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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실의 파편

돌틈 끝 공기는 보스실의 젖은 먼지보다 더 차갑고, 더 금속 맛이 났다.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빛이 아니라 방 생김새였다.

몸 하나 겨우 비껴 나올 만큼 좁았던 틈은 안쪽에서 짧게 꺾인 뒤, 무너진 작업실 같은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왼쪽 벽에는 돌에 박힌 고정대 셋이 아직 남아 있었고, 그 아래에는 깨진 유리관 목 둘과 녹슨 걸쇠가 흩어져 있었다. 정면 바닥은 반쯤 내려앉아 얕은 웅덩이가 되었는데, 가장자리마다 얇은 은빛 가루가 젖은 채 엉겨 붙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허리 높이 선반이 한 줄 남아 있었고, 거기 기대어 금 간 석판 한 장과 접힌 지도틀 같은 금속판이 넘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틈 반대편 위쪽에는 누군가 오래전에 돌을 얇게 파낸 시야홈이 나 있었고, 그 아래 바닥에는 사람 발을 한 번 멈춰 세우도록 일부러 다듬은 낮은 턱이 남아 있었다.

공간은 작았다. 숨기기엔 지나치게 정리돼 있었고, 안심하기엔 너무 노출돼 있었다.

브론이 먼저 낮은 욕설을 뱉었다.

“광부 창고는 아니군.”

그가 웅덩이 가장자리 은빛 가루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물에 젖은 먼지처럼 퍼지지 않았다. 묽은 쇠비린내만 남긴 채 얇게 늘어졌다.

“광석 찌꺼기 아냐. 약재 반응이 남은 거다. 오래됐지만.”

미리엘이 곧장 그의 손목을 눌렀다.

“입 가까이 가져가지 마세요.”

그녀는 허리를 숙여 깨진 유리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안쪽 벽면에 희게 말라붙은 막이 남아 있었다. 손끝이 거기를 따라가다 멈췄다.

“정화약 계열이 아니에요. 더 무거워요.”

나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선반 쪽으로 갔다. 금 간 석판 아래, 작은 홈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무너진 돌가루 속에 은빛이 조금 비쳤다.

손을 넣어 꺼내자 차갑고 묵직한 유리병 반쪽이 나왔다.

아래쪽은 멀쩡했고 위만 깨져 있었다. 병 바닥에는 젖은 은빛 액이 한 손가락 깊이도 안 되게 남아 있었다. 흔들자 빛보다 무게가 먼저 움직였다. 물보다 더 느리고, 피보다 더 끈질긴 액체였다.

백은 수액.

목 안이 곧바로 조여 들었다.

엘레나 침상 곁에서 나는 그 냄새를 딱 한 번 맡아 봤다. 성도 의사가 병을 열지도 않은 채 겉면만 비추며, 정식 허가와 정화 허락이 없으면 닿을 수도 없다고 말하던 날이었다. 그때도 병은 작았고 값은 사람 목숨보다 컸다.

이번에는 회상보다 판단이 먼저 올라왔다.

이걸 빼앗기면 끝난다.

나는 곧장 병 반쪽을 옷 안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세라가 그 움직임을 봤다.

“뭔지 알아?”

“알아.”

“확실해?”

“확실하니까 더 안 보여 준다.”

세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서 바람이 한 번 스며들 때마다 말안장 가죽 냄새와 젖은 철 냄새가 함께 들어왔다. 놓친 사냥감을 찾는 바람이 아니라, 어디로 받으면 되는지 재는 바람 같았다.

리에트는 이미 시야를 잡고 있었다. 시야홈에 눈을 붙인 채 숨소리까지 줄이고 있었다.

“셋.”

그녀가 말했다.

“아니, 셋 줄이다.”

나는 선반 옆 금속판 하나를 세워 안쪽 빛을 조금 죽였다. 그제야 리에트가 손짓으로 바깥 배치를 짚었다.

“아래 길목엔 기사단 쪽 말 둘. 안장 장식은 가렸지만 고삐 매는 손이 군영식이야. 왼쪽 낮은 턱에는 성도 봉인국 쪽 둘. 횃불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해. 오른쪽 사면엔 따로 선 셋. 복식이 안 맞고, 말보다 발이 먼저 움직여.”

브론이 혀를 찼다.

“서로 한패는 아니군.”

“같은 걸 기다리는데.”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서로 먼저 손을 안 넣는 쪽이지.”

세라가 짧게 숨을 뱉었다.

“기사단이 먼저 들어오면 보호 명목으로 묶을 거야.”

그 말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미리엘이 선반 아래 쓰러진 금속판을 뒤집다가 멈췄다. 판 안쪽에는 얇은 홈이 엇갈려 있었다. 지도라기보다 접어서 인계 방향을 바꾸는 좌표판 같았다.

“정화시설 배치도가 아니에요.”

브론이 곁으로 와 모서리를 툭 건드렸다.

“배치도가 아니라 인계판이지.”

“인계판?”

내가 묻자 브론은 판의 접힌 선을 따라 손톱을 밀었다.

“보관실에서 바로 쓰는 물건이 아니다. 운반 중에 뭐를 어디로 돌릴지 접어서 표시하는 판이야. 바깥 선, 중간 선, 안쪽 선. 누가 먼저 가져가고 누가 나중에 넘기는지까지 나눠 둔다.”

그 말이 떨어지자 방의 모양이 달리 보였다.

보상실이 아니었다.

안에서 꺼낸 걸 바깥으로 넘기기 전에 잠깐 가려 세워 두는 방.

사람이든 물건이든, 이름보다 칸을 먼저 정하는 방.

세라 역시 같은 데 닿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출구가 바깥이 아니라 여기로 이어졌군.”

“우연은 아니지.” 리에트가 말했다. “아래서 살아 나온 건 여기서 다시 나누는 거다.”

미리엘 손이 석판 위에서 멈췄다.

금 간 석판은 젖은 가루와 먼지에 반쯤 덮여 있었지만, 중앙 위쪽만 유난히 깨끗했다. 누군가 최근에 한 번 쓸어 낸 듯한 자국이었다. 그녀는 소매 끝으로 표면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거기에 줄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얕게 새겨진 선 열둘.

그리고 그 옆, 원래 열세 번째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친 망치 자국.

긁어 지운 게 아니었다. 눌러 깨부숴,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읽히지 않게 만든 흔적이었다.

내 손가락이 저절로 주머니 속 병 반쪽 위를 눌렀다.

미리엘은 더 아래 문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군데군데 깎여 나갔지만 중앙 한 줄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녀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구원은…”

세라가 바로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지.”

미리엘은 숨을 한 번 고른 뒤, 더 또렷하게 읽었다.

“구원은 감춤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말이 방 안에 얇게 걸렸다.

브론이 낮게 코웃음쳤다.

“구원이라 적어 놓고 뒤에서 줄을 깨부순 놈들답군.”

미리엘은 떨리는 손을 거뒀다. 그래도 아까처럼 설명으로 흐르진 않았다.

“성도 장부에 비슷한 문장을 본 적 있어요.”

그녀는 석판을 본 채 말했다.

“거긴 반대로 적혀 있었어요. 감춤이 질서를 지킨다고.”

“보는 사람 따라 문구를 바꾸는 방이었다는 뜻이지.” 브론이 금속판을 접으며 말했다.

나는 석판 아래 깨진 홈 안을 다시 살폈다. 작은 돌조각 셋, 바닥에 눌어붙은 얇은 금속편 하나가 더 나왔다. 금속편에는 홈 두 개와 방향 표시 하나가 남아 있었다. 로웬이 남긴 부적 뒷면의 선과 닮은 각도였다.

미리엘이 금속편을 보자마자 말했다.

“이건 남쪽 표기가 아니에요. 일반 배치와 반대로 접혀 있어요.”

“북서.”

리에트가 시야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받았다.

“능선 뒤 배수로 쪽으로 이어질 때 쓰는 방향이야.”

북서.

로웬 메모와, 부적이 도시 바깥에서 더 세게 떨던 방향.

세라가 그제야 나를 제대로 봤다.

“처음부터 거기로 빼낼 생각이었나.”

“빼내든 숨기든.” 내가 말했다. “누군가는 정식 길보다 이 방향을 먼저 알고 있었어.”

그 말은 곧 우리보다 먼저 이 방을 알고 있던 손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사단이든 성도든, 아니면 둘 바깥의 누군가든.

바로 그때, 바깥에서 짧은 금속음이 세 번 끊겼다.

셋. 둘. 하나.

조금 쉰 뒤, 다시 둘이 이어졌다.

건조한 박자였다. 누가 먼저 고삐를 쥐고, 누가 나중에 손목을 묶는지 정해 둔 사람들만 쓰는 신호였다.

세라 턱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기사단 신호는 아니야.”

“성도도 아니에요.”

리에트가 시야홈 너머를 보며 덧붙였다.

“오른쪽 사면 셋이 움직였다. 아래 둘이 길을 열고, 위 하나는 아직 안 내려온다.”

“보고만 있다는 거군.”

내 말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먼저 찍고 몸은 나중에 들이미는 손이야.”

죽이려면 이미 쐈을 자들이다.

그런데 기다린다.

우리가 무엇을 챙기는지, 누가 앞장서는지, 누가 다친 몸으로도 물건을 버리지 않는지까지 보고 난 뒤에 붙으려는 태도였다.

세라는 방패 손잡이를 쥔 장갑 낀 손을 한 번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녀가 보는 건 손바닥 상처가 아니었다. 그 손으로 다시 기사단 인계 문서에 서명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기사단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나를 먼저 묶진 않을 거야. 대신 언제 문서를 찢었는지, 언제 보고를 늦췄는지, 왜 대상 이탈을 바로 막지 않았는지 쓰게 하겠지.”

그녀 시선이 내 주머니 쪽으로 한 번 스쳤다.

“그리고 넌 보호 명목으로 따로 넘겨질 거다.”

“보호가 아니라 인계지.” 브론이 투덜댔다. “나도 조합으로 돌아가면 끝이야. 금지 합금 흔적 봤고, 허가 없이 먼저 뚫은 길로 들어갔고, 국가 물건 같은 걸 만졌다. 공방 문턱도 못 밟고 바로 벗겨질걸.”

미리엘도 석판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이었다.

“성도는 저를 살려 두겠죠. 대신 말은 못 하게 만들 거예요. 삭제 교리 정리실에서 뭘 봤는지부터 다시 쓰게 할 거고, 이 문장도 못 읽은 사람처럼 만들 거예요.”

리에트는 시야홈에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댔다.

“나는 숲으로 곧장 빠져도 인간 쪽 추적선이 먼저 물린다. 여기까지 발 들인 흔적이 이미 남았어. 그리고 로웬 흔적을 쫓은 걸 의회가 반길 리도 없지.”

각자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다 길이 아니었다.

각자 다른 칸에 집어넣히는 순서만 다를 뿐이었다.

나는 금 간 석판, 접힌 인계판, 주머니 속 백은 수액 반쪽, 바깥의 회수 신호를 한 번에 같이 생각했다.

따로 흩어지면 더 빨리 끝난다.

그 생각은 기분이 아니라 눈앞 모양새에서 바로 튀어나왔다.

“듣고 있어.”

내가 말하자 네 사람이 다 나를 봤다.

“여기서 각자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먼저 잡히는 순서만 달라진다. 세라는 기사단 보고 계통, 미리엘은 침묵 조치, 브론은 물건값, 리에트는 추적 흔적. 나는 반응자로 따로 떨어진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 답은 하나야. 같이 나가되, 누구 손에도 바로 안 넘어가야 한다.”

세라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말은 쉽지.”

“쉬워서 하는 말 아니야.”

나는 바닥의 젖은 먼지 위에 돌조각으로 선을 그었다. 비상 틈에서 이 방으로 들어온 길, 시야홈이 난 바깥 사면, 북서로 꺾이는 배수 홈 방향. 선은 짧았지만, 어디가 트이고 어디가 막히는지는 눈에 들어왔다.

“우린 넓은 길로 못 나간다. 아래 길목엔 기사단 말이 기다리고 있어. 왼쪽 턱엔 성도. 오른쪽 사면은 고용 추적선이 시야를 잡았다. 하지만 북서 배수 홈은 아직 직접 막히지 않았어.”

브론이 무릎을 꿇고 선을 들여다봤다.

“좁다.”

“좁아야 돼. 말이 못 들어오고 셋이 한 줄로 못 펴지는 길이면 된다.”

리에트가 바로 받았다.

“위쪽 시야는 내가 지워 줄 수 있어. 잠깐뿐이지만.”

미리엘은 금속 인계판과 석판 사이에 끼어 있던 얇은 고리 하나를 뽑아 들었다.

“반응 흔적도 줄일 수 있어요. 이 방에서 바로 빠져나간 흔적 대신, 문장선이 아직 안쪽에 남은 것처럼 속일 수 있어요. 오래는 못 가요.”

브론은 선반 밑 녹슨 걸쇠 둘을 발끝으로 끌어왔다.

“배수 홈 입구가 막혀 있으면 부술 순 있어. 조용하진 않다.”

세라는 여전히 방패를 놓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시야홈 쪽을 한 번, 내가 그린 선을 한 번 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기사단 쪽으로 나가면 저들이 먼저 멈추는 척은 하겠지. 하지만 그 순간 넌 바로 따로 떼일 거야.”

그녀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그럼 그건 길이 아니네.”

세라는 마침내 방패를 바닥에 조용히 세웠다. 전투가 끝나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한다는 몸짓이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이번엔 기사단 복귀선 안 탄다.”

브론이 짧게 웃었다.

“이제야 말이 되네.”

세라는 그를 보지도 않고 잘랐다.

“대신 각자 할 일은 분명히 한다.”

나는 먼지 위 선 옆에 다섯 점을 찍었다.

“세라는 선두. 좁은 턱에서 밀어낼 사람 있으면 네가 처리해. 리에트는 후미와 위 시야. 우리 뒤에서 누가 따라붙는지 계속 봐. 미리엘은 반응 흔적을 숨겨. 브론은 배수 홈을 열고, 길 막히면 바로 바꿔. 난 물건을 나눠 가진다.”

“나눠 가진다고?” 미리엘이 물었다.

나는 주머니 속 백은 수액 반쪽을 눌렀다가 손을 뗐다.

“한 사람만 들고 나가면 그 사람이 먼저 잡혀. 석판 조각, 좌표판, 금속편, 수액을 나눠 가져. 누가 하나 물려도 전부 뺏기지 않게.”

브론 눈빛이 짧게 반짝였다.

“그건 마음에 드는데.”

“마음에 들어도 값부터 매기진 마.”

세라가 말했다.

브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값을 안 매기면 더 위험해.”

그 말은 이번엔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석판 아래서 떨어져 나온 조각 둘을 챙겼다. 열세 번째 줄 자리가 망치 자국으로 깨진 부분의 파편이었다. 문장 끝이 남은 좁은 조각 하나는 미리엘에게 줬다. 그녀라면 더 읽을 수 있다. 방향 홈이 있는 금속편은 리에트에게 넘겼다. 길을 읽는 손이 가져야 했다. 접힌 인계판은 브론에게 줬다. 이런 판을 읽을 줄 아는 놈이 숨겨야 했다. 그리고 백은 수액 반쪽은 내가 품었다.

세라가 그걸 보며 말했다.

“그건 네가 드는 게 맞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병이야말로 누가 우리를 가장 먼저 갈라놓으려 할지 정해 줄 물건이었다.

바깥에서 이번엔 목소리가 들렸다.

“…보호 대상 우선 확인…”

기사단 쪽이었다.

잠시 뒤 다른 쪽에서 더 딱딱한 말이 따라왔다.

“…분리 확보 후 봉인국 이송…”

성도.

그리고 가장 낮은 쪽, 오른편 사면 아래에서 거친 숨 섞인 말이 새었다.

“먼저 걸어 나오는 놈부터 잡아.”

짧고 건조한 말.

명분도 설득도 없었다. 넘겨받을 대상을 고르는 사람 목소리였다.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리에트가 먼저 활을 들었다.

“오른쪽 사면 시야를 한 번 지울 수 있어.”

브론도 걸쇠와 망치 자루를 챙겼다.

“배수 홈 입구 막은 건 오래된 받침 셋일 거다. 두 개는 깨고 하나는 밀면 지나간다.”

미리엘은 금속 고리를 은실과 함께 감았다.

“제가 안쪽 문장선을 조금 살려 둘게요. 우리가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것처럼 반응을 남겨 둘 수 있어요. 그러면 저쪽은 잠깐 더 기다릴 거예요.”

보상실.

그 단어는 이제 맞지 않았다. 아직 이름 붙기 전 사람과 물건을 잠깐 모아 두는 가름칸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파편은 남았다.

구원은 감춤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지워진 열세 번째 줄.

백은 수액 반쪽.

북서를 가리키는 금속편.

누가 숨기려 했든, 이제 이건 우리 다섯이 나눠 든 증거가 되었다.

나는 방패와 활, 망치, 은실, 주머니 속 병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한 번 더 순서를 봤다. 전투 순서가 아니라 도주 순서였다. 하지만 다섯 사람을 한 줄로 묶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라가 먼저 길 연다.”

내가 낮게 말했다.

“브론이 뒤따라 막힌 돌 푼다. 내가 셋째로 가운데를 잡는다. 미리엘은 넷째에서 안쪽 흔적을 끊고, 리에트는 후미에서 시야를 자르며 내려와.”

세라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서면 된다.”

리에트도 활시위를 당긴 채 말했다.

“후미는 내 쪽이 맞아.”

미리엘은 짧게 숨을 골랐다.

“제가 넷째면 마지막 떨림까지 남길 수 있어요.”

브론은 이미 걸쇠를 허리춤에 꽂고 있었다.

“그럼 늦지 마. 이런 방에 오래 붙어 있으면 오히려 우리가 분류표가 된다.”

세라가 방패를 다시 들었다. 보스실에서와는 소리가 달랐다. 적을 막기 위한 방패가 아니라, 한 줄로 빠져나갈 사람들 앞에서 턱을 밀어내기 위한 도구로 잡힌 소리였다.

우리는 아직 동료라기보다, 서로 없이는 오늘 밤을 못 넘기는 다섯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정확했다.

누군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각자 원래 줄로 돌아가면 더 빨리 끝난다는 계산 때문에 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따뜻한 맹세는 없었다. 대신 누가 선두를 맡고 누가 뒤를 닫고 누가 증거를 나눠 갖는지가 분명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달랐다.

리에트가 시야홈 쪽으로 마지막 화살 하나를 겨눴다.

“신호 줄게.”

그녀가 속삭였다.

“오른쪽 위 불빛이 꺼지면 움직여.”

잠깐 뒤, 짧은 파열음이 났다. 화살이 돌가루를 일으키며 횃불 걸쇠를 긁었고, 빛 하나가 툭 꺼졌다. 바깥에서 거친 욕설이 터졌다. 그래도 누구도 곧장 뛰어들지 않았다. 먼저 본 걸 확인하려는 머뭇거림이 오히려 길을 열었다.

“지금.”

세라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가 오른쪽 뒤벽 선반 밑, 브론이 짚어 둔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방패 가장자리로 썩은 받침목 하나를 걷어냈다. 브론이 바로 뒤에서 망치 자루를 박아 돌을 옆으로 틀었다. 젖은 흙이 무너지며 사람 하나 겨우 기어 나갈 만큼의 배수 홈이 열렸다.

바깥 말울음이 가까워졌다.

왼쪽에서는 성도 쪽 누군가가 아직 안쪽 반응이 살아 있다고 외쳤고, 아래에서는 기사단 쪽이 길목을 넓히라고 짧게 명했다. 오른쪽 사면의 고용 추적선은 여전히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 움직임을 다 못 봤기 때문인지, 일부러 더 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건 그들의 뜻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틈을 타는 순서였다.

브론이 틈 안쪽으로 상체를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이쪽은 물 빠진 지 오래됐어. 아래로 한 번 꺾이면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다.”

세라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돌아왔다.

“발판 둘. 셋째는 비어.”

나는 곧장 몸을 낮췄다. 여기서도 먼저 믿어야 하는 건 말보다 자리였다.

미리엘은 마지막으로 방 안 석판을 돌아봤다. 그녀는 은실 끝을 금 간 고정대에 걸어 두고, 문장선이 아직 안쪽에 얽혀 있는 것 같은 얕은 떨림을 남겼다.

“조금만 버텨 줘.”

그 말은 우리에게 한 게 아니라, 방 안에 남겨 둔 거짓 흔적에게 하는 말 같았다.

리에트가 후미에서 다시 한 번 바깥을 봤다.

“오른쪽 위 하나는 아직 안 움직여.”

그녀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

“우릴 놓친 게 아니야. 어디까지 가는지 보려는 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배수 홈 안으로 몸을 넣었다.

첫 굴곡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앞에서 세라 방패가 돌을 긁는 낮은 소리가 났고, 브론은 빈 발판 자리마다 욕설을 깔아 주듯 짧게 알려 줬다. 내가 발을 디딘 세 번째 턱은 정말 비어 있었다. 흙이 갑자기 꺼지며 종아리까지 미끄러졌고, 나는 왼손으로 젖은 벽 홈을 잡아 겨우 몸을 버텼다.

뒤에서 미리엘 숨이 멎는 소리가 짧게 났다.

“괜찮아.”

내가 바로 말하자 세라가 앞에서 되받았다.

“오른쪽 손 위로. 거기 돌턱 있다.”

나는 손을 더듬어 튀어나온 돌턱을 찾았다. 지시가 늦지 않았고, 몸은 다시 중심을 잡았다. 위쪽에서는 브론이 막힌 받침 하나를 옆으로 걷어차며 낮게 욕을 삼켰다. 돌 부딪히는 소리가 홈을 타고 짧게 울렸다.

그 순간 뒤쪽에서 금속 신호가 다시 끊겨 울렸다.

셋. 둘. 하나.

이번엔 더 가까웠다.

우리가 떠난 방이 비었다는 걸 이제 눈치챈 것이다.

리에트가 후미에서 화살 하나를 뒤쪽 어둠으로 흘려 보냈다. 쏘는 소리보다 맞는 소리가 먼저 왔다. 누군가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대신 돌가루가 무너지고, 멈칫한 발 하나가 제자리를 다시 찾는 기색만 들렸다. 저쪽도 아직 속도를 다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가.”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본 척만 하고 있어.”

배수 홈은 한 번 더 아래로 꺾였다. 젖은 흙 냄새 사이로 바깥 밤공기가 더 짙게 스며들었다. 북서로 빠지는 길이었다.

앞쪽에서 세라 방패가 갑자기 한 번 크게 걸렸다.

“멈춰.”

우리는 그대로 얼었다.

브론이 몸을 더 밀어 넣어 앞을 만졌다.

“돌살 하나가 무너져 아래를 가리고 있어.”

세라가 낮게 답했다.

“정면으로 밀면 밑으로 떨어진다. 소리도 크게 난다.”

나는 몸을 벽에 붙인 채 손을 뻗어 아래 바람을 느꼈다. 차갑게 빨아들이는 기류가 오른쪽 아래로 쏠리고 있었다. 막힌 건 완전한 벽이 아니라, 위에서 떨어진 돌판이 사선으로 걸려 길을 반쯤 덮은 상태였다.

“브론.”

“봤다.”

그가 숨을 낮췄다.

“왼쪽 아래 받침을 먼저 깨야 해. 그래야 돌판이 안쪽으로 누워.”

“소리는?”

“난다.”

소리가 안 나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리에트, 뒤 간격.”

“아직 둘이 들어오진 않았어. 하나가 입구를 재고, 하나는 아래에 남아 있어.”

“미리엘, 흔적.”

“아직 먹혀요. 하지만 오래 못 버텨요.”

“세라, 돌판 눌리면 네 방패로 받아.”

“알겠어.”

말이 짧아질수록 몸은 더 빨라졌다.

브론이 망치 자루 끝을 왼쪽 받침 틈에 밀어 넣었다. 세라가 방패 아래를 받쳤다. 나는 둘 사이 빈 자리에 팔을 끼워 돌판이 안쪽으로 미는 각을 잡았다. 뒤에서 미리엘이 내 허리띠를 한 번 잡아 줬고, 더 뒤에서는 리에트가 화살촉으로 어둠을 겨누고 있었다.

“지금.”

브론이 힘을 주자 돌 속에서 젖은 금 가는 소리가 났다. 받침이 먼저 깨지고, 돌판이 우리 쪽으로 짧게 미끄러졌다. 세라 방패가 낮게 울렸고, 내가 어깨로 밀어 준 만큼만 안쪽으로 누웠다. 돌판 아래, 사람 옆으로 기어 나갈 너비가 겨우 생겼다.

“먼저 가.” 세라가 말했다.

“아니. 네가 버티고 있으니까 네가 마지막이다.”

나는 바로 답했다.

세라는 반박하지 않았다. 브론이 먼저 틈을 통과해 아래 자리를 확인했고, 내가 그 뒤를 이었다. 발이 닿은 곳은 젖은 흙이 아니라 거칠게 깎인 돌계단이었다. 누군가 예전에 사람 발 너비만큼은 꾸준히 쓴 길이었다.

“계단이야.”

내가 낮게 말하자 브론이 바로 받았다.

“배수로에 이런 건 자연으론 안 남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리에트 화살이 다시 한 번 울었다. এবার은 더 가까운 금속음이 따라왔다. 좁은 홈 입구까지 누군가 들어선 것이다.

“한 놈 들어왔다.”

리에트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뛰진 않는다. 발판 수를 세고 있어.”

시험하듯 따라오는 손.

정말 끝까지 죽이기보다 보는 쪽이었다.

미리엘이 내 뒤로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속삭였다.

“방 안 반응이 거의 끊겼어요.”

“그럼 이제 우릴 직접 쫓겠군.”

세라가 마지막으로 돌판을 놓고 내려오며 말했다. 돌이 제자리로 완전히 닫히진 않았지만, 방패를 뺀 뒤에도 절반은 다시 걸렸다. 뒤따르는 자들이 속도를 내기엔 한 번 더 몸을 낮춰야 하는 각이었다.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좋아. 이 정도면 한 박자는 번다.”

계단은 짧았고, 끝에는 사람 셋이 겨우 설 만한 바위 턱이 나왔다. 위는 사선으로 튀어나온 바위에 가려져 있었고, 오른쪽 아래로는 마른 배수 홈이 밤 사면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멀리 아래쪽에서는 기사단 횃불 둘이 서로 어긋나며 움직였고, 왼편 깊은 곳에서는 성도 쪽 흰 천이 바람에 한 번 접혔다 펴졌다. 오른편 능선 그림자 밑에는 불빛 없이 움직이는 셋이 보였다. 횃불이 없는 대신, 걸음 간격이 지나치게 일정했다.

리에트가 가장 마지막으로 바위 턱 위에 몸을 올렸다.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아래 배치부터 다시 세었다.

“기사단 둘은 아직 아래를 넓히는 중. 성도는 왼편으로 돌아간다. 오른쪽 셋은 우리 쪽 높은 턱을 아직 안 탄다.”

“왜.” 브론이 물었다.

“우리가 어디로 빠지는지 더 보려는 거지.”

나는 바위 턱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쥔 물건을 확인했다. 주머니 속 백은 수액 반쪽. 미리엘 손의 석판 조각. 리에트 손목 안쪽에 끼워 넣은 금속편. 브론 허리춤에 접힌 인계판. 세라 방패 안쪽 끈에 묶어 둔 작은 돌파편 하나. 하나가 잡혀도 전부는 남도록 나눠 둔 증거였다.

그 배열이 이상하게도 우리 상태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각자 따로 쥐고 있지만,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 뜻이 크게 달라지는 구조.

세라가 바위 턱 끝에 방패를 세우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기사단 쪽으로 가면 아직 멈춰 세울 수는 있어.”

그녀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멈춘 다음엔 끝이야.”

이번엔 아무도 그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미 다 아는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미리엘이 석판 조각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브론이 인계판을 허리 안쪽으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나도 조합 문으로는 못 들어간다.”

리에트는 말 대신 오른쪽 능선 그림자 쪽을 가리켰다. 불빛 없는 셋이 아직도 같은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망자를 몰아붙이는 발이 아니라, 사냥개의 뛰는 법을 배우려는 눈 같았다.

나는 바위 턱 아래로 이어지는 마른 홈을 봤다. 좁지만 이어져 있었다. 중간중간 돌기둥처럼 남은 바위가 시야를 끊어 주고, 위에서 말을 타고 내려오기에는 너무 급했다. 사람 둘이 나란히 달리기도 어려운 길이었다.

“여기로 간다.”

내가 말했다.

“계속 북서로.”

세라가 짧게 물었다.

“끝이 어딘지 알아?”

“몰라.”

나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래도 저 셋 줄로 다시 들어가는 끝보단 낫다.”

세라 입가가 아주 잠깐 굳었다가 풀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아. 선두는 내가 잡아.”

“둘째는 나.” 브론이 곧장 받았다. “막힌 돌 있으면 미는 건 내 쪽이 빠르다.”

“셋째는 나.”

내가 말했다.

“앞뒤 간격은 내가 맞춘다.”

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넷째에서 흔적을 지울게요.”

리에트가 마지막으로 활시위를 만졌다.

“후미는 내가 닫는다. 붙으면 먼저 눈을 뺏어.”

따뜻한 선언은 없었다.

하지만 역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바위 턱 아래에서 다시 금속 신호가 울렸다. 이번엔 기사단 쪽 짧은 외침과 성도 쪽 응답이 거의 겹쳤다. 서로 먼저 잡겠다고 나서는 소리였지, 우리를 살리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들은 채 방패를 들어 올렸다.

“간다.”

그녀가 먼저 마른 홈 아래로 몸을 낮췄다. 브론이 뒤따랐고, 나는 셋째 자리에서 앞사람 발뒤꿈치와 뒷사람 숨소리 사이 간격을 맞췄다. 미리엘은 은실을 바위 틈에 한 번 감아 두고 내려왔고, 리에트는 마지막까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능선 그림자와 아래 횃불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조용히 후미로 미끄러졌다.

우리는 말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 침묵은 조금 전까지와 달랐다. 누가 누구를 완전히 믿는다는 침묵도, 감정을 숨긴다는 침묵도 아니었다. 같은 방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자기 역할만 남긴 침묵이었다.

그 침묵 안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이 다섯은 더 이상 우연히 같은 던전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다.

각자 돌아갈 집이 먼저 등을 돌렸기 때문에, 스스로 다음 길을 고른 사람들이다.

앞쪽에서 세라가 다시 낮게 말했다.

“왼쪽으로 붙어. 아래 바람 세다.”

브론이 곧장 뒤를 이었다.

“다음 턱은 넓다. 거기서 한 번 숨 고른다.”

뒤에서는 미리엘의 은실이 마지막으로 어딘가에 긁히는 소리가 났고, 맨 끝에서는 리에트 화살촉이 아직도 어둠을 겨누고 있었다.

멀리 뒤쪽, 우리가 나온 바위 턱 위로 불빛 하나가 늦게 떠올랐다. 너무 늦게 나타난 빛이었다. 잡으러 뛰어든 자의 불빛이 아니라, 놓치지 않았는지만 확인하러 나온 자의 불빛에 더 가까웠다.

리에트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보고 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보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길을 고른 채 이미 칸 밖으로 몸을 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북서로 내려갔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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