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아래에서 기다린 성도

하강 계단의 첫 착지대는 숨을 고르는 자리가 아니었다.

위에서 밀려 내려온 먼지는 계단 턱마다 얇게 쌓였고, 아래에서는 젖은 돌과 오래 닫아 둔 향 냄새가 식은 숨처럼 올라왔다. 왼쪽 벽에는 손가락 두 마디 폭의 은회색 선이 계단 모서리를 따라 끊기듯 이어졌고, 오른쪽 벽은 세라가 방패를 정면으로 세울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발밑 판석은 셋째 칸부터 유난히 매끈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서 닳은 게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서 멈추고, 같은 각도로 발을 돌리고, 누군가에게 읽힌 뒤에야 지나간 흔적이었다.

세라는 내 뒤 한 칸 위에서 방패를 옆으로 접어 계단 입구를 막았다. 수문장의 밀침을 받아 낸 왼팔이 아직 떨렸지만, 그녀는 방패를 놓지 않았다. 리에트는 그보다 반 칸 위에서 활대를 세로로 세우고, 위쪽 문턱과 아래 어둠을 번갈아 겨눴다. 위에서는 장대 끝이 돌을 긁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아래에서는 반쯤 가린 등불 하나가 오른쪽 벽의 작은 홈 안에서 노랗게 숨을 쉬고 있었다.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추적자들의 거친 발소리와는 달랐다. 등불은 도망치는 손처럼 흔들리지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누군가 우리를 따라온 게 아니라, 우리가 여기까지 내려오기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짧게 봐.”

세라가 낮게 말했다.

“오래 서 있으면 우리부터 줄 맞춰진다.”

리에트가 위를 보며 대답했다.

“셋은 넘는다. 장대 둘, 짧은 칼 하나. 불도 붙였어.”

나는 대답 대신 첫 계단 모서리를 발끝으로 눌렀다. 판석이 아주 얕게 떨더니 울림 하나를 안쪽으로 흘렸다. 곧장 공격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그 떨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래 어둠에서 늦은 되울림이 돌아왔다.

이미 깨워 둔 길이다.

나는 두 번째 칸 가장자리를 손등으로 훑었다. 돌은 거칠었지만 중심부만 이상하게 미끄러웠다.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닌 흔적이 아니었다. 둘이나 셋이 같은 보폭으로 멈추고, 같은 자리를 피해 디딘 흔적이었다. 첫 세 칸은 탈출로가 아니었다. 누가 어느 발로 어디에 섰는지 아래로 넘기는 확인 절차였다.

“첫 세 칸이 사람을 거른다.”

세라의 방패가 아주 조금 내려왔다.

“지금도?”

“응. 다만 위처럼 바로 죽이는 쪽은 아니야. 보폭을 먼저 봐.”

그때 아래 홈 안쪽 불빛이 한 번 더 흔들렸다. 등불 심지를 손끝으로 세운 듯 작고 조심스러운 노란 빛이 벽에 붙었다. 젖은 천이 돌에 스치는 소리와 물방울이 금속 그릇에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났다.

나는 은회색 선이 끊긴 자리를 확인한 뒤 한 칸 내려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칸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아래 홈 안쪽 그림자가 또렷해졌다.

착지대는 계단이 한 번 꺾이는 자리에서 겨우 열리는 좁은 숨구멍이었다. 왼편 바닥에는 손바닥만 한 배수 홈이 길게 나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오래된 등잔걸이 두 개가 박혀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작은 성도식 휴대등이 걸려 있었다. 그 등불 아래, 회색 먼지가 묻은 흰 겉옷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우리 얼굴보다 먼저 우리가 선 자리를 봤다.

내 발이 밟은 칸. 세라 방패가 막는 높이. 리에트 활이 꺾여 나갈 수 있는 각. 그걸 다 읽고 나서야 시선이 얼굴로 올라왔다.

치유사처럼 보였다. 소매를 걷은 팔에는 마른 정화수 얼룩이 남아 있었고, 발 옆에는 청동 상자, 접힌 붕대 꾸러미, 목이 깨진 병, 젖은 천 두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준비물보다 먼저 들어온 건 그녀 눈이었다. 상처를 살피는 눈이 아니라, 누가 어느 줄에 서 있는지 먼저 적어 넣는 눈.

세라가 입을 열기 전에 여자가 말했다.

“위 확인이 생각보다 빨랐네요.”

놀란 목소리가 아니었다. 절차가 한 줄 밀렸을 때 나오는 목소리였다. 세라가 방패를 내리지 않은 채 한 칸 더 내려왔다.

“이름.”

여자는 숨을 짧게 골랐다.

“미리엘 하센.”

그녀가 말했다.

“성도 소속 정화 보조사제였어요. 지금은…… 여기서 부상자를 보고 있었어요.”

리에트가 짧게 웃었다. 웃음에 온기는 없었다.

“보고 있었다고? 네가 먼저 본 건 피가 아니라 자리인데.”

미리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청동 상자를 열었다. 얇은 은침, 짧은 붕대, 회색 가루와 엷은 푸른 액이 든 유리병 두 개가 반듯하게 들어 있었다. 손놀림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만 상처 쪽으로 오기 전에 다시 한 번 우리 셋의 배치를 훑었다.

위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아래 빛이다!”

장대 끝이 무너진 문턱을 타고 미끄러지며 돌가루를 긁었다. 세라 턱선이 단단해졌다.

“설명은 짧게. 손은 멈추지 마.”

미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국 외곽 확인반 소속으로 내려왔어요. 붕괴 보고 뒤 살아 있는 반응자와 회수 대상…… 아니, 생존자를 먼저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세라 눈빛이 바로 차가워졌다.

“방금 뭐라고 했지?”

미리엘 입술이 멈췄다. 리에트가 활을 든 채 낮게 말했다.

“입에 붙은 말은 급하면 꼭 먼저 튀어나오지.”

나는 돌벽에 등을 반쯤 붙인 채 미리엘의 손을 봤다. 능숙하게 거짓말을 꾸미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대신 너무 오래 사람을 나누는 말을 써 와서, 다급하면 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리엘은 먼저 세라에게 다가갔다. 세라가 방패를 완전히 내리지 못한 채 왼팔만 내주자, 팔등을 길게 긁은 상처와 손목 안쪽 멍이 드러났다. 미리엘은 상처부터 누르지 않았다. 먼저 방패 가장자리와 팔꿈치 각도를 확인했다. 그다음에야 푸른 액을 적신 천을 상처 가장자리부터 눌렀다.

세라 어깨가 순간 굳었다.

“따갑겠지만 버텨요.”

“독이면 네가 먼저 죽는다.”

“독이면 여기까지 들고 오지도 않아요.”

미리엘은 그렇게 답하면서 세라 손목을 고쳐 잡았다. 붕대는 상처를 덮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방패를 다시 들 때 각이 무너지지 않도록 손목 방향까지 잡아 두는 방식이었다. 세라가 그걸 느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실전에 익숙하네.”

“실전보다 수습에 익숙해요.”

미리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살아서 걸어나온 사람보다, 너무 늦게 데려온 사람을 더 많이 봤으니까.”

꾸민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뒤에 나온 질문은 다시 목을 조였다.

“위에서 어떤 문양이 켜졌는지 기억해요?”

세라 손이 그녀 손목을 낚아챌 듯 멈췄다.

“사람부터 살린다며.”

미리엘은 세라를 똑바로 보다가 대답했다.

“둘 다 해야 해서 그래요.”

그 한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솔직했다. 변명할 때보다 그렇게 인정할 때 더 지쳐 보였다. 사람을 살리는 손과 사람을 확인표에 올리는 손이 한몸에 붙어 있고, 그 둘을 지금도 떼어내지 못한 얼굴. 그녀가 붕대를 조이는 동안에도 눈은 위쪽 장대 소리와 아래 문틀 사이를 오갔다. 다친 사람을 붙잡는 순서와 기록할 대상을 세는 순서가, 그녀 안에서 아직 갈라지지 않은 채 맞물려 있었다.

나는 착지대 바닥을 훑었다. 배수 홈 가장자리에는 마른 회백색 가루가 남아 있었고, 오른쪽 등잔걸이 아래 돌은 손등 높이쯤만 매끄럽게 닳아 있었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자주 멈춰 섰다. 등불을 가리고, 벽을 짚고, 아래쪽 문을 살폈다. 미리엘이 우연히 숨어든 자리가 아니었다.

이곳 냄새도 이상했다. 단순한 약냄새가 아니라, 여러 번 개봉한 정화수 병과 눅눅한 향이 바닥에 스며든 냄새였다. 이 숨구멍 같은 착지대는 이미 몇 차례 사람을 가르고, 묶고, 내려보낸 자리였다.

리에트도 같은 걸 읽은 듯 말했다.

“여긴 네 첫 자리가 아니지.”

미리엘은 대꾸 없이 리에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리에트는 활을 완전히 내리지 않은 채 오른어깨만 내주었다. 가죽을 찢고 스친 상처였다. 활줄을 다시 당기면 벌어질 자리.

“네가 보는 건 상처냐.”

리에트가 물었다.

“아니면 우리가 어디까지 봤는지냐.”

미리엘 손이 잠깐 멈췄다.

“둘 다요.”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위 선을 연 사람이면, 그냥 다친 원정대가 아니니까.”

“이제야 사람 말 같네.”

리에트는 비웃었지만 어깨는 거두지 않았다. 미리엘은 은침 끝으로 피멍 가장자리를 눌러 보고 회색 가루를 뿌린 뒤 얇은 천을 둘렀다.

“움직임은 남겨 둘게요. 완전히 마비시키면 반응이 늦어져요.”

대단한 기적은 아니었지만 활을 다시 당길 만큼은 남기는 손이었다. 리에트가 어깨를 한 번 굴리자 떨림이 줄었다. 리에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지만, 처치를 거부하진 않았다.

위에서는 누군가 무너진 돌조각을 걷어차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장대 끝이 빈 공간을 찍고 지나갈 때마다 계단 안쪽 공기가 얇게 떨렸다. 아직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좁은 길에서는 얼굴보다 숨이 먼저 닿는다. 위에서 쫓아오는 놈들의 초조함과 아래에서 기다리는 장치의 침묵이 함께 우리 등을 밀었다.

이제 미리엘의 시선이 내게 왔다.

내 발목은 크게 꺾이지 않았지만, 수문장 받침에 끌려간 뒤부터 안쪽 인대가 계속 욱신거렸다. 나는 일부러 벽에서 등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 오면 손보다 눈을 먼저 볼 생각이었다.

미리엘은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발목보다 먼저, 내 허리춤 안쪽의 균열이 난 성철 부적을 봤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너무 선명했다. 그녀 눈동자가 그 부적을 알아본 사람처럼 굳었다가, 바로 시선을 떼었다.

“그건 어디서…….”

말끝을 삼킨 미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발목 보여 줘요.”

나는 내밀지 않았다.

“넌 내 상처보다 먼저 그걸 봤어.”

위쪽 문턱에서 돌이 다시 크게 울렸다. 이번에는 누군가 체중을 제대로 실은 모양이었다. 세라가 방패를 더 세게 밀어 세웠고, 리에트는 반걸음 위로 올라가 활을 고쳐 잡았다. 시간이 없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미리엘은 결국 애매한 중간을 택했다.

“그 부적은 성도 물건이 아니에요.”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성도 문서에는 두 번 나와요.”

그녀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둘 다 회수 실패 기록으로.”

회수 실패.

그 네 글자가 이 좁은 착지대에서 지나치게 또렷했다. 세라와 리에트 시선이 동시에 내 허리춤으로 모였다. 나는 부적을 감추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왜 아는데.”

내가 묻자 미리엘이 대답했다.

“지워진 기록을 정리하던 방에 있었거든요.”

말이 나간 뒤에야 그녀 턱이 굳었다. 세라가 낮게 되물었다.

“지워진 기록?”

미리엘은 내 발목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허락을 기다리는 척했지만 눈빛은 이미 훨씬 많은 걸 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을 내밀었다.

“짧게 끝내.”

“네.”

그녀 손은 차가웠다. 발목 바깥쪽을 누르던 손끝이 안쪽 힘줄로 옮겨 오자 욱신거리던 통증이 날카롭게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미리엘은 뼈를 억지로 맞추지 않았다. 얇은 은침 두 개를 발목 위 얕은 자리로 찔러 넣고 푸른 액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 뒤 손바닥으로 열을 눌렀다.

처음에는 따가웠고, 그다음에는 차갑게 식었다. 살 아래 어딘가에 남아 있던 긴장이 한 줄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감각과 거의 동시에 허리춤 부적이 미세하게 떨렸다.

미리엘 손도 같이 멎었다.

그녀는 내 발목 통증 때문이 아니라, 내 피부 아래 지나간 떨림이 계단 벽 은회색 선과 맞닿는 모양을 본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 시선이 내 발목에서 허리춤, 다시 계단 벽의 선으로 천천히 옮겨 갔다.

“왜 그러지.”

리에트가 바로 물었다.

미리엘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착지대 아래쪽, 계단이 한 번 더 꺾이는 자리 너머 어둠을 향해 등불을 들었다.

그 빛 아래 문틀 하나가 드러났다.

사람 둘이 나란히 서기엔 좁고, 세라가 방패를 옆으로 틀어야 겨우 통과할 폭이었다. 문틀 양옆에는 물결처럼 휘어진 홈 열두 개가 세로로 파여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거의 지워진 열세 번째 선 하나가 비스듬히 남아 있었다.

미리엘은 그 선을 보자마자 얼굴빛을 잃었다.

진짜로 핏기가 빠졌다. 등불 불씨가 흔들리고, 그림자가 문틀 위에서 잘게 떨렸다. 세라도 그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읽고 착지대 아래 한 칸을 더 내려왔다. 리에트 활끝은 이제 위가 아니라 미리엘 등 뒤 문틀을 겨누고 있었다.

“저게 뭐지.”

세라가 물었다.

미리엘은 첫 대답을 삼킨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열둘이어야 해요.”

그녀 말이 공기보다 먼저 식었다.

“원래는.”

나는 오른쪽의 희미한 잔선을 다시 봤다. 완전히 새긴 흔적이 아니라, 억지로 긁어 지운 자국 위에 남은 잔광 같았다. 위에서 봤던 열세 번째 빛과 닮아 있었다. 지워졌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선. 누군가 감추려 했다는 사실만 더 선명하게 남은 선.

문틀 앞 공기도 이상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향 냄새가 그 앞에서 한 번 엉켰다. 오래된 방 앞에 서 있을 때, 안쪽 빈 공간이 아직 숨을 참는 듯한 감각이 있다. 이 문이 그랬다. 단순히 잠겨 있는 문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판단한 뒤에야 움직이는 장치.

“넌 저걸 알아.”

내 말에 미리엘은 눈을 감지 못했다.

“기록에서만.”

“무슨 기록.”

그녀는 대답 대신 문틀 옆으로 다가가 열두 홈 위를 천천히 짚었다. 홈마다 먼지 두께가 달랐다. 다섯째와 아홉째 홈은 최근에 누가 손댄 것처럼 검은 때가 벗겨져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더듬는 손길이 아니라, 금지된 문장을 기억으로 짚는 손길이었다.

“정화문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정화문으로 바꿔 적어 둔 거지.”

세라 턱선이 굳었다.

“누가.”

“그걸 적는 사람들이요.”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피로가 묻어 있었다. 단순히 윗선 욕을 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이미 그 문장을 여러 번 속으로 되뇌었고, 그래도 입 밖으로 내는 걸 꺼려 온 사람의 말투였다.

위쪽에서 돌 무너지는 소리가 크게 쏟아졌다. 이번에는 누군가 문턱 일부를 밟고 확실히 내려선 기척이었다. 리에트가 몸을 틀어 위를 겨눴다.

“얼굴 나온다.”

먼저 내려온 것은 얼굴이 아니라 장대 끝에 매단 작은 쇠거울이었다. 좁은 계단 모서리 밖으로 거울이 비스듬히 들어와 착지대를 훑었다. 우리 몸을 직접 보려는 게 아니었다. 방패 위치, 등불 높이, 문틀 앞에 선 사람 수를 먼저 세는 움직임이었다. 거울 뒤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

“성도 쪽 사람도 있다. 다치게 하지 말고 분리해.”

미리엘 어깨가 아주 작게 움찔했다. 그 짧은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위쪽 사람들은 그녀를 구조 대상으로 부르지 않았다. 자기들 쪽 사람처럼 말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와 떼어 놓을 대상으로 셌다.

“네 편인가.”

리에트가 물었다.

미리엘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가 그 침묵을 대신 읽고 방패를 더 높였다.

“편이면 먼저 이름을 불렀겠지.”

쇠거울이 한 번 더 아래를 훑었다. 이번에는 내 허리춤 쪽에서 오래 멈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부적을 가리지 않았다. 가리는 순간 저들이 찾는 게 맞다고 알려 주는 꼴이었다.

“리에트, 거울 말고 손목.”

내 말에 리에트는 바로 쏘지 않았다. 거울이 착지대 끝까지 들어와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녀의 화살이 거울 뒤 얇은 가죽끈을 끊었다. 쇠거울이 계단 아래로 떨어져 배수 홈 옆에서 깨졌다. 위에서 욕설이 터졌고, 세라의 방패가 좁은 계단을 반쯤 막아 섰다.

미리엘은 그 틈에 등불을 문틀 쪽으로 낮췄다. 도망치려는 몸짓이 아니었다. 그녀도 위쪽 손에 잡히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이제 숨기지 않았다.

세라도 즉시 위쪽 칸으로 반 걸음 물러나 방패를 세웠다. 좁은 착지대에서 둘이 나란히 설 수 없어, 몸을 비틀어 위쪽 문턱과 아래 문틀을 함께 막아서는 자세가 됐다. 미리엘은 그 사이에 낀 사람처럼 등불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우리가 네 사람으로 늘어난 게 아니라 이 착지대가 네 사람을 딱 네 칸에 꽂아 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라는 위를 막는 칸.

리에트는 얼굴을 먼저 끊는 칸.

미리엘은 남은 문장을 잇는 칸.

그리고 나는, 아래 문이 읽고 있는 칸.

속이 서늘하게 식었다.

이 길은 처음부터 사람을 도구처럼 배치하게 만든다. 누가 막고, 누가 쏘고, 누가 읽고, 누가 반응하는지. 한 번 자리에 들어가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역할이 붙는다. 위에서 쫓아오는 놈들이 우리를 몰아넣는 게 아니라, 계단 자체가 우리를 그 자리에 끼워 넣고 있었다.

“시간 없어.”

세라가 미리엘에게 쏘아붙였다.

“열리나, 안 열리나.”

미리엘은 문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냥은 안 열려요.”

“왜.”

“위에서 누구한테 반응했는지, 아래도 이어받아야 하니까.”

그녀 눈이 다시 내게 왔다. 이번에는 숨길 생각이 없는 시선이었다. 평가도 경멸도 아니라, 기록에서만 보던 대상을 실제 자리에서 본 사람의 혼란과 두려움.

세라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또 저놈이군.”

“저놈이 아니라…….”

미리엘이 반사적으로 말했다가 멈췄다. 그리고 거의 속삭이듯 고쳤다.

“반응자.”

착지대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그녀 처치는 분명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도움은 친절만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미리엘은 내가 필요해서 살리고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내려와야만 이어지는 문장이 있기 때문에.

“반응자가 뭘 해야 열리는데.”

내가 묻자 미리엘은 등불을 더 높이 들었다. 빛이 문틀 위를 타고 올라가자 열두 홈 사이 작은 글자 자국들이 떠올랐다. 오래된 엘프 장례문양과 성도식 약식 기도문이 뒤섞인 배열이었다. 거의 지워진 열세 번째 선 아래에는 짧은 가로흔 하나가 남아 있었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글자 사이에서 더 옅은 밑선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원래 적힌 문장을 긁어낸 뒤 그 위에 짧은 성도식 표기를 덧씌운 흔적이었다. 미리엘 입술이 아주 짧게 움직였다. 기도인지 기억인지 모를 소리 사이에서 단어 하나가 또렷하게 흘렀다.

누락자.

덧씌운 성도식 문장에는 없는 말이었다. 기록을 정리하던 사람들끼리만 쓰는 은어처럼 들렸다. 미리엘은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기 실수를 깨달은 사람처럼 턱을 굳혔다.

세라가 바로 물었다.

“뭘 읽었지.”

미리엘은 답 대신 문틀 아래 가로흔을 엄지로 문질렀다. 회백색 가루가 묻어 나왔고, 지워진 선 틈에서 마른 붉은 얼룩이 아주 조금 살아났다. 오래전 여기서 누군가 이름이나 자격을 확인받지 못한 채 붙들렸다는 식의, 너무 사람 냄새 나는 흔적이었다.

그 붉은 얼룩은 오래 말라붙은 피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확인 도장을 대신하던 무언가였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좋은 뜻은 아니었다. 지나간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문이었다면 저런 자국은 남지 않는다.

미리엘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이건 문이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사람을 가르는 장치예요. 누가 아래로 넘어가도 되는지, 누가 여기서 묶여야 하는지 고르는 장치.”

리에트가 위를 겨눈 채 짧게 웃었다.

“좋군. 위에선 잡으려 들고 아래에선 고르려 들고.”

세라는 한마디로 잘랐다.

“방법.”

미리엘은 더 미루지 못하고 허리춤 안쪽 작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 안에서 얇은 은실이 감긴 납구슬 셋이 나왔다. 이미 몇 번이고 꺼내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지만, 손끝은 아주 조금 떨렸다.

“제 기도문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녀 시선이 내 발밑 은회색 선과 허리춤 부적, 오른편 열세 번째 잔선 사이를 오갔다.

“그 사람 발이 먼저 들어가야 해요.”

세라가 즉시 내 앞을 반 칸 가로막았다. 방패 모서리가 문틀과 부딪혀 낮게 울렸다. 위쪽 문턱에서도 불빛이 더 가까워졌다. 아직 얼굴은 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한 번 길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누군가 정말로 내려오고 있었다.

“설명 더.”

세라가 말했다.

미리엘은 은실 한 줄을 내 발 앞 계단 가장자리와 문틀 아래 얕은 홈 사이에 걸쳤다. 구슬 셋은 정면 중앙이 아니라 왼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었다. 다섯째와 아홉째 홈 앞에서만 더 길게 떨었다. 미리엘은 그 떨림을 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문을 읽는 사람의 불안보다, 이 결과를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가운데로 바로 밟으면 안 돼요.”

그녀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왼쪽 반 걸음 비껴 들어가야 해요. 위에서 이미 한 번 중심으로 읽혔으니까, 아래에서 같은 자리를 또 밟으면 묶는 쪽이 먼저 닫혀요.”

말과 함께 그녀는 한 손등을 다섯째 홈에, 다른 손가락을 아홉째 홈 아래에 짚었다. 구슬 셋이 한 번에 떨며 얇은 울림을 냈다. 문틀 안쪽 어둠에서 맞물린 톱니 하나가 미세하게 돌아가는 소리도 이어졌다.

실제다.

돌과 돌이 맞물릴 때 나는 마른 마찰음이 아니라, 오래 물을 먹은 장치가 겨우 다시 숨을 들이마실 때 나는 소리였다. 이 문은 죽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고, 지금 내 발과 부적과 미리엘의 기도문이 그 잠을 건드리고 있었다.

세라가 그 소리를 듣고 방패를 더 깊게 세웠다.

“열리기만 하면 바로 들어간다.”

“아직 다 안 열려요.”

미리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반응자가 선을 밟고, 제가 남은 문장을 이어야 첫 잠금이 풀려요. 그다음에야 안쪽에서 어느 쪽이 닫힐지 알아요.”

“어느 쪽이.”

내가 묻자 미리엘은 끝내 나를 똑바로 보지 못했다.

“들어가는 쪽일 수도 있고…….”

그녀가 겨우 말했다.

“돌아가는 쪽일 수도 있어요.”

그 말이 끝나자 착지대 바닥을 타고 옅은 떨림 하나가 지나갔다.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는데도, 아래쪽 어둠이 벌써 우리 선택을 받아 적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되돌아가는 길이 막힌다는 말은 단순히 후퇴가 안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위에서 쫓아오는 놈들과 아래 문 사이에 끼인 채 한 번 고르면 다른 쪽을 잃는다는 뜻이다. 이 길은 언제나 둘 중 하나만 남긴다. 사람도, 선택도.

위쪽에서 횃불빛 하나가 계단 벽에 크게 튀었다. 리에트는 숨을 고르고 시위를 당겼다. 세라는 욕설을 씹으며 방패를 더 세게 밀어 올렸다. 미리엘은 문틀 앞에 선 채 끝내 인정하듯 말했다.

“성도 기록에서는 이 선을 지웠어요.”

그녀 손끝이 열두 홈 사이를 짚다가,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열세 번째 잔선 앞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워도 남는 문이 있어요.”

등불 아래 지워진 밑선이 먼지처럼, 숨처럼 아주 약하게 살아났다.

“저만 읽을 수는 있어요.”

미리엘이 말했다.

“하지만 여는 건 저 혼자 못 해요.”

문틀의 잔선이 오래 참고 있다가 다시 숨을 쉬는 것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이 내 허리춤 부적의 균열과 같은 박자로 떨리는 걸 보자, 나는 이 길이 우리를 여기까지 부른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위에서는 추적자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지워진 문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발은, 둘 사이에서 먼저 읽힌 자리 위에 놓여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