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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모순

반쯤 열린 문 앞 착지대는 싸움터와 작업대가 겹친 꼴이었다.

정면에는 검은 틈을 벌린 문틀이 있고, 그 안쪽 낮은 작업실에서는 식은 쇳내와 오래 갇힌 향 냄새가 함께 올라왔다. 왼쪽 벽 밑으로는 브론이 끌어낸 판재와 못들이 늘어섰고, 오른쪽 아래에는 조금 전 우리가 억지로 물린 쐐기가 돌틈을 버티고 있었다. 위쪽 계단에서는 아직도 장대 끝이 돌을 긁었다. 한 번 긁을 때마다 돌가루가 세라의 방패 위로 떨어졌고, 횃불 연기는 천장 낮은 곳에 눌려 빠져나가지 못했다.

세라는 오른발을 낮은 턱에 걸고 방패를 비스듬히 세웠다. 윗길에서 내려오는 장대와 정면 문틀에서 튀어 오를 반응을 한 번에 막으려면 그 자세밖에 없었다. 리에트는 세라보다 한 칸 높은 계단에 서서 활끝을 위 추적자와 문 안쪽 어둠 사이로 번갈아 옮겼다. 미리엘은 피가 굳은 손가락으로 문틀 다섯째 홈과 아홉째 홈 사이를 붙잡고, 은실 구슬 셋을 홈 아래에 걸어 두었다. 브론은 작업실 문턱에 무릎을 대고 앉아 못, 얇은 겉판, 검푸른 금속 조각을 길이순으로 늘어놓았다.

나는 그들 가운데 쪼그려 앉았다.

무릎 앞에는 수련원에서 베껴 온 초급 광갱 분류 사본이 있었다. 그 옆에는 로웬의 메모 조각, 성도식 외피 조각, 그리고 세라가 방패 안쪽 가죽끈 아래 숨겨 두었던 기사단 임시 봉쇄 문구가 놓였다. 종이는 전부 젖고 그을렸고, 모서리가 바닥 먼지에 붙었다. 그래도 문장들은 살아 있었다.

서로 다른 손이 같은 장소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위쪽에서 돌멩이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리에트가 고개도 들지 않고 화살촉으로 그 돌을 밀어 냈다. 돌은 착지대 가장자리를 넘어 검은 틈 아래로 사라졌다.

세라가 짧게 말했다.

“오래 못 버틴다.”

나는 종이들이 바람에 말리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눌렀다.

“알아. 그래서 지금 맞춰야 해.”

브론이 코로 웃었다.

“문 앞에서 공부라. 오래 살 생각은 있나?”

“공부가 아니야.”

나는 문틀을 보았다. 열두 홈은 아직도 차례대로 숨을 쉬듯 희미하게 떨었다. 그 바깥쪽에 지워진 열세 번째 잔선은 불이 붙지 않은 칼자국처럼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누가 우리를 가운데로 세우려 했는지 보는 거지.”

그 말에 브론의 손이 멈췄다. 세라는 방패 뒤에서 눈만 움직였고, 미리엘은 홈에 붙인 손끝 힘을 조금 줄였다.

나는 먼저 왕국 분류표를 폈다.

외곽 채굴 폐선. 소규모 붕락. 저위험 정리 가능. 임시 보수 대기.

글자는 얌전했다. 너무 얌전해서, 이 계단 위에서 장대가 내려오고 문틀이 발목을 붙잡던 방금 전 일이 다른 장소의 소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리에트가 종이를 흘겨보고 낮게 말했다.

“폐선이면 배수 틈부터 죽인다.”

그녀는 계단 아래쪽 벽 밑을 화살촉으로 가리켰다. 먼지 아래 얇은 바람길이 살아 있었다. 바람은 문 안쪽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왼쪽 작업실 뒤편, 판재와 돌이 겹친 곳에서도 미세하게 흘렀다.

“사람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물길과 바람길부터 막아. 그런데 여긴 정면만 무너뜨렸어. 옆틈은 숨겨 두고 살려 놨지. 들어오지 말라는 폐광이 아니라, 정해진 사람만 옆으로 들어오게 둔 길이야.”

브론이 손톱으로 금속편을 퉁겼다. 얇은 소리 뒤에 늦고 깊은 울림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내가 들어왔고.”

세라의 시선이 그에게 날아갔다.

“자랑할 일은 아니군.”

“자랑은 살아 나간 뒤에 하지. 지금은 사실만 말하는 거야.”

브론은 금속 조각 하나를 밀어 내게 보였다.

“이 표면을 봐라. 겉은 성도식 곡선을 흉내 냈는데, 뒷면 사선 홈은 군용 보강재 쪽에 가깝다. 그리고 그 안쪽 검푸른 띠는 둘보다 훨씬 오래됐어. 광갱 보수용 금속도 아니고, 성도 보관함에 쓰는 은도 아니다. 열 먹은 결이 너무 깊다. 사람 지나가는 문에 붙일 물건이 아니야. 사람을 세워 놓고 따지는 물건에 가깝지.”

미리엘의 어깨가 굳었다.

성도식 곡선이라는 말에 반응한 게 아니었다. 사람을 세워 놓고 따진다는 말이 그녀를 찔렀다.

“정화문은 아니에요.”

그녀는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바로 전까지는 인정하지 않으려 버티던 얼굴이었다. 지금은 부정할 힘을 다른 데 쓰고 있었다. 손끝 떨림을 죽이고, 은실 구슬이 끊어지지 않게 눌러 잡는 데.

“정식 성도 표기면 곡선 셋이 이렇게 꺾이지 않아요. 정화문으로 읽히게 겉만 맞춘 거예요. 급한 현장 사제는 이름을 먼저 보고 기능을 나중에 맞춰요. 보고 양식이 그렇게 굳어 있거든요.”

세라가 낮게 물었다.

“처음에 네가 그렇게 읽은 이유도 그거냐.”

미리엘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네.”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착지대 공기를 바꿨다. 성도 확인반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던 미리엘이 처음으로 자기 쪽 실수를 밖에 놓았다. 세라는 그걸 공격하지 않았다. 방패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을 뿐이다.

위쪽에서 장대가 다시 내려왔다. 세라의 방패 윗면이 둔하게 울렸고, 충격이 착지대 바닥으로 흘러 들어왔다. 미리엘의 은실 구슬 셋이 동시에 떨었다. 브론이 바로 오른쪽 쐐기 머리를 눌렀다.

“말하면서 손 놓지 마, 사제 아가씨.”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미리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선명했다.

브론이 눈썹을 올렸다.

“좋아. 미리엘. 손 놓지 마.”

이름을 바꾸자 그녀 손끝의 떨림이 아주 조금 줄었다. 우스운 일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금 이 문은 이름 하나에도 사람 자세가 바뀌는 걸 보고 있었다. 호칭은 예의가 아니라 하중이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 문은 기능보다 이름을 먼저 믿게 만들었어.”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광갱이라고 부르면 수련생은 위험을 낮게 보고, 정화문이라고 부르면 성도 사람은 기도문부터 맞춰. 군용 보강재 흔적을 보면 기사단은 봉쇄 절차라고 이해하고. 전부 자기 쪽 말로 먼저 읽게 만든 거야.”

리에트가 활끝을 위로 겨눈 채 말했다.

“그리고 틀린 자리로 선다.”

“그래.”

나는 문틀 가운데를 보았다. 내가 조금 전 본능처럼 발을 올렸던 자리였다. 제일 안전해 보였고, 제일 속기 쉬운 자리였다.

“가운데.”

브론이 짧게 웃었다.

“문 모르는 놈은 가운데 선다. 잘 닦인 길 가운데, 잘 그은 줄 가운데, 제일 빛나는 홈 가운데. 그런데 여기서는 가운데가 덫이다. 가운데를 밟는 순간 왼쪽 쐐기가 늦게 깨고, 오른쪽 힘이 밀리고, 문 여는 놈 발목부터 잡힌다.”

내 발목에 아직도 둔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 통증은 설명보다 정확했다.

세라가 방패를 조금 낮췄다. 위에서 내려온 갈고리 끝이 방패 윗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리에트가 바로 화살을 놓았다. 화살은 사람을 맞히지 않고, 장대를 당기는 밧줄 옆 얇은 고리를 끊었다. 끊어진 고리가 튀어 와 브론의 못 더미 옆에 떨어졌다.

브론은 그 고리를 발끝으로 눌러 세웠다.

“이것도 급히 덧댄 물건이군. 추적자들도 원래 구조를 다 아는 건 아니야.”

“그건 어떻게 알아.”

세라가 물었다.

“제대로 아는 놈이면 장대를 저 각도로 안 밀지. 지금은 위쪽에서 아래를 두드려 깨우는 중이다. 문 안쪽 반응을 이해해서 여는 게 아니라, 소란을 키워서 우리를 먼저 죽이려는 쪽이지.”

그 말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우리를 쫓는 자들이 전부를 모른다는 건, 우리에게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전부를 모르는 손들이 이미 이만큼 깊이 들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라가 방패 뒤에서 기사단 봉쇄 문구를 턱짓했다.

“그럼 이것도 봐.”

나는 그녀가 내민 얇은 가죽 조각을 펼쳤다. 방패 안쪽 끈 아래 감춰 뒀던 짧은 문구였다. 잉크가 많이 번졌지만 핵심 문장은 남아 있었다.

외곽 폐선 접근 시 우선 확보 대상 분리. 분류 전투원 감시 지속. 성도 확인반 접촉 시 현장 판단 보류.

미리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도 확인반 접촉을 알고 있었어요?”

세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위쪽을 막느라 숨을 한 번 끊었다. 방패가 밀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방패 아래쪽을 손으로 받쳤다. 충격이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제야 세라가 말했다.

“나는 임무 전체를 받은 게 아니야. 감시 대상이 성도 쪽과 닿으면, 보고보다 먼저 현장 판단을 보류하라는 조항만 받았어.”

“보류라니요.”

“죽이지도 말고, 넘기지도 말고, 혼자 판단하지도 말라는 뜻이지.”

세라의 시선이 내게 아주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처음부터 네 선택을 기다리라는 말은 아니었다. 네가 선택하기 전에 어느 쪽 손이 먼저 닿는지 보라는 말에 가까웠어.”

그 말은 차갑게 내려앉았다.

나는 감시받고 있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문구는 감시보다 더 불쾌했다. 나를 사람으로 보는 문장이 아니었다. 다른 세력끼리 서로 먼저 손대지 못하게 세워 둔 물건처럼 다루는 문장이었다.

리에트가 낮게 숨을 뱉었다.

“그래서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는 거군.”

로웬의 메모 조각이 내 손 아래에서 눌렸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처음엔 도시 안에 적이 더 많다는 뜻인 줄 알았다. 이제는 달랐다. 도시 안에는 이름이 많았다. 수련원 문건, 기사단 조항, 성도 표기, 광갱 분류, 보급 장부, 봉쇄 문구. 이름이 많을수록 사람은 더 쉽게 다른 칸으로 밀렸다.

그리고 각자 자기 칸의 말만 믿으면, 전체를 가린 손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미리엘이 성도식 외피 조각을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손가락이 떨렸지만 놓치지 않았다.

“이 표기는 정식 기록자 손이 아니에요. 누군가 성도 양식을 훔쳐 썼어요. 완전히 아는 사람도 아니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에요. 현장 보고서 첫 줄만 따라 쓸 정도는 아는 손.”

브론이 바로 받았다.

“군용 보강재도 그래. 왕국 공방에서 나온 물건은 맞아 보이지만, 정식 납품품은 아니다. 수량 관리 새김이 없어. 창고에서 빼돌렸거나, 폐품으로 처리한 뒤 다시 붙였거나.”

리에트는 바닥 먼지를 화살촉으로 긁었다.

“바깥 길도 마찬가지야. 선발대가 지나간 흔적이 있는데 공식 원정대는 아니야. 짐을 줄인 발자국이고, 오래 머문 자리도 없어. 먼저 들어와 확인하고, 흔적을 덮고 빠진 쪽이지.”

세라가 짧게 정리했다.

“성도 이름을 흉내 낸 손, 왕국 물자를 빼돌린 손, 바깥 길을 먼저 밟은 손.”

“셋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내가 말했다.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장소를 자기 목적대로 덮은 걸 수도 있어.”

브론이 어깨를 굴렸다.

“보통 후자가 더 비싸다.”

세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값 얘기 그만해.”

“값이란 말이 싫으면 대가라고 해. 여러 손이 붙은 장소는 대가가 커. 누군가 죽었고, 누군가 입을 닫았고, 누군가 이름을 바꿔 팔았다는 뜻이니까.”

이번엔 세라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문 안쪽에서 아주 낮은 울림이 올라왔다. 우리 말에 반응한 건지, 위쪽 충격을 받아 깨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실 구슬 셋이 동시에 오른쪽으로 기울었고, 열두 홈 가운데 다섯째와 아홉째가 한 박자 늦게 푸른빛을 삼켰다.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다섯째와 아홉째 사이가 다시 길어져요.”

브론은 쐐기 머리에 귀를 가까이 댔다.

“안쪽이 듣고 있어.”

리에트가 즉시 물었다.

“사람 말을?”

“말이 아니라 하중. 떨림. 위치. 누가 어디에 서는지.”

브론은 시선을 올려 나를 봤다.

“그리고 네놈이 가운데를 피했는지.”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왔다.

세라의 시선은 감시자 눈이었다가, 곧 방패 뒤 동료의 눈으로 바뀌었다. 리에트는 끝까지 나를 겨누지 않았지만, 활을 문 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미리엘은 무언가 말하려다 입술을 다물었다. 브론은 여전히 값을 재는 얼굴이었지만, 이번엔 금속만 보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놓인 종이와 금속, 그리고 각자의 발 위치를 한꺼번에 보았다.

내가 여기서 할 일은 누군가를 믿는다고 선언하는 게 아니었다. 믿음은 아직 너무 비쌌고, 우리 중 누구도 그 값을 치를 준비가 안 됐다.

대신 서로의 반쪽을 묶어야 했다.

“규칙을 정하자.”

내가 말했다.

위쪽에서 다시 장대가 내려왔다. 세라가 몸으로 받아 냈고, 나는 방패 아래를 한 손으로 받쳤다. 손목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갈 때, 아무도 혼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미리엘이 성도식으로 읽으면 브론이 재료를 보고, 브론이 구조를 말하면 리에트가 길 흔적을 본다. 세라는 위협과 사람 배치를 본다. 나는 로웬 메모와 수련원 문건을 대조한다.”

리에트가 물었다.

“틀리면?”

“틀렸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우선권을 가진다.”

브론이 씩 웃었다.

“좋은 계약이군. 말만 빠른 놈이 이기는 계약은 아니네.”

“그리고 물건은 나중이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네가 먼저 고르는 두 장은 약속했다. 하지만 아래 문이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떼지 않는다. 떼야 할 때는 미리엘이 표기 반응을 보고, 세라가 위를 막고, 리에트가 나가는 길을 잡은 뒤에 떼.”

브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명령이 많아졌는데.”

“네가 혼자 금속을 뜯다 죽으면 네 몫도 없어.”

리에트가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죽어도 네 몫은 없어.”

세라가 방패를 밀어 올리며 말했다.

“살아서 나가면 따져. 지금은 하라는 대로 해.”

미리엘은 아무 말 없이 은실 구슬 하나를 내 쪽으로 밀었다. 성도 확인반이 쓰던 물건이었다. 그녀가 그걸 내게 맡긴 건 아니었다. 내 앞 종이 옆에 놓아, 자기 쪽 읽기도 다른 물증과 함께 놓겠다는 표시였다.

그 작은 행동이 말보다 컸다.

브론도 투덜거리며 검푸른 금속편 하나를 못 더미에서 빼 내 종이 옆에 놓았다.

“흠집 내지 마라. 나중에 값 떨어진다.”

리에트는 화살 하나를 바닥에 눕혔다. 깃 끝에는 바깥 배수 틈에서 묻은 회색 흙이 말라 있었다.

“바깥 길 증거.”

마지막으로 세라가 기사단 봉쇄 조각을 내 손바닥 앞까지 밀었다. 그녀 손가락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내게 죄책감을 보이려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필요한 것을 내놓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착지대 한가운데에 처음으로 같은 장면이 생겼다.

왕국 종이.

성도 은실.

브론의 금속.

리에트의 흙 묻은 화살.

세라의 봉쇄 문구.

로웬의 메모.

따로 보면 서로를 찌르는 물건들이었다. 같이 놓으니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

이 길은 버려진 광갱이 아니었다.

누군가 오래된 판정 구조를 발견했다.

누군가는 그 구조를 왕국 물자로 버티게 했고, 누군가는 성도 이름처럼 보이게 덮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수련원 문건에 낮은 위험 등급을 적어, 나 같은 사람을 제 발로 가운데로 걷게 만들었다.

내가 더 무서운 건 그 다음이었다.

그 모든 손이 나를 정확히 알고 움직였는지, 아니면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빈칸을 기다렸는지 아직 모른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기분 좋은 답은 아니었다.

문 안쪽에서 두 번째 울림이 났다.

이번엔 바람도 함께 밀려 나왔다. 오래된 창고 냄새가 아니었다. 물속에 담가 두었던 칼날을 막 꺼냈을 때 나는 맑은 쇳내가 숨처럼 흘렀다. 횃불 연기가 그 바람을 맞고 옆으로 눕더니, 문틀 오른쪽 바깥 잔선 위에 얇은 빛이 고였다.

지워진 열세 번째 잔선이 푸르게 살아났다.

처음엔 등불 반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빛은 바깥에서 닿지 않는 곳부터 피어났다. 문틀 안쪽 깊은 곳, 검푸른 본체의 가장 얇은 흠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번졌다. 열두 홈은 일제히 낮아졌고, 열세 번째 잔선만 비껴난 자리에서 또렷하게 선을 세웠다.

미리엘이 은실 구슬을 꽉 쥐었다.

“저건 덧댄 표식 반응이 아니에요.”

브론이 목 안쪽으로 욕을 삼켰다.

“겉판도 아니고 보강재도 아니야. 안쪽 본체가 직접 켜졌어.”

세라가 방패를 내 앞쪽으로 더 틀었다.

“닫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주머니 속 균열난 성철 부적도 아주 약하게 떨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답이 아니었다. 작은 바늘처럼 방향만 찔러 보였다. 핵심은 부적이 아니라, 문틀의 잔선과 로웬의 메모와 내가 피했던 가운데 자리가 한꺼번에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를 들여보내는 게 아니야.”

입 안이 말랐다.

“누가 왔는지 확인하는 거야.”

말이 끝나자 문 안쪽 어둠에서 목소리가 났다.

사람 목소리라기엔 너무 고르고, 장치 소리라기엔 너무 또렷했다. 오래전 정해 둔 문장이 긴 시간 동안 닫힌 곳에서 제 발음만 잊지 않은 듯했다.

“……열세 번째 계승 표식의 보관자.”

착지대의 모든 소리가 한 박자 끊겼다.

위쪽 추적자들의 장대 소리도, 세라 방패에 떨어지는 돌가루 소리도, 미리엘의 은실 떨림도 한순간 멀어졌다. 내 귀에는 그 호칭만 남았다.

보관자.

계승자도, 주인도, 반응자도 아니었다.

보관자.

내가 가진 게 무엇인지 나보다 먼저 안다는 말이었다. 내가 원하는지 아닌지는 묻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세라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나를 밀어내지 않고, 문과 내 사이를 반 치 좁혔다. 감시하던 사람이 아니라 막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다시 말해.”

세라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

문은 그녀의 요구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리엘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그 호칭은…”

그녀는 말을 삼켰다. 성도 안에서 배운 금지된 항목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리에트가 활줄을 더 당겼다. 겨냥은 문 안쪽이었다.

“아는 척하는 장치일 수도 있어.”

“그럼 더 위험하지.”

브론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웃음기가 없었다.

“장치가 속임수를 쓰려면 우리 중 뭘 건드려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

나는 로웬의 메모를 보았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혹시 로웬은 내가 숨겨진 장소를 찾길 바란 게 아니었을까.

내가 이미 들고 있는 무언가를 알아차리길 바랐던 걸까.

이름도 모른 채 들고 다닌 표식. 누군가 문건에 확보 대상으로 적어 두고, 성도는 확인하려 들고, 기사단은 보류하라 적은 빈칸. 내가 가운데를 밟지 않고 비껴선 순간에야 살아나는 열세 번째 잔선.

숨이 얕아졌다.

하지만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면 다시 누군가 붙인 이름 안으로 밀려 들어간다. 광갱, 정화문, 확보 대상, 감시 대상. 전부 다른 손이 내게 덮어씌운 이름이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여섯 가지 물증을 한 번에 쓸어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저 문한테만 묻지 않는다.”

내 말에 세라가 눈만 돌렸다.

나는 문 안쪽을 보며 다시 말했다.

“로웬의 메모, 성도 표기, 왕국 문건, 바깥 길 흔적, 브론의 금속 판독, 세라가 들고 온 봉쇄 문구까지 같이 읽을 거야. 저 안이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 이름 하나만 믿고 들어가진 않아.”

리에트가 아주 낮게 웃었다.

“이제야 덜 멍청하네.”

세라의 방패가 흔들렸다. 위쪽에서 또 장대가 내리꽂혔다. 이번엔 브론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내 발 앞을 지나 방패 오른쪽 아래에 쐐기를 하나 더 물렸고, 미리엘은 은실 구슬을 다섯째 홈에서 떼지 않고 숨을 끊어 잡았다. 리에트의 화살은 위쪽 갈고리 하나를 다시 끊었다.

각자 믿어서가 아니었다.

같은 문 앞에서 자기 몫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움직인 것이다.

푸른 잔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왔다. 빛은 물처럼 번지지 않았다. 칼로 얇게 그은 선처럼 착지대 돌 틈을 타고 뻗었다. 하나는 내 왼발 앞에서 멈췄고, 하나는 세라 방패 그림자 아래로 기어들었다. 다른 하나는 미리엘 은실 구슬을 스치고 브론의 쐐기 머리에서 툭 끊겼다.

브론이 이를 악물었다.

“바닥도 읽는다.”

그는 손가락으로 금속 조각 하나를 튕겨 내 왼쪽 발목 앞에 세웠다. 검푸른 조각이 빛을 받자 선이 잠깐 흔들렸다. 장치가 사람과 금속을 구분하려는 듯했다.

“속일 수 있나.”

내가 묻자 브론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속이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버는 거야. 저건 문 위에 붙은 허접한 덧장과 달라. 오래된 본체가 직접 네 위치를 재고 있다. 가짜 무게 하나쯤은 알아본다.”

“그럼 진짜 무게를 나눠.”

세라가 말했다.

그녀는 말과 동시에 방패 손잡이 하나를 내게 밀었다. 감시자라면 내 몸을 뒤로 밀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나를 문 앞에서 빼지 않았다. 대신 자기 방패 하중을 나누어 주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어깨를 낮췄다. 윗길에서 내려온 충격이 세라 팔에서 내 팔로 반쯤 넘어왔다. 뼈가 울렸다.

리에트는 계단 한 칸을 내려와 내 오른쪽 뒤에 섰다. 활은 여전히 문 안쪽을 겨눴지만, 발끝은 바깥 배수 틈 쪽을 향했다.

“네가 넘어지면 끌고 나갈 길은 내가 잡는다.”

“끌려갈 생각 없어.”

“네 생각은 별로 안 믿어.”

그 대꾸가 묘하게 안심됐다. 리에트는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빠져나갈 길을 버리지 않았다.

미리엘은 은실 구슬 셋 중 하나를 문틀에서 떼어 내 내 손등 위에 올렸다. 차가운 구슬이 피부에 닿자 푸른 잔선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성도식으로는 손등에 표식을 올려 반응을 늦춰요. 정식 절차는 아니에요. 원래라면 사제만 써야 하고, 감시 대상에게 대면 안 돼요.”

그녀는 숨을 한 번 삼켰다.

“하지만 지금 그 규칙을 지키면 문이 당신을 먼저 읽어요.”

세라가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을 네 보고서에 쓸 건가.”

미리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은 보고서가 없어요. 살아 나간 뒤에 쓰든 찢든 하죠.”

그 말은 작은 배신이었다. 성도를 향한 배신인지, 성도가 그녀에게 씌운 이름을 향한 배신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은실 구슬은 내 손등 위에서 떨고 있었고, 그 떨림이 문이 나를 삼키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나는 내 이름을 꺼낼지 잠깐 망설였다.

장치가 이미 모르는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면, 내가 아는 이름을 먼저 세워야 했다. 누군가 붙인 호칭만 남겨 두면, 그 호칭이 나를 끌고 갈 것이다.

“에이드리언 베일.”

내가 말했다.

문 안쪽 바람이 한 번 멎었다.

“그게 내 이름이다. 네가 부른 보관자라는 말은 나중에 따진다. 지금은 내 이름부터 듣고, 이 사람들 위치까지 같이 읽어.”

브론이 헛웃음을 냈다.

“문한테 일행 명부를 쓰게 하겠다고?”

“이 문이 이름으로 사람을 줄 세운다면, 우리가 줄을 다시 긋는 거야.”

세라는 방패를 더 낮췄고, 리에트는 바깥쪽 발을 반 치 물렸다. 미리엘은 손등 위 은실을 놓지 않았다. 브론은 툴툴거리며 쐐기 옆에 작은 못을 하나 더 박았다. 각자의 위치가 바뀌자 푸른 빛도 따라 흔들렸다. 가운데로 모이던 선이 잠깐 흐트러지고, 열세 번째 잔선이 다시 내 왼쪽 비껴선 자리에서 굳었다.

그때 문 안쪽 목소리가 두 번째로 울렸다.

이번엔 더 낮고, 더 가까웠다.

“보관자 확인. 열세 번째 왕좌 기록을 다시 올릴 준비를 한다.”

미리엘이 숨을 잃었다.

브론의 손이 금속 쐐기 위에서 멈췄다.

세라는 방패를 더 세웠고, 리에트는 활끝을 흔들지 않았다.

나는 푸른 잔선 한가운데 서 있지 않았다. 한 걸음 비껴난 자리, 원래 계산에서 밀려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문은 나를 찾아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가운데가 아니라 이 비껴난 자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가장 끔찍했다.

그리고 가장 필요했다.

내가 쥔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제부터는 그 이름을 누가 먼저 쓰려는지부터 봐야 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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