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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웬이 남긴 문장

공동 서명 원문 칸에서 세로 홈을 한 번 꺾어 나오자 천장이 더 낮아졌다. 왼쪽에는 허리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검게 흘렀고, 오른쪽에는 무너진 보관벽이 어깨를 밀어 넣듯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젖은 돌판 사이로 마른 띠가 가늘게 남아 있었다. 사람 한 명이 무릎을 낮춰 기록을 잠깐 펼칠 만큼의 자리, 그 이상은 없는 턱이었다.

위쪽 회수대의 목소리는 아직 따라왔다. 다만 이 꺾인 홈은 직선으로 내려다보이지 않았다. 말은 닿지만 손은 바로 닿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뒤쪽에서는 금속 바퀴가 물에 걸리는 소리가 났고, 앞쪽 배수로에서는 찬 바람이 아주 얇게 밀려왔다. 오래 숨을 곳은 아니었다. 방향을 고르고 빠져나갈 만큼만 허락된 틈이었다.

세라는 꺾이는 모서리에 먼저 섰다. 검을 뽑지 않고 검집 끝을 물막과 돌바닥 사이에 끼웠다. 물이 한 치 비틀리자 위에서 내려오는 발이 곧장 딛지 못할 미끄러운 줄이 생겼다. 리에트는 더 깊은 어둠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왼쪽 물가 기둥 그림자에 붙어 회수대 발소리와 다른 수로 물소리를 갈라 들었다. 브론은 무너진 보관벽 아래를 훑으며 손바닥만 한 마른 자리를 찾았고, 미리엘은 그 옆에서 소매 끝으로 바닥 물기를 먼저 걷어 냈다.

나는 품 안쪽을 누른 채 멈췄다. 가죽 안감 안에는 로웬의 기록 튜브가 있었다. 조금 전 공동 서명 원문 칸에서 건진 것. 왕궁과 성도가 같은 줄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눌러 온 증거. 손안에 넣었다고 우리 것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욕심내면, 들고 나온 첫 줄보다 빼앗길 줄이 더 많아진다.

“첫 줄만 본다.”

브론이 고개를 들었다. 미리엘도 내 손을 봤다.

“지금요?”

“지금은 방향만.”

나는 세라 쪽을 봤다. 세라는 대꾸 대신 검집 각도를 더 낮췄다. 뒤에서 내려오던 발 하나가 물에 헛걸리는 둔한 소리가 났다. 그녀가 싸움을 붙잡는 대신 시간을 사는 쪽으로 마음을 옮겼다는 뜻이었다.

“다 펴면 젖어. 젖기 전에 뺏겨. 어디로 가야 하는지만 보고 접는다.”

리에트가 돌판 틈에 끼어 있던 반투명한 물막 조각을 집어 올렸다. 글자는 거의 풀렸지만 두 어절은 살아 있었다.

`서쪽 열람 후`

미리엘의 숨이 짧게 멎었다.

“순서예요.”

브론은 조각을 손으로 받지 않았다. 젖은 조각에 자기 체온이 옮는 것조차 꺼리는 얼굴이었다.

“감상은 아니군.”

위쪽에서 `원문 통 확보`라는 외침이 내려왔다. 바로 뒤이어 `대표 응답 재개`라는 말이 붙었다. 저들은 사람과 문서를 아직도 같은 절차 아래 부르고 있었다. 문서를 확보하고, 대표를 세우고, 누군가의 얼굴로 한 줄을 닫는 방식. 우리가 거기 걸어 들어가면 로웬의 튜브도 다시 이름표 하나로 묶일 것이다.

나는 튜브를 꺼냈다. 물에 닿지 않도록 손목 안쪽으로 감싸 쥐고 봉함끈만 풀었다. 종이가 스스로 벌어질 만큼도 아니었다. 첫 줄과 그 아래 번진 짧은 문장이 겨우 보일 만큼만.

검은 먹이 흐려진 문장이 나타났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그 아래 덧붙은 문장은 더 많이 번져 있었다. 그래도 방향은 남아 있었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짧았다. 짧아서 더 차가웠다. 왕도 지하에서 끝을 보지 말 것.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출 것. 로웬은 억울함을 길게 남기지 않았다. 누가 어느 길을 먼저 밟아야 덜 속는지를 남겼다.

브론은 문장보다 접힘을 먼저 봤다. 그는 늘 그랬다. 쇠가 부러진 자리, 종이가 접힌 자리, 손이 급했는지 계산했는지부터 읽었다.

“급히 숨긴 자국이 아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다음 손이 열 자리 남기고 감았어. 혼자 읽고 태울 기록이면 이렇게 안 접어. 물 먹는 쪽하고 마른 쪽도 일부러 갈라 놨고.”

미리엘은 첫 줄 아래 옆칸의 번진 먹을 따라갔다. 손끝은 글자를 만지지 않고 허공에서만 멈췄다.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그녀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길 절반만 보여 주는 곳으로 읽은 거예요. 큰 제목부터 읽지 말고, 비교할 자리를 먼저 찾으라는 지시예요.”

리에트가 내 손의 튜브 끝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 눈은 문장보다 종이 바깥의 얇은 문양에 가 있었다. 물을 먹은 가장자리에서 잎맥처럼 갈라지는 가는 선이 남아 있었다.

“장례문양 아니야.”

“유리숲 쪽?”

“비슷한 게 아니고 같은 줄.”

그 말에 튜브 무게가 달라졌다. 왕도 지하에서 건진 문장이 서방 숲으로 뻗었다. 첫 던전 벽화 가장자리에서 보았던 희미한 잎맥, 리에트가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옛 원정의 냄새, 로웬이 남긴 절반이라는 말이 같은 방향으로 붙기 시작했다.

나는 튜브를 다시 접지 못하고 잠깐 멈췄다. 손보다 심장이 늦게 뛰었다. 로웬은 나를 버린 사람이 아니라, 나 같은 다음 손이 여기까지 올 것을 계산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 생각이 원망보다 아팠다. 다 남기지 않았다는 원망이 올라오자마자 다른 질문이 그 위를 덮었다. 다 남겼다면 누가 먼저 가져갔을까.

브론이 무너진 보관벽 아래 못 자국을 짚었다. 물을 피해 쪼그려 앉을 자리 둘, 문서를 잠깐 걸칠 틈 하나, 그리고 바로 위에 비스듬히 기대 둔 돌판. 누군가 이곳을 그냥 지나가는 홈이 아니라 짧은 열람 자리로 만들어 두었다.

“한곳에 몰아 읽는 걸 막으려 한 거다.”

미리엘이 바로 받았다.

“성도 문서는 사람을 큰 분류부터 붙잡아요. 정화, 격리, 보호, 심사. 큰 이름을 먼저 붙이고, 그다음 사람을 그 칸 안에 세우죠.”

그녀는 젖은 물막 조각을 뒤집어 손등 위에 올렸다. 손바닥 열에 먹이 풀리지 않도록 하는 자세였다.

“로웬은 반대였어요. 조각을 흩고, 순서를 남기고, 한 손에 다 못 잡게 했어요. 다 잡히면 같이 닫히니까.”

튜브 안쪽 옆줄에서 더 짧은 경고가 보였다.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또 문장만 남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우리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느냐였다. 한곳에 모이면 닫힌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 손에 다 모으면 안 된다. 기록도, 사람도, 선택도 나눠야 한다.

“나눠 든다.”

내가 말하자 세라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뭘.”

“튜브는 내가. 물막 조각은 미리엘. 철판 눌림은 브론. 길 표식은 리에트가 기억해. 세라는 아무것도 들지 마.”

세라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나만 빈손?”

“네 손은 뒤를 막아야 해.”

그 말에 세라는 짧게 웃지 않았다. 대신 검집 끈을 다시 조였다. 이름값을 앞세우지도 않았고, 불만을 말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들지 않는 것이 이번 배치에서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끝까지 빈손으로 갈게.”

리에트가 계단 쪽을 보며 낮게 말했다.

“길 얘기 해야 해.”

사각지대 끝에는 얕은 계단이 있었다. 왼쪽은 위쪽 회수대가 가까워지는 방향이었다. 오른쪽은 배수로 아래로 꺾이는 어두운 하행선이었다. 계단 벽에는 이끼 사이로 긁힌 방향표가 남아 있었다. 손으로 더듬어야 읽히는 선 위에 굵은 사선 하나가 겹쳤다. 정면 길을 지우고 우회 길을 남긴 흔적처럼 보였다.

왕도 지하의 나머지는 아직 아래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 그 생각은 손목을 잡아당겼다. 내려가면 더 볼지도 모른다. 더 보면 더 확실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문장을 쫓는 욕심이었다. 로웬이 남긴 말은 `더`가 아니라 `먼저`였다.

미리엘이 내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 더 안쪽으로 내려가고 싶죠.”

“그래.”

나는 숨을 얕게 내쉬었다.

“그래도 안 내려간다.”

브론이 계단 아래 물색을 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 안쪽 길은 이미 저쪽 규격에 익숙한 손들이 막을 거다. 더 내려가면 튜브부터 뺏겨. 남은 절반을 보러 가기도 전에, 들고 나온 절반이 없어져.”

리에트는 벽 긁힘 끝을 짚었다.

“유리숲 뒤집힌 사당 쪽 표식 맞아. 첫 던전 벽화 가장자리하고도 이어져. 저기를 먼저 안 보면 왕도 아래에서 뭘 봐도 반쪽으로 읽을 거야.”

세라는 검집으로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을 한 번 더 틀었다. 물소리가 작게 바뀌자 뒤쪽 금속 발이 또 한 박자 늦어졌다.

“나가서 펴.”

그녀가 말했다.

“여기선 순서만 지켜.”

미리엘은 튜브 끝의 번진 경고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거의 확신이었다.

“`왕도 지하는 너무 늦다.` 그렇게 이어져요.”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왕도 지하는 너무 늦다.

로웬은 감상을 남기지 않았다. 죄목 하나로 끝낼 수 있는 폭로도 남기지 않았다. 순서와 방향, 그리고 빼앗기지 않는 방식을 남겼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누가 나쁜지보다 어디서 읽으면 속지 않는지를 먼저 말하는 기록은, 저들이 세운 얼굴을 한 번에 흔든다.

브론은 허리띠 안쪽에서 기름 먹인 천 세 장을 꺼냈다. 뜨거운 금속 부속을 임시로 감쌀 때 쓰는 얇은 천이었다. 그는 첫 장을 내게 내밀었다.

“튜브 겉만 받아. 안쪽까지 꽉 감싸면 젖은 숨이 안 빠져.”

두 번째 천은 미리엘에게 갔다. 물막 조각은 종이와 닿지 않도록 천 사이에 얇게 띄워야 했다. 세 번째 천은 브론이 직접 철판 조각에 감았다. 철판과 종이가 서로 닿으면 눌림 자국이 섞인다고 했다. 그는 칼을 바로 뽑기 어려운 자세가 되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그가 맡은 싸움은 누군가를 베는 일이 아니라, 이미 남은 자국이 서로를 망치지 않게 지키는 일이었다.

미리엘은 천을 받으며 말했다.

“밖에 나가면 문장부터 다 읽지 않아요.”

“그럼?”

“표식, 첫 줄, 끝 경고, 번호. 그 순서로 봐요. 끝 번호를 먼저 보면 저쪽 칸으로 다시 읽게 돼요.”

브론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문장에 취하지 않는 답이군.”

나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문장에 취하지 않는다. 로웬을 원망하는 데도, 로웬을 숭배하는 데도 취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방식대로 움직인다. 한곳에 몰지 않는다. 한 손에 다 맡기지 않는다. 읽기보다 먼저 살아서 나간다.

위쪽에서 다른 수로 문이 강제로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둔탁한 금속음이 한 번 울리고, 물길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회수대가 길을 바꾸고 있었다. 이제 저들은 우리가 있던 원문 칸만 뒤지는 게 아니라, 빠져나갈 만한 홈을 하나씩 열어 보며 내려올 것이다.

리에트가 선두로 움직였다. 그녀는 배수로 쪽 통로를 곧장 타지 않았다. 두 갈래 물길이 다시 만나는 지점까지 세 걸음만 미리 나가더니, 거기서 멈춰 바닥의 마른 모서리 셋을 차례로 짚었다. 왼쪽 앞, 중앙 턱, 가장 낮은 홈. 우리가 밟아야 할 순서였다.

“소리 줄여.”

그녀가 속삭였다.

“여긴 발보다 물이 먼저 알려 줘.”

나는 두 번째로 움직였다. 품 안쪽에 튜브를 더 깊이 눌러 고정하고, 왼팔 전체로 안감을 감쌌다. 손으로 잡으면 넘어질 때 먼저 놓친다. 팔로 껴안으면 몸이 먼저 구른다. 불편했지만 그 자세가 맞았다. 나는 지금 문장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을 운반하는 사람이었다.

미리엘은 내 뒤에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입 안으로만 낮게 되뇌었다.

“잎맥 표식. 서쪽 우선. 끝 경고. 번호 나중.”

암송이 아니라 못질 같았다. 젖은 종이가 찢기더라도 머릿속 순서만은 흩어지지 않게 박아 넣는 말이었다. 그녀가 성도 안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유가 그런 손과 입에 있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다만 이제 그 손은 저쪽 장부가 아니라 우리 쪽 기억을 붙드는 데 쓰이고 있었다.

브론은 한 번 발을 멈췄다. 그의 앞에 얇은 철편 하나가 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그냥 밟으면 소리가 났다. 그는 몸을 숙인 채 무릎으로 균형을 잡고, 발끝으로 철편을 돌려 물길 쪽으로 눕혔다. 그러고서야 다음 발을 옮겼다. 뒤따르는 세라가 같은 자리를 밟을 때 소리 나지 않게 미리 길을 고친 것이다.

세라는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우리처럼 앞만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검집 끝으로 물길을 툭 건드려 흐름을 바꿨고, 한 번은 벽에 기대 있던 얇은 돌판을 어깨로 밀어 살짝 눕혔다. 직선으로 내려오던 사람이 그 위를 밟으면 반 박자라도 늦을 각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칼이 먼저였을 사람인데, 지금은 칼집과 물과 돌만으로 버텼다. 그게 이번 자리에서 세라가 택한 싸움이었다.

우리가 첫 꺾임을 지나자 뒤쪽에서 `대표 응답`을 다시 요구하는 소리가 내려왔다. 이제 그 말은 문장보다 박자처럼 들렸다. 누가 앞에서 읽고, 누가 뒤에서 봉하고, 누가 끝칸을 닫는지 이미 정한 사람들의 박자. 저쪽은 사람을 부르는 척하면서 줄을 닫으러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 들었다.

“이 기록을 대표 응답으로 바꾸지 않는다. 누구 얼굴 하나로 닫히게 하지 않는다.”

세라가 뒤에서 짧게 받았다.

“그럼 더 빨리 움직여.”

명령 같았고 동의 같았다. 나는 리에트가 짚은 마른 턱을 밟고 몸을 더 낮췄다. 천장이 생각보다 빨리 내려왔다. 품 안의 튜브가 들보에 스치지 않도록 왼팔을 더 안으로 말았다. 어깨가 돌에 긁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살은 아물 수 있다. 먹은 번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통로가 더 좁아지는 곳에서 우리는 한 사람씩 몸을 틀어야 했다. 리에트가 손바닥으로 들보 아랫면을 먼저 눌러 높이를 알려 주었다. 나는 그 손 위치를 기준으로 허리를 꺾었다. 미리엘은 메모 조각을 입술 사이에 잠깐 물고 양손으로 벽을 짚었다. 브론은 손가락 사이 조각들이 서로 닿지 않게 손 자체를 비틀어 통과했다. 세라는 뒤를 보며 반쯤 옆걸음으로 빠졌다. 다섯이 같은 방향으로 달아나는 모양이 아니었다. 각자 다른 조각과 시간을 들고 같은 축을 옮기는 모양이었다.

리에트가 다시 멈췄다. 그녀는 왼쪽 벽에 남은 희미한 긁힘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물에 젖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잎맥이 갈라지는 모양과 닮은 선이었다. 아까 튜브 끝에 남은 문양과 같은 결이었다.

“이어진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도 남겨 놨어.”

그 말은 곧 로웬이 안쪽 한 줄만 숨긴 것이 아니라, 나가는 동선까지 계산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안에서 읽을 줄과 밖에서 맞출 줄이 따로 남아 있었다. 그 사람은 정말 끝까지 운반자였다. 혼자 살아나지 못했더라도, 뒤에 올 손들이 서로를 잃지 않게 줄을 남겼다.

나는 목 안쪽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울 때가 아니었다. 원망을 내려놓을 때도 아니었다. 로웬을 이해했다고 말할 때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그가 남긴 방식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해는 밖에서 해도 늦지 않았다. 보전은 지금 아니면 끝이었다.

배수로 쪽 마지막 낮은 통로에서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물 냄새와 젖은 돌 냄새 사이에 오래 말린 수액이 타다 식은 것 같은 씁쓸한 냄새가 섞였다. 리에트가 바람을 더 길게 들이마셨다.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유리숲 바깥 야영지에서 맡았던 거랑 같아.”

“오염선?”

내가 묻자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숲 안쪽에서만 나는 냄새가 아니야. 안쪽 것을 바깥으로 끌어낸 손이 있었을 때 나는 냄새야.”

그 한마디로 서쪽의 성질이 바뀌었다. 유리숲은 남은 절반을 읽으러 가는 장소만이 아니었다. 리에트가 아직 끝까지 말하지 못한 실패와, 누군가 숲의 오염을 바깥으로 끌어낸 흔적이 겹친 자리였다. 로웬의 문장은 과거 기록이 아니라 지금 퍼지는 냄새와도 이어져 있었다.

미리엘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왕도 안쪽에서만 답을 찾으면, 교단이 짜 둔 순서로 읽게 될 거예요. 저 냄새가 먼저 가고 있다면 더 늦어요.”

브론이 낮게 덧붙였다.

“문양, 냄새, 접기, 끝 번호가 한 줄로 붙었군. 이제 우연이라고 우기긴 어렵다.”

세라는 맨 뒤에서 끊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후퇴 명령처럼 들릴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음 전장을 고르는 선언이었다. 싸움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싸움이 벌어질 자리를 바꾸는 목소리.

그때 위쪽에서 회수대 지휘가 바뀌었다. `대표 응답`을 부르던 목소리 뒤로 왕궁식 호각이 섞였다. 성도의 흰 띠가 물 아래를 훑고, 왕궁 사람들은 위쪽 마른 통로를 막는 식이었다. 서로 다른 구호였지만 움직임은 하나로 맞았다. 아래에서는 젖은 기록을 빼앗고, 위에서는 나가는 얼굴을 확인한다. 우리를 잡는 방식도 처음부터 둘이었다.

리에트가 그 박자를 듣고 바로 손을 들었다. 손가락 두 개가 왼쪽, 하나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왼쪽 위 통로에 둘, 오른쪽 수로 문에 하나. 숫자보다 중요한 건 간격이었다. 아직 우리를 본 것은 아니지만, 냄새와 물소리로 사각지대를 좁히는 속도가 빨랐다.

“위로 가면 얼굴부터 걸려.”

리에트가 말했다.

“아래로 가면 손부터 걸려.”

브론은 즉시 바닥을 봤다. 무너진 돌판 아래에 짧은 쇠사슬 하나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예전 보관함을 묶던 사슬 같았지만, 지금은 발목을 잡기 좋았다. 그는 철판 조각을 든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발끝과 무릎만 써서 사슬을 돌렸다. 물길을 타고 사슬이 벽 쪽 홈에 걸리자 뒤따르는 사람은 바로 지나오지 못할 작은 덫이 생겼다. 칼 한 번 휘두른 것보다 조용한 지연이었다.

미리엘은 그 사이 자기 조각을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손이 떨렸지만 시선은 떨리지 않았다. 성도에서 배운 분류법을 버리는 대신, 그 기술을 거꾸로 쓰고 있었다. 어느 줄이 사람을 묶는지 알기 때문에 어느 줄을 먼저 숨겨야 하는지도 아는 얼굴이었다.

“제가 잡히면 물막 조각부터 버리지 말아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사람 먼저야.”

내 말은 거의 반사였다.

“아니요.”

미리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을 살리려고 조각을 나눈 거잖아요. 제가 넘어지면 오른쪽 안주머니부터 꺼내요. 저를 끌어내는 손은 그다음이에요. 둘을 헷갈리면 저쪽이 이겨요.”

그 말에 세라가 뒤에서 이를 악무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녀는 미리엘을 꾸짖지 않았다. 대신 검집을 쥔 손을 조금 더 낮췄다. 감정을 말로 꺾는 대신, 그 말을 실제 배치 안에 넣었다. 미리엘이 넘어지면 어느 손이 먼저 가야 하는지, 세라가 후미에서 어떤 박자를 벌어야 하는지까지 한 번에 바뀌었다.

나도 다시 배치를 고쳤다. 리에트가 선두에서 냄새와 표식을 본다. 내가 두 번째로 튜브를 안쪽에 품고, 미리엘 오른쪽을 비운다. 브론은 네 번째에서 철판과 물막 사이 거리를 본다. 세라는 마지막에서 손이 아니라 사람 시선을 끊는다. 이건 도망 순서가 아니었다. 누가 어느 순간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지 정하는 순서였다.

“미리엘이 미끄러지면 내가 오른쪽을 잡는다. 브론은 조각 간격부터 봐. 세라는 우리 쪽으로 시선이 붙는 순간 위를 끊어.”

브론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트는?”

리에트가 대답했다.

“나는 길이 끊기면 돌아오지 않아. 앞쪽에 새 길을 남겨. 뒤돌아오면 다섯이 한곳에 몰려.”

그 말은 차가웠다. 하지만 맞았다.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로웬의 경고가 사람 배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누구도 혼자 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자리였다. 각자 흩어져야 서로를 잃지 않는 길이 있었다.

세로 홈 마지막 턱을 넘기기 직전, 위쪽에서 금속이 벽을 긁는 소리가 크게 내려왔다.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바로 맞물릴 거리였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듣자 검집 끝으로 물길을 마지막 한 번 틀고 몸을 빼냈다. 그 직후 좁은 홈 안쪽으로 물이 한꺼번에 흘러들어 돌바닥을 미끄럽게 덮었다. 뒤따라오던 발이라면 그대로 속도를 잃을 자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숨을 길게 뱉었다.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저 아래 사각지대에서, 저들이 우리 손안의 첫 줄을 빼앗지는 못했다. 오늘의 승부는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세로 홈 바깥 첫 마른 턱에 한 번 더 모였다. 멈춘 것이 아니라 다시 나누기 위해서였다. 튜브가 안감 안에서 밀리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미리엘의 물막 조각은 손등 위 천 사이에 살아 있었다. 브론 손가락 사이 철판도 종이와 닿지 않았다. 리에트는 앞쪽 공기를 읽었고, 세라는 뒤에서 금속음 간격을 다시 셌다.

마른 턱 오른쪽에는 오래된 점검 못 네 개가 일렬로 박혀 있었다. 못 끝에는 젖은 붉은 섬유가 아주 조금 걸려 있었다. 공동 서명 원문 칸에서 보았던 봉함끈과 같은 결이었다. 브론은 그걸 떼지 않고 눈으로만 보았다. 건드리면 떨어질 만큼 약한 흔적이었다. 대신 그는 못 간격을 손가락으로 재고, 리에트는 그 줄이 배수로 쪽으로 기울어진 각도를 읽었다. 미리엘은 그 작은 섬유를 보며 성도 봉함과 왕궁 보관못이 같은 길 위에 섞인 것이라고 낮게 말했다. 여기까지 와도 두 손은 갈라지지 않았다. 아래에서는 성도가 주웠고, 위에서는 왕궁이 걸었다. 우리가 들고 나온 절반은 그 사이를 통과해야 했다.

그 확인이 짧은 회의가 되었다. 말은 길지 않았다. 나는 튜브를 다시 눌렀고, 세라는 뒤를 보며 손짓만 했다. 리에트는 앞에서 왼쪽 물길을 버리고 오른쪽 낮은 홈을 골랐다. 브론은 못에 걸린 섬유를 포기하자고 했다. 지금 그걸 떼면 살아 있는 큰 조각 둘을 잃을 수 있었다. 미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증거를 더 모으는 욕심보다 이미 건진 것을 젖지 않게 옮기는 일이 먼저였다. 남은 흔적은 길이 허락할 때 다시 찾기로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로웬이 남긴 문장을 다시 생각했다. 한 사람이 다 들고 도망치는 방식이 아니었다. 여러 손에 나눠 건네야 끝까지 살아남는 방식. 그래서 로웬은 조각을 남겼고, 그래서 우리는 조각을 들고 움직인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절반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절반부터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서쪽으로 간다.”

내가 말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세라가 후미를 맡고, 리에트가 선두를 맡고, 브론이 물증 간격을 다시 잡고, 미리엘이 순서를 입 안에 못질했다. 나는 품 안의 튜브를 더 깊이 눌렀다.

우리는 물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택했다. 패배해서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기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칼보다 기록이 먼저였고, 추격보다 보전이 앞섰고, 분노보다 순서가 앞섰다.

그 순서를 지키는 동안만, 저들이 마지막 얼굴을 다시 씌우지 못한다.

차가운 바람이 배수로 끝에서 한 번 더 불어왔다. 유리숲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냄새를 따라 몸을 낮췄다. 로웬이 남긴 문장은 끝이 아니었다.

길이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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