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고백
미리엘이 꺼낸 첫 조각이 떨어지자 다섯 칸 가운데 오른쪽 끝 하나가 아주 얕게 빛났다. 빛은 환하지 않았다. 젖은 종이 밑에서 번지는 푸른 먹물처럼 바닥에 낮게 고였다. 칸 안쪽의 작은 홈은 미리엘의 은실과 이어졌고, 그 선은 다시 세라의 방패 아래, 리에트의 활 사선, 브론의 쐐기, 내가 비껴 선 열세 번째 잔선까지 가느다랗게 훑고 지나갔다.
착지대는 아직 넓어지지 않았다. 정면의 문틀은 반쯤 열린 채 어둠을 물고 있었고, 위 계단에서는 장대 끝이 돌벽을 더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세라는 문과 계단 사이에 방패를 비스듬히 세웠다. 방패 왼쪽 모서리는 내 어깨에 닿았고, 오른쪽 모서리는 아래 색인판으로 튀어 오를 수 있는 장치를 눌렀다. 리에트는 한 칸 높은 돌턱에서 활을 위로 겨누되, 눈은 우리 발밑의 칸을 놓치지 않았다. 브론은 문턱 오른쪽에 박은 쐐기 둘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새 홈을 찾았다. 미리엘은 방금 빛난 칸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었다. 도망치려면 바로 위로 돌아서야 했지만, 위에는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앞으로 가려면 아래 칸이 요구하는 답을 지나야 했다.
다섯 칸은 우리를 둘러싸지 않았다. 더 불쾌하게도, 우리가 이미 서 있던 자리를 뒤늦게 드러냈다. 세라의 방패 자리 하나. 리에트의 위턱 사선 하나. 미리엘의 은실이 떠는 홈 하나. 브론의 쐐기와 보강층 사이 하나. 그리고 내 발뒤꿈치와 열세 번째 잔선이 맞물린 가장 안쪽 자리 하나. 누군가 우리를 끌고 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서도록 몰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색인판 안쪽에서 얇은 금속판이 맞물렸다.
“부분 응답 접수.”
평평한 음성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잔여 칸 제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에서 첫 돌조각이 떨어졌다. 세라가 방패를 들어 받아 냈다. 충격이 철판을 타고 내 팔까지 내려왔다. 리에트의 화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쏘지 않았다. 아직 쏘면 안 되는 거리였다.
미리엘은 자기 칸이 빛난 걸 보고도 숨을 고르지 못했다. 손끝은 은실을 쥐었고, 눈은 색인판이 아니라 세라의 방패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첫 답을 냈지만, 그것만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안 얼굴이었다.
세라가 짧게 말했다.
“내가 먼저 한다.”
그녀는 미리엘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았다. 방패를 정면에 남긴 채, 오른발만 칸에 맞춰 반 치 옮겼다. 하중을 놓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감정을 토로할 자세가 아니라, 문서 한 줄을 자기 몸으로 증명해야 하는 자세였다.
“왕립기사단 후보 세라 벨로네.”
방패 윗면에 장대 끝이 다시 닿았다. 세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대상 접촉 시 보고. 단독 이탈 금지. 현장 위험 확대 시 담당자 재량 보호 가능. 상급자 도착 시 인계 우선.”
단어들은 칼보다 차갑게 떨어졌다. 그녀가 나를 보호하러 온 사람인지 감시하러 온 사람인지 묻던 말들이 한꺼번에 형태를 얻었다. 세라는 그 문장을 변명처럼 다루지 않았다. 실제로 자기가 들고 온 명령을 칸 위에 내려놓듯이 말했다.
“나는 네 편으로 배속된 게 아니었다.”
방패 모서리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위 장대가 그 틈을 타고 미끄러지려 하자 리에트의 화살 하나가 날아가 장대 끝 쇠고리를 찍었다. 쇠고리가 계단벽에 부딪혀 튀었다. 세라는 그 짧은 틈에 숨을 한 번 삼켰다.
“처음엔 너를 잃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아. 너를 사람으로 붙들라는 말이 아니었다. 위에서 요구하면 바로 넘기기 쉽게, 현장에서 먼저 떨어뜨리지 말라는 뜻에 더 가까웠다.”
그녀의 눈은 내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오래 보면 말이 흐려질 걸 알기라도 한 듯, 바로 문틀로 돌아갔다.
“보고를 늦춘 것도 신뢰 때문만은 아니야. 네 이름이 올라가면 성도와 기사단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러면 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네가 정하기 전에, 어느 마차에 실을지부터 정해진다. 그래서 늦췄다. 봉쇄를 늦추려고.”
두 번째 칸 아래 잔선이 밝아졌다. 방패 아랫변을 누르던 하중이 아주 잠깐 가벼워졌다가 다시 걸렸다. 색인판은 세라의 사과를 들은 게 아니었다. 세라가 서 있던 줄의 이름을 확인한 듯했다.
나는 세라의 말보다 그녀 손을 먼저 보았다. 방패 손잡이를 쥔 손등이 찢어져 피가 번졌는데도, 그녀는 손을 털지 않았다. 방금 말한 조항이 무엇이든, 지금 그 손은 내 앞에서 방패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모든 불신을 지우지는 못했다. 다만 불신 위에 당장 밟을 수 있는 돌 하나를 놓았다.
미리엘이 그 돌을 보듯 숨을 들이켰다.
“저도 끝까지 말할게요.”
그녀는 이미 한 조각을 냈지만, 색인판 앞에서 다시 자기 이름을 댔다.
“성도 정리실 하급 사제 미리엘 하센.”
은실 끝이 첫 번째 빛난 칸 안쪽에서 떨었다. 그녀는 입으로 교리문을 외우던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다. 손으로 장부를 넘기던 사람이 기억나는 칸 위치를 따라 읽듯 말했다.
“회수 보류 문장 이관. 삭제 교리 색인 정리. 보관자 확인 전 임시 침묵. 기록 계통 재개 시 외부 낭독 금지. 왕좌 계열은 현장 보고보다 상위 봉쇄 절차 우선.”
말이 길어질수록 미리엘 얼굴은 하얗게 식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듬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베껴 쓴 말이라 몸이 먼저 기억하는 목소리였다.
“저는 치료 보조로 내려온 줄 알았어요.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그녀는 허리춤의 작은 약주머니를 만졌다가 바로 손을 뗐다. 약주머니를 붙잡으면 거기에 숨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임무문엔 환자라는 말보다 반응 확인이라는 말이 더 가까이 있었어요. 누가 다쳤는지보다, 무엇이 어떤 이름에 반응하는지 먼저 적게 되어 있었어요. 에이드리언 님을 살피라는 명령과, 에이드리언 님을 어디에 넘길지 확인하라는 명령이 한 문장 안에 붙어 있었어요.”
세라의 방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분노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미리엘은 세라를 보지 않았다. 나를 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색인판에 자기 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넘기면 사람으로 안 남아요. 장부에 남는 건 이름이 아니에요. 어느 담당자에게, 어느 봉함 아래, 어떤 말은 금지된 채로 넘어갔는지만 남아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더는 성도 쪽 문장으로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오른쪽 끝 칸의 빛이 깊어졌다. 은실 하나가 칸 안으로 끌려 들어갈 듯 팽팽해졌다가, 미리엘이 손목을 돌리자 다시 바깥으로 풀렸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자기 도구를 빼앗기지 않았다. 그 작은 움직임이 그녀의 선택처럼 보였다. 성도가 준 실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실이 끌려가는 방향만은 거부한 선택.
위 계단에서 낮은 욕설이 들렸다. 적들이 이제 우리 목소리를 알아들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장대 끝이 푸른 잔선 위로 한 번 더 내려왔다. 리에트가 이번에는 쏘지 않고, 화살촉만 장대가 들어온 틈 바로 옆에 고정했다. 그녀는 위를 보는 동시에 아래를 읽고 있었다.
“내 차례.”
리에트는 이름을 낮게 말했다.
“서방 숲 감시단 비공식 추적자, 리에트 아르셸.”
세라는 그녀를 노려봤다.
“비공식이라.”
“공식이면 여기서 네게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
리에트는 대꾸를 짧게 자르고, 자기 칸 앞에 발끝을 맞췄다. 활시위는 여전히 당긴 채였다. 그녀에게 고백은 무장을 내려놓는 일이 아니었다. 쏠 수 있는 자세에서 자기 목적만 꺼내 놓는 일이었다.
“나는 원정대에 합류하러 온 게 아니다. 북서 사면의 먼저 밟힌 흔적, 엘프식 지움 자국, 로웬 헤일이 남긴 길표시가 같은 방향으로 꺾이는지 확인하러 왔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지 않았다. 위 계단의 그림자 하나가 얼마나 내려왔는지 재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네가 미끼인지, 운반자인지,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밖으로 던진 흔적인지 보려고 했다. 구하러 온 것도 아니고, 믿으러 온 것도 아니야. 숲에서 놓친 줄 하나가 네 발밑까지 이어지는지 보러 왔다.”
내 가슴 안쪽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세라가 숨겼던 문서와 다른 종류의 배신이었다. 그래도 리에트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 행동을 좋게 포장하지 않았다. 구원도, 호의도, 운명도 붙이지 않았다. 목적을 벗겨 놓으니 남은 건 추적자의 차가운 눈뿐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내려오니 계산이 바뀌었다.”
리에트가 활끝으로 위 계단, 색인판, 내 발밑 잔선을 차례로 찍었다.
“왕국은 붙잡는 말을 줬고, 성도는 넘기는 말을 줬고, 누군가는 길을 먼저 밟아 우리가 쫓기게 만들었다. 브론은 금속 냄새를 따라왔고, 나는 지워진 흔적을 따라왔다. 서로 다른 이유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전부 같은 문 앞에 세워졌어.”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내 얼굴을 스쳤다.
“네가 중심이라서가 아니야. 네가 먼저 읽히면, 우리 목적도 한꺼번에 잡힌다. 그걸 누군가 알고 배치했다.”
세 번째 칸 위에 푸른 점이 세 번 뛰었다. 동시에 위 계단의 발소리가 한 박자 늦어졌다. 적들도 아래 장치의 반응을 듣고 멈춘 것 같았다. 아니, 멈췄다기보다 기다렸다. 우리가 어떤 답을 내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브론이 낮게 웃었다.
“좋아. 거짓말 값이 점점 비싸지는군.”
그는 자기 칸 앞에 쐐기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금속이 돌을 긁으며 짧은 불꽃을 냈다. 브론은 그 불꽃을 손바닥으로 가리듯 눌렀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보다 계산이 먼저 떠올랐지만, 그 계산은 처음보다 훨씬 덜 가벼웠다.
“드워프 장비공 브론 카르트. 목적은 금지 합금 파편 선점, 봉인재 단가 확인, 외곽 회수 담당자보다 먼저 물건 만지기.”
세라가 헛웃음을 삼켰다.
브론은 어깨를 으쓱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농담을 섞었을 사람이, 이번에는 정말 계산서만 읽었다.
“나는 사람보다 쇳값을 먼저 본 적이 있다. 여기 온 것도 반쯤은 그 버릇 때문이다. 아래 구조가 국가 승인 합금과 성도 보강재를 같이 품었다면, 그 조각 하나로 내 채무 몇 줄은 지울 수 있었으니까.”
그는 쐐기 머리를 두 번 두드렸다. 울림은 비어 있지 않았다. 문턱 아래에는 여러 겹의 다른 금속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너무 익숙하더군. 겉에는 왕국 표식, 안쪽에는 성도식 보강, 더 안에는 누가 만들었는지 지워진 원래 뼈대. 필요한 부분만 빼 쓰고, 이름은 다른 데 붙이고, 닳은 사람은 설계도에서 지워 버리는 방식.”
브론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어졌다.
“우리 가문도 그렇게 잘렸다. 설계는 남고 이름은 없어졌다. 남은 건 빚과 망가진 공방뿐이었지.”
그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인정한다. 나는 거래하러 왔다. 네놈을 도우면 뭔가 남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선 나도 물건 칸에 올라갈 수 있다. 손익을 재러 내려왔는데, 장치가 먼저 내 손목값부터 재고 있었어.”
다섯 번째 칸에서 묵직한 울림이 올라왔다. 브론이 박은 쐐기 둘 중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갔다. 쐐기가 들어가자 문턱 오른쪽 보강층이 아주 조금 벌어졌고, 그 틈으로 검푸른 먼지가 새었다. 브론은 그 먼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탐욕으로 반짝이던 눈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구조를 알아본 사람의 눈이었다.
이제 남은 칸은 하나였다.
내 앞 칸.
위쪽 발소리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장대만 내려오지 않았다. 사람 하나가 계단 끝 턱에 무릎을 걸친 소리가 났다. 금속 신발이 돌턱을 찍고 멈췄다. 리에트의 화살촉이 그 발목 그림자를 따라갔다. 세라의 방패는 위와 정면 사이에서 더 무겁게 눌렸다. 미리엘의 은실은 빛난 칸 셋을 놓치지 않으려 바닥 위로 팽팽히 이어졌고, 브론은 벌어진 보강층 틈에 손가락을 넣지 않고 쇠막대 끝만 대고 있었다.
모두 자기 줄을 냈다.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얼마나 다른 손에 잡혀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더 선명해졌다.
색인판이 말했다.
“잔여 응답자.”
내 손은 허리 주머니 위에 있었다. 그 안에는 로웬의 메모를 감싼 천 조각과 수련원 배정 문건 일부가 들어 있었다. 꺼내면 문이 읽을 것이다. 꺼내지 않아도 문은 이미 내가 거기에 손을 얹었다는 사실을 읽을 것이다. 도망과 침묵 사이에 차이가 별로 없는 자리였다.
나는 부적을 쥐지 않았다. 성철 부적은 길의 반응을 알려 줬지만, 지금 말해야 할 것을 대신 말해 주지 않았다. 판단은 내가 본 것들에서 나와야 했다. 공개 평가장 바닥의 먼지. 수련원 배정서의 한시 유예 조항. 막사에서 나만 따로 확인하던 손. 세라의 지시문. 미리엘의 장부 조각. 리에트가 따라온 지워진 길. 브론이 읽어 낸 보강층의 덧댐. 그리고 로웬의 빈칸.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내 칸은 앞으로 나서는 자리가 아니었다. 다섯 사람 사이를 잇는 자리였다. 그래서 발끝만 열세 번째 잔선 안쪽으로 반 치 옮겼다.
“에이드리언 베일.”
이름을 말하자 색인판 가장 깊은 칸이 낮게 울었다. 내 이름을 기다렸다는 반응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대조하는 소리였다.
“수련원 배정 문건에서 나는 전력 외였다. 그런데 생환 시 한시 유예 조항은 내 이름 앞에만 붙어 있었다. 성문 밖 막사에서는 원정대 전체 확인이 아니라 나한테만 별도 확인이 붙었다. 로웬 헤일은 내게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으라고 남겼고,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고 했다.”
목이 말랐다. 위 계단의 적이 조금 더 내려왔지만, 리에트가 아직 쏘지 않았다. 세라가 방패를 더 세웠다. 그 짧은 기다림이 내게 넘어왔다.
“처음엔 내가 약해서 밀려난 줄 알았다. 엘레나를 살려야 해서 붙잡히기 쉬웠고, 후견인이 사라져서 더 만만해졌고, 초급 보조직이라 버리는 칸에 넣기 좋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런데 아니다. 나는 특별해서 선택된 게 아니다. 사람보다 먼저 표식으로 읽혔고, 이름보다 먼저 별도 확인으로 접혔고, 도움보다 먼저 인계 절차에 묶였다. 여기까지 온 길도 내가 고른 길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내가 어떤 말에 반응하는지, 누가 나를 막고 누가 나를 넘길지, 누구 목적이 내 발밑으로 모일지 이미 재고 있었다.”
가장 안쪽 칸이 깊은 우물처럼 가라앉았다. 푸른빛이 내 발뒤꿈치를 타고 세라의 방패, 리에트의 사선, 미리엘의 은실, 브론의 쐐기까지 한 번에 엮었다. 그 순간 등골이 얼어붙었다. 빛이 나만 훑은 게 아니었다. 내가 말한 답이 모두의 자리와 이어졌다.
“로웬이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고 한 건 길만 말한 게 아닐 거다. 성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람보다 절차가 먼저 움직인다. 이름이 올라가기도 전에 누가 어디로 넘길지, 누가 침묵해야 할지, 어떤 기록은 지워야 할지 정해진다.”
나는 색인판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나는 더는 먼저 읽히기만 하지 않겠다. 나를 어디에 둘지 남이 정하기 전에, 내가 누구와 어디에 설지 먼저 정한다.”
말을 끝낸 순간, 다섯 칸이 동시에 울렸다.
빛이 우리 발밑에서 위로 솟지 않았다. 반대로 아래로 꺼졌다. 마치 깊은 곳에서 다섯 개의 빈칸을 받아들인 뒤, 더 큰 장부 한 장을 뒤집는 소리였다. 착지대 아래가 낮게 흔들렸다. 위 계단에서 내려오던 적의 발도 그 흔들림에 멈칫했다.
처음에는 문이 열리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색인판 뒤 어둠이 천천히 갈라졌다. 안쪽에서 올라온 것은 문짝도 통로도 아니었다. 사람 키를 조금 넘는 검푸른 철석상 같은 몸통이었다. 몸통 앞에는 얇은 거울판 세 장이 가로로 겹쳐 있었다. 거울이라고 부르기에는 표면이 너무 어두웠고, 판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안쪽에서 사람 숨 같은 김이 피어올랐다.
세라가 방패를 한 치 높였다. 리에트는 위 계단을 포기하지 않은 채 거울판 측면까지 시야에 넣었다. 미리엘은 은실을 다섯 칸에서 빼내지 않았다. 브론은 벌어진 보강층에 쇠막대 끝을 걸어 놓고, 새로 올라온 몸통의 밑판을 재기 시작했다.
거울판이 우리를 비췄다.
하지만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세라 앞 거울에는 평가장 가장자리에서 등을 돌리던 기사단 후보들의 그림자가 먼저 떴다. 방패를 들어도 누구도 이름을 불러 주지 않던 자리.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방패가 아주 조금 낮아졌다가 다시 올라갔다.
미리엘 앞 거울에는 장부를 넘기는 손이 보였다. 사람 이름을 먹으로 지우고 처리 칸만 남기던 손. 미리엘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녀는 기도문을 꺼내지 않았다. 은실이 떨렸고, 그녀는 떨리는 실을 손등에 감아 잡았다.
리에트 앞 거울에는 숲의 후퇴 신호가 한 박자 늦게 꺼지는 밤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래도 활끝은 발목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브론 앞 거울에는 공방 불빛 아래 남의 인장이 찍히는 설계도가 떠올랐다. 브론은 웃지 않았다. 쇠막대 끝을 더 깊이 넣고, 손목을 낮게 꺾었다.
내 앞 거울에는 배정 통지서도, 막사 확인표도 아니었다. 로웬의 메모 끝에 남은 빈 여백이 먼저 보였다. 누군가 이름을 적기 전부터 접을 방향이 정해진, 너무 깨끗해서 더 잔인한 빈칸.
숨이 목에 걸렸다.
거울은 과거를 보여 주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가장 늦게 숨기고 싶은 장면을 꺼내, 현재 손발을 늦추려는 장치였다. 비밀을 말하게 만드는 시험이 아니었다. 비밀을 들킨 뒤에도 제자리를 지키는지 보는 적이었다.
세라가 먼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보이는 걸 따라가지 마.”
그녀는 자기 기억을 떼어 내듯 방패를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거울 정면을 받지 않고, 몸통 오른쪽에 튀어나온 낮은 철턱을 노렸다.
“위는 아직 위에 있다. 아래는 우리 시선을 갈라놓는 중이야.”
리에트가 곧장 받았다.
“패턴 둘. 거울이 기억을 건드리고, 위 손들이 빈자리로 찌른다.”
브론이 쇠막대를 누르며 말했다.
“오른쪽 밑판 비어 있다. 밀어 붙이는 놈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놈이야. 거울 보느라 한 걸음 들어가면 홈이 발목을 먹는다.”
미리엘은 다섯 칸과 거울판 아래 반원형 홈을 번갈아 보았다.
“칸이 다시 닫히면 안 돼요. 각자 자기 자리를 놓치면, 방금 낸 답을 다시 빼앗길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 위 계단에서 적 하나가 착지대 가장자리를 밟았다. 두 번째 그림자는 그보다 반 박자 뒤에 멈췄다. 아래 거울판이 먼저 우리를 흔들고, 그 틈에 위쪽 손들이 들어올 생각이었다. 위와 아래가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늦어지는지 같이 재고 있었다.
나는 열세 번째 잔선 위에서 발을 고정했다. 모두의 고백을 들은 뒤라 더 무거웠다. 세라는 감시자였고, 미리엘은 회수 절차를 들고 왔고, 리에트는 나를 관찰하려 했고, 브론은 값을 재러 왔다. 그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쥔 손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방패, 활, 은실, 쐐기, 그리고 내 발밑 선이 한 박자 안에 있었다.
그 박자를 놓치면 끝이었다.
“세라.”
내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정면 말고 오른쪽 턱. 거울을 받지 말고 비틀어.”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패 각도를 바꿨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브론은 밑판을 묶어. 금속을 빼려 하지 말고, 미끄러지는 각만 틀어.”
“말 안 해도 하려던 참이다.”
브론의 대답은 거칠었지만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보강못 하나가 밑판 틈으로 들어갔다.
“미리엘은 닫히는 칸부터 불러. 뜻을 풀지 말고 번호와 위치만.”
미리엘이 숨을 삼켰다.
“오른쪽 끝 유지. 세라 쪽 둘째 칸 흔들림. 가운데 칸 깊어져요.”
“리에트는 아래 보지 마. 위에서 내려온 놈 발목만 끊어.”
“알아.”
리에트의 화살이 날아갔다. 위 계단 가장자리에 올라선 적의 발목끈이 끊어졌고, 그 몸이 한순간 기울었다. 죽인 건 아니었다. 균형만 뺏었다. 아래 거울판이 기다리던 빈틈을 거꾸로 위쪽에 만든 셈이었다.
거울판 세 장이 동시에 들렸다. 세라의 평가장, 미리엘의 장부, 리에트의 숲, 브론의 공방, 내 빈 여백이 서로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잠깐, 세라가 내 얼굴에서 자기 평가장의 그림자를 보았고, 미리엘이 브론의 손에서 지워진 장부의 손을 보았고, 나는 리에트의 눈 속에서 꺼져 가는 숲불을 보았다.
각자의 비밀이 서로의 얼굴을 더럽혔다.
그래도 우리는 물러나지 않았다.
세라의 방패 모서리가 오른쪽 철턱에 부딪혔다. 둔한 충격이 착지대 전체를 울렸다. 브론의 보강못이 밑판을 비틀었다. 미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닫히는 칸을 계속 불렀고, 리에트는 위쪽 두 번째 그림자의 무릎 옆에 화살을 박았다. 나는 열세 번째 잔선 위에서 반걸음 더 비껴 서며, 모두의 위치를 한 줄로 다시 잡았다.
그제야 내 앞 빈칸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적기 전에 접어 놓은 자리라는 사실은 같았다. 하지만 그 칸이 나 하나만 삼키려는 건 아니었다. 우리 다섯을 어느 순서로 갈라낼지 적어 둔 자리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순서를 먼저 비틀면 아직 살아남을 틈도 있었다.
색인판 안쪽에서 금속판이 크게 울렸다.
“응답 배열 불안정.”
처음으로 장치의 말에 아주 작은 어긋남이 섞였다.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해 둔 서식과 맞지 않는 답이 들어왔을 때 나는 기계적인 틈이었다.
그 틈은 소리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라가 밀어 넣은 방패 모서리 아래에서 오른쪽 철턱의 높이가 손가락 한 마디쯤 내려앉았다. 브론의 보강못이 밑판에 박힌 자리는 그대로였지만, 거울 몸통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며 반원형 홈 가장자리의 먼지를 밀어냈다. 드러난 홈 안쪽에는 작은 걸림턱이 셋 있었다. 발목을 바로 자르는 날은 아니었다. 대신 한 번 들어온 발을 늦게 놓아, 위쪽 칼이나 장대가 정확히 떨어질 시간을 벌어 주는 턱이었다.
“발이 아니라 시간을 잡는 홈이야.”
브론이 낮게 말했다.
그 말이 들리자 거울판의 위험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저 몸통은 우리를 세게 밀어 죽이려는 적이 아니었다. 기억을 던져 한 사람을 반 박자 늦추고, 그 늦어진 발을 홈에 붙잡아 위에서 내려온 손이 마무리하게 만드는 적이었다. 그러니 칸을 지키는 일과 위를 막는 일은 따로 갈 수 없었다. 다섯 답을 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자기 비밀을 깨끗하게 씻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어느 기억에서 늦어질지 서로 미리 알기 위해서.
세라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번 더.”
방패가 다시 오른쪽 턱을 밀었다. 브론은 이를 악물고 보강못을 눌렀다. 리에트는 위쪽 그림자가 착지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기 전 발을 묶었다. 미리엘은 칸의 빛을 잃지 않으려 손등까지 은실을 감았다. 나는 다섯 칸의 빛이 어느 순서로 흔들리는지 보며, 한 사람씩 반 박자 먼저 불렀다.
“세라, 네 오른발.”
평가장의 그림자가 세라 발목을 잡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욕설 대신 오른발 뒤꿈치를 바깥으로 돌렸다. 홈이 헛물었다.
“미리엘, 손 말고 팔꿈치로 실을 고정해.”
장부 속 손이 그녀 손끝을 덮치듯 번졌지만, 미리엘은 손가락 힘을 버리고 팔꿈치를 바닥 돌턱에 대며 은실을 눌렀다. 떨림이 줄었다.
“브론, 설계도 보지 마. 못 깊이만.”
그는 거울 속 공방 불빛에서 눈을 떼고, 손끝에 걸린 못머리 높이만 쟀다. 쇠가 반 치 더 들어갔다.
“리에트, 지금.”
리에트는 자기 거울에 뜬 숲불을 밀어내듯 숨을 멈췄다가, 위쪽 두 번째 그림자의 무릎 뒤를 쐈다. 화살은 살을 깊게 박지 않았다. 다만 무릎이 접히기에 충분했다.
나는 내 앞 거울 속 빈 여백을 다시 보았다. 아직 아무 이름도 적히지 않은 자리. 누군가 나를 먼저 읽으려 했던 자리. 하지만 그 빈칸을 보는 내 눈 뒤에는 이제 다른 네 사람의 답도 같이 걸려 있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서로를 깨끗하게 믿지 않았다.
대신 서로가 무엇을 숨기고 내려왔는지 안 채로도, 지금 어디에 서야 하는지 알았다.
검푸른 거울판이 첫 반사를 쏟아 냈다. 위에서 넘어지는 그림자와 아래에서 밀려오는 몸통이 같은 순간에 닫혀 왔다.
나는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각자 자기 자리. 흔들려도 옮기지 마.”
이번에는 아무도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첫 고백이 끝난 뒤 남은 유일한 답이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