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모순
반쯤 열린 문 앞 착지대는 이제 싸움터라기보다 급히 펼친 해부대 같았다.
위쪽 계단턱에서는 아직도 장대 끝이 돌을 긁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내려왔다. 한 번 긁을 때마다 가느다란 돌가루가 어둠 속에서 비처럼 흩어졌고, 조금 전 리에트가 꺾어 떨어뜨린 횃불 냄새가 천장 아래 눌어붙어 탔다. 아래로는 문틀 틈 사이에서 식은 향 냄새와 젖은 쇳내가 번갈아 올라왔다. 오래 닫혀 있던 장소 특유의 눅눅함 속에, 누군가 최근까지 손을 댄 금속의 맑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세라는 오른발을 낮은 턱에 걸친 채 방패를 비스듬히 세우고 있었다. 위에서 밀려오는 힘과 아래 문틀에서 튀어 오를 수 있는 반응을 한 번에 막으려면 저 각도밖에 없었다. 방패 윗면에는 돌가루와 탄 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고, 손잡이를 쥔 그녀 손등에는 핏줄이 굵게 솟아 있었다. 리에트는 한 칸 높은 계단에서 활줄을 반쯤 당긴 채 위 추적선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서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끊임없이 아래 문틀과 작업실 틈으로도 흘렀다. 미리엘은 문틀 다섯째 홈과 아홉째 홈 사이에 은실 구슬 셋을 다시 걸어 두고, 작은 필사판을 무릎 위에 펼친 채 지워진 밑문장을 더듬고 있었다. 브론은 작업실에서 끌어낸 낮은 판재를 받침 삼아 앉아, 못과 금속편을 길이와 두께 순서로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 로웬의 메모 조각과 수련원 배정 문건 사본, 방금 벗겨 낸 성도식 외피 조각을 바닥에 펴 두었다.
같은 문 하나를 두고 기록이 넷이나 나왔다.
왕국 분류표.
성도 표기.
현장 구조.
로웬의 메모.
문제는 넷 중 하나가 거짓이라는 데 있지 않았다.
더 질 나쁜 쪽이었다.
넷 모두가 반쯤만 진실이고, 그 반쪽들끼리 서로를 가리도록 맞물려 있다는 감각.
위쪽에서 돌 하나가 툭 굴러떨어졌다. 세라가 시선을 올린 채 짧게 말했다.
“길게 못 끈다.”
“알아.”
나는 문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더 빨리 맞춰야 해. 감으로 버티면 우리가 먼저 죽어.”
문 하나를 잘못 읽는 대가는 틀린 길로 들어서는 정도가 아니었다. 누가 우리를 여기까지 밀었는지,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누구 이름을 믿어야 하는지까지 전부 거꾸로 뒤집힐 수 있었다.
리에트가 활줄을 당긴 손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어디서부터.”
“이 문 이름부터.”
나는 성도식 외피 조각을 문건 옆에 내려놓았다. 멀리서 보면 정화문 표식처럼 보이는 곡선 세 줄.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선 간격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매끈하게 흘러야 할 부분이 억지로 눌린 흔적처럼 꺾여 있었고, 끝은 성도식 마감선이 아니라 사람 반응을 보려고 적는 축약 부호를 억지로 늘여 놓은 모양이었다.
미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식 성도 표기는 아니에요.”
그녀는 한 번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정화문처럼 읽히게 흉내 낸 거예요. 곡선 세 줄처럼 보여도, 실제론 사람 반응부터 보려는 쪽에서 쓰는 축약 부호를 억지로 늘여 놓은 거에 가까워요.”
세라 시선이 바로 그녀에게 꽂혔다.
“그럼 처음에 네가 정화문이라고 본 건.”
“그렇게 읽히도록 덮여 있었어요.”
미리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정식 현장 사제가 처음 보는 순간엔 그렇게 판단하도록요. 급한 상황이면 더 그래요. 이름을 먼저 읽고 기능은 나중에 맞추게 되니까.”
브론이 금속판 모서리를 손톱으로 퉁겼다. 얇은 소리 뒤로 늦고 무거운 울림이 따라왔다.
“겉간판.”
그가 말했다.
“보이는 얼굴은 하나인데, 안쪽 뼈대는 다른 물건이라는 뜻이지.”
나는 그 말을 바로 붙잡았다.
“성도식으로 보이게 덮었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가리는 쪽이야.”
미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정화하는 문이 아니에요. 누가 어디에 서는지, 어느 순서로 반응하는지 보는 선에 더 가까워요. 정화문이면 열두 홈이 이런 식으로 남을 이유가 없어요. 정화문은 통과시켜 씻어 내는 구조고, 이런 문은 통과 전에 자리를 고정하는 구조예요.”
브론이 기다렸다는 듯 못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저 열두 홈도 처음부터 이 모양이 아니야.”
그는 못의 찌그러진 머리를 등불 쪽으로 기울였다.
“광갱 보수용이면 길을 막거나 무게를 받치려고 박지, 힘을 비틀려고 박진 않는다. 그런데 여기 박힌 놈들은 전부 문이 열릴 때 하중이 어디로 미끄러질지 계산하고 들어갔어. 오른쪽으로 무게를 몰고, 다섯째와 아홉째 사이에서 한 번 더 걸리게 만들고, 가운데 선 놈을 틀린 자리로 유도하는 식으로.”
세라가 문틀 오른편을 흘겨보았다.
“일부러 잘못 서게 만들었다는 건가.”
“잘못 서는 놈을 기다린 거지.”
브론의 대답은 건조했다.
“문 여는 법을 모르는 놈은 가운데 선다. 안전해 보이니까. 근데 이 문은 가운데가 안전한 자리가 아냐.”
내 발바닥에 조금 전 돌의 감촉이 다시 살아났다.
중심에 서고 싶은 건 늘 상대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한가운데를 찾는다. 좁은 통로에서는 더 그렇다. 나를 이 길로 밀어 넣은 손도, 이 문을 덮은 손도, 내가 제일 그럴듯한 자리로 걸어 들어가길 바랐을 것이다.
로웬의 메모가 문득 떠올랐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그때는 좌표를 숨긴 줄 알았다.
지금 보니 좌표보다 먼저, 이름을 의심하라는 경고였는지도 모른다.
리에트가 낮게 끼어들었다.
“왕국 쪽 분류표.”
나는 수련원에서 베껴 나온 초급 광갱 분류 사본을 펼쳤다. 외곽 채굴 폐선. 소규모 붕락. 저위험 정리 가능. 임시 보수 대기.
브론이 종이를 보자마자 비웃었다.
“저걸 믿고 들어오면 다 죽지.”
세라가 바로 받았다.
“근거.”
이번엔 리에트가 활끝으로 아래 환기 틈과 문틀 위 장대 흔적을 차례로 가리켰다.
“초급 광갱 폐선이면 외곽 배수 틈이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어.”
그녀 목소리는 짧고 단정했다.
“폐광으로 접을 때는 사람부터 빼는 게 아니라 물길부터 죽인다. 그래야 길이 다시 살아나지 않거든. 그런데 여긴 반대야. 정면은 무너뜨렸는데 바람 드나드는 옆틈은 일부러 남겨 놨어. 앞길은 막아 놓고 옆길은 살려 둔 거지.”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들어왔고.”
“그리고 누군가 먼저도 들어왔어.”
리에트가 바로 이었다.
그녀는 계단 안쪽 눌린 돌가루와 작업실 벽 아래 끼인 회색 염분 흙을 턱짓했다.
“위에서 아래로만 무너진 자국이 아니야. 바깥에서 안으로 몸부터 밀어 넣은 흔적이 오래 눌렸다가 다시 덮였어. 광갱 정리 인부면 장비를 메고 오지 저렇게 기어들진 않아. 저건 가볍고 빠른 선점 동선이야.”
세라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그럼 분류표는 현장을 몰라서 틀린 게 아니군.”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라.”
나는 종이 위 문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다르게 읽히길 바라서 그렇게 적은 거겠지.”
짧은 침묵이 내렸다.
잘못 붙인 이름.
잘못 붙인 표식.
잘못 서게 만드는 중심.
처음엔 따로 놀던 거짓말 같았는데, 방향은 하나였다.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자기 눈으로 진짜 구조를 읽지 못하게 만드는 쪽.
미리엘이 은실 구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떨림은 약했지만 끊기지 않았다.
“성도 쪽도 같아요.”
그녀가 마침내 인정했다.
“정화문이나 보관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현장 사제는 그 이름부터 믿고 읽어요. 기능을 처음부터 다시 확인하지 않아요. 보고 양식이 그렇게 굳어 있으니까. 보고서에 이름을 먼저 적고, 반응 양상은 그 뒤에 덧붙이거든요.”
브론이 코웃음을 쳤다.
“보고용 간판이군.”
미리엘 입매가 굳었다. 그래도 이번엔 부정하지 않았다.
“정식 기록자 손은 아니에요. 정식 기록자면 이런 어중간한 모양을 남기지 않아요. 차라리 완전히 지워요. 그런데 이건… 흉내는 낼 줄 아는 손이 급하게 덮은 흔적이에요. 현장에 있던 누군가가 최소한의 서식만 맞춘 채 올려놓은 표기요.”
브론이 작업실 바닥에서 깨진 금속판 하나를 밀어 주었다.
“그 손이 이것도 만졌는지는 모르겠군.”
판 한 면에는 성도식 곡선 흉내가 남아 있었고, 뒷면에는 군용 보강재 계열에서 쓰는 사선 홈이 지나가고 있었다. 세라는 그것을 받지 않고 눈으로만 훑었다.
“기사단 보급고에서 비슷한 홈을 본 적 있어.”
그녀가 말했다.
“훈련용 말고 외곽 봉쇄용 장비에서.”
브론 눈빛이 가늘어졌다.
“확실해?”
“완전히 같다고는 못 해.”
세라는 끝까지 단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 받는 방향을 비틀어 고정할 때 쓰는 방식은 비슷해. 보기 좋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들키지 않게 오래 버티게 만드는 쪽이지.”
리에트가 차갑게 정리했다.
“그럼 성도가 간판을 흉내 내고, 왕국이 구조를 분류하고, 다른 누군가가 현장을 먼저 만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셋이 각자 다른 몫으로 같은 길을 덮었을 수도 있지.”
내 말에 세라와 미리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세라는 기사단 쪽으로 칼끝이 얼마나 기우는지 재는 눈이었고, 미리엘은 성도 이름이 얼마나 깊게 걸리는지 재는 얼굴이었다. 둘 다 당장 부정하고 싶어 했지만, 바닥에 놓인 물증이 그 입을 묶고 있었다.
브론은 둘 반응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싫으면 아니라고 해. 근데 금속은 거짓말을 잘 못 하거든.”
그는 금속편 세 조각을 나란히 놓았다.
“얇은 겉판은 눈속임용. 두꺼운 받침은 군용 보강 계열. 그리고 이 제일 안쪽 검푸른 띠는 둘보다 훨씬 오래된 본체다. 하나로 만든 구조가 아니야. 만든 손, 고친 손, 표정만 바꿔 붙인 손이 다르다.”
“그 오래된 본체는 뭔데.”
브론은 어깨를 한번 굴렸다.
“아직은 몰라. 다만 광갱 장비도 아니고 성도 보강재도 아니다. 열 먹은 결이 너무 깊어. 원래부터 사람을 가르는 쪽에 가까워.”
미리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판정선.”
“자격까지 재는지는 모르겠어.”
세라가 말했다.
“그래도 적어도 누가 어디에 서는지는 보더군.”
나는 바닥에 둔 로웬의 메모 조각을 펼쳤다. 번진 글씨 사이로 두 문장이 또렷했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브론이 문장을 읽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열세 번째 줄?”
나는 문틀 오른편 바깥 잔선을 보았다.
“처음엔 지워진 흔적 같았어.”
세라와 미리엘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열두 홈 바깥에 저 비스듬한 잔선이 계속 걸렸지. 계산에서 밀려난 흔적처럼 남아 있었으니까. 일부러 중심에서 밀어낸 것처럼.”
미리엘이 조심스럽게 받았다.
“정식 표기면 저 위치에 저런 선을 남기지 않아요. 특히 사람 반응 보는 쪽 표식이면 더요. 서로 엉키지 않게 딱 떼어 놓거든요.”
“그럼 지우다가 남긴 거군.”
리에트가 말했다.
“혹은 남기면 안 되는 걸 끝내 못 지운 채 덮었거나.”
나는 메모를 손끝으로 눌렀다.
“로웬은 열세 번째 줄을 읽으라고 남겼어. 처음엔 좌표나 숨은 문구를 찾으라는 뜻으로 봤는데, 지금은 달라 보여.”
세라가 물었다.
“어떻게.”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는 건, 도시 바깥 던전이 무섭다는 뜻이 아니라 도시 안에서 붙여 놓은 이름들이 더 위험하다는 뜻일 수 있어.”
광갱.
정화문.
보관문.
초급 폐선.
“우리가 여기 오기 전부터 틀린 말을 쥐고 있었다는 거지.”
미리엘이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길의 좌표보다 길을 가리는 이름을 먼저 의심하라는 뜻.”
“값도 있는 해석이군.”
브론이 중얼거렸다.
세라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모든 걸 값으로 읽지 마.”
“왜.”
브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이 길을 감춘 이유가 공익이나 신앙 같나? 아니면 기사단 명예를 지키려는 친절?”
세라 손등 힘줄이 불거졌다. 방패 손잡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그녀가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지금 필요한 긴장이 서로 향한 칼끝으로 꺾일 게 뻔했다.
위쪽에서도 마침 장대가 다시 돌을 긁었다.
그 마찰음이 등을 세웠다.
나는 종이들을 거두지 않고 손바닥으로 눌렀다.
“둘 다 멈춰.”
착지대가 조용해졌다.
“지금 필요한 건 누가 더 깨끗한지 따지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씩 짚었다.
“미리엘은 간판이 어떻게 위장됐는지 읽을 수 있다. 브론은 뭐가 덧댄 힘줄이고 뭐가 오래된 뼈인지 판독할 수 있어. 리에트는 바깥에서 어떤 길이 살아 있는지 본다. 세라는 위 추적선이 얼마나 빨리 내려오는지, 우리가 몇 번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안다.”
마지막으로 내 앞 문건을 가리켰다.
“나는 로웬 메모와 수련원 문건, 배정 인장, 그리고 지금 반응하는 위치선을 이어 읽을 수 있다. 따로 쥐면 전부 반쪽이야. 같이 놓아야 다음 문장 하나가 나온다.”
리에트가 처음으로 활끝을 조금 내렸다.
“신뢰하자는 말은 아니겠지.”
“아니.”
나는 바로 답했다.
“서로를 믿어서 같이 가는 게 아니야. 서로가 가진 반쪽이 없으면 아래로 못 내려가서 같이 가는 거지.”
브론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마음에 드는 계약 문장이네.”
세라도 이번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그럼 계약답게 보여.”
그 말과 동시에 위쪽에서 돌무더기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장대가 더 깊이 밀려 내려오는 소리. 세라가 방패 각을 바꾸는 찰나, 문틀 오른편 금속편 하나가 미세하게 들렸다.
브론이 즉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손대지 마.”
그는 무릎으로 판재를 밀치고 일어나 문틀 쪽으로 반 걸음 다가왔다. 리에트 활끝이 다시 그의 옆목으로 향했다.
“더 오면 쏜다.”
브론이 혀를 찼다.
“쏘면 다 같이 깔린다. 오른쪽 힘줄이 풀렸어.”
세라가 낮게 물었다.
“어떻게 확인하지.”
브론이 나를 봤다. 아까보다 계산이 빠른 눈이었다.
“방패 아래 자리, 잠깐 내게 줘. 내가 쐐기 다시 잡아야 해.”
세라가 대꾸하기도 전에 위에서 또 한 번 충격이 내려왔다. 그녀가 몸으로 받아 내자 착지대 전체가 울렸다. 리에트 활이 흔들렸고, 미리엘의 은실 구슬이 길게 떨었다.
지금 저 자리는 세라가 비우면 무너진다.
그렇다고 브론을 못 들이면 오른쪽 보강이 먼저 죽는다.
나는 먼저 움직였다.
세라 방패 가장자리를 손으로 밀어 반 치만 틀고, 내 몸을 그 빈틈 사이에 비스듬히 끼워 넣었다. 방패 무게가 어깨와 팔뚝으로 그대로 넘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세라가 얼마나 많은 충격을 혼자 떠받치고 있었는지 그제야 뼈로 알았다.
“세라, 위만 막아.”
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래쪽은 내가 받쳐.”
세라가 짧게 나를 봤다. 놀람도, 반대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말 대신 방패 손잡이를 살짝 놓아 무게 일부를 내 쪽으로 넘겼다.
그 한순간이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다.
나는 다른 손을 브론 쪽으로 뻗었다.
“대신 넌 내 시야 안에서만 움직여. 쐐기 박고 끝나면 바로 물러나.”
브론 시선이 내 손과 내 어깨 사이를 한 번 오갔다. 그는 피식 웃지도 않았다.
“좋아. 그 정도면 값은 맞네.”
그가 내 손목을 한 번 짚고 방패 아래로 몸을 들이밀었다. 짧고 딱딱한 손이었다. 친근함이 아니라 작업 위치를 재는 손.
그래도 그 접촉 하나로, 적어도 지금 이 한순간엔 서로가 등을 찌르지 않는다는 증표는 됐다.
브론은 곧장 오른편 아래 틈에 무릎을 박고 앉았다. 허리춤에서 납작한 쐐기 둘을 꺼내더니, 하나는 문틀 밑으로 밀어 넣고 다른 하나는 작업실 쪽 갈라진 판재 아래에 끼웠다. 망치 대신 끌 손잡이로 두 번만 눌렀는데도 쐐기가 자리를 잡는 소리가 단단하게 울렸다.
“영원히 버티진 않아.”
그가 중얼거렸다.
“대신 첫 번은 돌려 세운다.”
미리엘이 떨리는 은실을 다시 잡았다.
“다섯째와 아홉째 사이 울림이 더 길어졌어요.”
브론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받았다.
“안에 한 겹 더 있다는 뜻이지.”
나는 방패 무게를 어깨로 버티며 문틀을 다시 보았다. 처음엔 한 덩어리 같던 덧댐이 층으로 읽혔다.
가장 바깥에는 성도식으로 읽히게 붙인 얇은 겉판.
그 아래에는 힘을 오른편으로 꺾는 군용 접합 보강층.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검푸른 띠처럼 잠긴 오래된 본체.
겉간판.
힘줄.
오래된 뼈.
브론이 숨을 짧게 내쉬었다.
“처음 만든 손 따로, 나중에 고친 손 따로, 마지막에 표정만 바꿔 붙인 손이 또 있어.”
“그러면 결론은 하나네.”
리에트가 말했다.
“여긴 처음부터 광갱 폐선이 아니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오래된 판정 구조를 발견했고, 누군가는 그걸 자기 방식으로 보강했고, 누군가는 다시 겉이름을 바꿔 붙였어. 그리고 우리를 여기로 보낸 쪽은 그 전부를 몰랐더라도 적어도 ‘안심하고 잘못 읽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
세라가 방패 너머로 낮게 물었다.
“아래엔 뭐가 있지.”
브론이 먼저 답했다.
“문을 만든 손이 숨긴 것.”
리에트는 다른 말을 얹었다.
“문을 덮은 손이 다시 확인하러 올 만큼 중요한 것.”
미리엘은 은실을 놓지 않은 채 속삭였다.
“그리고 성도 기록에서 이름부터 바꿔야 했던 것.”
세 사람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이 같은 장소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위쪽에서 또 고함이 터졌다. 횃불 불꽃이 틈 사이로 번쩍이며 내려왔다. 리에트가 지체 없이 화살을 날려 불씨를 꺾었다. 세라는 방패로 장대 끝을 받아 밀어냈고, 브론은 쐐기 머리를 손끝으로 눌러 흔들림을 확인했다. 미리엘은 숨을 끊듯 참고 있다가 다시 문틀 밑선을 더듬었다.
나는 그 모두를 한꺼번에 보았다.
세라는 아직 나를 감시 대상처럼 볼 때가 있다.
리에트는 여전히 우리 중 누구 하나가 틀린 판단을 내리면 먼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미리엘은 성도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브론은 살아남으면 이 현장 전체를 자기 값표에 묶어 두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의 반쪽은 정확했다.
부정하고 싶어도 정확했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로웬이 내가 보길 바랐던 그림일지도 몰랐다.
한 사람이 전부를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다들 자기 칸의 진실만 쥔 채 전체를 가리는 구조.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는 말은 사람 수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손이 많아질수록 책임이 잘게 쪼개진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책임이 쪼개지면 거짓말은 더 오래 산다.
그때였다.
문틀 안쪽, 조금 전 더 벌어진 검은 틈 깊은 곳에서 낮은 금속 울림이 한 번 길게 번졌다.
바람이 먼저 나왔다.
차갑기만 한 바람이 아니었다. 오래 닫힌 창고 냄새도, 광갱 밑바닥 눅눅함도 아니었다. 잘 닦인 칼날을 물속에 오래 담갔다가 꺼낸 것 같은, 맑고 서늘한 쇳내가 숨결처럼 밀려 나왔다.
미리엘이 반사적으로 은실 구슬을 움켜쥐었다. 브론은 쐐기에 얹은 손을 멈췄고, 리에트 활끝은 위가 아니라 문 안쪽으로 돌아갔다. 세라는 방패를 틈 쪽으로 비스듬히 틀며 내 앞을 더 좁게 막았다.
그리고 열세 번째 잔선이, 등불을 더 받지도 않았는데 한순간 푸르게 살아났다.
내 주머니 속 균열난 성철 부적도 아주 미세하게 떨었다.
방향을 짚어 주는 정도의 공명뿐이었다.
핵심은 그 반응이 아니라, 잔선과 문틀 구조와 로웬의 메모가 정확히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잔선이… 살아났어요.”
브론이 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덧간판 반응이 아니야. 안쪽 본체가 직접 울고 있어.”
세라가 낮게 물었다.
“닫히는 거냐, 열리는 거냐.”
“둘 다 아닐 수도 있어.”
내가 답했다.
“확인하는 걸지도 몰라.”
말을 뱉고 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이라는 건 보통 지나가기 위해 만든다.
하지만 판정선은 다르다.
저쪽에서 원하는 건 통과가 아니라 식별일 수 있다.
누가 왔는지, 누가 서 있는지, 누가 중심을 피하고 열세 번째 잔선을 읽었는지.
문 안쪽 어둠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목소리라기엔 너무 매끈했고, 장치 소리라기엔 너무 또렷했다. 오래전에 정해 둔 호출문이 아직도 자기 자리를 잊지 않은 것처럼, 낡고 고른 발음이 착지대 공기를 정확히 가르며 흘러나왔다.
“……열세 번째 계승 표식의 보관자.”
심장이 먼저 오그라들었다.
지금 여기 있는 누구도 내게 그런 이름을 붙인 적이 없다.
아니, 그런 이름이 아직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계승자라는 직업명도, 훈련원에선 조롱 반 의문 반으로 불리던 이름일 뿐이었다. 로웬은 끝까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성도는 확인만 하려 들었고, 기사단은 인계 대상처럼 굴었다. 나는 그 모든 틈 사이에서 겨우 내 몫의 살아남을 자리만 찾고 있었다.
그런데 저 목소리는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자리가 비어 있었고, 내가 그 자리에 늦게 도착했을 뿐이라는 듯이.
세라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뭐라고 했지?”
그녀 목소리는 낮았지만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미리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 호칭… 성도 기록엔…”
그녀는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신 입술만 굳게 다물었다. 말해도 되는 이름과 말하면 안 되는 이름의 경계에 걸린 얼굴이었다.
브론이 내 쪽을 봤다. 조금 전까지 금속값과 하중만 재던 눈에서 처음으로 계산이 한 박자 늦었다.
“너, 뭘 들고 온 거냐.”
리에트는 활줄을 당긴 채도 나를 보지 않았다. 문 안쪽 어둠을 겨누고 있었지만, 그녀 등은 전보다 더 굳어 있었다.
“질문 순서 틀렸어.”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저 안이 왜 저 이름을 아는지부터 따져.”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그보다 먼저 다른 질문이 일어났다.
왜 하필 보관자인가.
계승자가 아니라.
그 계승 표식의 주인도, 후계도, 반응자도 아니라.
보관자.
그 말은 힘을 가진 사람보다, 무언가를 맡아 들고 있는 사람에게 붙는다.
지키는 사람. 전달하는 사람. 혹은 아직 열지 못한 사람.
로웬의 메모가 다시 떠올랐다.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혹시 그는 내가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길 바란 게 아니라, 내가 이미 그 일부를 들고 있다는 걸 알았던 걸까.
내가 모르고 들고 다니는 어떤 이름, 어떤 선, 어떤 자격.
위쪽 계단에서 다시 고함이 터졌다. 장대 끝이 한번 더 돌을 긁고 내려왔다.
그런데도 그 소리는 먼 데서 나는 것처럼 흐릿했다.
내 귀에는 방금 들은 호칭만 남았다.
열세 번째 계승 표식의 보관자.
열세 번째 잔선.
가운데가 아니라 비껴난 자리.
지워진 이름 표식이 있던 벽화.
로웬의 메모.
나를 확보하려 들던 기사단 문서.
내 이름 앞에서만 별도 확인 태도를 보이던 성도 막사.
서로 따로 떠 있던 것들이 한순간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 방향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 끔찍할 만큼 분명했다.
그리고 문 안쪽에서,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하고 더 낮은 두 번째 음성이 이어졌다.
“보관자 확인. 열세 번째 왕좌 기록을 다시 올릴 준비를 한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