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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웬이 남긴 문장

공동 서명 원문 칸에서 세로 홈을 한 번 꺾어 나오자 천장이 더 낮아졌다. 눌린 돌판과 오래된 보관벽이 어깨를 안쪽으로 밀어 넣어, 다섯이 한 줄로 서면 숨이 섞일 만큼 비좁았다. 왼쪽으로는 허리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검게 흘렀다. 바닥엔 얕은 물막이 고르게 깔려 있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기보다 먼저 소리가 났다. 오른쪽 보관벽은 반쯤 무너져 얇은 돌판 몇 장이 비스듬히 기대 있었고, 그 밑으로 젖지 않은 마른 띠가 사람 한 명 반쯤 설 자리만 남기고 이어졌다.

위쪽 회수대 목소리는 아직 들렸다. 다만 이쪽은 직선으로 내려다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말은 닿지만 손은 바로 닿지 않는 자리. 오래 버틸 수 없는 은신처였지만, 숨 한 번 고르고 방향을 정하기엔 그만한 곳도 없었다.

세라는 꺾이는 모서리에 먼저 섰다. 검을 뽑지 않았다. 검집을 비스듬히 내려 물길과 돌바닥 사이에 걸쳤다. 금속 끝이 바닥을 눌러 물줄기를 한 치쯤 틀어 놓자, 위에서 급히 내려오는 발목이 한 번은 꼬일 자리로 바뀌었다.

“여긴 내가 붙잡을게.”

리에트는 더 깊은 어둠보다 뒤따라오는 소리를 먼저 갈랐다. 물가 가장자리 돌기둥 그림자 쪽으로 미끄러지듯 옮겨 간 뒤, 위쪽 회수대 금속음과 다른 수로에서 부딪히는 물소리를 따로 세는 얼굴이 되었다. 브론은 무너진 보관벽 아래를 훑다가 내 오른쪽에 무릎을 낮췄다. 미리엘은 마른 띠 끝에 몸을 붙인 채 종이를 잠깐 펼쳐도 버틸 만한 자리를 손바닥으로 먼저 눌러 봤다.

나는 가죽 안감 속 기록 튜브를 바로 꺼내지 않았다. 위쪽 세로 홈 폭, 발판 간격, 물길 깊이, 우리가 선 자리 길이를 다시 읽었다. 여기서 욕심내면 끝이었다. 읽는 줄보다 빼앗길 줄이 더 많아진다.

“첫 줄만 확인한다.”

브론이 고개를 들었고, 미리엘도 내 쪽을 봤다.

“지금?”

“지금은 방향만.”

나는 세라 쪽을 힐끗 본 뒤 말을 이었다.

“여기서 다 펴면 젖어. 젖기 전에 뺏기고. 첫 줄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만 보고 접는다.”

세라는 대꾸 대신 검집 각도를 조금 더 눌렀다. 싸움을 붙드는 대신 시간을 사는 쪽으로 이미 마음을 옮겼다는 뜻이었다.

돌판 틈에 반투명한 물막 조각 하나가 끼어 있었다. 리에트가 그걸 먼저 집어 미리엘에게 넘겼다. 글자는 거의 풀렸지만 두 어절은 남아 있었다.

`서쪽 열람 후`

미리엘이 낮게 숨을 들이켰다.

“순서예요.”

브론이 조각 가장자리를 손등으로만 훑었다.

“감상은 아니군.”

위쪽 회수대에서 `원문 통 확보`라는 외침이 떨어졌다. 거의 같은 박자로 `대표 응답 재개`가 따라붙었다. 사람과 문서를 아직도 같은 줄에서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나는 튜브를 꺼냈다. 물에 닿지 않게 손목 안쪽으로 감싸 쥐고 봉합끈만 풀었다. 젖은 종이가 스스로 벌어질 만큼까지만, 정말 한 줄만 드러날 만큼까지만.

검은 먹이 흐려진 첫 문장이 나타났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 번진 덧문은 더 차갑게 남아 있었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완전한 문장이라 잘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뜻은 한 방향이었다. 왕도 지하에서 끝을 보지 말 것.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출 것.

브론은 손을 내밀지 않은 채 튜브 접힘만 눈으로 쫓았다. 그는 늘 문장보다 접는 방식을 먼저 읽었다.

“급히 숨긴 자국이 아냐.”

그가 낮게 말했다.

“운반 접기다. 다음 손이 열 자리 남기고 접었어. 혼자 읽고 태울 기록이면 이렇게 안 감아.”

미리엘은 첫 줄 아래 옆칸의 번진 먹을 따라갔다. 그녀 손끝이 멈춘 자리에서 짧은 경고 하나가 더 살아났다.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그녀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로웬도 여길 절반만 보여 주는 곳으로 읽었어요. 큰분류가 아니라, 비교 열람 순서를 남긴 거예요.”

리에트가 내 손의 튜브 모서리를 잠깐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 시선은 문장이 아니라 종이 바깥의 얇은 문양에 가 있었다. 물을 먹은 끝에 잎맥처럼 갈라지는 가는 선이 남아 있었다.

“장례문양 아니다.”

그녀가 말했다.

“길표식이야.”

“유리숲 쪽?”

“비슷한 게 아니라 같은 줄.”

나는 튜브를 다시 말아 쥐었다. 손이 먼저 접히고 나서야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로웬은 나중에 올 사람까지 생각하고 접었다. 한 줄만 남긴 게 아니라, 이 한 줄로 다음 절반을 찾게 만들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더 아팠다. 버려졌다는 원망보다 여기까지 올 걸 계산한 손의 흔적이 더 선명해서였다.

무너진 보관벽 아래로 몸을 낮추자 작은 못 자국들이 보였다. 물을 피해 쪼그려 앉을 자리 둘, 문서를 잠깐 걸칠 틈 하나. 브론이 그쪽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

“한곳에 몰아 읽는 걸 막으려 했군.”

미리엘이 바로 받았다.

“성도는 사람을 큰분류부터 읽게 붙들어 둬요. 한 줄을 다 읽게 하는 대신 그 줄 밖으로 못 나가게 하죠.”

그녀는 젖은 막을 가볍게 눌렀다.

“로웬은 반대였어요. 조각을 흩어 놓고, 한 손에 다 못 잡게 했어요. 다 잡히면 같이 잠기니까.”

내 머릿속에서 원망이 다른 모양으로 바뀌었다. 왜 다 남기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다 남기면 누구 손에 먼저 들어갔겠느냐는 질문으로.

튜브 안쪽 옆줄에는 더 짧은 경고가 남아 있었다.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설명보다 먼저 손을 멈추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로웬다운 방식이었다.

위에서 다른 수로 문이 강제로 열리는 소리가 났다. 리에트가 고개를 들었다. 세라의 검집 끝도 살짝 들렸다. 회수대가 길을 바꾸고 있었다.

“이제 길 얘기 해야 해.”

사각지대 끝에는 얕은 계단이 있었다. 왼쪽은 위쪽 회수대가 가까워지는 방향, 오른쪽은 배수로 아래로 꺾이는 어두운 하행선. 계단 옆 벽에는 이끼 사이로 긁힌 방향표가 남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더듬어야 읽히는 선 위에 굵은 사선 하나가 겹쳐 있었다.

나는 그 사선을 한참 봤다. 정면 길을 지우고 우회 길만 남긴 흔적 같았다.

“지금 더 안쪽으로 내려가고 싶죠.”

미리엘이 내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웃을 수도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왕도 지하의 나머지가 바로 아래 어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손을 잡아당긴다. 하지만 로웬이 `먼저`를 남긴 이상, 순서를 어기는 순간 우리가 든 조각부터 뺏긴다.

리에트가 벽 긁힘 끝을 짚었다.

“유리숲 뒤집힌 사당 쪽 길표식 맞아. 첫 던전 벽화 가장자리 문양하고도 이어져. 저기 먼저 안 보면, 왕도 아래서 뭘 봐도 반쪽으로만 읽혀.”

브론이 계단 아래 물색을 한 번 보고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왕궁 안쪽 길은 이미 저쪽 규격 손들이 익숙해. 더 내려가면 튜브부터 뺏긴다. 여기서 욕심내면 끝이야.”

세라는 그제야 몸을 반쯤 돌렸다. 위쪽 회수대 쪽을 향해 서 있던 발을 조금 빼고, 후미를 맡기 좋은 각도로 자세를 바꿨다. 한 번 버틴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대신, 우리가 빠져나갈 동안 뒤를 잘라 내는 쪽을 택한 것이다.

“맞아. 여기서 더 가면 우리가 지는 싸움이 돼.”

그녀는 검집으로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발 하나를 더 꼬이게 만들고 낮게 숨을 골랐다.

“나가서 펴. 여기선 순서만 지켜.”

미리엘은 튜브 끝부분의 번진 경고를 다시 짚었다. 이번에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왕도 지하는 너무 늦다.` 그렇게 이어져요.”

짧고 차가운 결론이었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남은 절반은 서쪽에서 먼저 맞춘다.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왕도 지하는 너무 늦다.

로웬은 감상을 남긴 게 아니었다. 순서와 방향을 남겼다. 누가 먼저 어느 길을 밟아야 살아남는지, 그 최소한의 결을 남겼다. 그리고 그 결은 유리숲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바로 튜브를 다시 감지 않았다. 종이 가장자리에 남은 눌림과 물먹은 결을 한 번 더 봤다. 로웬은 급히 적고 접은 것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펼칠 사람 손까지 계산해, 젖은 부분과 마른 부분이 서로 닿지 않게 감아 두었다. 끝을 거꾸로 잡으면 먹이 번지고, 정면을 벌리면 첫 줄만 보인다. 브론 말대로 운반 접기였다. 남길 내용보다 살아남길 바란 방식이 먼저 보이는 접기였다.

브론도 그걸 읽고 있었다. 그는 내 손으로 튜브를 다시 감는 걸 기다린 뒤, 자기 허리띠 안쪽에서 얇은 기름먹인 천 조각을 꺼냈다. 대장간에서 뜨거운 부속을 임시로 감쌀 때 쓰는 천이었다. 물은 막고 김은 조금 빼는 재질이었다.

“겉면만 한 겹 받아.”

그가 낮게 말했다.

“안쪽까지 죄다 감싸면 젖은 숨이 안 빠져. 겉만 눌러. 틈은 남겨.”

나는 튜브를 그 천으로 한 번 받친 뒤 가죽 안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미리엘은 그걸 보는 동안에도 막조각 끝의 먹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손톱 끝으로 글자 높낮이를 짚다 말고, 젖은 조각이 자기 체온에 더 풀어지지 않게 손등 쪽으로 뒤집어 쥐었다.

“밖에 나가면 큰분류부터 읽지 말고, 남긴 순서대로 비교해야 해요.”

“어떻게.”

“첫 줄, 끝 경고, 길표식, 그리고 번호.”

그녀는 숨을 한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성도는 늘 큰 이름으로 사람을 붙들어요. 정화, 격리, 보호, 심사. 그런데 로웬은 그런 이름을 안 남겼어요. 먼저 볼 줄, 나중에 맞출 줄, 지금은 보지 말 줄만 남겼어요. 그건 누가 뭘 숨겼는지보다, 어디서 읽어야 덜 속는지를 먼저 알려 준 거예요.”

리에트는 계단 벽의 사선 아래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긁힌 흔적 밑에 이끼가 얇게 걷힌 부분이 있었다. 최근에 한 번 더 만져 본 손이 지나간 자국이었다.

“이건 표식만이 아냐.”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정면 길을 지우고 우회만 남길 때 쓰는 손놀림이야. 숲 바깥 추적대도 이렇게 긁어. 쫓는 쪽이 아니라, 뒤에 올 사람을 살려 보내는 쪽.”

그 말에 가슴이 더 조여 왔다. 로웬은 끝까지 도망친 사람이 아니었다. 뒤에 남을 눈을 계산한 사람이었다. 한 줄을 적고, 길 하나를 긁고, 한곳에 모이면 닫힌다는 경고를 남기며, 누가 다음 손이 될지를 끝까지 붙들고 버텼다.

세라는 여전히 뒤를 보고 있었지만, 검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박자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막는 손이었다. 이제는 나갈 때까지 끊어 주는 손이었다. 그녀는 짧게 물었다.

“밖에 나가면 제일 먼저 뭘 맞출 거지?”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문장부터 다 읽지 않아.”

세라가 조금 고개를 틀었다. 내 대답을 재촉하는 움직임이었다.

“유리숲 쪽 표식이 먼저야. 그다음 로웬 줄. 끝번호는 마지막.”

브론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좋아. 문장에 취하지 않는 답이군.”

“끝번호를 먼저 맞추면 저쪽 규격으로 다시 읽게 될 수 있어요.”

미리엘도 곧바로 받았다.

“표식과 순서를 먼저 봐야 해요. 그래야 같은 줄을 다른 얼굴로 덮어 놓은 자리도 다시 벗길 수 있어요.”

그 말은 맞았다. 지금 손안에 있는 건 폭로문이 아니라 방향문이었다. 누가 나빴는지부터 외치게 만드는 기록이 아니라, 어디를 먼저 보지 말아야 하는지부터 정하게 만드는 기록. 그래서 더 위험했고, 그래서 더 빼앗기면 안 됐다.

배수로 쪽 마지막 낮은 통로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아주 약하게 새어 들어왔다. 천장은 낮고 거칠었지만 물은 확실히 얕아지는 방향이었다. 문서를 지키며 빠져나가기에는 그쪽이 낫다.

나는 튜브를 다시 말아 가죽 안감 가장 안쪽에 넣었다. 젖은 겉면이 쓸리지 않게 안쪽 천을 한 겹 더 접어 받쳤다. 브론은 물기 먹은 철판 조각과 아까 건진 물막 조각을 겹치지 않게 손가락 사이에 나눠 끼웠다. 미리엘은 잎맥 같은 길표식과 끝 경고를 잊지 않으려는 듯 입술 안쪽으로만 되뇌었다.

세라는 앞줄에서 한 걸음 물러나 후미를 맡았다. 리에트는 가장 먼저 몸을 낮춰 서쪽 바람이 드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잠깐 멈춰 바람 냄새를 들이켰다.

“이 냄새… 예전 원정 때 맡았어.”

나는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가 말한 예전 원정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유리숲 쪽 기억 오염선, 그녀가 아직 끝까지 털어놓지 않은 실패의 자리. 그 냄새가 여기 배수로 바람 끝에 닿아 있다는 건, 서쪽이 단순한 우회가 아니라 그 실패와도 이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브론이 짧게 말했다.

“좋아. 그럼 더 분명해지지.”

미리엘도 고개를 들었다.

“왕도 안쪽에서만 답을 찾으면, 교단이 짜 둔 순서로 읽게 될 거예요. 로웬이 그걸 피하라고 남긴 거라면… 서쪽을 먼저 봐야 해요.”

세라는 후미를 확인하며 덧붙였다.

“밖에 나가면 누가 먼저 튜브를 열지 다시 정하자. 지금은 다치지 않고 들고 나가는 게 먼저다.”

그 말이 좋았다. 누가 답을 독점하는 문장이 아니었다. 들고 나가서, 다시 펼치고, 같이 순서를 맞춘다는 말이었다. 로웬이 조각을 남긴 방식과도 닮아 있었다.

위쪽에서 다시 `대표 응답`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했다. 저 목소리가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정리된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범인으로 세우고, 나머지 줄을 다시 닫는 응답. 그 절차에 들어가면 이 튜브도, 로웬이 남긴 반쪽도, 유리숲으로 이어지는 나머지도 같은 칸 안에서 눌릴 것이다.

우리는 그 순서에 서지 않기로 했다.

리에트가 먼저 몸을 낮췄다. 그녀는 배수로 쪽 통로를 곧장 타지 않았다. 두 갈래 물길이 다시 만나는 지점까지 세 걸음만 미리 움직인 뒤, 거기서 한 번 멈춰 뒤를 봤다. 누가 어느 돌을 밟아야 물소리가 덜 나는지, 누가 어느 순간 몸을 굽혀야 위쪽 시선에 걸리지 않는지 재는 눈이었다. 그녀 손끝이 바닥의 마른 모서리 셋을 차례로 짚었다. 왼쪽 앞, 중앙 턱, 가장 낮은 홈. 우리가 밟아야 할 순서였다.

세라는 그 신호가 떨어지자 검집을 완전히 빼지 않았다. 오히려 끝을 더 낮춰 물막과 철판 사이에 끼워 넣었다. 위에서 내려오던 발 하나가 다시 헛디디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 틈을 잡아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다시 반 걸음 비켜 섰다. 더 오래 붙들겠다는 자세가 아니었다. 마지막 사람까지 빠져나갈 길을 남겨 둔 채, 뒤를 접어 버리는 자세였다.

브론은 손가락 사이에 낀 조각들을 다시 한 번 나눴다. 철판 조각은 왼손 둘째와 셋째 사이, 물막 조각은 오른손 엄지 밑. 서로 스치면 눌림이 더 번질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는 칼을 쥐지 못하는 자세였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 이 칸에서 제일 먼저 지켜야 할 건 사람을 찌르는 쇠가 아니라, 이미 남아 있는 눌림과 번호였다.

미리엘은 움직이기 직전, 마른 띠 끝에 무릎을 잠깐 찍어 짧은 메모를 남겼다. 길게 쓰지 않았다. `잎맥표식 / 서쪽 우선 / 끝 경고 / 번호 나중.` 네 줄도 아니고 네 덩이였다. 누가 빼앗아 봐도 뜻을 바로 못 읽게, 자기만 다시 보면 순서를 되살릴 수 있게 적는 방식이었다. 그녀가 성도 안에서 오래 살아남은 건 그런 손 때문이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다만 이제 그 손은 저쪽 장부가 아니라 우리 쪽 기억을 붙드는 데 쓰이고 있었다.

나는 튜브를 안감 안쪽으로 더 밀어 넣으며 순서를 다시 세었다. 리에트가 길을 연다. 내가 둘째다. 미리엘이 셋째, 브론이 넷째. 세라가 마지막. 앞은 소리를 줄여야 하고, 뒤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가운데 셋은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단순한 후퇴가 아니었다. 기록을 든 채 빠져나가는 운반선이었다.

위쪽에서 다시 `대표 응답`이 들렸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박자로 들렸다. 누가 앞에서 읽고, 누가 뒤에서 봉하고, 누가 끝칸을 닫는지 이미 정한 사람들의 박자. 저쪽은 사람을 부르는 척하면서 줄을 닫으러 내려오고 있었다.

리에트가 첫 돌을 밟았다. 물이 거의 튀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짚은 마른 모서리를 그대로 따라갔다. 두 번째 발을 디딜 때는 몸을 더 낮춰야 했다. 천장이 생각보다 빨리 내려왔고, 품 안의 튜브가 들보에 스치지 않게 왼팔 전체로 안감을 감싸야 했다. 손보다 팔이 먼저 기록을 껴안는 자세가 되었다. 불편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넘어져도 튜브가 먼저 부딪히지는 않을 자세였다.

미리엘은 내 뒤에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아주 낮게, 입 안에서만 같은 말을 되뇌는 기척이 났다. `서쪽 열람 후.` `북하단에서 다 들여다보지 마라.` `한곳에 모이면 바로 닫힌다.` 그건 암송이 아니라 거의 못질 같았다. 젖은 종이가 흩어져도, 적어도 머릿속 줄은 흩어지지 않게 박아 넣는 반복이었다.

브론은 한 번 발을 멈췄다. 그의 앞에 얇은 철편 하나가 물에 반쯤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밟고 지나가면 소리가 났다. 그는 몸을 숙인 채 무릎으로 균형을 잡고, 발끝으로 그 철편을 돌려 물길 쪽으로 눕혔다. 그러고서야 다음 발을 옮겼다.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중요했다. 뒤따르는 세라가 같은 자리를 밟을 때 소리 나지 않게 미리 길을 고쳐 둔 것이다.

세라는 마지막까지 위쪽을 보고 움직였다. 그녀는 우리처럼 앞만 따라오지 않았다.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검집 끝으로 물길을 툭 건드려 흐름을 바꿨고, 한 번은 벽에 기대 있던 얇은 돌판을 어깨로 밀어 살짝 눕혔다. 직선으로 내려오던 사람이 그 위를 밟으면 반 박자라도 더 늦을 각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칼이 먼저였을 사람인데, 지금은 칼집과 물과 돌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게 그 순간의 세라였다.

우리가 세로 홈 첫 꺾임까지 올라왔을 때, 리에트가 다시 멈췄다. 그녀는 앞쪽 공기를 한 번 들이마시더니, 왼쪽 벽에 남은 아주 희미한 긁힘을 쓸어 내렸다. 물에 젖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잎맥이 갈라지는 모양과 닮은 선이었다. 아까 튜브 끝에 남은 문양과 같은 결이었다.

“이어진다.”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도 남겨 놨어.”

그 말은 곧 로웬이 여기 안쪽 한 줄만 숨긴 것이 아니라, 나가는 동선까지 계산해 두었다는 뜻이었다. 안에서 읽을 줄과 밖에서 맞출 줄이 따로 남아 있었다. 내 등골을 타고 식은 것이 흘렀다. 그 사람은 정말 끝까지 운반자였다.

통로가 더 좁아지자 우리는 한 사람씩 몸을 틀어야 했다. 천장 아래 들보가 낮게 걸린 곳에서는 리에트가 손바닥으로 먼저 들보 아랫면을 눌러 높이를 알려 줬고, 나는 그 손 위치를 기준으로 허리를 꺾었다. 미리엘은 메모 종이를 입술 사이에 잠깐 물고 양손으로 벽을 짚으며 지나갔다. 브론은 자기 손가락 사이 조각들이 서로 닿지 않게 손 자체를 비틀어 통과했다. 세라는 마지막까지 뒤를 본 채 반쯤 옆걸음으로 빠졌다. 다섯이 같은 방향으로 달아나는 모양이 아니라, 다섯이 서로 다른 물건 하나씩을 들고 같은 축을 옮기는 모양이었다.

그때 리에트가 다시 바람을 맡았다. 이번에는 더 길었다. 물 냄새와 젖은 돌 냄새 사이에, 오래 말린 수액이 타다 식은 것 같은 씁쓸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유리숲 바깥 야영지에서 맡았던 거랑 같아.”

나는 앞만 보며 물었다.

“오염선?”

“응. 숲 안쪽에서만 나는 냄새가 아냐. 바깥으로 끌어낸 손이 있었을 때 나는 냄새야.”

그 한마디로 다음 길의 성질이 바뀌었다. 서쪽은 단지 남은 절반을 읽으러 가는 곳이 아니었다. 리에트가 끝내 설명하지 못했던 실패와, 누군가가 숲 안쪽 것을 바깥으로 끌고 나왔던 자취까지 겹치는 곳이었다. 길은 이미 열렸고, 동시에 썩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브론이 낮게 말했다.

“좋네. 그럼 문양, 냄새, 접기, 끝번호가 다 한 줄로 붙는다.”

미리엘도 숨을 고르며 맞받았다.

“왕도에서 다 읽으면 늦는다는 말이 이제 문장만은 아니에요. 저 냄새가 먼저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세라는 맨 뒤에서 짧게 끊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여기서 안 멈춘다.”

그녀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누가 들으면 후퇴 명령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다음 전장을 고르는 선언이었다. 싸움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싸움이 벌어질 자리를 바꾸는 목소리.

세로 홈 마지막 턱을 넘기기 직전, 위쪽에서 금속이 벽을 긁는 소리가 한 번 크게 내려왔다. 우리가 조금만 늦었어도 바로 맞물릴 거리였다. 세라는 그 소리를 듣자 검집 끝으로 물길을 마지막 한 번 틀고, 그대로 몸을 빼냈다. 그 직후 좁은 홈 안쪽으로 물이 한꺼번에 흘러들며 돌바닥을 미끄럽게 덮었다. 뒤따라오던 발이라면 그대로 속도를 잃을 자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숨을 길게 뱉었다. 아직 안전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저 아래 사각지대에서, 저들이 우리 손안의 첫 줄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오늘의 승부는 거기까지였다.

나는 리에트 뒤를 따르며 마지막으로 세로 홈 쪽 어둠을 흘끗 봤다. 로웬은 한 장의 죄목보다 한 줄 전체를 남기려 했다. 성도의 잘못만 적고 끝내는 대신, 왕국과 성도가 어떻게 같은 줄을 나눠 눌렀는지 남기려 했다. `R.H.`라는 약식 표기와 `북하단 비교 후 보류`라는 문장은 그가 그 줄을 실제로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같은 걸 붙들어야 했다.

더 깊이 들어가는 건 다음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졌다.

살아서 나간다.

지금 손에 든 걸 젖지 않게 지킨다.

순서를 잊지 않는다.

세라는 마지막까지 후미를 지켰다. 검집과 철판, 물길과 발목만으로 시간을 벌어 주는 움직임이었다. 브론은 물증을 쥔 손가락 간격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다. 미리엘은 짧은 메모를 남겼다. `잎맥표식 / 서쪽 우선 / 끝 경고.` 리에트는 선두에서 바람 냄새와 물 빠지는 소리를 함께 읽었다.

나는 품 안의 튜브를 더 깊이 눌러 고정했다.

왕도 지하는 절반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절반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절반부터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물 밖으로 빠지는 통로를 택했다. 패배해서가 아니라, 이번엔 이기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칼보다 기록이 먼저였고, 추격보다 보전이 앞섰고, 분노보다 순서가 앞섰다.

세로 홈 바깥 첫 마른 턱에 발이 닿자, 나는 바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바닥을 확인했다. 물이 어디까지 따라 나왔는지, 튜브가 안감 안에서 밀리지 않았는지, 브론 손가락 사이 조각이 서로 닿지 않았는지, 미리엘 메모 먹이 번지지 않았는지 차례로 봤다. 리에트는 이미 앞쪽 공기를 읽고 있었고, 세라는 뒤에서 따라오는 금속음을 다시 셌다. 우리는 방금 한 줄을 건진 파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증언 여러 조각을 나눠 든 운반선처럼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로웬과 닮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이 다 들고 도망친 흔적이 아니라, 여러 손에 나눠 건네야 끝까지 살아남는 방식. 그래서 더 확신이 들었다. 유리숲으로 가야 한다. 왕도 아래에 남은 절반이 있더라도, 그걸 여는 키는 이미 서쪽으로 먼저 건너갔다.

그리고 그 순서가, 결국 다음 문을 열 것이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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