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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밖 포위망

배수 홈 마지막 굴곡을 빠져나오자 밤공기가 얼굴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먼저 드러난 건 길이 아니라 막힌 자리들이었다.

배수로 끝은 산허리 안쪽을 비스듬히 파먹은 좁은 틈으로 이어져 있었다. 정면 아래로는 젖은 자갈이 깔린 사면이 길게 미끄러져 내렸고, 그 끝에는 말 네댓 필이 겨우 설 만한 외곽 길목이 어둡게 걸려 있었다. 왼쪽은 바위가 층층이 갈라진 낮은 암반 턱이었다. 횃불을 들고 서기에 좋고, 활을 걸치기에도 좋고, 도망치는 사람을 위에서 눌러 보기에도 좋은 자리였다. 오른쪽은 더 가팔랐다. 오래전에 물이 파고 지나간 홈이 굽이치며 북서 쪽으로 빠졌지만, 중간중간 무너진 돌턱이 시야를 여러 번 끊었다. 말은 못 들어오고, 사람도 한 줄로 움직여야 하는 길이었다.

세라가 가장 먼저 틈 밖으로 몸을 빼낸 뒤 방패를 바위에 세워 아래를 가렸다. 브론은 뒤에서 무너진 흙을 발끝으로 밀어 원래 있던 구멍처럼 보이게 다듬었다. 미리엘은 손등에 남은 은실 끝을 바위 틈에 걸고 아주 약한 떨림을 남겼다. 방 안의 반응이 아직 끊기지 않은 것처럼 속이는 손놀림이었다. 리에트는 마지막으로 기어 나오면서 바로 위턱과 아래 길목을 번갈아 훑었다.

나는 몸을 낮춘 채 사면 아래 불빛을 세었다.

셋이 아니었다.

아래 길목 가장 넓은 자리는 왕국 쪽이 잡고 있었다. 말 앞가슴에는 천을 덮어 표식을 가렸지만, 고삐를 짧게 감아 쥔 손과 안장 간격이 군영식이었다. 둘은 길을 막고 서고 하나는 뒤에서 빈 자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람을 데려갈 때 묶는 줄 길이까지 미리 맞춘 손놀림이었다.

왼쪽 낮은 턱에는 성도 인원이 넷 있었다. 횃불 높이가 일정했고, 두 사람은 바닥에 뭔가를 펴 놓은 채 고개를 맞대고 있었다. 문장을 읽는 자세였다. 나머지 둘은 위를 보지 않고도 손을 번갈아 들었다. 누가 먼저 잡고 누가 무엇을 따로 옮길지 순서를 이미 짜 둔 몸짓이었다.

오른쪽 사면 아래, 그림자가 제일 많은 곳에는 셋이 따로 흩어져 있었다. 옷은 통일돼 있지 않았고, 말도 한 필뿐이었다. 대신 셋 다 손을 비워 두고 있었다. 당장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먼저 누가 무엇을 들고 나오는지 확인한 뒤 값을 매길 사람들처럼 보였다. 셋 중 맨 위에 선 자는 끝내 좋은 자리를 버리지 않았다. 아래 둘이 움직여도 그자는 발을 떼지 않았다. 자리를 먼저 찍고 몸을 늦게 들이미는 손이었다.

아래에서 짧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생환자 확인 후 보호 구역으로 돌린다.”

왕국 쪽이었다.

말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가장 앞 사람 발은 길 중앙이 아니라 양옆 돌기둥 사이를 재고 있었다. 보호할 사람을 맞이하는 자세가 아니라, 뛰쳐나오면 어느 각에서 다리를 걸 수 있는지 계산하는 자세였다.

곧이어 성도 쪽에서 더 마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물 분리 우선. 반응자는 별도 봉인대기.”

사람보다 순서가 먼저였다.

오른쪽 사면에서는 누군가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받았다.

“먼저 손에 든 것부터 보자.”

그 말이 셋 중 가장 솔직했다.

세라가 아래를 내려다본 채 입술 안쪽을 한 번 깨물었다.

“기사단이 저 줄에 붙어 있으면.”

그녀가 아주 낮게 말했다.

“내가 내려가는 순간 살아 돌아온 경위부터 쓰게 할 거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다음 말이 더 중요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세라 시선이 내 허리춤 안쪽, 백은 수액 반쪽을 감춘 주머니에 스쳤다.

“그리고 넌 내 뒤에 숨겨도 결국 따로 세워질 거야.”

보호라는 말은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인계가 더 정확했다.

미리엘은 왼손으로 바위 가장자리를 짚은 채 성도 쪽을 봤다. 밤인데도 그녀 얼굴에서 핏기가 한 겹 더 빠져나갔다.

“저기 펼쳐 둔 건 임시 운반표 같아요.”

“문장까지 보여?” 브론이 물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줄 배치가 그래요. 사람 이름보다 칸부터 찍는 양식이에요."

그녀 목소리는 떨렸지만 느려지진 않았다.

“제가 저 선으로 내려가면 살려 두긴 하겠죠. 대신 입을 못 열게 만들 거예요. 삭제 교리, 보관자 표기, 안쪽 문장… 본 적 없는 걸로 다시 정리시킬 거예요.”

브론이 낮게 코를 풀듯 웃었다.

“난 더 간단해. 조합으로 돌아가면 설계권 박탈부터 들어오지. 금지 합금 보고, 국가 물건 건드리고, 허가 없이 외곽에서 먼저 뚫은 길로 들어갔거든. 살려 두면 손부터 묶을 거다.”

리에트는 오른쪽 사면을 본 채 활시위를 손가락 하나 분량만 당겼다 놓았다.

“숲 쪽으로 바로 빠져도 저 손들이 먼저 문다.”

그녀는 감정을 얹지 않고 말했다.

“여기까지 내려온 흔적이 이미 남았어. 로웬 흔적을 따라온 것도, 안쪽 유적에 발 들인 것도 다. 의회가 그걸 덮어 주진 않겠지.”

각자 돌아갈 곳을 말하고 있었는데, 듣고 있자니 돌아갈 곳이 아니라 잘리는 순서 같았다.

나는 사면 아래, 암반 턱, 오른쪽 북서 홈을 다시 한 번 훑었다. 넓은 길은 셋 다 보고 있었다. 낮은 턱은 성도가 잡았고, 아래 길목은 왕국이 잡았고, 오른쪽 사면은 정체불명 추적선이 눈을 붙이고 있었다. 셋 다 서로를 의식해 먼저 치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만큼 우리가 넓은 쪽으로 뛰는 순간 셋 모두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브론이 내 어깨를 건드렸다.

“생각 끝났나?”

“거의.”

나는 젖은 바닥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우리가 빠져나온 배수 틈, 아래 왕국 길목, 왼쪽 성도 턱, 오른쪽 그림자 셋, 그리고 북서로 한 번 더 꺾이는 물길 자리를 짧게 이었다.

“넓은 쪽은 전부 막혔어. 대신 셋이 서로를 완전히 못 믿는다.”

세라가 즉시 알아들었다.

“한쪽을 다른 쪽에 들이받게 만든다?”

“정면으로는 아니고.”

나는 아래 길목 뒤 말 그림자를 짚었다.

“왕국은 생환자 몸을 먼저 챙기고 싶어 해. 성도는 물건과 반응자를 나눠 잡고 싶어 하고. 오른쪽 셋은 그 둘이 헝클어질 때 손 넣으려는 쪽이야. 그러면 먼저 흔들 건 성도 쪽 절차다.”

미리엘이 눈썹을 좁혔다.

“왜요?”

"칸이 어그러지는 순간 저쪽은 바로 멈춘다."

내가 답했다.

“왕국은 길을 막는 게 먼저지만, 성도는 순서가 틀어지는 순간 자기들끼리 다시 재. 거기에 반응 흔적까지 두 겹으로 남기면 누가 먼저 건드렸는지 가지고 서로 물어뜯는다.”

브론이 씩 웃었다.

“그 사이에 오른쪽 셋은?”

“우릴 쫓기 전에 값부터 재게 만들면 된다.”

리에트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 불빛 둘만 끊으면 오른쪽은 아래 성도 턱 쪽을 먼저 의심할 거야. 사선이 겹치거든.”

세라는 방패를 다시 들어 암반 턱 높이를 가늠했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기사단 쪽 시선도 끌 수 있어.”

그녀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이번엔 망설임이 아니라 계산으로 눌려 있었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다. 그 순간 아래는 날 살려 세우려 들겠지. 바로 치진 못 해.”

“그러면 네가 미끼가 된다.” 미리엘이 말했다.

세라는 눈을 떼지 않았다.

“복귀선으로 내려가면 더 나쁜 미끼가 돼.”

그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선을 조금 더 그었다. 오른쪽 북서 홈 중간, 무너진 돌턱 하나를 표시했다.

“우리가 진짜 탈출할 길은 여기야. 한 줄로만 지나갈 수 있고, 말은 못 들어와. 대신 중간에 막힌 자리가 하나 있어. 브론, 네가 열어야 한다.”

브론이 무릎을 꿇고 선을 보더니 혀를 찼다.

“위에서 떨어진 돌판이면 깨는 것보다 눕히는 게 낫다. 소리는 좀 날 거다.”

“소리는 나도 괜찮아.”

세라가 말했다.

“이미 들킬 거면, 들키는 시점을 우리가 고르면 된다.”

미리엘은 바위에 걸어 둔 은실을 천천히 풀었다가 다시 감았다.

“제가 방 안쪽 떨림을 여기까지 끌어오진 못해요. 하지만 성도 문장선 비슷한 흔적을 왼쪽 턱 아래 돌에 잠깐 남길 수는 있어요. 반응자가 저기 있는 것처럼 보이게.”

“좋아.”

나는 바로 이었다.

“리에트는 오른쪽 위 시야를 먼저 끊어. 한 번이면 돼. 그다음 아래 성도 턱 근처 돌에 화살 하나 더 박아. 맞히라는 게 아니라, 저쪽 셋이 성도 쪽이 먼저 손 댔다고 오해하게.”

리에트는 이미 각을 보고 있었다.

“가능해.”

“브론은 내가 신호 주면 북서 홈 막힌 자리 열고. 세라는 선두에서 기사단 쪽 시선 한 번 받아 준 뒤 바로 꺾어. 미리엘은 왼쪽 턱 아래 흔적 남기고 마지막에 따라붙어.”

브론이 웃음기 없이 물었다.

“너는?”

“가운데서 순서 본다. 누가 늦으면 끌고, 누가 잡히면 남은 물건부터 빼.”

세라 시선이 다시 한 번 내 주머니로 갔다.

“백은 수액은 계속 네가 들고.”

“석판 조각은 나눠 가졌고, 좌표 금속편도 따로 있어. 이 병만 뺏겨도 끝이지만, 이 병 때문에 내가 먼저 잡혀도 나머지가 전부 사라지진 않아.”

브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싫진 않군. 누가 하나 물려도 전부 털리는 건 아니니까.”

“값 매기지 말랬지.” 세라가 자르듯 말했다.

“값을 알아야 안 넘기지.” 브론도 바로 받았다.

둘의 말끝이 맞부딪혔지만, 이전처럼 같은 말을 돌려 던지진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지보다 어느 손이 어느 물건을 쥐고 달릴지였다.

아래에서 다시 목소리가 올라왔다.

“보호 대상 우선 확인!”

왕국.

곧 성도 쪽이 겹쳤다.

“분리 확보 전 접근 금지!”

그리고 오른쪽 사면 아래에서 짧은 욕설과 함께 낮은 웃음이 샜다.

“둘이 먼저 싸우게 냅둬.”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리에트를 봤다.

“지금.”

활시위가 거의 소리를 남기지 않았다.

첫 화살이 오른쪽 위 바위틈 횃불 걸쇠를 긁었다. 불빛 하나가 기울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곧바로 두 번째 화살이 왼쪽 성도 턱 아래 돌면을 때렸다. 불꽃 하나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돌가루가 흩어졌다.

“누가 먼저—” 아래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응선이 왼쪽으로—” 성도 쪽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왕국 길목의 말 하나가 놀라 옆으로 몸을 틀었다. 고삐를 쥔 병사가 급히 끌어당기며 욕을 내뱉었다. 오른쪽 사면 셋 중 둘은 즉시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고 성도 턱과 왕국 길목을 번갈아 봤다. 먼저 누가 손을 넣었는지 확인하려는 머뭇거림이 생겼다.

세라가 방패를 높이 들고 암반 턱 아래로 반걸음 나섰다.

“벨로네 기사후보 세라다!”

그녀 목소리가 밤공기를 쪼갰다.

“아래서 움직이지 마!”

왕국 길목이 그 한마디에 정말로 멎었다.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멈춤은 오래가지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한 박자가 필요했다.

나는 곧바로 손을 내렸다.

“북서.”

브론이 먼저 돌턱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젖은 자갈이 발밑에서 쓸렸다. 그가 망치 자루를 돌판 아래 받침에 박아 넣고 몸무게를 실었다. 낮은 파열음과 함께 돌판이 안쪽으로 비스듬히 주저앉았다. 막혔던 틈 아래로 검은 홈이 열렸다.

“하나씩!”

세라가 곧장 몸을 밀어 넣었다. 방패 가장자리로 남은 자갈을 쓸어내며 선두 자리를 만들었다. 브론이 그 뒤를 붙어 돌판이 다시 굴러오지 않게 어깨로 받쳤다. 나는 세 번째로 틈을 타려다 뒤를 돌아봤다.

미리엘은 정말로 왼쪽 턱 아래 돌 하나에 은실을 감아 두고 있었다. 작은 떨림이 젖은 돌면을 타고 번졌다. 성도 쪽에선 그걸 보고 누군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확인과 재확인이 겹치는 시간이었다.

리에트는 마지막까지 위를 보고 있었다.

“오른쪽 셋 중 하나 내려온다.”

“바로 붙어.”

내가 말하자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아래에서 왕국 쪽 외침이 터졌다.

“세라 후보! 거기서 대기해!”

곧 성도 쪽이 덮쳤다.

“움직이면 봉인 규정 위반입니다!”

둘 다 명령이었고, 둘 다 늦었다.

세라는 이미 좁은 홈 안쪽에서 몸을 틀고 있었다. 브론이 뒤에서 돌판을 한 번 더 눌러 길을 넓혔다. 나는 틈을 타고 들어가며 백은 수액 반쪽이 옷 안에서 부딪히지 않도록 손으로 눌렀다. 미리엘이 바로 뒤에 붙었고, 리에트는 마지막으로 뒤를 향해 화살 하나를 더 날렸다. 이번에는 사람을 맞히지 않았다. 오른쪽 사면의 빈 바위에 박힌 화살이 돌가루를 크게 터뜨리자, 쫓아내려오던 발이 반걸음 늦춰졌다.

홈 안쪽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좁았다. 왼편은 젖은 흙벽, 오른편은 날 선 돌기둥이 이어졌고, 발판은 한 사람 발 절반만 겨우 올릴 만큼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좋은 점도 분명했다. 뒤에서 셋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올 수 없고, 말은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앞에서 세라 목소리가 돌아왔다.

“첫 턱 넘으면 오른쪽으로 꺾여!”

브론이 바로 이어받았다.

“둘째 발판은 젖어 있다. 힘 빼지 마!”

나는 손바닥을 젖은 벽에 붙인 채 한 발씩 옮겼다. 뒤에서는 미리엘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지만, 발은 정확히 따라왔다. 리에트는 마지막까지 뒤를 보며 후미를 닫았다.

금속 신호가 다시 울렸다. 셋. 둘. 하나.

이번엔 더 가까웠다. 우리가 빠진 자리를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좁은 홈 안에서는 그 소리도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누가 먼저 들어올지, 들어오다 떨어지진 않을지, 어느 쪽이 선두를 설지 그들끼리 먼저 정해야 했다.

우리가 노린 건 바로 그 느림이었다.

홈이 한 번 더 꺾이자 바깥 불빛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북서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더 선명해졌다. 흙냄새보다 마른 풀 냄새가 먼저 섞였다. 바깥으로 통하는 다른 숨구멍이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세라가 앞쪽에서 속도를 늦췄다.

“잠깐.”

우리는 좁은 발판 위에서 그대로 멈췄다. 그녀는 방패를 돌벽에 기대 두고 아래를 살폈다. 브론이 몸을 반쯤 숙여 틈 사이를 더듬었다.

“이 아래로 떨어지면 작은 골짜기다.”

그가 낮게 말했다.

“왼쪽으로 말 못 들어오는 자갈턱이 이어져. 거기 타면 더 멀어진다.”

“뒤는?” 내가 물었다.

리에트가 대답했다.

“아직 서로 밀고 있어. 기사단은 세라 이름 때문에 함부로 못 들어오고, 성도는 반응선이 어디로 갔는지 다시 재는 중이야. 오른쪽 셋은 둘 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지금도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놓친 게 아니라,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확실한 결론을 줬다. 돌아갈 수 있는 선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값을 매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귀환자보다 운반물에 가깝게 보고 있었다.

미리엘이 어둠 속에서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 정말 끝이네요.”

누구도 무슨 끝인지 묻지 않았다.

수련원으로 돌아가는 끝.

성도로 돌아가는 끝.

조합으로, 숲으로, 기사단으로 각자 흩어져도 살아남을 거라는 마지막 착각의 끝.

“아니.”

내가 말했다.

“끝난 게 아니라 정해진 거야.”

세라가 뒤돌아봤다.

나는 좁은 홈 벽을 한 번 짚고 말을 이었다.

“우린 각자 원래 소속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내려온 셋 다 그걸 몸으로 보여 줬어. 왕국은 보호라 부르고, 성도는 분리라 부르고, 저 그림자들은 값이라고 부른다. 이름만 다르지 하는 일은 같아.”

브론이 짧게 코웃음쳤다.

“사람 대신 칸부터 정한다는 거지.”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남이 붙인 칸으로 움직이면 안 된다.”

잠깐 침묵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건 젖은 돌 틈으로 스미는 바람 소리와, 멀리 아래서 서로 명령을 뒤섞는 목소리뿐이었다.

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사단 복귀선은 버린다.”

이번에는 아주 분명했다. 설명도 변명도 없었다.

미리엘도 바로 이었다.

“저도 성도 선으로 안 내려가요.”

브론은 어깨를 돌리며 웃지 않은 채 말했다.

“조합 문턱보다 북서 골짜기가 낫다면, 그쪽이지.”

리에트는 활을 다시 등에 걸었다.

“숲으로 곧장 빼는 것보다 너희와 움직이는 쪽이 더 오래 숨을 수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아래를 한 번 더 돌아봤다. 멀리 왕국 불빛 하나가 움직였고, 성도 횃불 둘이 서로 다른 높이로 흔들렸다. 오른쪽 사면 맨 위 그림자는 아직도 급히 쫓아들지 않고 위를 보고 있었다. 우리를 놓친 게 아니라,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는지 재는 태도였다.

“내려간다.”

내가 말했다.

“북서 골짜기까지 먼저 닿고, 거기서 다시 좌표 맞춘다. 백은 수액 반쪽도, 석판 조각도, 금속편도 누구 손에도 안 넘긴다. 앞으로는 우리가 고른 길로만 움직여.”

세라가 방패를 다시 들었다. 이번엔 누군가의 선두 기사처럼 든 게 아니라, 좁은 길 앞을 여는 첫 사람의 자세였다.

“그럼 내가 앞장선다.”

브론이 아래 틈을 더 넓히며 중얼거렸다.

“길 열고 무너질 자리 막는 건 내 몫.”

미리엘은 손끝에 남은 은실을 감아 넣었다.

“뒤에서 흔적 줄일게요.”

리에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본 뒤 활끈을 조였다.

“후미와 위 시야는 내가 본다.”

나는 그들 사이 빈 한 칸에 몸을 세웠다. 전열 한복판도, 후미도 아닌 자리. 누가 미끄러지면 붙잡고, 누가 늦으면 밀어 넣고, 누가 잡히면 남은 셋이 무엇을 먼저 들고 뛰어야 하는지 정하는 자리였다.

따뜻한 맹세는 없었다. 대신 누가 앞을 열고 누가 뒤를 닫고 누가 무엇을 들고 가는지가 분명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래에서 누군가 마침내 외쳤다.

“북서로 빠진다! 잡아!”

늦었다.

세라가 먼저 몸을 내렸다. 브론이 그 뒤를 붙었고, 나는 젖은 돌벽을 짚으며 셋째 자리를 탔다. 미리엘이 숨을 눌러 따라붙고, 리에트가 마지막으로 뒤쪽 시야를 자르며 어둠을 덮었다.

첫 굴곡은 좁았고 둘째 굴곡은 더 가팔랐다. 세라 방패 가장자리가 돌을 긁을 때마다 짧은 쇳소리가 났다. 브론은 막힌 발판을 발끝으로 더듬다가 젖은 흙을 걷어 내고, 밟아도 되는 돌과 비는 자리를 짧게 끊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손을 뻗어 다음 턱을 짚었다. 뒤에서 미리엘 숨이 한 번 세게 흔들렸지만, 리에트가 바로 어깨를 받쳤는지 발소리가 다시 고르게 붙었다.

금속 신호가 이번에는 홈 안쪽까지 직접 튀어 들어왔다. 셋. 둘. 하나. 조금 쉰 뒤 다시 둘.

기사단도 성도도 아니었다. 바깥에서 자리를 재던 오른쪽 손이 끝내 간격을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맨 위 놈 내려온다. 그래도 아직 활부터 안 든다.”

죽이기보다 위치를 찍겠다는 거였다. 저 손은 끝까지 우리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등을 밀었다. 이 길 끝이 우리만의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앞쪽에서 세라가 갑자기 방패를 세웠다.

“멈춰.”

브론이 바로 몸을 구겨 넣어 앞을 만졌다.

“돌살 하나가 내려앉았다.”

나는 벽에 손을 대고 아래 바람을 느꼈다. 기류가 오른쪽 아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막힌 게 아니었다. 위에서 떨어진 납작한 돌판이 사선으로 걸려 길을 반쯤 덮은 상태였다.

“왼쪽 아래 받침 깨면 눕는다?”

내가 묻자 브론이 낮게 답했다.

“그래. 대신 소리가 크다.”

“해.”

망설일 틈이 없었다.

브론이 허리에서 짧은 망치자루를 뽑아 받침 아래에 박았다. 첫 타격은 낮고 둔했다. 둘째는 더 깊이 먹혔다. 셋째에서 돌살 밑 받침이 꺾이며 무게가 한 번에 쏠렸다. 곧장 돌판이 안쪽으로 털썩 누웠다. 막혀 있던 틈 아래로 사람 하나씩 미끄러져 내려갈 만한 경사가 열렸다.

동시에 뒤에서 외침이 터졌다.

“안쪽이다!”

이번엔 가까웠다. 누군가 홈 입구까지 몸을 들이민 것이다.

리에트 화살이 바로 뒤를 갈랐다. 사람을 노린 소리가 아니었다. 화살은 홈 입구 왼편 튀어나온 돌을 때리고 돌가루를 쏟아냈다. 비탈이 얇게 무너지며 뒤에서 욕설이 연달아 올라왔다. 좁은 길에서는 그 반걸음의 멈춤만으로도 충분했다.

“내려!” 세라가 말했다.

그녀가 먼저 누운 돌판 위로 방패를 밀어 내렸다. 돌판 아래는 사람 팔 길이만큼 미끄러진 뒤 작은 턱으로 꺾였다. 세라가 방패를 턱에 먼저 박아 몸을 세우자, 브론이 그 뒤를 타고 내려가 방패를 함께 받쳤다. 나는 셋째로 미끄러지며 손바닥이 돌면에 쓸리는 감각을 참았다. 주머니 안 백은 수액 병 반쪽이 옆구리에 박혔지만 손을 뗄 수는 없었다.

턱 아래는 생각보다 넓었다. 홈이 끝나는 자리는 허리 높이 마른 풀과 검은 자갈이 깔린 얕은 골짜기였다. 양옆으로는 바람에 깎인 돌기둥이 들쭉날쭉 서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전에 물이 지나가며 남긴 굽은 홈이 북서로 이어졌다. 위에서는 좁고 막힌 길 같았지만, 아래에서는 사람 여럿이 낮춰 뛰기에 충분했다. 대신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자갈이 무너져 소리를 크게 냈다.

브론이 바로 쪼그려 앉아 바닥을 훑었다.

“최근에 밟힌 흔적 있다.”

그가 자갈 사이를 가리켰다.

“짐 끈 끝이 한 번 쓸린 자국이야. 사람 한둘이 아니라, 뭔가 들고 지나갔어.”

리에트도 무릎을 꿇었다.

“위에서 내려온 선이 아니다. 골짜기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온 흔적도 섞였어.”

로웬.

아니면 로웬을 쫓던 손.

세라는 방패를 들어 골짜기 위쪽을 한번 가렸다.

“추적은?”

“홈 입구에서 서로 먼저 들어오라고 밀고 있어.” 리에트가 짧게 답했다. “기사단은 세라 얼굴 때문에 함부로 화살 못 쏴. 성도는 반응선이 안쪽에 남았는지 아직 헷갈린다. 오른쪽 셋은 이제야 내려올 각을 잰다.”

그 말끝과 함께 위쪽 어둠에서 작은 돌 하나가 골짜기로 굴러떨어졌다.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

직접 쏘지 않고, 자리를 잃지 않은 채.

나는 고개를 들고 골짜기 앞을 살폈다. 북서 쪽으로 사면이 한 번 더 휘며 낮아지는 자리, 그 너머로 바위 두 개가 문짝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왼편 돌기둥 밑면에는 아주 얇은 칼자국 두 줄이 사선으로 남아 있었다. 자연 균열이 아니었다. 누군가 방향을 읽으라고 남긴 짧은 표식이었다.

주머니 속 금속편 각도와 같았다.

“저기다.”

내가 말했다.

세라가 곧장 시선을 옮겼다.

“표식이야?”

“응. 북서로 한 번 더 꺾으라는 뜻.”

미리엘이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그럼 이 길도 이미 누군가 알고 있었네요.”

“알고 있었지.”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안 그러면 저 위 손들이 저렇게 죽이지도 않고 자릴 재겠냐.”

설명은 길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우리를 회수하려는 줄이 셋이고, 그 셋 바깥에서 우리가 어디로 이어지는지까지 세는 손이 하나 더 있다. 이 골짜기는 우연한 도주로가 아니라 이미 누군가가 쓰던 통로다.

그러면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세라 선두 그대로.”

내가 골짜기 앞 문짝 같은 바위를 짚으며 말했다.

“브론은 둘째로 자갈 무너지는 자리만 막아. 미리엘은 지나간 자리에 젖은 은실 한 번씩만 긁어. 반응 흔적이 아래로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리에트는 마지막까지 위 보는 대신, 이제 오른쪽 옆턱도 같이 봐. 저 손 하나가 우리보다 먼저 돌아들 수 있다.”

리에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은 죽이러 오는 걸음이 아니야. 길 끝을 먼저 보려는 걸음이지.”

“그래서 더 빨라야 해.”

세라는 대꾸 대신 몸으로 먼저 답했다. 그녀가 방패를 앞으로 세워 자갈길 앞쪽 낮은 돌무더기를 밀어 냈다. 굴러간 자갈이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는 이미 위쪽에서 터지는 외침에 묻혔다.

“거기서 멈춰!”

기사단.

“반응자 분리 전 접근 금지!”

성도.

그리고 더 낮고 짧은 한마디.

“끝까지 봐.”

오른쪽 그림자.

나는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건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발을 옮겼다. 골짜기 바닥은 겉보기보다 미끄러웠고, 풀 아래 숨은 돌턱은 자꾸 발목을 잡았다. 세라가 선두에서 한 번 미끄러질 뻔했지만 방패 끝으로 균형을 잡았고, 브론은 뒤에서 돌 하나를 걷어 차며 길을 넓혔다. 미리엘은 지나간 자리에 은실을 스치듯 흘려 아주 약한 떨림을 남겼다. 뒤에서 쫓아오는 이가 있다면, 우리가 곧장 달아난 것이 아니라 골짜기 중간중간 멈춰 다시 무언가를 확인한 것처럼 읽게 만들 흔적이었다.

바위 두 개가 벌어진 자리까지 닿았을 때, 그 안쪽은 생각보다 깊었다. 왼편 벽은 인공적으로 한 번 다듬은 것처럼 평평했고, 바닥에는 물길이 만든 홈 위로 오래된 발판돌 세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그중 맨 앞 발판 가장자리에는 금속이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브론이 바로 낮게 말했다.

“짐 수레는 못 와도 들것이나 작은 상자는 여기로 넘길 수 있겠네.”

사람만 빠지는 길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들고 옮기기 위해 손본 길이었다.

세라도 그걸 읽었는지 턱이 굳었다.

“정식 귀환로보다 이쪽이 먼저 준비돼 있었단 말이군.”

“우릴 살리려고 만든 길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빼내려고 만든 길이지.”

그 말은 누구도 다시 풀어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발판돌을 하나씩 밟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첫째는 미끄럽고 둘째는 비어 있었고 셋째는 바람이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자리와 맞닿아 있었다. 리에트가 셋째에 발을 얹기 직전, 뒤쪽 위턱에서 돌 부딪히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누군가가 마침내 홈 안으로 몸을 넣은 것이다.

“더 빨라진다.” 리에트가 말했다.

“얼마나?”

“기사단 둘, 성도 하나는 아직 서로 고함치고 있어. 그런데 오른쪽 손 하나가 아래로 돌아간다. 우리 앞을 보려는 거야.”

나는 즉시 앞쪽 평평한 벽 아래를 봤다. 벽은 끝나지 않고 왼쪽으로 살짝 꺾여 있었다. 그 아래 바닥에는 말발굽이 아니라 짐 끌개가 한 번 긁고 지나간 긴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쫓아오는 것만 막으면 되는 길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막힐 수 있었다.

“세라, 다음 꺾임 전까지 멈추지 마.”

“알겠다.”

“브론, 셋째 발판 지나면 뒤쪽 둘째 돌만 비워. 쫓아오는 쪽 발 끊기게.”

브론이 바로 웃음기 없이 답했다.

“그건 잘하지.”

그는 지나치며 셋째 발판 옆 느슨한 돌 하나를 일부러 걸쳐 두었다. 뒤에서 급히 밟으면 바로 돌아나갈 자리였다. 미리엘은 그 앞에 은실을 아주 얇게 걸쳐 돌기둥 그림자와 섞이게 만들었다. 보이는 덫은 아니지만, 발을 서두르는 쪽이라면 박자를 잃게 만드는 정도는 됐다.

안쪽 꺾임을 돌자 골짜기 끝이 비로소 열렸다.

정면 아래로는 바람이 마른 흙냄새를 밀어 올리는 낮은 협곡이 길게 이어졌다. 양옆 벽은 무너진 성벽처럼 층이 갈려 있었고, 바닥은 자갈보다 단단한 회색 흙으로 굳어 있었다. 달빛은 직접 들지 않았지만, 위쪽 틈으로 새어든 푸른 빛 덕에 길의 굽음은 읽을 수 있었다. 멀리 아래, 협곡이 다시 한 번 꺾이는 지점에는 사람 손으로 세운 것처럼 반듯한 검은 돌 하나가 반쯤 기울어 서 있었다.

자연 바위치고는 지나치게 곧았다.

리에트가 숨을 낮췄다.

“저 돌.”

“보인다.”

“누가 길잡이로 세운 거야.”

미리엘이 작게 물었다.

“로웬 헤일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보다 먼저 여기 쓰던 손일 수도 있어.”

나는 협곡 아래를 보며 답했다.

“중요한 건 하나야. 위로 돌아가면 저 돌이 가리키는 데까지 영영 못 간다는 거.”

뒤쪽에서 짧은 무너짐 소리가 났다. 브론이 걸쳐 둔 둘째 돌이 누군가 발에 채여 돌아나간 것이다. 곧 욕설 하나가 협곡 입구를 울리고, 누군가가 몸을 다시 세우느라 발을 헛디디는 기색이 들렸다.

브론이 이를 드러냈다.

“한 박자 샀다.”

“그걸로 충분해.”

세라가 이미 협곡 아래로 내려서며 말했다.

그녀는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사단 복귀선이 아니라 우리 쪽 길을 택한 사람의 등처럼 곧았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주머니 속 병 반쪽을 한 번 더 눌렀다. 차갑고 무거운 감각이 손바닥에 확실히 남았다. 엘레나 치료 시한, 지워진 열세 번째 줄, 북서 표식, 회수형 추방 문건. 이제 그건 따로 흩어진 문제들이 아니었다. 우리 다섯을 같은 방향으로 몰아가는 하나의 줄이었다.

협곡 중간까지 내려가자 위쪽 외침이 훨씬 멀어졌다. 성도와 기사단 명령은 여전히 서로 겹쳤지만, 더는 바로 뒤 목덜미에 닿지 않았다. 대신 바람이 협곡 벽을 타고 내려오며 낮은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사이로, 아주 잠깐 금속이 돌에 스치는 맑은 소리가 섞였다.

리에트가 즉시 고개를 들었다.

“앞쪽 오른편.”

세라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사람?”

“확신은 못 해. 하지만 바람 소리는 아니야.”

나는 협곡 오른편 벽을 봤다. 갈라진 틈 하나가 사람 몸 반쯤 숨길 만한 깊이로 파여 있었고, 그 아래 모래에는 막 지워진 듯한 선 하나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방금 몸을 틀며 발끝으로 흔적을 쓸어 없앤 모양이었다.

우리 앞을 먼저 보러 도는 손.

오른쪽 사면 맨 위에 남아 있던 그 그림자가 결국 돌아들고 있는지 모른다.

좋다.

그렇다면 더더욱 서둘러야 한다.

“협곡 아래 검은 돌까지만 간다.”

내가 짧게 말했다.

“거기서 숨 고르고 좌표 맞춘다. 그 전엔 멈추지 마.”

세라가 앞에서 방패를 조금 더 치켜들었다.

브론은 뒤를 한 번 돌아본 뒤 망치자루를 고쳐 쥐었다.

미리엘은 은실을 손등에 다시 감아 넣었다.

리에트는 활을 완전히 내려 쏘는 대신, 언제든 들어 올릴 높이로만 들었다.

다섯 사람의 간격이 자연스럽게 맞아 들어갔다.

선두는 길을 열고,

둘째는 무너질 자리를 읽고,

가운데는 순서를 붙들고,

넷째는 흔적을 흐리고,

후미는 시야를 닫는다.

따뜻한 이름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누가 어느 자리에 서야 사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북서 협곡 아래, 반듯하게 기울어 선 검은 돌을 향해 몸을 낮췄다. 위에서는 아직도 서로 다른 명분이 뒤엉킨 목소리가 늦게 따라왔고, 오른편 틈에서는 정체를 숨긴 금속음이 한 번 더 짧게 스쳤다.

돌아갈 집은 저 위에 없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만, 누군가 먼저 세워 둔 표식처럼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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