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한 임시 동맹
무너져 내린 발판 끝은 방금까지 길이었던 자리를 믿지 말라고 말하듯 날카롭게 부서져 있었다.
돌판 문턱 바로 바깥의 평평한 판석은 왼쪽부터 반쯤 꺼져 있었고, 떨어져 나간 돌조각들은 아래 검은 틈으로 사라진 뒤 한 박자 늦게야 둔탁한 울림을 되돌려 보냈다. 정면에는 반쯤 열린 돌판이 안쪽 어둠을 품은 채 비스듬히 물러나 있었고, 오른편엔 흙과 판석이 어색하게 맞붙은 좁은 턱이 남아 있었다. 뒤쪽 넓은 진입로 쪽으로는 먼지 사이를 타고 횃불 불빛이 흔들렸고, 사람 여러 명이 급히 발을 옮길 때 나는 금속 울림이 바람을 타고 번져 왔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아직 완전히 끊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 사람씩 어깨를 틀어 도박하듯 지나가야 하는 폭밖에 남지 않았다.
세라는 무너진 자리보다 한 걸음 안쪽에 방패를 세운 채 서 있었다. 그녀 발끝 아래에는 흙을 덮어 놓은 판석선이 길게 이어졌고, 왼어깨는 안쪽 문턱을 향한 채 오른쪽 시야만 바깥으로 열어 두고 있었다. 리에트는 돌판 오른편 위턱에 몸을 가늘게 걸친 채 활을 당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바깥 넓은 길과 우리 머리 위의 작은 틈들을 번갈아 훑었다. 나는 둘 사이 반 걸음 뒤에서 남은 발판 폭, 문턱 높이, 안쪽 첫 단의 깊이를 눈으로 다시 쟀다. 아까처럼 셋이 나란히 물러나는 건 끝났다. 이제부터는 누가 먼저, 어느 각도로, 어디를 밟는지가 전부였다.
바깥에서 짧은 휘파람이 두 번 울렸다.
뒤이어 누군가가 급히 세라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반쯤 먼지에 먹힌 목소리였다. 그 뒤에 말발굽이 돌을 긁는 소리, 금속 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 사람 둘이 낮게 욕설을 주고받는 소리까지 겹쳤다.
세라 턱선이 굳었다.
“넓은 길 쪽이야. 가까워졌어.”
리에트가 활시위를 더 당겼다.
“가까워진 정도가 아니야. 우리가 안으로 들어온 타이밍이랑 맞췄어.”
나는 무너진 발판 아래 검은 틈을 한 번, 반쯤 열린 돌판 안쪽을 한 번 봤다. 밖으로 나가면 시야는 넓다. 대신 우리도 그대로 드러난다. 안쪽은 좁다. 대신 자리를 먼저 잡으면 바깥 손이 바로 들이닥치진 못한다. 더 중요한 건, 이 유적이 아까부터 계속 한 방향으로만 우리를 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뒤로 빼면 화살이 지나가고, 중심에 서면 바닥이 울리고, 문턱을 넘으면 안쪽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막으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배치였다.
세라가 짧게 말했다.
“결정해.”
명령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내 계산을 기다리는 말이었다. 그녀가 먼저 나가면 방패가 표적이 된다. 리에트가 먼저 빠지면 사선은 살지만 뒤가 막힌다. 내가 먼저 움직이면 바닥이 또 반응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대가가 있다.
나는 돌판 틈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찬 공기 흐름을 느꼈다. 먼지가 바깥으로 흩어지는 모양이 일정했다. 뒤에 작은 틈이 아니라 첫 공간이 있다. 사람 셋이 몸을 꺾어 버틸 정도의 넓이는 분명히 있다.
“안쪽 첫 공간.”
내가 말했다.
“더 깊이는 안 가. 문턱 안쪽 구조 먼저 잡고, 거기서 바깥 붙는 소리 본다.”
세라가 곧바로 답했다.
“내가 앞.”
“그대로 들이밀면 안 돼.”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왼쪽 바닥 홈에 방패 하단이 먼저 걸린다. 네가 문턱에서 미끄러지면 뒤 둘 다 죽어.”
세라가 눈을 좁혔다.
“그걸 봤어?”
“봐야 하니까.”
리에트가 낮게 웃었다.
“드디어 싸우기 전에 길부터 정하네.”
“입 닥쳐.” 세라가 쏘아붙였다.
나는 바닥을 가리켰다.
“정면 판석 두 장은 멀쩡해 보여도 가운데가 닳았어. 자연 마모가 아니라 급히 방향 틀어 밟은 자국이야. 넓게 들어가면 미끄러진다. 세라, 왼쪽 벽 붙어. 방패는 세우지 말고 눕혀. 리에트는 위쪽 틈 계속 봐. 내가 가운데 선부터 밟아 볼게.”
세라가 즉시 반박했다.
“또 네가 반응하면?”
“그럼 어디가 울리는지 알 수 있지.”
바깥에서 금속이 크게 부딪혔다. 누군가 무너진 발판 바깥을 억지로 건드리는 소리였다. 리에트가 짧게 말했다.
“빨리.”
세라는 한순간만 더 망설이다가 방패 각도를 바꿨다. 세운 방패를 왼쪽으로 눕혀 문턱 아래에 걸치듯 두자 남는 폭이 반 걸음쯤 넓어졌다. 그녀는 몸을 벽에 붙여 어깨를 접었고, 리에트는 오른편 위턱으로 조금 더 올라가 고개만 비죽 내밀었다. 이제 셋이 지나갈 수 있는 선이 보였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마시고 판석 첫 줄에 발을 올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 번째 발을 닳은 중앙선 바깥쪽, 아주 조금 왼편에 놓았다. 그제야 발바닥 아래에서 얕은 마찰음이 스쳤다. 문이 열릴 때 났던 깊은 울림이 아니라, 얇은 판이 제자리를 바꾸기 전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였다.
“왼쪽 반 보.”
세라가 즉시 움직였다. 방패 모서리가 흙을 스치며 벽 쪽에 붙었다.
바로 그 순간 오른쪽 위에서 쉭 소리가 갈랐다.
“위!” 리에트가 외치며 활을 놓았다.
화살이 어둠 속 작은 구멍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거의 동시에 돌판 오른편 윗면에서 쇠못만 한 화살촉 셋이 튀어나와 우리가 방금 있던 중앙선을 가로질렀다. 둘은 바깥 공기만 갈랐고, 하나는 세라 방패 가장자리를 긁고 튕겼다.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는 자리만 자른 거야.” 내가 빠르게 말했다. “허리 위로 지나갔어. 죽이는 각보다 겁줘서 뒤빼게 만드는 각.”
세라가 날 노려봤다.
“그걸 지금 구분해?”
“구분해야 산다. 앞이 아니라 뒤를 막는다는 뜻이니까.”
리에트가 두 번째 화살을 걸며 중얼거렸다.
“오른쪽 위 홈 두 개 더 있다.”
나는 안쪽 바닥을 보았다. 첫 판석 줄 다음으로 미세하게 낮아진 선이 있고, 그 오른편으로는 발끝이 걸리기 좋은 홈이 사선으로 파여 있었다. 누군가가 실수로 미끄러지면 중심이 안으로 쏠릴 각이었다.
“셋 세면 같이 움직여.”
세라가 방패를 조금 더 들었다.
“어디까지?”
“문턱 안쪽 첫 단.”
바깥에서 다시 세라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훨씬 급했다. 하지만 세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목을 낮췄다.
“하나. 둘. 지금.”
세라는 왼쪽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반 보 들어왔다. 리에트는 활을 당긴 채 뒤꿈치부터 몸을 틀어 문턱 안으로 걸쳤다. 나는 가운데 선을 짧게 밟아 안쪽 첫 단 끝으로 옮겨 섰다.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왼편 벽 아래가 열리며 바닥 한 줄이 뒤로 밀렸다. 흙과 작은 돌들이 그 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발목이 그대로 빠질 위치였다.
“미끄럼 홈!” 내가 소리쳤다. “세라, 왼발 빼!”
세라가 방패를 축으로 몸을 틀며 다리를 뺐다. 그녀 발끝을 스친 흙이 검은 틈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리에트는 이미 상단 홈을 향해 화살 하나를 더 박아 넣고 있었다. 곧 오른편 위쪽에서 화살촉 둘이 더 튀어나왔지만, 이번엔 이미 우리가 한 단계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금속은 빈 자리만 긁고 지나갔다.
세라가 숨을 짧게 몰아쉬었다.
“후퇴 각을 먹는 구조야.”
“응.”
나는 안쪽 첫 단 끝에서 정면을 보았다. 사람 셋이 겨우 어깨를 맞대지 않고 설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왼쪽은 세라가 방패를 세워도 바깥 반 걸음은 볼 수 있고, 오른쪽은 리에트가 몸을 걸치면 위쪽 틈과 뒤 문턱을 같이 볼 수 있는 얕은 턱이 있었다. 정면은 다시 한 단 낮아져 어둠 속으로 꺼졌고, 그 아래 좌우로 길게 파인 홈이 희미하게 이어졌다. 벽면에는 등불을 여러 번 걸었던 듯 검게 그을린 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었다. 그 아래 돌면은 손바닥이 자주 짚인 자리만 닳아 있었다.
등불 자국 사이 간격은 사람 보폭 하나 반 정도였다. 누군가 이 자리에 불을 같은 높이로 걸고, 같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래 머문 흔적이었다. 왼쪽 벽 허리쯤에는 방패 모서리나 금속 틀이 반복해서 스친 듯한 흠집이 있었고, 오른쪽 턱 아래에는 활시위 끝이나 긴 막대가 부딪혀 남긴 가느다란 긁힘이 이어졌다. 이곳은 우연히 숨는 틈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장비와 자세를 고쳐 잡고, 아래에서 올라올 무언가를 기다리던 첫 대기실 같았다.
“여기서 멈춰.” 내가 말했다. “이 공간부터 잡아.”
세라는 말없이 정면 왼쪽을 향해 방패를 세웠다. 리에트는 오른편 턱으로 반쯤 올라가 위와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각을 만들었다. 셋이 자리를 잡자마자 바깥에서 금속이 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누군가 무너진 발판을 억지로 건너다 발을 헛디딘 듯 욕설과 돌 미끄러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따라왔다.
리에트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말했다.
“바깥도 쉽지 않다.”
세라가 정면만 본 채 물었다.
“여기서 버텨?”
나는 좌우 벽 간격과 정면 낮은 단의 높이를 다시 쟀다.
“둘 이상 한 번에는 못 들어와. 대신 위랑 바닥이 같이 움직일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면 아래에서 둔탁한 울림이 한 번 올라왔다.
“정면.” 리에트가 활끝을 더 들며 속삭였다.
“사람 아냐.” 나는 벽 홈을 보며 대답했다. “구조다.”
낮은 단 아래에서 돌이 돌을 미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곧이어 천장 홈에서 모래가 얇게 떨어졌다. 나는 횃불을 뻗어 정면 바닥에 비췄다. 아래 양옆으로 파인 홈은 단순 배수로가 아니라 뭔가 움직이도록 만든 폭이었다.
“숙여.”
셋이 동시에 몸을 낮춘 바로 뒤, 천장에서 낙하석 두 개가 엇갈리며 떨어졌다. 하나는 우리가 방금 서 있던 문턱 중앙을 찍고 깨졌고, 다른 하나는 안쪽 첫 단 바로 앞을 때려 돌가루를 뿌렸다. 세라 방패 위로 먼지가 쏟아졌고, 리에트는 오른편 턱에서 몸을 접은 채 간신히 피했다.
세라가 낮게 내뱉었다.
“이게 사람 안 죽이는 구조냐.”
“정확히 머리 찍는 각이 아니야.” 나는 깨진 돌의 튀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자세 무너뜨리고 발을 꼬이게 만드는 각이야. 넘어지면 다음 게 온다.”
리에트가 아래 어둠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앞 홈 양쪽, 뭐 지나간다.”
검은 그림자 둘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스쳤다. 쇠가 벽을 긁는 소리와 함께 중앙선으로 무언가가 당겨졌다.
나는 세라 방패 윗부분을 두 번 두드렸다.
“정면 왼쪽 손바닥만큼 열어.”
세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뭘 유도하려고?”
“저걸. 완전히 막으면 다른 선이 튀어나온다.”
리에트가 활시위를 당긴 채 말했다.
“맞춰 줄 테니 해.”
나는 빠르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지금.”
세라가 방패 왼쪽을 손바닥 넓이만큼 열었다. 그 틈을 향해 정면 아래 어둠에서 검은 창대 같은 구조물이 미끄러져 솟구쳤다. 쇠끝 세 갈래가 허리 높이에서 벌어지며 그대로 밀려 들어왔다.
“쏴.”
리에트 화살이 곧바로 날아가 장치 관절 같은 부분에 박혔다. 밀침창은 방향을 잃고 왼벽 쪽으로 튕겼고, 세라는 즉시 방패를 닫아 남은 충격을 받아냈다. 금속이 방패를 긁으며 옆으로 미끄러진 뒤 다시 아래 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라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좋아. 하나 읽었다.”
리에트는 건조하게 말했다.
“아직 셋은 더 남았어.”
실제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쪽 그림자가 움직였다. 리에트가 몸을 왼편으로 낮췄고, 세라는 방패를 머리 위로 비스듬히 올렸다. 화살촉 넷이 비처럼 떨어졌다. 둘은 방패에 박히고, 하나는 벽을 튕겼고, 마지막 하나는 내가 방금 무릎을 옮긴 자리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순서가 있다.” 리에트가 숨을 죽인 채 말했다.
“위 화살, 바닥 미끄럼, 정면 밀침.” 내가 빠르게 받았다. “낙하석은 자세 흐트러질 때.”
세라가 눈을 흘겼다.
“그걸 다 세고 있어?”
“세야 하니까.”
나는 벽과 바닥의 마모를 다시 훑었다. 문턱 걸쇠 근처 손자국만이 아니었다. 첫 단 왼편 벽에도 손가락 끝이 여러 번 짚인 자국이 있었고, 오른편 턱 아래에도 부츠 앞코가 반복해서 문지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처음 지나는 사람은 여기서 흔들리고, 익숙한 사람은 같은 동작을 밟는다. 이곳은 즉흥적인 함정실이 아니라, 사람한테 일정한 동작을 반복시키는 통로였다.
“봐.” 내가 낮게 말했다. “손자국이 문턱에만 있는 게 아니야. 여기서도 반복돼.”
세라는 정면을 막은 채 흘끗 보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막는 구조가 아니야. 사람을 같은 자리로 세우고 같은 동작을 하게 만들어.”
리에트가 곧장 이해했다.
“몰아넣는 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를 죽이려면 문턱에서 화살 세 번이면 끝났어. 그런데 이건 아니야. 뒤로 물러나는 자리 끊고, 발을 안으로 빼앗고, 열린 틈으로만 밀고, 자세 무너뜨리고, 다시 같은 선 밟게 해.”
세라가 방패 너머로 낮게 말했다.
“특정 위치까지 보내려는 거군.”
“혹은 특정 사람 반응을 보면서.”
그 말이 떨어진 직후, 정면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더 깊은 울림이 올라왔다. 이번엔 바로 앞 장치음이 아니라 멀리 있는 큰 문짝이나 석문 하나가 아주 천천히 움직일 때 나는 진동이었다. 바닥선이 그 울림을 타고 발목까지 전해 왔다.
리에트가 활끝을 조금 내렸다.
“아까보다 안쪽이다.”
나는 횃불을 더 깊게 뻗었다. 빛 끝에서 짧은 석주 같은 것이 반짝였고, 그 뒤로는 벽 아래에서 봤던 것과 같은 얇은 문양선이 정면 낮은 단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선이 계속 간다.”
세라가 물었다.
“어디까지?”
“단 아래로. 아직 끝이 안 보여.”
리에트가 혀를 짧게 찼다.
“결국 더 안쪽으로 보라는 거지.”
정면 아래에서 다시 무언가 튀어 오르려는 기척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세라, 방패 올리고 반 걸음 전진. 리에트, 오른쪽 위 하나 끊어.”
세라는 이번엔 묻지 않았다. 방패를 세운 채 딱 반 걸음 전진하자 바닥 아래서 솟구치던 장치가 그녀 방패 전면에 먼저 부딪혔다. 동시에 리에트 화살이 위쪽 틈 하나를 꿰뚫었다. 위에서 날아들던 두 화살은 각을 잃고 천장만 긁었다.
세라가 무게를 버티며 말했다.
“더?”
“거기서 멈춰. 왼발 고정.”
세라가 전진한 자리 아래 판석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 오른편 벽 중간쯤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리에트, 오른쪽 벽 중간!”
화살이 날아가 얇은 틈을 맞혔다. 곧 거기서 철침 여러 개가 튀어나왔다가 힘없이 떨어졌다.
리에트가 짧게 웃었다.
“이제 좀 읽힌다.”
세라도 숨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없었으면 전열이 벌써 찢어졌겠네.”
그건 칭찬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지금 이 공간에서 내 판단이 더는 귀찮은 보조의 입놀림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나는 곧바로 다음 선을 봤다.
“세라, 그 자세 유지. 리에트, 방금 화살 박힌 자리 아래도 두 번째 있을 수 있어.”
리에트가 시선을 내렸다.
“있다. 작은 홈 하나 더.”
“좋아. 내가 앞으로 한 발 가면 또 울릴 거야. 울리면 위는 네가, 정면은 세라가 막아.”
세라가 거칠게 숨을 뱉었다.
“계속 네가 밟아야 하네.”
“내 발에서 반응이 제일 크니까.”
말하고도 속이 쓰렸다. 하지만 부정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문은 나한테 맞춰 열렸고, 판석은 내 위치를 더 크게 읽는다. 마음에 들든 말든 지금은 그 사실을 이용해야 했다.
나는 정면 단 끝으로 한 발 더 내밀었다.
곧바로 발밑이 짧게 떨렸다.
이번엔 바로 앞이 아니라 오른편 깊은 곳에서 무거운 마찰음이 길게 이어졌다. 뭔가 큰 축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리에트가 활을 당긴 채 속삭였다.
“큰 게 움직여.”
세라도 방패를 더 끌어올렸다.
“사람이냐.”
“아니.” 나는 빛이 닿는 끝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수문 장치 쪽.”
낮은 단 아래 어둠 속 홈은 한 지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 중앙엔 둥근 받침 같은 것이 있고, 그 뒤로는 닳은 석주가 서 있었다. 그냥 함정 하나가 아니라 다음 구획을 지키는 무언가가 깨어나는 형태였다.
“여기 계속 버티기만 하면 더 불리한 판이 벌어진다.”
세라가 물었다.
“그럼?”
“단 아래까지만 더 내려가. 숨을 자리 있으면 잡고, 없으면 다시 문턱으로 튕겨.”
세라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리에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틀리면 바로 끌어낸다.”
“알아.”
나는 마지막으로 공간을 훑었다. 첫 단 왼편은 방패와 몸을 겹칠 틈이 있고, 오른편은 리에트가 걸친 턱 아래 화살 둘을 더 꽂아 둘 수 있다. 정면 낮은 단으로 내려가면 중앙 사선은 더 줄어든다. 뒤는 이미 무너졌다. 결국 앞으로 계산하는 수밖에 없다.
“세라, 셋에 맞춰 한 발 내리고 방패 아래. 리에트, 위 안 움직이면 바로 아래 홈 봐.”
리에트가 짧게 답했다.
“응.”
“하나. 둘. 셋.”
세라가 먼저 무릎을 굽혀 낮은 단 아래로 방패를 들이밀었다. 나는 그녀 어깨 뒤로 비스듬히 따라 내려갔다. 리에트는 오른편 턱에 몸을 건 채 우리 머리 위를 덮듯 활을 겨눴다.
낮은 단 아래는 생각보다 완전한 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왼편에 사람 둘이 몸을 웅크릴 수 있는 움푹한 홈이 있었고, 그 앞에는 허리 높이의 석주처럼 튀어나온 돌기둥이 서 있었다. 방패와 그 기둥을 겹치면 정면 사선을 상당 부분 끊을 수 있었다. 오른편 벽에는 손바닥 높이의 얕은 홈이 두 줄 이어졌고, 그 아래엔 반복해서 무릎이 닿은 듯 닳은 돌면이 남아 있었다.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이 잠깐 숨을 죽이며 몸을 낮췄던 자리였다.
“여기다.” 내가 말했다. “첫 대기 지점.”
그 말이 끝나자 정면 깊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천천히 일어서는 소리가 났다.
돌과 쇠가 마찰하며, 오래 잠긴 관절이 깨어나는 소리였다.
리에트가 숨을 죽인 채 중얼거렸다.
“봤어.”
세라가 물었다.
“뭐가.”
“사람은 아니야.”
횃불빛 끝에서 가장 먼저 보인 건 둥근 철면의 가장자리였다. 그 뒤로 세로로 선 축 하나가 드러났고, 양옆에 접혀 있던 팔 비슷한 구조물이 아주 천천히 펼쳐졌다. 완전한 괴물보다 오래된 수문 장치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다만 앞면 중앙에는 우리가 위 벽화에서 봤던 빛 배열과 닮은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열둘이 반원을 이루고, 바깥으로 밀린 하나가 그 끝에 붙어 있었다.
나는 목 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중층 수문장.”
세라가 방패를 더 끌어올렸다.
“지금 싸우자는 건 아니겠지.”
“아직은 아니야.” 나는 빠르게 숨을 골랐다. “이 공간부터 먹어. 저건 자세부터 읽는다.”
수문 장치는 즉시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원판처럼 생긴 얼굴을 아주 천천히 돌리며 우리 위치를 훑었다. 오른편 높은 턱의 리에트, 왼편 방패를 세운 세라, 그리고 중앙 바닥선 위에 선 나. 마지막으로 그 원판은 내 발밑 판석선에서 잠깐 더 오래 멈췄다.
리에트가 낮게 욕했다.
“저것도 네 쪽을 보네.”
“알아.”
세라가 이를 악문 채 물었다.
“부적 때문이야?”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이야. 바닥이랑 위치. 아까부터 계속 그랬어.”
그 말은 사실이었고,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부적이 만능 열쇠라면 차라리 밀어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누군가가 사람 움직임 자체를 구조 일부로 짜 놓았고, 내 발 위치가 그 선을 가장 잘 맞추고 있었다. 내가 문을 푼 게 아니라 문이 나를 기다렸다는 감각이 다시 차갑게 목덜미를 훑었다.
바로 그때 뒤쪽 문턱에서 또 한 번 큰 금속음이 울렸다. 무너진 발판 바깥에서 누군가가 장대를 걸치다 다시 미끄러진 듯한 소리였다. 뒤이어 누군가가 “불빛 더!” 하고 외쳤다. 먼지 너머 번지던 불빛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세라가 짧게 말했다.
“시간 없다.”
리에트가 활을 낮추지 않은 채 받았다.
“뒤는 점점 좁아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바깥은 우리를 붙잡으러 오고, 안쪽은 우리를 더 깊이 읽으려 한다. 어느 쪽도 호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 이 비좁은 첫 공간은 하나의 장점이 있었다. 셋이 역할을 나누면 버틸 수 있다.
무너진 문턱과 낮은 단 사이에 끼인 이 짧은 구획은 통로라기보다 시험 직전 사람을 재배치하는 전실처럼 느껴졌다.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은 여기서 숨을 고르고, 앞에서 기다리는 구조는 여기서 서 있는 자세를 읽는다. 방패가 서는 자리, 활이 기대는 턱, 중앙 판석 위에 발이 모이는 선까지 너무 노골적으로 정리돼 있었다. 누군가는 오래전에 이미 세 사람 안팎의 진입을 상정하고 이 첫 방을 그려 놓은 것이다.
우정이 생긴 건 아니었다. 신뢰가 완성된 것도 아니었다. 세라는 아직도 나를 완전히 믿지 않고, 리에트는 여전히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처럼 거리를 둔다. 나 역시 둘 다 경계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좁은 구조 안에서는 셋이 따로 움직이면 죽는다.
그 사실 하나가 차갑고 단단한 못처럼 우리를 같은 선에 박아 두고 있었다.
나는 수문 장치와 세라, 리에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좋아. 이제부터는 진짜로 같이 움직여야 해.”
세라가 방패 너머로 짧게 답했다.
“명령만 정확히 해.”
리에트도 건조하게 덧붙였다.
“쓸데없는 말은 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어둠 속에서 중층 수문장의 원판 눈이 아주 희미하게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뒤쪽 무너진 문턱 밖으로는 아직 얼굴도 안 보인 추적자들 불빛이 먼지마다 걸렸고, 반쯤 열린 돌판 틈에서는 오래된 찬 공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빛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 미약한 광택만으로도 우리는 수문장의 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원판은 정면으로 고정돼 있지 않고 아주 느리게 좌우를 훑었고, 왼쪽 팔 같은 구조물은 세라 방패 높이에 맞춰 들리다 멈췄다. 오른쪽 축은 리에트가 몸을 건 턱 아래를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엔 내 발 아래 판석선 중앙을 다시 짚었다. 누가 어디에 서야 다음 동작이 이어지는지, 저 장치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뒤쪽에선 바깥 사람들이 무너진 발판 위에 판자나 장대를 얹으려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우리가 붙잡은 이 첫 공간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안과 밖 두 압박이 같은 순간에 맞물리는 가장 얇은 경계선이었다. 돌기둥 발치 반달 마모는 이 좁은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발이 같은 방향으로 버텨 왔는지까지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바깥으로도, 안쪽 깊숙한 곳으로도 완전히 가지 못한 채 그 중간 첫 공간을 겨우 선점했다. 그 자리는 숨는 곳이 아니라, 누구 손에 먼저 붙잡힐지 정하는 목줄의 차갑고 얇은 마디 같았다.
하지만 바로 그 비좁은 자리에서, 방패와 활과 발판 계산은 처음으로 하나의 호흡처럼 맞물리기 시작했다.
더 안쪽으로 가는 길은 열려 있었다.
더 뒤로 물러나는 길은 이미 아까의 길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면에서 깨어난 수문장은, 우리가 그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듯 느리고 무거운 자세로 다음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