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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의 대가

회색 종루 북하단으로 내려붙는 반턱은 사람 하나가 겨우 어깨를 비틀어 통과할 폭이었다. 왼쪽 암벽은 팔꿈치를 긁을 만큼 가까웠고, 오른쪽 아래로는 검은 자갈과 끊어진 목재 조각이 겹쳐진 낭떠러지가 급하게 꺼졌다. 정면 건너편 절벽에는 회색 돌기둥 하나가 반쯤 박힌 채 서 있었고, 그 둘째 층쯤에서 무너진 운반 발판이 비스듬히 튀어나와 있었다. 발판 아래 어둠 속에는 낮은 철문이 잠겨 있었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안의 상자와 병을 밀어 내리거나 다시 끌어올릴 때 쓰는 문이었다.

세라는 방패를 암벽 쪽으로 눕혀 우리 실루엣을 한 덩어리로 가렸다. 브론은 선두 둘 사이에 끼어 발끝으로 떠 있는 돌만 골라 아래로 차 냈고, 미리엘은 바람을 따라 내려오는 냄새를 짧게 나눠 맡았다. 오래된 기름,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 쇠, 약재를 담았던 병 입구에만 남는 싸한 향이 한데 섞여 있었다. 리에트는 반턱 뒤쪽으로 몸을 비틀어 우리가 지나온 협곡 굽이와 종루 아래 발판 왼쪽 그늘을 번갈아 훑었다. 뒤따르는 손이 아직 화살을 쏘지 않는 건, 우리가 어느 문으로 먼저 붙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금속패를 손안에서 한 번 더 펼쳐 보았다. `병 1 / 석편 / 음성 / 회색 종루 북하단`. 아까까지는 문장이었다. 지금은 실제 높이와 거리, 먼저 닿아야 할 철문의 위치까지 붙은 좌표가 됐다. 엘레나 시간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도, 로웬이 남긴 기록도, 누군가 지워 버린 열세 번째 줄의 흔적도 전부 저 아래층 어둠 안에 몰려 있었다.

세라가 손등만 들어 올렸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반턱 끝에서 종루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은 더 위험했다. 바닥이 평평하게 이어지지 않고, 한번 잘린 자리마다 목재 쐐기와 녹슨 쇠못이 반쯤 박힌 채 남아 있었다. 누군가 예전에 발판을 덧대어 다녔고, 나중엔 일부러 걷어 낸 흔적이었다. 정면으로 내려서면 아래에서 실루엣이 먼저 뜬다. 옆 틈으로 돌아 붙으면 시간은 더 걸리지만 발판 밑 어둠을 먼저 잡을 수 있다.

“정면으로 내려가면 아래에서 다 보여.”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브론이 한쪽 무릎을 꿇고 끊어진 쐐기 자리를 만졌다.

“그리고 여기, 한 번만 쓴 길이 아니야. 못머리 닳은 결이 둘이야. 위에서 물건 내리던 손이 있고, 아래서 다시 올리던 손도 있었다.”

세라는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정면 포기. 옆 틈으로 붙는다. 내가 먼저.”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틀었다. 방패를 앞세우지 않고 왼어깨로 암벽을 밀듯 움직였다. 덕분에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사람보다 회색 돌이 먼저 보였을 것이다. 브론이 바로 뒤에서 바닥 틈에 남은 쇠못을 짧게 비틀어 뽑아 냈다. 뒤따라오던 손이 같은 자리만 믿고 발을 놓으면 한 번 더 멈추게 만들려는 계산이었다.

아래로 반 층 내려서자 철문이 더 선명해졌다. 문의 높이는 세라 어깨보다 조금 높았고, 폭은 들것 하나를 옆으로 밀어 넣기 딱 좋았다. 문 앞 바닥은 자연석이 아니라 얇은 판석을 덧댄 선이 두 줄로 이어져 있었다. 판석 사이엔 가는 홈이 패여 있었고, 홈 끝은 발판 쪽이 아니라 문 안으로 향했다. 물건을 밖으로 내보내기보다 안으로 밀어 넣을 때 더 잘 맞는 자리였다.

미리엘이 문 가까이 가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향유보다 보존액 냄새가 더 강해요.”

“정화실 냄새냐.” 세라가 묻자 미리엘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람을 고치는 방보다, 상한 걸 늦추는 방에 가까워요. 상처를 닫는 냄새가 아니라 상태를 붙잡아 두는 냄새예요.”

브론이 철문 오른쪽 아래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탁, 하고 속 빈 울림이 났다.

“문 하나 뒤에 방 하나가 아니네. 안쪽에 짧은 통로가 더 있다. 그리고 문턱이 낮아. 들것보다 상자, 상자보다 병 선반이 먼저 드나든 자리다.”

나는 문틀 아래 남은 금속 태그 홈을 봤다. 누군가 이름표를 걸었다 떼어 낸 듯 네모난 자국이 여러 개 줄지어 있었다. 사람 이름을 적는 높이가 아니었다. 물건표를 거는 자리였다.

“치유실이 아니라 보관칸이군.” 내가 말하자 브론이 씁쓸하게 웃었다.

“치유가 필요해도 먼저 칸에 넣는 놈들 방식이지.”

세라는 철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 짧게 물었다.

“열 수 있나.”

브론은 손잡이를 보지 않고 문틀 위쪽 세 개의 작은 구멍부터 확인했다.

“잠금은 밖에서 거는 방식이 아니다. 안에서 밀어 닫으면 바깥 손잡이로는 반쯤만 풀려. 누가 급히 나가거나 급히 들이밀 때 쓰는 문이야.”

“부술까?”

“부수면 소리 난다.” 리에트가 곧장 잘랐다. “뒤 손이 가까운 걸 잊지 마.”

나는 문 아래 판석 홈에 부적을 가까이 댔다. 금속이 뜨겁게 뛰진 않았다. 대신 로웬 메모 끝에 있던 잘린 방향 기호와 같은 각으로, 문 왼편 돌기둥 아래를 향할 때만 얇게 떨었다.

“여기.”

나는 돌기둥 밑면의 검은 때를 손톱으로 긁었다. 오래된 기름과 먼지가 벗겨지자 안쪽에 눌린 철심이 드러났다. 브론이 바로 알아봤다.

“운반 걸쇠다. 바깥 손잡이 당기는 게 아니라, 이걸 먼저 눌러 안쪽 빗장을 한 칸 푸는 방식이야.”

세라가 몸을 기울여 철심을 눌렀다. 브론이 동시에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눌린 쇳소리가 짧게 울린 뒤, 철문이 손바닥 한 마디만큼 안쪽으로 밀렸다. 완전히 열리진 않았지만 틈은 생겼다. 그 틈에서 더 차갑고, 더 마른 냄새가 새어 나왔다.

약재 보관칸이었다.

안쪽 첫 통로는 낮고 좁았다. 오른쪽 벽엔 병목이 스치며 남긴 둥근 긁힘이 층층이 이어졌고, 왼쪽에는 손잡이 없는 얕은 서랍칸이 허리 높이마다 파여 있었다. 통로 끝 작은 방은 사람 다섯이 서면 꽉 찰 정도였지만, 벽 세 면을 따라 선반이 박혀 있었다. 들어온 문은 등 뒤에, 선반은 정면과 좌우에, 가장 안쪽 선반 뒤에는 손 한 뼘쯤 더 두꺼운 판석 벽이 붙어 있었다. 선반 절반은 비어 있었고, 나머지엔 깨진 병목, 두꺼운 마개, 기름 먹은 헝겊 조각이 남아 있었다.

미리엘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숨을 눌렀다.

“빛 가리지 마세요.”

그녀는 횃불을 높이 들지 못하게 손으로 막고 가장 안쪽 선반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선반 가운데 하나엔 병을 눕혀 고정하던 반달 홈이 다른 자리보다 깊게 패여 있었다. 그 옆에 남은 은회색 찌꺼기가 돌 표면에 얇게 눌어붙어 있었다. 그 자리 둘레만 먼지선이 끊겨 있었고, 선반 가장자리엔 최근에 헝겊으로 한 번 닦은 듯 길게 훑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기 있었어요.”

미리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완성형 백은 수액 보관병 자리예요.”

내 목이 저절로 굳었다.

“비었잖아.” 브론이 먼저 말했다.

“자리만 보고도 알아요?” 세라가 묻자 미리엘은 무릎을 꿇고 찌꺼기를 손끝에 묻혀 냄새를 맡았다.

“정제 비율이 달라요. 일반 회복제는 이렇게 눌어붙지 않고, 정화제는 냄새가 더 매워요. 백은 수액은 은향이 남는데, 완성형은 반응을 오래 묶기 위해 보존층이 더 두껍게 감겨요.”

그녀는 내 쪽을 돌아봤다.

“당신이 가진 반쪽은 급한 악화를 늦추는 수준이에요. 불이 번지는 속도를 누를 수는 있어도, 뿌리째 식히진 못해요. 완성형은 다릅니다. 최소한 상한 줄기가 더 깊게 갈라지는 건 막을 시간을 벌어요.”

“엘레나를 고칠 수 있나.”

내 질문은 생각보다 메마르게 나갔다.

미리엘은 바로 희망을 주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단정 못 해요. 성흔열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봉인 부산물이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봐야 해요. 하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그녀는 빈 병자리와 내 주머니를 번갈아 봤다.

“지금 가진 반쪽만으로는 모자라요. 시간을 조금 늦출 수는 있어도, 엘레나를 그 문 앞에 계속 세워 둘 거예요.”

세라 턱선이 더 굳었다.

브론은 빈 선반 아래 바닥을 살폈다. 병이 깨진 자리는 아니었다. 누군가 병을 꺼낸 뒤, 자리까지 닦아 내고 떠난 흔적이었다. 다만 선반 맨 아래 틈에서 반쯤 깨진 작은 유리 파편이 하나 굴러 나왔다. 안쪽에 은회색 막이 얇게 말라붙어 있었다.

미리엘이 그 파편을 받아 들고 짧게 숨을 삼켰다.

“완성형이 맞아요.”

그녀는 파편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문질렀다.

“말라붙은 막이 아직 부서지지 않았고, 향도 남아 있어요. 여긴 바람이 드니까 오래 놔두면 이렇게 남지 않아요.”

“얼마나 최근인데.” 리에트가 통로 쪽을 감시한 채 물었다.

“며칠. 길어야 열흘 안쪽.”

열흘.

엘레나에게 남은 유예보다 길지 않았다.

누군가는 우리가 던전에서 기어 나오는 동안 이 병을 옮겼다.

세라는 그 계산을 나와 같은 속도로 끝낸 얼굴이었다.

“그럼 완성형은 종루 아래에 있었고, 최근에 빠져나갔다.”

“다 빠져나간 건 아닐 수도 있어.” 브론이 곧장 반박했다. “보관칸 하나면 출구도 하나라는 법은 없지.”

그는 선반 뒤쪽을 두드리다 가장 안쪽 판석 하나에서 손을 멈췄다. 다른 판석보다 울림이 얕았다.

“여기 뒤에 얇은 빈 공간이 더 있어.”

세라가 방패 끝으로 선반 아래 짐을 치웠다. 브론이 판석 틈에 못머리를 끼워 비틀자, 손바닥 넓이만 한 얇은 덮개가 안으로 밀렸다. 그 뒤엔 병이 아니라 납작한 보관 상자 하나와 검은 밀랍으로 봉해 둔 둥근 금속통이 나란히 끼워져 있었다.

내 심장이 한 번 세게 뛰었다.

금속통 한쪽엔 닳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음성`

브론이 상자보다 금속통을 먼저 꺼내려 하자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문 쪽.”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바깥에서 자갈이 한 번, 두 번 밀렸다. 종루 아래 발판 왼쪽 그늘을 지키던 리에트의 시야에 뭔가가 스쳤다는 뜻이었다. 바로 들이닥치는 발소리는 아니었다. 대신 누가 우리가 문을 연 걸 알고, 어느 쪽으로 빠질지 각을 재는 소리였다.

세라는 지체하지 않았다.

“브론, 하나만 꺼내. 전부 펼치지 마.”

브론이 금속통부터 집어 들었다. 손바닥 두 개 길이의 둥근 통이었다. 윗면엔 오래된 홈이 세 줄, 옆면엔 얇은 회전 고리 하나가 달려 있었다. 미리엘이 그걸 보자 눈빛이 달라졌다.

“이거, 성도 낭독통과 비슷해요. 글을 적는 게 아니라 짧은 음성각인을 봉해 두는 통.”

“전부 재생할 수 있나.”

“바로는 힘들어요. 고리가 닫힌 상태면 억지로 열 때 안쪽 각인이 깨질 수 있어요.”

브론이 옆면을 만져 보고 혀를 찼다.

“한 번 누가 열려다 만 흔적 있다. 힘으로 비틀면 망가진다.”

나는 금속통을 받아 들었다. 차갑지 않았다. 오래 사람 손을 탔던 물건처럼 미세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윗면 첫 줄을 엄지로 누르자, 아주 약한 진동이 손끝에 스쳤다. 통 전체가 열리진 않았지만 첫 봉함 하나가 미세하게 풀렸다.

그 직후, 금속통 안쪽에서 숨을 삼킨 듯한 잡음이 짧게 흘렀다.

그리고 목소리.

`…열세 번째 줄은…`

갈라진 음성이었다. 로웬과 완전히 같다고 단정할 순 없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낮고 마른 숨결과 닮아 있었다.

잡음이 한 번 더 끼어들었다.

`유예는… 치료가 아니라…`

뒤 문장이 끝나기 전에 통이 스스로 잠겼다. 미리엘이 놀라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더 누르지 마요.”

그녀가 속삭였다.

“다음 봉함선이 아직 안 풀렸어요. 순서 틀리면 안쪽 각인 자체가 엉킬 수 있어요.”

세라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조건이 뭔데.”

브론은 금속통 밑면을 뒤집어 보았다. 밑바닥엔 아주 얇게 새겨진 세 글자가 있었다.

`상층 합`.

“합?” 세라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는 먼저 뜻을 더듬었다.

“우선은 상층에서 가져와 맞춰야 하는 다른 조각이 있다는 뜻으로 읽혀.”

나는 금속패의 `병 1 / 석편 / 음성` 줄을 떠올렸다.

“병이랑 음성만 적힌 게 아니라 석편도 같이 묶였잖아. 위쪽에서 챙긴 조각이 열쇠일 가능성이 먼저야.”

미리엘이 금속통 바닥을 다시 들여다봤다.

“다만 `합`이라는 말은 물건만 맞춘다는 뜻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역할이나 순서를 다시 맞춰야 한다는 표기일 때도 있거든요.”

브론이 짧게 코웃음 쳤다.

“어느 쪽이든 여기 바닥에 서서는 다 못 푼다는 소리네.”

리에트는 문 쪽 그늘을 보며 낮게 덧붙였다.

“그리고 바깥 손도 기다려 주지 않아.”

맞았다. 음성 기록은 전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확한 압박만 남겼다. 유예는 치료가 아니라는 말. 누군가 그걸 음성으로까지 남겨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다음 봉함을 열 조건이 아직 우리 손에 다 없다는 뜻.

브론은 그제야 납작한 상자 쪽으로 손을 옮겼다. 상자 안엔 병이 없었다. 대신 얇은 계약 태그 세 개와 작게 접힌 분류표 한 장, 손톱만 한 은회색 결정 조각 둘이 들어 있었다.

미리엘이 분류표를 펼치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정화 연장 대상`

`반응 억제 유지 시 우선`

`완치 판정 유보`

`보관 협조자 지정`

그녀는 끝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못했다.

내가 종이를 받아 마지막 줄을 직접 봤다.

`장기 관리 전환 권고`

완치가 아니라 관리.

유예가 끝나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계약.

세라가 아주 짧게 물었다.

“이게 성도 방식이냐.”

미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그 대신 태그 하나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작은 구멍 두 개와 가는 사슬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목에 거는 표식이었다.

“살린 뒤 놓아주는 양식이 아니에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엘레나를 붙잡아 둘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붙잡음은 사람을 밖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게 아니라, 문 안에 오래 남겨 두기 위한 방식이었다.

나는 상자 안 결정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빛을 받자 안쪽에 아주 작은 기포선이 열세 갈래처럼 갈라져 있었다. 엘레나 팔목에 번져 가던 금과 닮은 모양이었다. 미리엘도 그걸 보자 입술을 깨물었다.

“성흔열 반응을 재던 기준 조각일 가능성이 커요.”

브론이 상자 바닥을 다시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이 종루는 병만 숨긴 데가 아니네. 상태를 재고, 기록을 남기고, 다시 옮기는 중계칸이야.”

세라가 금속통과 분류표, 결정 조각, 빈 병자리를 차례로 봤다.

“치유실이 아니라.”

“보관칸.” 내가 말했다.

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기록, 운반, 보관을 한 군데서 돌리던 하단 중계칸이지. 병 하나만 챙긴다고 끝날 판이 아니야. 누가 병을 쥐고, 누가 기록을 쥐고, 누가 판정 기준을 쥐느냐가 다 따로 놀게 돼 있어. 그래서 사람도 물건도 같은 방식으로 떼는 거고."

그 말이 끝나자 바깥에서 금속이 돌을 스치는 소리가 이번엔 더 가깝게 났다.

리에트가 활을 바로 들었다.

“발판 왼쪽 그늘. 하나는 확실해.”

세라가 방패를 들어 문 앞을 막았다.

“둘로 나눈다. 브론은 금속통과 상자. 에이드리언은 분류표와 결정 조각 하나. 미리엘은 빈 병자리 찌꺼기와 유리 파편. 리에트는 뒤 시야 계속.”

나는 분류표를 접으며 마지막으로 빈 병자리를 봤다. 완성형은 여기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빠져나갔다. 하지만 누군가는 병만 빼 가고, 유예의 진짜 뜻과 기록의 일부는 남겨 두었다. 우리 같은 누군가가 나중에라도 이 칸의 말을 읽게 하려고.

세라는 문짝 안쪽 고리에 방패 끝을 걸어 철문을 반만 닫히게 세웠다. 브론은 뽑아 둔 쇠못 하나를 경첩 아래 틈에 끼워, 뒤에서 무턱대고 밀면 한 박자 걸리게 만들었다. 리에트는 그 틈 너머 그늘을 노린 채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고, 미리엘은 통로 벽에 손가락을 문질러 남은 은회색 막을 천 조각에 쓸어 담았다.

금속통이 내 손안에서 아주 미세하게 한 번 더 떨었다. 막 닫힌 봉함선 아래로, 이번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잡음 하나가 새어 나왔다.

`…북하단에 오래 두지 마라…`

그 짧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자갈이 크게 무너졌다.

세라가 몸을 돌렸다.

“붙었다.”

브론은 상자를 품 안에 넣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좋지. 이제 확실하네. 종루는 약방이 아니라 창고야. 더 정확히는, 사람 목줄을 약병 냄새로 감추던 창고.”

미리엘이 유리 파편을 천 조각에 감싸며 낮게 말했다.

“그리고 완성형이 여기 있었다는 건, 엘레나 같은 환자를 잠깐 붙잡아 두는 계약선도 실제로 돌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나는 금속통과 분류표를 옷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희망은 생겼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장 길이 되지 않았다. 누가 그 병을 쥐고 누구를 어디까지 묶어 둘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더 단단한 쇠고리로 돌아왔다.

세라가 짧게 손짓했다.

“나간다. 왔던 길 말고 아래 발판 음영으로 빠져.”

리에트는 활끝을 문 바깥 어둠에 고정한 채 낮게 덧붙였다.

“뒤 손은 아직 우리가 전부 찾았는지 몰라. 그 착각, 조금만 더 쓰자.”

브론은 마지막으로 보관칸 안을 돌아보고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병 하나만 찾는 놈은 여기 판을 반밖에 못 읽었을 테니까."

회색 종루 북하단은 치료실이 아니었다.

기록을 봉하고, 병을 숨기고, 상태를 재고, 사람을 오래 붙들 방법을 같은 칸에서 나누던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완성형 백은 수액의 자리와 유예의 진짜 뜻을 모두 안 채 그 칸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세라가 먼저 문을 밀었다. 방패 끝에 걸어 둔 고리를 빼자 철문이 한 번 떨었고, 브론이 경첩 밑에 끼워 둔 쇠못을 반쯤만 빼 두었다. 누가 뒤에서 급히 밀면 바로 열리는 게 아니라 한 번 씹히게 만드는 각이었다. 리에트는 그 틈으로 몸을 반쯤 내밀어 발판 왼쪽 그늘을 훑었다. 바람이 아래서 위로 말려 올라왔고, 그 사이에 사람 숨보다 마른 마찰음 하나가 섞였다.

“왼쪽 아래.”

그녀가 속삭였다.

“발은 멈췄어. 우리를 기다리는 쪽이야.”

세라는 문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 내 어깨 하나 통과할 만큼만 틈을 만들고, 방패를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세웠다. 정면에서 보면 빈 문틈보다 회색 쇠면이 먼저 보이게 하는 각이었다.

“브론, 아래 발판부터.”

브론이 몸을 낮춰 먼저 빠져나갔다. 문 바로 아래에는 썩은 널판이 반쯤 떨어진 채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사람이 한 줄로 옮겨 설 수 있는 좁은 음영 턱이 이어졌다. 그는 망치 손잡이 끝으로 널판 한쪽을 눌러 보고, 체중을 실어도 버티는 돌줄만 짚어 짧게 손짓했다.

“가장자리 말고 안쪽. 바깥쪽 판은 비었어.”

세라가 둘째, 내가 셋째로 빠져나왔다. 발판 음영은 안에서 본 것보다 더 좁았지만, 위쪽 종루 벽이 돌출돼 있어 아래 사면에서 올려다보면 몸이 바로 드러나지 않았다. 오른쪽은 곧장 낭떠러지였고, 왼쪽 종루 벽엔 밧줄이 여러 번 스치고 간 듯한 검은 홈이 세 줄 나란히 남아 있었다. 홈 아래에는 쇠고리 두 개가 낮게 박혀 있었는데, 하나는 오래 녹아 있었고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마찰된 듯 테두리만 밝게 드러나 있었다.

브론이 그 밝은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최근에 위로 올린 놈이 있다.”

“병?” 세라가 묻자 그는 바로 단정하지 않았다.

“병만은 아니야. 하중이 생각보다 길게 걸렸어. 상자나 통, 혹은 둘 다.”

미리엘이 내 바로 뒤로 빠져나오며 종루 벽 가까이 코를 대듯 숨을 들이켰다.

“은향이 위로 더 진해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보관칸 안보다 위쪽 틈새에서 더 남아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위 칸으로 한 번 더 옮겼을 가능성이 커요.”

상층 합.

나는 금속통 밑면의 세 글자를 다시 떠올렸다. 상층에서 맞춰야 할 다른 조각. 방금 전까지는 가설이었는데, 이제는 운반 흔적이 붙었다. 누군가는 완성형과 기록 일부를 이 북하단에 오래 두지 않았고, 더 위 칸이나 다른 결합점으로 옮겼다.

그때 아래 그늘에서 자갈 하나가 짧게 튀었다.

리에트의 화살이 먼저 움직였다. 시위를 끝까지 당기지 않은 짧은 견제사였다. 화살촉이 그늘 앞 돌을 스치며 튀자, 아래쪽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몸을 물렸다. 사람 크기였지만 정식 기사단 장비처럼 무겁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위치를 찍고 빠지는 손이었다.

“맞히지 마.” 내가 낮게 말했다.

리에트도 이미 같은 판단을 끝낸 눈이었다.

“안 죽이는 쪽이 더 말해 주지.”

세라는 한쪽 무릎을 굽혀 방패를 턱 아래까지 올렸다. 아래 사면에서 쏘면 방패에 먼저 걸리고, 위쪽 종루 틈에서 누가 내다봐도 우리 숫자가 바로 읽히지 않는 자세였다.

브론은 발판 끝에서 몸을 비틀어 종루 벽 오른쪽 아래를 살폈다. 음영 턱이 안쪽으로 한 번 더 꺾이는 자리, 사람 한 명이 쪼그려 앉을 만큼의 좁은 작업칸이 숨어 있었다. 그 바닥에는 끊어진 밧줄 섬유 두 가닥과, 손톱만 한 흰 밀랍 조각 하나가 굴러다녔다.

그가 그걸 집어 들고 혀를 찼다.

“보관칸 은닉통이랑 같은 밀랍이다. 아래에서 바로 뺀 게 아니라, 여기서 한 번 묶고 위로 넘겼어.”

미리엘이 밀랍 조각을 받아 냄새를 맡았다.

“향도 같아요. 병 마개 봉함에 쓰던 계열이에요.”

세라 시선이 종루 윗벽의 검은 틈으로 올라갔다.

“그럼 완성형은 이미 상층으로 간 거군.”

“혹은 상층에서 다음 판정을 기다리는 거겠지.” 내가 말했다.

사람을 먼저 붙들고, 상태를 재고, 기록을 따로 떼고, 물건을 다시 올리는 구조. 북하단은 끝이 아니라 하단 중계칸이었다. 음성 기록에 붙은 `상층 합`도, 완성형 빈 자리도, 방금 찾은 밧줄 홈과 밀랍 조각도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리에트가 다시 속삭였다.

“둘이 됐다.”

아래 그늘 왼쪽과, 우리가 지나온 반턱 위쪽. 추적 손이 서로 다른 높이에서 각을 좁히고 있었다.

세라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멈춰 싸우면 여기서 갇힌다. 음영 턱 따라 오른쪽 꺾인 자리까지 간다. 거기서 위 칸 올라가는 틈이 있는지 본다.”

브론이 먼저 상자를 품 안 깊숙이 밀어 넣고 망치를 다시 쥐었다.

“좋아. 여긴 운반용 턱이니까, 작업손 빠지는 보조 홈도 있을 거다.”

나는 금속통을 옷 안쪽에 더 눌러 넣으며 마지막으로 아래 그늘을 봤다. 저 손들이 원하는 건 우리 목숨만이 아니었다. 누가 병을 가졌는지, 누가 기록을 읽었는지, 누가 먼저 다음 칸에 닿는지가 더 중요했다.

세라가 손을 내렸고, 우리는 한 줄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패가 앞을 가리고, 브론이 발판의 버티는 줄을 찍고, 내가 가운데서 거리와 순서를 맞추고, 미리엘이 종루 벽 틈새 냄새를 따라 위 칸 방향을 더듬고, 리에트가 두 개의 그늘 사이를 번갈아 겨눴다.

한 발 옮길 때마다 종루 벽 안쪽 어딘가에서 낮은 울림이 따라왔다. 바람이 빈 칸을 통과하며 내는 소리가 아니라, 위아래 칸이 아직 같은 구조물로 이어져 있다는 증거였다. 아래칸에서 남은 기록이 끊긴 곳, 완성형이 빠져나간 줄, 다음 봉함이 열릴 자리까지 전부 이 벽 안에서 한 줄로 이어지고 있었다.

회색 종루는 약을 숨긴 곳이 아니었다.

약도 기록도 사람도 따로 떼어 오래 붙들어 두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완성형 백은 수액이 올라간 상층과 `상층 합`이 뜻하는 다음 문턱을 향해 같은 종루를 더 깊이 타고 올라가야 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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