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보스실 전의 재배치

색인판 뒤로 열린 착지대는 좁고 낮았다. 앞쪽은 검푸른 철석상이 반쯤 일어난 보스실 입구였고, 뒤쪽은 우리가 내려온 계단이었다. 왼쪽 돌턱은 세라의 방패가 겨우 선을 잡을 폭밖에 없었고, 오른쪽은 리에트가 발끝만 걸치면 무너질 듯 낮게 끊겼다. 중앙 바닥에는 반 치씩 높이가 다른 발판 셋이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 있었다. 그 아래 홈마다 푸른빛이 남아 있었고, 빛은 방금 끝난 다섯 칸의 고백을 지운 게 아니라 우리 발목에 다시 감아 둔 것처럼 흔들렸다.

철석상 앞에는 거울판 셋이 걸려 있었다. 왼쪽 거울은 세라의 방패 윗변을 향했고, 가운데 거울은 내 얼굴보다 조금 낮은 곳을 비췄다. 오른쪽 거울은 리에트와 미리엘 사이 빈틈을 겨누었다. 거울 뒤쪽으로는 작은 고리와 쇠줄, 더 안쪽에는 브론이 알아볼 만한 보강층이 보였다. 위 계단에서는 추적자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창대 끝이 돌벽을 긁는 소리, 짧은 활시위가 손 안에서 당겨졌다 풀리는 소리, 누군가 발을 헛디디고 욕을 삼키는 소리까지 겹쳤다.

세라는 내 왼쪽 앞에서 방패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방패 아랫변을 바닥에 낮게 물리고, 어깨와 팔꿈치로 하중을 나눴다. 리에트는 오른쪽 높은 턱에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위 계단과 거울 고리를 번갈아 봤다. 미리엘은 중앙 홈 가장자리에 서서 은실을 손가락보다 팔목에 더 단단히 감았다. 브론은 오른편 보강층 틈에 쐐기 둘을 꽂고, 망치가 아니라 손바닥으로 먼저 진동을 재고 있었다. 나는 열세 번째 잔선 위에 발뒤꿈치를 반쯤 걸쳤다. 뒤로 물러나면 위에서 찔리고, 앞으로 뛰면 거울이 사람을 먼저 붙잡을 자리였다.

철석상의 눈 안쪽에서 검푸른 불이 켜졌다.

그 빛은 사람을 노려보지 않았다. 더 불쾌하게도, 사람의 뒤에 남은 빈칸을 찾았다. 세라 방패 뒤에는 왕립기사단의 평가석 모서리가 떠올랐다. 리에트 뒤에는 숲 가장자리의 늦은 신호 불빛이 작게 흔들렸다. 미리엘 앞에는 성도 장부의 작은 글씨가 줄마다 번졌다. 브론 쪽에는 끊어진 공방 도면과 누군가 일부러 비워 둔 서명칸이 걸렸다. 내 앞에는 이름을 적기 전부터 사람을 어느 줄로 밀어 넣을지 정해 둔 흰 칸이 열렸다.

숨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나는 거울에서 눈을 떼고 발판을 봤다. 거울이 던지는 건 기억이지만, 우리를 죽일 건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을 본 사람이 반 박자 늦는 사이, 발판이 발을 붙잡고, 위에서 내려온 창과 아래 철석상의 손이 같은 곳을 닫아 버린다. 그러면 누가 무엇을 숨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늦은 사람부터 끊긴다.

브론이 먼저 알아차렸다.

“발목 자르는 홈은 아니야.”

그는 쐐기 머리를 누른 손바닥을 바닥에 더 붙였다.

“더 나빠. 발이 나가려는 시간을 물어. 빠져나가는 순간을 늦춰서 위쪽 놈들이 맞추게 만든다.”

위 계단에서 첫 창끝이 사선으로 내려왔다. 세라는 방패를 들지 않고 더 낮췄다. 방패 모서리가 바닥에 박히자 내 왼팔까지 진동이 올라왔다. 그 진동은 막아 낸 충격이 아니라, 다섯 사람이 같은 박자에 서 있는지 확인하는 짧은 두드림처럼 느껴졌다.

“세라.”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먼저 나갔다.

“막지 마. 기준만 세워.”

세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디 기준.”

“내 왼쪽 어깨, 네 오른발, 아래 가운데 발판. 셋을 한 줄로.”

그녀는 방패를 한 치 옮겼다. 평가석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에 번졌지만, 방패는 올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낮고 단단하게 박혔다. 왕립기사단 후보라는 말, 감시 임무라는 말, 보고를 늦췄다는 말이 방금까지 그녀를 따라붙었다. 하지만 지금 방패는 변명하지 않았다. 누구를 믿느냐보다, 어느 자리를 먼저 지킬지를 말하는 쇳조각이었다.

리에트가 위를 보며 짧게 말했다.

“셋. 맨 앞 창, 뒤 둘 활. 아래가 움직이면 위도 바로 쏜다.”

“쏘지 마.”

그녀의 손가락이 시위 위에서 멈췄다.

“위가 먼저인데?”

“위는 우리를 죽이러 온다. 아래는 누가 늦는지 고른다. 먼저 고르는 쪽부터 틀어야 해.”

리에트는 이를 악물었다. 오른쪽 거울 속 숲불이 그녀 눈가에 비쳤다. 후퇴 신호를 놓쳤던 그 밤이, 지금도 그녀 발밑을 잡아당겼을 것이다. 위에서 화살이 날아오면 먼저 반응하는 몸. 뒤를 버렸다는 기억 때문에 한 박자 빨리 쏘고 싶은 몸. 그 예민함은 약점이었다. 동시에, 이 방 안에서 제일 빨리 흔들림을 보는 눈이었다.

“고리?”

그녀가 물었다.

“오른쪽 아래. 끊지 말고 기울여.”

화살이 날아간 곳은 적의 목이 아니라 거울판 아래 고리였다. 쇠가 끊어지진 않았지만, 거울의 각도가 너무 깊게 기울었다. 리에트 앞에 번진 숲불이 위가 아니라 아래로 흘렀다. 그 짧은 틈에 철석상의 첫발이 헛박자를 냈다.

미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줄이 꺾였어요.”

그녀는 기도문을 찾지 않았다. 장부에서 사람을 빼내던 손놀림도 숨기지 않았다. 은실을 손가락에만 감으면 거울 속 장부가 그녀 손을 먼저 낚아챌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실을 팔꿈치 밑 돌턱에 걸었다. 손가락이 아니라 팔 전체로 떨림을 받았다.

“어느 줄.”

“왼쪽 거울에서 가운데 발판으로 오던 줄이, 리에트 화살 때문에 오른쪽 고리로 밀렸어요. 오래는 못 버텨요.”

“얼마.”

“한숨 반.”

짧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브론이 그 말에 맞춰 망치를 들었다. 그는 보강층 전체를 때리지 않았다. 쐐기를 꽂아 둔 오른쪽 틈, 손가락 둘이 겨우 들어갈 넓이만 노렸다.

“한숨 반이면 못 하나는 먹인다.”

“못 말고 하중.”

내가 말했다.

“이름 읽기 전에 무게부터 빼.”

브론의 눈이 잠깐 커졌다. 공방 그림자가 거울 속에서 튀어 올랐다. 깨진 도면, 비워진 서명칸, 누군가 설계 책임을 다른 손에 넘겼던 밤. 그는 그쪽을 오래 보지 않았다. 보려고 하면 질질 끌려갈 걸 알고, 아예 눈을 쐐기 머리 높이에 고정했다.

“좋아. 이름 안 본다. 쇠만 본다.”

망치가 내려갔다.

쐐기가 반 치 들어가며 보강층 안쪽에서 둔탁한 마찰음이 났다. 오른쪽 거울판이 더 기울었고, 가운데 발판 밑 홈이 비어 있는 입처럼 열렸다. 철석상의 왼발이 그 홈을 밟았다가 늦게 빠졌다. 아주 짧은 늦음이었다. 처음으로 늦어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보스의 발이었다.

위에서 창끝이 내려왔다.

세라가 방패를 올리려 했다. 그 순간 왼쪽 거울이 평가장의 빛을 세게 토했다. 돌바닥 위에 왕립기사단의 흰 선이 그어졌다. 후보자는 뒤로 물러나라는 호령, 기준 미달자의 방패를 낮추라는 말, 방패를 놓지 못해 웃음거리가 됐던 날의 숨소리가 세라 어깨를 눌렀다. 그녀의 방패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세라, 오른발 뒤꿈치 바깥.”

그녀가 숨을 끊었다.

“지금?”

“지금.”

세라는 방패를 올리는 대신 오른발 뒤꿈치를 바깥으로 틀었다. 평가장의 흰 선이 방패 위로 미끄러졌고, 아래 발판 홈이 그녀 발목을 물지 못했다. 창끝은 방패 윗변을 스치고 옆으로 빠졌다. 충격은 컸지만, 세라는 밀리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 끝에서 낮은 숨이 새었다.

“다시.”

명령을 기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기가 방금 버틴 방식을 다시 쓰겠다는 확인이었다.

미리엘 쪽 거울이 곧바로 밝아졌다. 성도 장부의 글씨가 줄마다 일어나 그녀 손등을 덮었다. “보관자 확인 전 임시 침묵.” “외부 낭독 금지.” “왕좌 계열 상위 봉쇄.” 글자는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미리엘이 오래 들었던 명령처럼 손목을 조였다. 그녀 손가락이 은실을 더 세게 움켜쥐려 했다.

“손 말고 팔꿈치.”

내가 말했다.

“읽으려 하지 마. 꺾이는 순간만 봐.”

미리엘은 눈을 질끈 감지 않았다. 손가락을 풀고, 팔꿈치를 돌턱에 더 세게 눌렀다. 은실이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팔 밑에서 다시 걸렸다. 거울 속 글자들은 그녀의 손을 덮을 곳을 잃고, 돌턱 위에서 미끄러졌다.

“왼쪽 두 줄이 안 맞아요.”

그녀 목소리는 떨렸다. 하지만 문장은 짧았다.

“보스 발보다 위 창이 먼저 닫혀요. 동시에 막으면 세라가 늦어요.”

“그럼 세라가 막지 않게 만든다.”

나는 오른발을 열세 번째 잔선에서 반 치 뗐다. 잔선이 발뒤꿈치를 놓아주지 않으려 했지만, 완전히 빠져나가진 않았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다만 거울이 나를 중앙 표적으로 읽도록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가운데 거울이 바로 반응했다.

흰 빈칸이 커졌다. 배정 통지서의 내 이름 자리. 병실 앞 치료 연기 표. 감시 허가서의 별도 확인 표기. 로웬의 메모 가장자리에서 찢겨 나간 줄. 그 모든 빈칸이 하나의 얕은 구멍처럼 나를 불렀다. 이름을 올리면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름을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정리해 준다고도 하지 않았다. 더 간단했다. 네가 한 칸에 들어가면 나머지는 덜 다친다.

그 말은 달콤하지 않았다. 익숙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나는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리에트, 위 두 번째 무릎.”

“중앙 비었어.”

“알아. 그래서 네가 위를 잡아.”

리에트가 숨을 멈췄다. 숲불이 다시 그녀 뒤에서 타올랐다. 늦은 후퇴 신호. 놓친 사람들. 누가 먼저 보고도 말하지 않았느냐는 눈빛. 그 기억은 리에트의 화살을 위가 아니라 뒤로 돌리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뒤를 보지 않았다. 내가 중앙으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도, 위 두 번째 적의 무릎만 골랐다.

화살이 박혔다. 깊지 않았다. 그러나 무릎이 접혔고, 뒤쪽 활잡이의 사격선이 창잡이 어깨에 걸렸다. 위 계단의 공격이 한 박자 엉켰다.

“봤다.”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늦은 신호가 아니라, 늦게 쏘게 만드는 신호였어.”

그 말은 자기 고백을 다시 설명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방의 규칙을 읽어 낸 정찰자의 보고였다. 나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좋아. 네가 보는 늦음은 우리한테 먼저 온다.”

브론이 두 번째 쐐기를 밀었다.

“말 길게 하지 말고 어디 치는지만.”

“오른쪽 보강층 말고, 가운데 발판 밑 앞쪽.”

“거긴 빈 데야.”

“그래서 소리가 늦게 돌아와.”

브론은 토를 달려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망치가 빈 데를 쳤다. 둔탁한 소리가 아니라 속 빈 울림이 퍼졌다. 그 울림이 거울 뒤 쇠줄을 타고 올라가자, 철석상의 가슴 안쪽에서 작은 맞물림이 엇나갔다. 보스가 몸을 크게 흔들진 않았다. 대신 셋째 거울이 사람을 비추기 전에 잠깐 자기 뒷면을 드러냈다.

거울 뒷면에는 문장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선명한 글은 아니었다. 먼지와 기름때 속에 반쯤 묻힌 작은 글자였다. 미리엘이 보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개별 기억이 아니라 역할 표본이에요.”

“쉽게.”

세라가 방패를 누른 채 말했다.

미리엘이 바로 고쳤다.

“우리 과거를 훔쳐서 던지는 게 아니에요. 각자 제일 늦어지는 자리를 찾아요. 세라 님은 평가, 리에트는 후퇴 신호, 브론은 책임 이름, 저는 성도 문장, 에이드리언 님은 빈칸.”

“그러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자리를 바꾸면 된다.”

내 말에 미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미 발을 옮기고 있었다. 중앙에서 반 발 왼쪽. 세라 방패 뒤가 아니라 방패 그림자가 끝나는 자리. 세라가 나를 가리려면 방패를 올려야 하는 자리였고, 내가 그대로 서면 거울이 세라의 평가 기억과 내 빈칸을 겹쳐 읽어야 하는 자리였다.

“세라, 내 앞으로 오지 마.”

세라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러면 네가 맞아.”

“맞는 게 아니라 헷갈리게 해.”

나는 방패 모서리에 손등을 댔다. 밀지 않았다. 세라가 세운 기준을 내 자리표로 빌렸을 뿐이었다.

“넌 기준점. 나는 표적처럼 보이는 미끼. 다르다.”

“그 차이, 나중에 따진다.”

“살아 나가면.”

세라는 대답 대신 방패를 더 낮게 박았다. 그녀가 방패를 올리지 않자 거울은 세라를 ‘막는 사람’으로 읽지 못했다. 내가 방패 그림자 끝에 서자 가운데 거울은 나를 ‘버려질 빈칸’으로 읽으려 했다. 두 판정이 겹치자, 왼쪽과 가운데 거울 사이에 얕은 균열이 생겼다. 아주 작은 빛샘이었다.

리에트가 그 틈을 봤다.

“한 발 왼쪽, 위 셋째 활.”

“왜?”

세라가 묻자 리에트가 바로 답했다.

“저놈이 우리가 헷갈리는 걸 보고 먼저 쏜다. 눈이 빨라.”

“쏴.”

나는 짧게 말했다.

리에트의 화살이 위 셋째 활잡이 손목을 스쳤다. 활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사격선이 위로 튀었다. 세라의 방패 위로 빗나간 화살이 지나갔고, 돌벽에서 부서진 파편이 내 뺨을 스쳤다. 피가 조금 났다. 따갑다는 감각보다, 가운데 거울이 그 피를 보자 더 선명하게 빛난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다.

철석상이 오른손을 들었다.

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납작했다. 판자처럼 넓은 돌손이 세 개의 거울빛을 한꺼번에 모아 우리 쪽으로 밀었다. 평가장, 숲불, 성도 장부, 공방 도면, 빈칸이 같은 속도로 겹쳤다. 전부를 피하려면 다섯 명이 각자 가장 편한 쪽으로 튀어야 했다. 그러면 끝이었다. 한 명은 위로, 한 명은 아래로, 한 명은 뒤로, 한 명은 옆으로, 나는 중앙으로. 우리가 찢어지는 순간 홈이 시간을 먹는다.

나는 먼저 이름을 불렀다.

“세라, 오른발 그대로.”

세라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버텼다.

“리에트, 위 보지 말고 오른쪽 고리 소리.”

활시위가 팽팽해졌다.

“미리엘, 글자 읽지 말고 선 끊기는 곳.”

은실이 돌턱에 긁혔다.

“브론, 도면 보지 말고 빈 울림.”

망치가 다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거울은 그걸 기다렸을 것이다. 빈칸에 적을 이름, 보관자라는 표식, 분류될 사람의 흔적. 나는 그것 대신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말했다.

“나는 세라 방패 그림자 끝. 가운데 발판 반 치 왼쪽.”

순간 가운데 거울이 크게 흔들렸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위치가 들어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빈칸에 들어갈 줄 알았던 내가 빈칸 바깥의 발판을 먼저 말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거울빛이 내 얼굴에서 발밑으로 떨어졌다. 빈칸은 아직 나를 붙잡지 못했다.

브론의 망치가 빈 울림을 쳤다.

쾅.

이번에는 쇳소리가 아니라 돌 속에서 막힌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보스 왼발 아래 홈이 한꺼번에 열렸고, 철석상의 무게가 앞쪽으로 쏠렸다. 세라가 방패를 올리지 않은 채 한 발로 버텼다. 방패 아랫변이 바닥을 긁으며 기준점을 더 깊이 박았다. 리에트의 화살은 오른쪽 고리를 다시 스쳤고, 고리는 끊어지지 않은 채 비틀렸다. 미리엘은 그 비틀림에 맞춰 은실을 잡아당겼다.

“지금 끊겨요.”

“끊지 마.”

내가 말했다.

“늦춰.”

미리엘이 눈을 크게 떴지만 손은 이미 움직였다. 은실을 확 당기지 않고, 돌턱 아래로 반 바퀴 감아 천천히 놓았다. 거울빛이 끊기는 대신 늘어졌다. 철석상이 우리를 덮치기 직전, 그 늘어진 빛이 철석상의 손목을 감았다. 보스의 넓은 돌손이 한 박자 늦게 내려왔다.

그 한 박자가 전부였다.

세라가 방패를 비틀었다. 막는 각도가 아니라 미끄러뜨리는 각도였다. 돌손이 방패를 때리고도 옆으로 빠졌다. 충격이 내 어깨를 지나 브론 쪽 바닥으로 흘렀다. 브론은 뒤로 밀리지 않고 쐐기 위에 무릎을 찍었다. 리에트는 위에서 다시 날아온 화살을 쏘지 않고 몸을 낮춰 흘렸다. 미리엘은 은실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중앙에서 빠지지 않자, 거울은 다시 내 빈칸을 키웠다.

하지만 이제 그 빈칸은 혼자 있지 않았다.

빈칸 주변에 발자국이 생겼다. 세라의 오른발이 남긴 먼지 자국, 리에트가 발끝으로 버틴 돌턱 흠, 미리엘 팔꿈치 밑에 묻은 푸른 가루, 브론 무릎에서 떨어진 철가루, 내 발뒤꿈치가 열세 번째 잔선 위에 남긴 반달 모양 눌림. 장치가 사람을 한 칸씩 읽으려 할수록, 자리는 서로 엮였다.

그때 철석상의 가슴 안쪽에서 더 낮은 소리가 났다.

“보관자 후보 배열 오류.”

말 자체는 차가웠다. 하지만 처음으로 방 안의 박자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걸 느꼈다. 완전히 이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보스가 이제 우리를 대충 흔들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음부터는 더 정확히 찌른다.

예상대로 거울판 셋이 뒤집혔다.

왼쪽 거울에는 더 이상 평가장의 흰 선만 뜨지 않았다. 세라가 방패를 놓으면 내가 성도 손에 넘겨지는 장면이 붙었다. 오른쪽 거울에는 숲불뿐 아니라 리에트가 지금 위쪽 적을 놓쳐 세라의 등이 뚫리는 그림이 겹쳤다. 미리엘 앞의 장부에는 그녀가 낭독하지 않은 문장을 누군가 대신 읽는 장면이 떠올랐다. 브론 쪽 도면에는 쐐기를 잘못 박으면 발판 전체가 꺼지는 계산이 붉게 번졌다. 내 앞 빈칸에는 네 사람의 이름이 가장자리부터 희미하게 적히기 시작했다.

보스가 방법을 바꿨다.

각자 약한 곳을 찌르는 게 아니라, 내가 지시한 자리가 틀리면 다른 사람이 다친다는 장면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쪽이 훨씬 무거웠다. 내 목소리 하나가 늦거나 틀리면 방패, 활, 은실, 쐐기까지 같이 무너진다는 감각이 목 안쪽을 막았다.

세라가 가장 먼저 알아챘다.

“네가 다 들려고 하지 마.”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그녀는 방패를 두 번 두드렸다. 낮고 짧은 소리였다.

“기준은 내가 줄게.”

리에트가 오른쪽 턱에서 발끝을 고쳐 세웠다.

“늦는 신호는 내가 볼게.”

미리엘은 은실을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조금 옮겼다.

“꺾이는 줄은 제가 말할게요. 문장은 안 읽어요.”

브론은 입 안에 고인 피를 삼키고 웃지도 않았다.

“빈 데는 내가 두드린다. 네가 전부 눈으로 재지 마.”

그 네 문장은 충성 서약이 아니었다. 위로도 아니었다. 각자 자기 책임을 손에 다시 쥐는 말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방금까지 보스가 바라는 방식대로 무게를 받으려 했다는 걸 알았다. ‘계승자’라는 이름이 사람을 이끄는 역할이라면, 그건 모든 짐을 내게 몰아주는 이름이 아니었다. 각자가 이미 들고 있는 짐이 힘이 되는 자리를 찾아 바꿔 세우는 이름이었다.

나는 숨을 다시 잡았다.

“좋아. 한 번 더 간다.”

철석상이 무릎을 굽혔다. 위 계단에서는 창잡이가 넘어졌고, 뒤쪽 두 명이 옆으로 벌어졌다. 다음 충돌은 위와 아래가 동시에 올 게 뻔했다. 이번에는 우리가 늦으면 누가 늦는지뿐 아니라, 누가 누구 때문에 흔들리는지도 거울이 물어뜯을 것이다.

나는 검을 앞으로 내밀지 않았다. 아직 베는 전투가 아니었다. 발판, 거울, 고리, 손, 방패, 시위, 은실, 쐐기, 계단 입구까지 한꺼번에 세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한 사람씩 따로 세지 말아야 했다.

“세라, 두 번 두드리면 왼쪽 기준.”

방패가 낮게 울렸다.

“리에트, 그 소리 끝에서 위 둘째.”

시위가 짧게 당겨졌다.

“미리엘, 오른쪽 거울 줄이 늘어지면 말만 해.”

은실이 돌 위에서 작게 삐걱였다.

“브론, 내가 발을 떼면 빈 데 치지 마. 세라 방패 울림 끝나고 쳐.”

브론이 망치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럼 네 자리는?”

내 앞 빈칸이 다시 커졌다. 네 사람의 이름 가장자리가 더 선명해졌다. 보스는 내가 내 자리를 말하길 기다렸다. 이름이든 표식이든, 빈칸이든, 무엇이든 하나만 내놓으면 그걸 물고 우리를 나눌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이름을 주지 않았다.

“내 자리는 네 사람 사이.”

거울빛이 잠깐 멎었다.

“정확히는?”

브론이 이를 악문 채 물었다.

나는 발밑을 보고 답했다.

“세라 방패 울림 뒤, 리에트 화살 앞, 미리엘 줄 떨림 아래, 네 망치 소리 위.”

말이 끝나자 네 사람이 동시에 아주 짧게 움직였다. 세라의 방패가 두 번 울렸고, 리에트의 화살이 그 끝소리를 타고 위 둘째의 손목을 찔렀다. 미리엘은 오른쪽 거울 줄이 늘어진 순간을 한 단어로 알렸다.

“늘어짐.”

브론은 바로 치지 않았다. 내가 발을 떼는 걸 기다리지도 않았다. 세라 방패 울림이 바닥을 타고 사라지는 끝, 그 작은 끝을 잡아 빈 데가 아니라 보스 발밑 앞쪽을 때렸다. 충격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 사이로 발을 옮겼다. 중앙에서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자리. 네 사람 움직임 사이에 남는 아주 좁은 틈. 그 틈은 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이 누구 하나를 고를 만큼 고립되지도 않았다.

철석상이 돌손을 내렸다.

이번에는 세라가 혼자 받지 않았다. 방패는 각도를 잡았고, 리에트의 화살은 손목을 흔들었고, 미리엘의 은실은 거울빛을 늦췄고, 브론의 망치는 발판을 반 치 비틀었다. 나는 그 네 움직임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발을 옮기며 마지막 한 마디만 던졌다.

“흔들려도 자기 자리. 남의 자리 대신 밟지 마.”

돌손이 방패를 스쳤다. 거울빛이 내 뺨을 베듯 지나갔다. 위에서 떨어진 화살 하나가 중앙 발판에 박혔다. 발판 홈이 피 대신 빛을 빨아들였다. 몸이 뒤로 밀렸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세라도 밀리지 않았다. 리에트는 오른쪽 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미리엘은 은실을 놓지 않았다. 브론은 쐐기 위에 무릎을 박은 채 망치를 놓지 않았다.

보스가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가슴 앞 거울 셋 중 오른쪽 하나가 반 바퀴 돌아 뒷면을 드러냈다. 그 안쪽에는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다음 방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잠금축이 있었다. 축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물려 있는 작은 톱니 하나가 빠져 있었다. 처음부터 빠져 있었거나, 누군가 먼저 건드린 듯했다.

리에트가 숨을 삼켰다.

“저거, 밖에서 손댄 거야.”

미리엘도 보았다.

“성도식 봉함이 아니에요. 왕국 장비 표식도 아니고요.”

브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공방 쪽도 아니야. 적어도 내가 아는 방식은 아니야.”

세라가 방패를 조금 더 앞으로 밀었다.

“그럼 누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보스가 흔들린 몸을 바로잡고 있었다. 오른쪽 거울은 아직 돌아간 채였고, 빠진 톱니가 드러난 잠금축은 우리를 유혹하듯 얕게 빛났다. 저걸 치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저걸 보느라 한 박자 늦으면, 보스는 방금보다 더 깊게 우리 자리를 찢을 것이다.

단 하나의 물건에 시선이 붙으면 끝이다. 톱니든 빈칸이든, 거울이든, 열세 번째 잔선이든. 이 방은 그 집착을 기다렸다가 사람을 나눈다.

나는 빠진 톱니에서 눈을 떼고 네 사람을 봤다. 세라의 방패 손잡이, 리에트의 낮아진 시선, 미리엘 팔꿈치 밑 은실, 브론의 무릎 아래 쐐기, 그리고 내 발밑에 아직 희미하게 남은 열세 번째 잔선. 여기서 다음 길을 여는 건 톱니 하나가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보고도 자기 자리를 놓지 않는가였다.

“톱니 보지 마.”

내가 말했다.

“지금은 보스가 먼저다. 보스부터 쓰러뜨리고 길은 그 뒤에 본다.”

세라가 방패를 두 번 울렸다. 리에트가 위 계단 끝으로 시야를 올렸다. 미리엘은 늘어진 줄을 짧게 감았다. 브론은 쐐기를 한 번 더 깊이 밀었다.

철석상이 다시 일어났다. 거울판 셋이 우리 상처를 더 깊게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다섯 사람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나는 네 사람 사이 좁은 틈에 발을 박고, 다음 박자를 말했다.

“자리 바꾸지 말고, 역할만 바꾼다.”

보스의 두 번째 손이 내려왔다.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