저 본 것을 확인하려는 머뭇거림이 길을 만들었다.
“지금.”
세라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오른쪽 선반 밑 좁은 틈에 방패 가장자리를 밀어 넣어 썩은 받침목 하나를 걷어냈다. 브론이 바로 뒤에서 망치 자루를 박아 돌을 옆으로 틀었다. 젖은 흙이 무너지며 사람 하나가 몸을 낮춰 지나갈 만큼의 배수 홈이 열렸다.
왼쪽에서는 성도 쪽 누군가가 아직 안쪽 반응이 살아 있다고 외쳤고, 아래에서는 기사단이 길목을 넓히라고 명했다. 오른쪽 사면의 셋은 여전히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 움직임을 다 못 봤기 때문인지, 일부러 더 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상관없다.
우리가 먼저 몸을 넣으면 된다.
브론이 틈 안쪽으로 상체를 밀어 넣었다.
“물 빠진 지 오래됐어. 아래로 한 번 꺾이면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다.”
세라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돌아왔다.
“발판 둘. 셋째는 비어.”
나는 곧장 몸을 낮췄다. 여기서 믿어야 할 건 약속보다 자리였다. 앞에서 부른 발판, 뒤에서 세는 숨, 손이 닿는 돌턱. 몸을 밀어 넣자 양쪽 어깨가 동시에 긁혔다. 주머니 속 병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팔꿈치를 안으로 접었다.
미리엘은 마지막으로 방 안 석판을 돌아봤다. 은실 끝을 금 간 고정대에 걸고, 문장의 흔적이 아직 안쪽에 남은 것처럼 얕은 떨림을 붙였다.
“조금만 버텨 줘.”
그 말은 우리에게 한 게 아니라 방 안에 남겨 둔 거짓 흔적에게 하는 말 같았다.
리에트가 후미에서 다시 바깥을 보았다.
“오른쪽 위 하나는 아직 안 움직여.”
그녀가 낮게 덧붙였다.
“놓친 게 아니야. 어디까지 가는지 보려는 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배수 홈 안으로 들어갔다.
첫 굴곡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세라 방패가 앞에서 돌을 긁는 소리가 났고, 브론은 빈 발판 자리마다 짧게 알려 줬다. 내가 딛은 셋째 턱은 정말 비어 있었다. 흙이 갑자기 꺼지며 종아리가 미끄러졌다. 왼손으로 젖은 벽 홈을 잡아 겨우 버텼다.
“오른손 위.”
세라가 앞에서 바로 말했다.
“거기 돌턱.”
손끝에 튀어나온 돌이 걸렸다. 몸이 다시 중심을 찾았다. 뒤에서 미리엘 숨이 짧게 멎었다가 이어졌고, 더 뒤에서는 리에트의 활시위가 어둠을 겨누는 낮은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뒤쪽에서 금속 신호가 다시 울렸다.
셋. 둘. 하나.
이번엔 더 가까웠다. 우리가 떠난 방이 비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리에트의 화살이 뒤쪽 어둠으로 흘렀다. 쏘는 소리보다 맞는 소리가 먼저 왔다. 누군가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대신 멈칫한 발이 제자리를 찾는 소리만 들렸다.
“계속 가.” 리에트가 말했다. “아직 보고만 있어.”
배수 홈은 한 번 더 아래로 꺾였다. 젖은 흙 냄새 사이로 바깥 밤공기가 더 짙어졌다. 북서로 빠지는 길이었다.
앞쪽에서 세라 방패가 크게 걸렸다.
“멈춰.”
우리는 그대로 얼었다.
브론이 몸을 더 밀어 넣어 앞을 만졌다.
“돌판 하나가 사선으로 내려앉았어. 정면으로 밀면 밑으로 떨어진다.”
나는 몸을 벽에 붙인 채 아래 바람을 느꼈다. 기류가 오른쪽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완전한 벽은 아니었다. 떨어진 돌판이 길을 반쯤 덮고 있었다.
“브론.”
“봤다.”
그가 숨을 낮췄다.
“왼쪽 아래 받침을 먼저 깨야 해. 그래야 돌판이 우리 쪽으로 안 떨어지고 안쪽으로 누워.”
“소리는?”
“난다.”
소리가 안 나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리에트, 뒤 간격.”
“둘이 입구를 살피고 있어. 하나는 아직 아래에 남았다.”
“미리엘, 흔적은?”
“먹혀요. 하지만 거의 끝이에요.”
“세라, 돌판 눌리면 방패로 받아.”
“알겠어.”
말이 짧아질수록 몸은 빨라졌다. 브론이 망치 자루 끝을 왼쪽 받침 틈에 밀어 넣었다. 세라가 방패 아래를 받쳤다. 나는 둘 사이 빈 자리에 팔을 끼워 돌판이 미는 각을 잡았다. 뒤에서 미리엘이 내 허리띠를 한 번 잡아 균형을 붙들었고, 맨 뒤에서는 리에트가 화살촉으로 어둠을 끊고 있었다.
“지금.”
브론이 힘을 주자 젖은 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받침이 먼저 깨지고, 돌판이 우리 쪽으로 짧게 미끄러졌다. 세라 방패가 낮게 울렸다. 내가 어깨로 밀어 준 만큼만 안쪽으로 누웠다. 돌판 아래에 사람이 옆으로 빠질 너비가 겨우 생겼다.
“먼저 가.” 세라가 말했다.
“아니. 네가 받고 있으니까 네가 마지막이다.”
나는 바로 답했다.
세라는 반박하지 않았다. 브론이 먼저 틈을 통과해 아래 자리를 확인했고, 내가 그 뒤를 이었다. 발이 닿은 곳은 젖은 흙이 아니라 거칠게 깎인 돌계단이었다. 누군가 예전부터 사람 발 너비만큼은 꾸준히 오가며 닳게 만든 길이었다.
“계단이야.”
내가 낮게 말하자 브론이 바로 받았다.
“배수로에 이런 건 자연히 안 남아.”
뒤에서 리에트 화살이 다시 울었다. 이번엔 가까운 금속음이 따라왔다.
“한 놈 들어왔다.”
리에트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뛰진 않는다. 발판 수를 세고 있어.”
시험하듯 따라오는 손.
정말 죽이려는 쪽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보는 쪽이었다.
미리엘이 내 뒤로 내려오며 속삭였다.
“방 안 떨림이 끊겼어요.”
“그럼 이제 우릴 직접 쫓겠군.”
세라가 마지막으로 돌판을 놓고 내려오며 말했다. 돌은 완전히 막히진 않았지만 절반쯤 다시 걸렸다. 뒤따르는 자들이 속도를 내려면 한 번 더 몸을 낮춰야 하는 각이었다.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좋아. 한 박자는 벌었다.”
계단 끝에는 사람 셋이 겨우 설 만한 바위 턱이 있었다. 위는 사선으로 튀어나온 바위가 가려 주었고, 오른쪽 아래로는 마른 배수 홈이 밤 사면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멀리 아래쪽에서 기사단 횃불 둘이 서로 어긋나며 움직였고, 왼편 깊은 곳에서는 성도 쪽 흰 천이 바람에 접혔다 펴졌다. 오른편 능선 그림자 밑에는 불빛 없이 움직이는 셋이 보였다. 횃불이 없는 대신 걸음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리에트는 가장 마지막으로 바위 턱에 올라 무릎부터 꿇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아래 배치를 다시 세었다.
“기사단은 아래 길을 넓히는 중. 성도는 왼편으로 돌아간다. 오른쪽 셋은 높은 턱을 아직 안 탄다.”
“왜 안 오지?” 브론이 물었다.
“우리가 어디까지 빠지는지 보려는 거지.”
나는 바위 턱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고 우리가 나눠 가진 증거를 확인했다. 석판 조각, 방향 금속편, 인계판, 백은 수액 반쪽. 하나가 잡혀도 전부를 잃지는 않도록 흩어 둔 것들이었다.
그 배열은 이상하게도 지금의 우리와 닮아 있었다. 각자 따로 쥐고 있지만,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 뜻이 크게 달라진다.
세라가 바위 턱 끝에 방패를 세우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기사단 쪽으로 가면 아직 멈춰 세울 수는 있어.”
그녀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멈춘 다음엔 끝이야.”
이번엔 아무도 그 결론을 다시 설명하지 않았다.
미리엘이 석판 조각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브론은 인계판을 허리 안쪽으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나도 조합 문으로는 못 들어간다.”
리에트는 말 대신 오른쪽 능선 그림자 쪽을 가리켰다. 불빛 없는 셋은 아직 같은 간격을 유지했다. 도망자를 몰아붙이는 발이 아니라, 사냥감이 어느 길을 택하는지 살피는 눈 같았다.
나는 바위 턱 아래로 이어지는 마른 홈을 보았다. 좁지만 이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돌기둥처럼 남은 바위가 시야를 끊어 주고, 위에서 말을 타고 내려오기에는 너무 급했다. 사람 둘이 나란히 달리기도 어려운 길이었다.
“여기로 간다.”
내가 말했다.
“계속 북서로.”
세라가 물었다.
“끝이 어딘지 알아?”
“몰라.”
나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래도 저 세 손 중 하나로 돌아가는 것보단 낫다.”
세라 입가가 아주 잠깐 굳었다가 풀렸다.
“좋아. 선두는 내가 잡아.”
“둘째는 나.” 브론이 곧장 받았다. “막힌 돌은 내가 본다.”
“셋째는 나.”
내가 말했다.
“앞뒤 간격과 증거 위치는 내가 맞춘다.”
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넷째에서 흔적을 지울게요.”
리에트가 활시위를 만졌다.
“후미는 내가 닫는다. 붙으면 눈부터 뺏어.”
따뜻한 선언은 없었다. 하지만 역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바위 턱 아래에서 다시 금속 신호가 울렸다. 이번엔 기사단 쪽 외침과 성도 쪽 응답이 거의 겹쳤다. 서로 먼저 붙겠다고 나서는 소리였지, 우리를 살리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간다.”
그녀가 먼저 마른 홈 아래로 몸을 낮췄다. 브론이 뒤따랐고, 나는 셋째 자리에서 앞사람 발뒤꿈치와 뒷사람 숨소리 사이 간격을 맞췄다. 미리엘은 은실을 바위 틈에 한 번 감아 두고 내려왔고, 리에트는 마지막까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능선 그림자와 아래 횃불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후미로 미끄러졌다.
우리는 말없이 움직였다.
그 침묵은 조금 전까지와 달랐다.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서 생긴 침묵도, 감정을 숨기려는 침묵도 아니었다. 같은 방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자기 몫만 남긴 침묵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분명히 알았다.
이 다섯은 더 이상 우연히 같은 던전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다. 각자 돌아갈 집이 먼저 등을 돌렸기 때문에, 스스로 다음 길을 고른 사람들이다.
앞쪽에서 세라가 낮게 말했다.
“왼쪽으로 붙어. 아래 바람 세다.”
브론이 곧장 뒤를 이었다.
“다음 턱은 넓다. 거기서 한 번 숨 고른다.”
뒤에서는 미리엘의 은실이 마지막으로 바위에 긁히는 소리가 났고, 맨 끝에서는 리에트 화살촉이 아직도 어둠을 겨누고 있었다.
멀리 뒤쪽, 우리가 나온 바위 턱 위로 불빛 하나가 늦게 떠올랐다. 잡으러 뛰어든 불빛이 아니었다. 놓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나온 불빛에 더 가까웠다.
리에트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보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길을 고른 채 이미 칸 밖으로 몸을 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북서로 내려갔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