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의 거래
판정선 앞 착지대는 사람 넷이 숨을 나눠 쉬기에도 좁았다.
위쪽으로는 무너진 문턱 사이에 걸린 장대 끝이 돌을 긁는 소리가 쉼 없이 내려왔고, 아래쪽으로는 문틀 너머 눅눅한 금속 냄새와 식은 향 냄새가 얇게 올라왔다. 오른편 벽에 남은 열두 홈은 등불빛을 받을 때마다 젖은 이빨처럼 번들거렸고, 그보다 바깥으로 비스듬히 남은 열세 번째 잔선은 지워진 흉터처럼 희미하게 빛을 머금었다.
세라는 내 앞을 반 칸 가로막은 채 방패를 세우고 있었다. 방패 윗면은 위에서 튄 돌가루와 횃불 재를 뒤집어쓴 상태였고, 좁은 착지대 탓에 그녀는 몸을 비스듬히 틀어야만 위와 아래를 동시에 막을 수 있었다. 리에트는 한 칸 높은 계단에서 활줄을 반쯤 당긴 채 위쪽 틈과 아래 문틀을 번갈아 겨누고 있었다. 미리엘은 문틀 다섯째 홈과 아홉째 홈 사이에 은실 구슬 셋을 걸어 두고, 숨을 얕게 고르며 지워진 밑문장을 다시 읽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문틀 왼쪽으로 반쯤 갈라진 틈 사이에서 오래된 작업실 하나가 어둠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좁은 틈 안쪽에는 낮은 작업대, 부러진 집게, 벽에 박힌 망치걸이, 뜯긴 판재가 먼저 보였다. 누군가 한 번 급히 몸을 숨긴 자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금속을 만지고 덧댄 손이 드나들던 공간이었다. 돌바닥 한쪽에는 못 대가리와 얇은 금속 부스러기가 비늘처럼 흩어져 있었다. 벽 아래로는 무너진 환기 틈이 하나 더 벌어져 있었는데, 바깥 광갱 외연에서만 묻어올 법한 회색 염분 흙이 그 틈 가장자리에 얇게 끼어 있었다.
저 틈이다.
정면 길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보강선이나 배수 틈을 더듬다가 몸 하나 겨우 구겨 넣어야 닿는 자리. 혼자 먼저 내려왔고, 혼자 먼저 갇혔다는 말이 된다. 구하러 온 사람의 동선이 아니라, 남들보다 먼저 값나가는 냄새를 맡고 기어든 사람의 동선이었다.
그 비늘 사이에서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키는 세라보다 조금 낮았지만 어깨가 넓었다. 회갈색 가죽 조끼 위로 먼지와 금속가루가 겹겹이 붙어 있었고, 수염 끝마다 회백색 가루가 엉겨 있었다. 그는 사람부터 확인하지 않았다. 먼저 바닥에 떨어진 금속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엄지손톱으로 긁었고, 그다음에야 우리 쪽으로 시선을 들었다.
눈빛은 굶주린 짐승 같지 않았다.
대신 값을 먼저 매기는 장사꾼 눈이었다.
“그거.”
그가 내 손이 아니라 세라 방패 아래 박힌 작은 금속 파편을 보며 말했다.
“버릴 거면 이쪽으로 던져. 단면 살아 있으면 값이 더 붙어.”
세라 눈썹이 곧바로 올라갔다.
“미쳤나.”
그녀 목소리가 착지대 천장에 낮게 부딪혔다.
“위에서 사람이 들이닥치기 직전인데 쇳값부터 묻는다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위에서 사람이 내려오든 말든, 아래에선 쇳값이 먼저지. 그 조각은 그냥 철이 아니야.”
리에트 활끝이 곧장 그의 목으로 향했다.
“한 걸음만 더 나오면 쏜다.”
“쏘지 마.”
남자는 손을 드는 대신 손에 든 금속 조각을 등불빛 쪽으로 기울였다. 잘린 단면에 푸르스름한 결이 비쳤다.
“이 아래서 사람 죽이면 피보다 비싼 걸 같이 망가뜨린다.”
그 말이 끝나자 위쪽 문턱에서 돌이 크게 울렸다. 누군가 장대를 더 깊이 밀어 넣은 소리였다. 세라는 본능적으로 방패를 한 번 더 끌어올렸고, 리에트 활줄은 더 팽팽해졌다.
나는 작업실 틈과 문틀 사이 거리를 먼저 쟀다. 세라가 방패를 돌려도 한 사람은 겨우 지나갈 폭, 둘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어깨가 걸릴 좁은 통로였다. 저 남자가 적이라면 이 자리는 우리에게 최악이고, 반대로 저 남자가 아래 구조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가장 비싼 정보원이기도 했다.
구원자는 아니다.
저 얼굴은 남의 목숨을 먼저 붙드는 얼굴이 아니라, 빠져나갈 길과 자기 몫을 동시에 남길 구멍부터 찾는 얼굴이다. 그런 얼굴은 믿기 어렵다. 대신 조건만 맞으면 가장 빨리 손익 계산을 끝내기도 한다.
미리엘이 문틀에 얹은 손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당신, 여기서 뭘 하고 있었죠?”
남자는 그제야 그녀를 한번 제대로 봤다. 성도식 흰 겉옷과 은실 구슬을 본 순간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기도하는 손까지 내려왔네.”
그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살아나갈 길 찾고 있었지. 그리고 눈먼 놈들이 덧대고 간 쇳조각을 주워 담고 있었고.”
“이름.”
세라가 잘라 말했다.
남자는 잠깐 망설이는 척하더니, 손에 든 금속 조각을 허리춤 주머니에 넣었다.
“브론 카르트.”
그는 말을 이었다.
“길 안내도, 판금 뜯기도, 값 매기기도 한다. 오늘은 운 나쁘게 무너지는 길 밑에 먼저 처박혔고.”
카르트.
드워프식 성씨였다.
브론은 우리 반응을 살피며 작업실 문턱까지 한 발 다가왔다. 그제야 등불빛이 그의 장비를 조금 더 비췄다. 허리에는 짧은 망치와 납작한 끌이 매여 있었고, 오른손 장갑 끝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전투병보다 작업병, 광부보다 장비공에 가까운 손이었다.
그런데도 첫인상은 기술자보다 거래꾼이었다.
사람 목숨보다 물건의 결을 먼저 보는 얼굴.
“카르트면 드워프 조합 쪽이냐.”
리에트가 물었다.
브론이 웃지도 않은 채 코로만 숨을 내쉬었다.
“조합이 내 이름을 아직 사람 취급하면 그럴 수도 있지.”
세라는 여전히 방패를 내리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왔지.”
“외곽 북사면 배수 틈.”
브론이 이번엔 바로 답했다.
“무너진 판재 뒤에 있던 반쯤 죽은 통로야. 광차도 못 지나가고, 사람 하나가 장비 벗고 비벼야 겨우 기어드는 틈.”
그는 작업실 벽 아래 염분 흙이 묻은 환기 틈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빠져 들어왔다. 먼저 들어오면 먼저 건질 수 있을 거라 봤지. 나가기도 저기로 할 생각이었고.”
세라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럼 혼자 선점하러 들어왔다는 뜻이군.”
브론은 부정하지 않았다.
“선점 못 하면 선점당하잖아.”
짧고 뻔뻔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한마디를 기억해 두었다. 이 남자는 숨길 건 숨겨도, 계산 자체를 부끄러워하진 않는다. 적어도 계산이 바뀌는 순간은 읽기 쉽다.
미리엘이 은실 구슬을 한번 조정하며 물었다.
“당신도 위쪽에서 반응 일어나는 거 봤어요?”
브론은 그녀 질문을 곧장 받지 않고 내 쪽을 봤다.
“저기 중심에 선 친구가 건드린 거지?”
세라가 대답 대신 방패 모서리를 움직였다. 작은 금속음이 울렸다.
“네가 묻는 쪽이 아니야.”
브론은 세라의 살기 섞인 태도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작업실 벽에 기대 세워 둔 짧은 쇠집게를 집어 들더니, 세라 방패 아래 박힌 금속 파편을 가리켰다.
“그 조각, 잠깐만 볼 수 있나.”
“싫다면.”
“그럼 다 같이 틀린 문을 열겠지.”
브론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한마디에 착지대 공기가 한 번 식었다.
미리엘이 먼저 시선을 들었다.
“무슨 뜻이죠.”
브론은 쇠집게 끝으로 문틀 왼편 보강재를 가리켰다. 등불빛을 따라 보니 돌과 돌 사이에 끼워 넣은 얇은 금속편들이 있었다. 처음엔 그냥 오래된 균열을 막은 덧댐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폭과 길이가 일정하지 않았다. 일부는 안쪽으로 눌렸고, 일부는 돌 틈을 살짝 띄운 채 박혀 있었다.
“저건 무너지는 걸 막으려고 대충 처박은 게 아니야.”
브론이 말했다.
“열릴 때 힘이 어디로 빠지는지 계산하고 박아 둔 거다.”
그는 손에 든 쇠집게로 공중에 선을 그었다.
“위쪽에서 반응이 오면 힘이 이 문틀 오른쪽으로 몰리고, 아래 잠금이 풀릴 때는 여기, 다섯째랑 아홉째 사이에서 한 번 걸린다. 그러니까 저 금속편은 보강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힘을 비뚤게 보내는 유도편이야.”
그는 곧장 세라 방패 윗모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각도 그대로 두면 다음 충격에 오른쪽부터 문다. 반 치만 낮춰.”
미리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잠깐.”
그녀가 문틀 다섯째 홈 아래를 다시 만졌다.
“그래서 은실이 여기서 길게 떨린 거군요.”
브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은실이야 네 방식이고, 내 방식은 먹은 열과 결을 보는 거지.”
그는 세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 파편.”
세라는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위쪽에서 횃불빛이 계단 벽에 한번 더 튀는 걸 보고, 결국 방패 아래 박힌 작은 금속 조각을 뽑아 브론 쪽으로 퉁겨 보냈다. 브론은 한 손으로 받아 들더니 곧바로 단면을 코앞까지 가져갔다. 냄새까지 맡는 얼굴이었다.
그는 금속을 엄지로 문지르고, 이를 가볍게 부딪혀 소리를 듣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뭐가.”
내가 물었다.
브론은 파편을 들어 보였다.
“이건 현장 은폐용 철판이 아니야. 수문장 받침 아래 덧댄 금속이랑 같은 계열이다. 보통 광갱 보강재면 결이 한 방향으로 죽고, 못 대가리에 균일한 망치흔이 남아. 그런데 이건 열을 두 번 먹였어.”
그는 파편 끝의 푸른 결을 손톱으로 짚었다.
“한 번은 만들 때, 한 번은 다른 데 붙였다 떼어낼 때. 그리고 성도식 덧보강처럼 표면만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게 아니라, 안쪽 힘줄이 살아 있다. 이건 숨기려는 손이 아니라 만들어서 다시 쓰려는 손이 만진 금속이야.”
리에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작 흔적이라는 건가.”
“그래.”
브론이 짧게 답했다.
“누군가 이 안을 발견하고, 그 뒤에 덮기만 한 게 아니야. 열고 닫히는 방식을 알고 다시 개조했다는 뜻이지.”
세라 턱선이 굳었다.
“국가 쪽이든 성도 쪽이든.”
브론은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라고 단정하긴 일러. 하지만…”
그는 문틀 오른편 잔선을 한번 힐끗 봤다.
“공식 광갱 보수 인부 손은 아니야. 못 규격부터 다르거든.”
브론은 작업실 바닥에서 길쭉한 못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못 대가리는 넓고 편평했는데, 한쪽 면이 이상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봐. 이건 아래에서 위로 박은 못이 아냐. 옆에서 비스듬히 밀어 넣은 뒤 안쪽에서 한 번 더 두드렸어. 좁은 공간에서 문틀 힘을 돌리려고 쓸 때 나오는 방식이지. 광갱 막는 사람은 이렇게 안 박아. 여는 사람이 이렇게 박는다.”
미리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성도 보수 기록에는 이런 규격이 없어요.”
브론은 코웃음을 쳤다.
“기록에 안 적는 손이 더 무섭지.”
그는 다시 작업실 안쪽으로 몸을 반쯤 돌려 발밑에서 납작한 금속판 하나를 끌어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판이었고, 모서리 셋이 깨져 있었다. 한 면에는 성도식 곡선 세 줄을 닮은 문양이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 밑면에는 전혀 다른 각도의 접합 홈이 보였다.
“이건 더 노골적이야.”
브론이 판을 세라 쪽으로 기울였다.
“겉문양은 성도 쪽 확인 표식 흉내고, 밑접합은 군용 보강재 계열이다. 서로 다른 규격을 억지로 포갠 거지. 한쪽은 남 눈 속이려고 붙인 껍데기고, 한쪽은 실제로 하중 버티는 뼈대야.”
착지대 아래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국가와 성도.
우리가 따로 의심해 왔던 이름들이 문틀 한 장에 포개져 있었다.
리에트가 위를 겨눈 채 낮게 물었다.
“그 셋이 다 같은 편이라고도 보나.”
브론은 금속판 모서리를 손톱으로 퉁겼다. 얇고 탁한 소리가 먼저 나고, 아주 깊은 데서 한 박자 늦게 낮은 울림이 따라왔다.
“같은 편이면 이렇게 안 겹쳐.”
그가 말했다.
“한 놈은 겉을 속이는 데 급했고, 한 놈은 힘이 새는 길을 틀어막는 데 급했고, 맨 아래 놈은 애초에 다른 문을 만들었어.”
그는 작업실 바닥에 금속판과 못을 나란히 놓았다.
“이 넓적한 못은 군용 운반문에 쓰는 방식이야. 급히 닫아도 안쪽에서 버티라고 옆으로 밀어 넣는 놈. 반면 이 겉판은 보여 주는 얼굴에 가깝지. 사람 눈을 속이려고 얇게 눌러 붙였어. 두 개를 한 손이 한 번에 했다면 이렇게 갈릴 수가 없다.”
미리엘이 문틀 왼편 홈을 더듬다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잠깐.”
그녀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갈라졌다.
“이 표기… 정화문 축약이 아니에요.”
세라가 곧바로 그녀를 봤다.
“그럼.”
미리엘은 대답 대신 성도식 곡선 아래를 손톱으로 문질렀다. 얇은 가루가 벗겨지며 눌린 자국 하나가 비쳤다. 곡선 끝에 숨은 짧은 획이었다. 이름을 줄일 때가 아니라, 확인 대상을 적을 때 끝에 덧붙이는 획.
“읽는 사람을 틀리게 끌고 가는 표기예요.”
그녀가 겨우 말했다.
“겉으로는 정화문처럼 보이게 덮어 놓고, 실제론 사람 반응부터 보게 만든 거예요.”
나는 그 배열을 눈으로 따라갔다. 납작한 판, 비스듬히 눌린 못, 겉에 붙은 성도식 곡선, 가장 안쪽에서 검푸르게 잠긴 오래된 띠. 제각기 다른 시대의 손이 좁은 돌틈 하나를 두고 자기 목적을 얹은 흔적이었다.
이건 숨긴 기록이 아니다.
살아 있는 다툼이다.
누군가는 이 문을 열어야 했고, 누군가는 들키지 않게 덮어야 했고, 또 누군가는 나중에 오는 사람이 틀린 이름부터 읽게 만들어야 했다. 로웬이 계속 좌표보다 말을 의심하라는 식으로 메모를 남긴 이유도, 어쩌면 이런 덮개의 순서를 현장에서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브론이 그 곡선 아래 눌린 획을 한 번 보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쇳값보다 비싼 게 있군.”
그가 낮게 말했다.
“이 문, 물건보다 사람을 가려 받는 구조야. 너한테 값이 붙어 있어.”
내 목덜미가 먼저 식었다. 금속판과 못과 문틀 홈을 따라오던 시선이, 그제야 사람 자리까지 올라온 셈이었다. 로웬 메모가 계속 좌표보다 줄과 순서를 남긴 것도 같은 이유일 수 있었다. 길만 숨기려 했다면 위치를 바꿔 적는 걸로 끝났을 거다. 그런데 그는 자꾸 읽는 법부터 뒤틀린다고 적었다. 누가 어디에 서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그 둘이 먼저 맞아야 안쪽이 움직인다는 뜻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리 하나 잘못 밟고 이름 하나 잘못 붙는 순간, 사람은 길 찾기도 전에 먼저 걸러진다.
그 말은 허세가 아니라 경고였다. 나는 그제야 브론이 파편보다 구조를 더 오래 보고 있었다는 걸 이해했다. 이 남자는 돈 냄새를 맡고 기어들었지만, 막상 안쪽에 닿고 보니 자기가 주워 갈 물건보다 더 큰 설계 냄새를 맡아 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더 위험했고, 그래서 더 필요했다.
위쪽에서 마침내 사람 발이 문턱 돌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장대 끝이 틈 사이로 들어오며 횃불 불꽃이 크게 흔들렸다. 세라가 즉시 방패를 밀어 올렸고, 리에트 활줄이 짧게 울렸다.
브론은 그 소리에 눈썹만 한번 꿈틀했을 뿐 물러나지 않았다.
“좋아, 그럼 거래를 하자.”
세라가 헛웃음을 냈다.
“지금?”
“지금.”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여기서 나가고 싶고, 너희는 저 문을 틀리게 열고 싶지 않다. 난 금속을 읽을 수 있고, 저 흰 옷은 문장과 판정선을 읽는다. 너희 둘은 위에서 내려오는 손을 막을 수 있지. 각자 값은 있다.”
“네 값은 뭐지.”
내가 물었다.
브론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 고민마저도 사람 목숨보다 계산표를 먼저 펴는 습관처럼 보였다.
“우선은 저 파편들 절반.”
세라가 비웃음을 삼켰다.
브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 나가면, 내가 본 걸 함부로 뺏지 않는다는 약속. 앞으로 이런 문과 금속이 또 나오면 내 몫의 판단 자리를 비워 두는 것.”
리에트가 차갑게 말했다.
“조건이 많군.”
“죽는 값보단 싸.”
브론이 곧바로 받아쳤다.
나는 브론 얼굴을 봤다. 탐욕스럽다기보다, 손에 쥘 수 있는 권리 하나쯤은 반드시 남겨 두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공짜로 돕고 뒤에 가서 공까지 빼앗길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좋다.
이 남자는 살려 두면 언젠가 값을 청구할 거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적어도 지금은 우리 쪽으로 힘을 걸어 둘 이유가 분명하다. 무서운 건 속내 없는 호의지, 값표 붙은 손이 아니다.
미리엘이 문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은 값보다 순서가 먼저예요. 첫 잠금을 풀지 못하면 작업실도, 착지대도 같이 닫힐 수 있어요.”
브론은 그 말에 처음으로 조금 진지해졌다.
“어느 쪽으로?”
“들어가는 쪽인지, 돌아가는 쪽인지는 아직 몰라요.”
브론은 문틀 아래 얕은 홈과 작업실 바닥 높낮이를 한번에 훑었다. 곧 그의 시선이 작업실 입구 오른쪽 바닥에서 멈췄다.
“아니, 하나는 알겠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 작업실 바닥이 착지대보다 반 치 낮아. 문틀이 닫히면 먼저 끊기는 건 안쪽이야.”
“왜 그렇게 보죠?”
미리엘이 물었다.
브론은 발끝으로 바닥에 남은 반원형 흠집을 그려 보였다.
“미닫는 문이 아니라 떨어지는 문이면, 끊기는 면엔 이런 눌림이 생겨. 그리고 못 머리 주변 마모가 안쪽에 더 심해. 예전에 한 번 닫혔다가 다시 들어 올린 적도 있다는 뜻이고.”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운 나쁘면 내가 있는 이쪽부터 잘린다.”
그 순간 거래의 무게가 조금 바뀌었다.
브론은 여전히 쇳값을 따졌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리만큼 이 문이 잘못 닫히는 걸 피해야 하는 처지였다.
세라도 그걸 읽었는지 방패를 조금 내렸다. 완전히 경계를 푼 건 아니었지만, 살기를 무조건 밖으로 세우던 각도는 아니었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살아 나가면 이야기하지. 지금은 손부터 보태.”
브론은 그 말을 듣고도 웃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작업실 안쪽에서 짧은 철쐐기 두 개를 주워 왔다.
“문이 비뚤게 떨어지면 오른쪽부터 문다. 그 전에 이 틈을 살짝 받쳐 두면 첫 충격은 버텨.”
그는 세라 쪽을 보았다.
“방패 각 조금만 낮춰. 아니, 더. 힘이 위에서 내려오게 말고, 문틀 오른편으로 흘려.”
세라가 불쾌한 얼굴로 눈을 좁혔다.
“지시하나.”
“안 들으면 같이 깔린다.”
짧은 대꾸였다.
세라는 욕설을 삼키듯 숨을 내쉬었지만, 결국 방패 각을 조금 낮췄다. 브론은 그 틈에 철쐐기 하나를 문틀 오른편 아래 틈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하나는 작업실 입구 왼쪽 갈라진 판재 아래에 박았다. 망치 대신 돌손잡이 끝으로 두 번만 눌렀는데도, 쐐기가 자리 잡는 소리가 단단하게 울렸다.
리에트가 위를 노린 채 물었다.
“그걸로 버티나.”
“영원히는 아니고, 첫 번은.”
브론이 답했다.
“여긴 완벽히 막는 데가 아니라 힘이 어디로 가는지 바꾸는 데니까.”
그 말은 이상하게 내 방식과도 닮아 있었다.
직접 막는 대신, 힘의 방향을 바꾸는 것.
미리엘이 다시 등불을 문틀 위로 들었다. 은실 구슬은 여전히 다섯째와 아홉째 홈 앞에서 길게 떨고 있었다. 브론이 손등으로 그 홈 사이 금속편을 살짝 두드리자, 안쪽에서 매우 얇은 빈 울림이 돌아왔다.
“안에 한 겹 더 있어.”
“안에 한 겹 더 있어.”
그가 말했다.
“겉문 하나, 속문 하나. 그런데 이름표는 제일 바깥에만 붙어 있어.”
나는 그 말에 문틀과 작업실 안쪽 보강 구조를 다시 봤다. 처음엔 한 덩어리로 보였던 덧댐이, 이제는 층으로 읽혔다.
가장 바깥에는 돌에 대충 웃는 얼굴처럼 붙은 성도식 곡선 금속판.
그 아래에는 힘을 오른편으로 틀어 보내는 군용 접합판.
그리고 가장 안쪽, 오래된 본체 쪽에는 검푸른 띠처럼 비스듬히 지나간 낡은 금속 뼈대.
겉간판.
힘줄.
오래된 뼈.
한 번 숨긴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열고, 누군가가 다시 덮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위에 읽는 이름부터 바꿔 붙였다.
브론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얼굴이었다.
“윗선과 아랫선이 다르군.”
그가 낮게 말했다.
“처음 만든 손 따로, 나중에 고친 손 따로, 제일 나중에 표정만 바꿔 붙인 손이 또 있어.”
미리엘이 입술을 굳혔다.
“표정만 바꿔 붙였다고요.”
“그래.”
브론이 문틀의 성도식 곡선 세 줄을 손톱으로 긁었다. 얇은 가루가 떨어졌다.
“이건 문 자체가 아니라 간판이야. 안쪽 뼈대는 다른데, 겉만 성도식으로 읽히게 해 놨어. 보고서엔 정화문이나 보관문쯤으로 적었겠지. 실제 기능은 다른데.”
세라가 차갑게 말했다.
“판정선.”
미리엘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쪽에서 마침내 한 사람이 틈 아래로 횃불을 들이밀었다. 불빛이 계단 벽과 세라 방패 위를 번쩍 핥았다. 리에트 화살이 곧장 날아가 횃불 끝을 후려쳤고, 불씨가 돌바닥으로 튀었다. 뒤이어 고함이 터졌고, 장대가 거칠게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세라가 방패로 그 첫 충격을 받아 냈다. 착지대 전체가 쿵 하고 울렸다. 브론이 급히 박아 넣은 쐐기에서도 낮은 떨림이 돌아왔다.
“한 번뿐이야!”
브론이 소리쳤다.
“다음엔 오른쪽이 무너져!”
미리엘이 곧바로 문틀에 두 손을 얹었다. 은실 구슬 셋이 한 번에 떨며 얇은 울음을 냈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떨리는 목으로도 이번엔 문장을 정확히 끌어냈다.
“왼편 잔선을 먼저 밟고, 중심을 넘기지 말아요.”
그녀가 나를 향해 말했다.
“같은 자리를 다시 중심으로 읽히면 묶는 쪽이 닫혀요.”
나는 발끝을 문틀 아래 얕은 홈 앞에 맞췄다. 오른발을 가운데로 들이밀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고, 왼쪽으로 반 걸음 비껴 서듯 무게를 옮겼다. 발바닥 아래 돌 표면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매끄러웠다. 오래전에 누군가 여러 번 밟았던 자리였다.
중심에 서고 싶은 건 상대다.
이 길을 만든 손도, 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은 손도, 내가 가운데에 올라타길 바랐을 거다. 그래서 더 비껴선다. 딱 한 반 걸음. 내가 선택한 자리라는 표식을 남길 만큼만.
“지금.”
미리엘이 숨을 죽인 채 속삭였다.
나는 왼쪽 반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문틀 안쪽에서 걸쇠 하나가 풀렸다. 동시에 작업실 바닥 아래에서도 낮은 금속음이 따라 울렸다. 브론이 눈을 번쩍 뜨고 오른편 보강재를 노려보았다.
“젠장.”
그가 낮게 말했다.
“안쪽만 연 게 아냐.”
문틀 틈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벌어지며 작업실 안쪽 어둠 일부가 뒤로 물러났다. 그 뒤에서 더 두꺼운 보강 구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다른 규격의 판금이 세 겹은 겹쳐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아예 다른 시대 금속처럼 보이는 검푸른 띠가 비스듬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 띠 가장자리에는 가루에 눌려 반쯤 죽은 획 하나가 더 있었다. 곡선도 숫자도 아니었다. 이름을 적기 전에, 누가 받아야 하는지 확인할 때 쓰는 짧은 끝획이었다.
미리엘 숨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저건…”
그녀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계승 표식이라 부르던 그 마지막 획이에요.”
브론은 그 말뜻을 다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내 쪽을 보는 눈은 더 날카로워졌다.
“길을 숨긴 게 아니군.”
그가 낮게 말했다.
“처음부터 틀린 이름으로 읽히게 만들어 두고, 맞는 사람만 안쪽으로 들이겠다는 거야.”
위쪽에서 두 번째 충격이 내려오기 직전, 문틀 안쪽 어둠에서 더 차가운 바람이 한 번 밀려 나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단순한 아래 공간이 아니었다.
길보다 먼저 이름을 가려 받는 자리였다. 함부로 들어온 사람을 밀어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