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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의 이름

서사면 방책선은 정면보다 낮은 곳에서 먼저 흔들렸다.

눈가루가 말뚝 끝을 스칠 때마다 앞줄 말뚝은 바깥으로 밀렸다가 반 박자 늦게 안쪽으로 돌아왔다. 왼쪽에는 반쯤 얼어붙은 배수 고랑이 말뚝 밑을 따라 비스듬히 내려갔고, 오른쪽에는 창고 뒤 경사와 기록 인계 통로로 내려가는 낮은 돌계단이 붙어 있었다. 뒤쪽 감시탑 아래 마당에는 세라가 방패를 세우고 섰다. 브론은 창고 문턱 옆 못 통을 발로 막았고, 미리엘은 보강재 더미 그림자에서 흙 밑 울림을 듣고 있었다. 리에트는 탑 난간 아래 사각에 붙어 서쪽 능선을 보고 있었다.

위험은 적이 보이는 자리보다 우리가 밟고 선 줄 아래에 있었다.

검은 깃 셋은 능선 아래에서 바로 돌진하지 않았다. 하나는 말뚝선 바깥을 가볍게 긁고 빠졌고, 둘은 창고 뒤 경사와 기록 통로가 동시에 보이는 낮은 자리에서 멈췄다. 병사들은 정면에 방패를 올렸지만, 말뚝이 흔들리는 방향은 정면이 아니었다. 충격은 바깥에서 들어와 말뚝을 지나고, 창고 뒤 흙 밑을 한 번 울린 뒤, 기록 통로 돌계단 아래에서 다시 올라왔다.

라그나드의 전위는 성벽을 깨러 온 게 아니었다.

저 아래 묻힌 길이 아직 살아 있는지 재고 있었다.

“앞줄 두 명, 말뚝에 붙지 마.”

세라의 목소리가 먼저 마당을 갈랐다. 그녀는 내 쪽을 돌아보지 않고 방패 아랫변으로 병사 둘을 한 걸음 안쪽으로 밀었다. 겉으로는 정면 전열을 정돈하는 동작이었다. 실제로는 브론이 창고 뒤 경사로 들어갈 길을 비우는 움직임이었다. 전초 병사들의 눈은 아직도 세라를 제일 먼저 따라갔다. 파견 지휘관이 원했던 그림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벨로네의 딸이 북방 방책 앞에 서 있고, 병사들이 그 이름을 보고 버티는 그림.

하지만 세라는 그 그림 안에서 길을 바꾸고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들어 가운데 홈을 가리켰다.

“브론, 겉말뚝 말고 안쪽 받침. 지금 세우면 저쪽이 하중 자리를 읽어. 길목부터 막아.”

브론은 바로 욕 같은 숨을 뱉었다.

“이제야 말이 맞네.”

그는 넘어질 뻔한 못 통을 세우지 않았다. 먼저 통 두 개를 경사 중간에 눕혀, 보강재와 썰매 자국이 한 줄로 미끄러지는 길을 끊었다. 못 통 안에서 쇳조각이 한꺼번에 울렸다. 병사 하나가 왜 보강부터 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브론은 설명하지 않았다. 말뚝을 곧게 세우는 것보다, 무게가 어디로 빠지는지 숨기는 일이 먼저였다.

미리엘은 손끝을 흙에 대지 않은 채 허공에 띄웠다. 눈발이 그녀의 장갑 위에서 녹지 못하고 붙었다.

“셋째 박자예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바깥 충격, 말뚝 흔들림, 그다음 이 밑이 울어요. 그런데 조금씩 빨라져요.”

셋째 박자. 말뚝. 흙 밑. 기록 통로.

나는 그 순서를 머릿속에 박았다. 남쪽 종루에서 수레를 바로 세웠을 때와 같았다. 힘센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한 장면이 아니었다. 어느 물건이 먼저 넘어지고, 어느 사람이 거기로 몰리고, 어느 문서가 그 틈에 사라지는지 읽어야 사는 자리였다.

감시탑 위 리에트가 짧게 휘파람을 끊었다.

왼쪽 아래 둘.

안쪽 하나.

나는 계단 끝 검은 틈을 봤다. 눈가루가 한 번 비틀리더니, 검은 재를 뒤집어쓴 그림자 하나가 낮은 자세로 미끄러져 나왔다. 놈은 병사의 목을 곧장 노리지 않았다. 팔꿈치를 몸에 붙이고, 손목에 감은 납실 끈을 짧게 당겼다. 손끝의 도구는 칼이라기보다 갈고리와 편날을 붙여 놓은 물건이었다. 목을 베기엔 짧고, 봉함 끈을 비틀어 끊거나 기록띠를 낚아채기엔 알맞은 길이였다.

“리에트, 위 각.”

“봤어.”

화살은 놈의 어깨가 아니라 손끝 앞 흙을 긁었다. 검은 그림자가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났다. 그 짧은 멈춤에 브론이 못 통을 걷어차 경사 길목을 막았다.

“통과하려면 여기 밟고 지나가라.”

그가 막은 건 사람 몸이 아니라 길이었다. 그림자가 멈칫하는 동안, 나는 가장 가까운 병사를 크게 불렀다.

“너, 오른쪽 자루 들어. 가운데 홈 비워!”

내 목소리에 병사 셋이 동시에 돌아봤다. 일부러였다. 그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는 순간, 세라의 방패가 비스듬히 들어와 기록 인계 통로 앞을 가렸다. 바깥에서 보면 다친 병사를 보호하려 앞으로 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는 누가 안쪽으로 손을 넣어도 그녀 방패 모서리를 먼저 마주치게 되는 각이었다.

파견 지휘관이 뒤에서 고함쳤다.

“정면 유지! 벨로네 경, 병사들을 흩뜨리지 마십시오!”

세라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정면을 보려면 먼저 옆을 비워야 합니다.”

그 한마디가 병사들 귀에 박혔다. 지휘관의 명령은 아직 더 높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몸을 살리는 말은 세라의 방패 끝과 내 손짓 쪽에서 나왔다.

검은 그림자가 방향을 바꾸었다. 세라 방패와 보강재 더미 사이에 길이 좁아지자, 놈은 병사 대신 바닥에 쓰러진 봉함 상자 쪽으로 몸을 던졌다.

등이 차가워졌다.

저건 우연히 뻗은 손이 아니다. 여기서 무엇을 빼야 하는지 알고 들어온 손이다.

“브론, 아래.”

“알아.”

브론이 긴 보강재 다발을 무너뜨리듯 옆으로 밀었다. 나무와 쇠못이 쏟아지며 통로 폭이 한순간 더 좁아졌다. 그림자는 세라 방패와 보강재 사이에 몸이 끼었다. 리에트의 두 번째 화살이 바로 내려와 갈고리를 튕겨 냈다.

금속이 돌계단에 부딪혀 짧게 울었다.

미리엘이 그 소리에 숨을 삼켰다.

“거기 밑이에요.”

그녀가 가리킨 건 적의 손이 아니었다. 갈고리가 떨어진 자리 아래, 기록 인계 통로와 창고 뒤 경사가 맞물리는 돌 틈이었다. 아주 얇은 공명이 거기서 다시 번졌다. 적은 이 통로를 우연히 고르지 않았다. 여기가 울리는 축이라는 걸 알고, 봉함 상자와 기록띠가 한자리에 엉키는 순간을 노린 것이다.

세라가 방패로 그림자를 밀어붙였다. 놈은 계단 끝에 부딪혀 몸을 낮췄고, 병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칼을 찔러 넣으려 했다.

“칼 세우지 마.”

나는 바로 잘랐다.

“통로부터 비워. 저놈을 죽이는 것보다, 저 손이 뭘 보려 했는지 남기는 게 먼저야.”

병사는 멈칫했다. 그 짧은 주저를 세라가 받아 냈다.

“들었지. 통로 비워.”

그녀가 같은 명령을 자기 목소리로 다시 내리자, 병사는 더 묻지 않고 옆 사람을 잡아끌었다. 처음으로 내 지시가 세라를 거쳐 병사 손에 닿았다. 공식 앞줄과 실제 지휘가 서로 밀어내지 않고 한 장면 안에서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넘어진 봉함 상자 뚜껑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안에는 붉은 끈으로 감은 기록띠와 얇은 납패가 들어 있었다. 목상자 안쪽은 칸이 셋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칸 위엔 다른 손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하나는 군수 창고 검인, 하나는 현장 사제 봉함, 마지막 하나는 중앙 인계 대기 표식. 물건 하나가 창고에서 나와 기록칸을 지나 중앙으로 넘어가기까지, 서로 다른 셋이 같은 줄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적이 이 상자를 노린 이유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단순히 문장을 훔치려는 게 아니었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감추고, 어떤 순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지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상자였다.

나는 상자 옆에 흩어진 물건들을 훑었다. 짧은 못묶음, 접힌 방한포, 납실 뭉치, ‘병막 보강용 임시 천’이라 적힌 마대, ‘개봉 시 기록칸 입회’라고 눌러 쓴 작은 목패. 남쪽 종루와 병막에서 보던 말투가 여기에도 눌어붙어 있었다. 북방 전초는 외곽 요새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물건과 문장을 같은 줄에 세워 걸러 내는 중간 분류소였다.

군수 서기가 뒤늦게 달려왔다. 그는 적을 보지 않았다. 깨진 밀랍과 기록띠만 봤다. 현장 사제도 열쇠 꾸러미를 쥔 채 따라붙었다. 파견 지휘관은 병사 재배치를 먼저 외쳤다. 셋은 서로 다른 말을 했지만, 끝은 같았다. 각자 자기 손이 먼저 닿은 줄을 첫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봉함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사제가 손을 뻗었다.

“파손 수량 확인이 먼저입니다.”

서기가 장부판을 펼쳤다.

“방책이 무너지면 둘 다 의미 없습니다.”

지휘관이 이를 악물었다.

세 사람의 말은 현장 위에 세 겹으로 덮였다. 그 사이에서 병사들은 다시 멈췄다. 누구 명령을 먼저 들어야 하는지 모르면 몸은 가장 좁은 길목에 몰린다. 바로 그 틈을 검은 깃이 노렸다.

통로 왼쪽에서 무릎을 다친 병사가 주저앉았다. 그는 칼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추위와 통증 때문에 제대로 굽지 않았다. 옆 병사는 그를 끌어내려다가 가운데 썰매 홈으로 뒷걸음질쳤고, 그 발뒤꿈치가 회색 납인 상자를 건드렸다. 상자가 한 번만 더 밀리면 기록띠, 못 통, 다친 병사가 같은 홈 안으로 굴러 들어간다. 그 순간 적이 두 번째로 손을 뻗으면 누구를 먼저 잡아야 할지 아무도 고르지 못한다.

“부상자는 고랑 쪽으로 빼지 마.”

나는 다친 병사를 보며 손을 내렸다.

“오른쪽 벽에 붙여. 다리는 펴지 말고 방패 뒤에 둬. 미리엘, 피부터 막지 마. 그 자리 울림부터 끊어.”

병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상처를 먼저 보지 말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미리엘도 한 박자 멈췄다. 그래도 그녀는 곧장 무릎을 굽혀 병사 발밑 눈을 손등으로 걷어 냈다. 붉은 피가 아니라 검은 재가 먼저 드러났다. 적이 지나가며 뿌린 가루가 부상자 발목 밑에 얇게 묻어 있었다. 병사를 치료하려고 그 자리를 흔들면, 재가 기록띠와 봉함 상자 쪽으로 번진다.

“재가 먼저예요.”

미리엘이 이를 악물었다.

“상처는 얕아요. 지금 옮기면 흔적이 섞여요.”

그 한마디에 병사 둘의 손이 달라졌다. 그들은 다친 동료를 번쩍 들지 않고, 방패 하나를 바닥에 눕혀 젖은 흙과 재 사이를 가렸다. 사람을 버린 게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면서 흔적도 같이 살리는 방식으로 손을 대는 순서를 바꾼 것이다. 이 전초에선 그런 간단한 순서조차 누군가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으면, 늘 장부와 열쇠가 사람보다 먼저 움직였다.

나는 손을 뻗어 가장 가까운 병사 둘을 불렀다.

“붉은 밀랍은 기록칸 벽 안쪽. 회색 납인은 창고 문턱 밖. 끈 없는 자루는 가운데 두지 마. 사람이 딛는 자리와 물건이 지나는 길을 갈라.”

둘은 처음엔 이유를 묻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움직이고 나니 차이가 드러났다. 붉은 밀랍 상자는 서로 부딪히면 봉함 끈이 잘 풀렸고, 회색 납인 상자는 무거워서 경사 아래로 한 번 밀리면 멈추기 어려웠다. 끈 없는 자루를 가운데 홈에서 치우자 사람과 물건이 처음으로 서로를 덜 밟았다. 통로가 통로답게 보였다.

미리엘은 기록띠를 맨손으로 집지 않았다. 장갑 안쪽 천을 접어 붉은 점획이 찍힌 띠와 군수 서기 손글씨가 묻은 띠 사이에 끼워 넣었다.

“떨어진 순서까지 봐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끊기지 않았다.

“붉은 점획이 위예요. 군수 글씨가 아래. 누군가 나중에 덮었어요.”

병사 둘의 시선이 처음으로 칼끝에서 기록띠로 내려갔다. 세라가 앞에서 버티는 동안 현장의 눈이 하나 더 늘었다. 지금 여기서 지키는 건 사람 목숨만이 아니었다. 무엇이 먼저 떨어졌고, 누가 나중에 덮었고, 적이 왜 그 순서를 보려 했는지까지 남겨야 했다.

사제가 낮게 말했다.

“그 판단은 성도 입회 뒤에—”

“입회는 나중에 해도 됩니다.”

미리엘이 말을 잘랐다. 그녀가 성도 사람 말을 이렇게 정면에서 끊은 건 드문 일이었다. 손끝은 여전히 떨렸지만, 눈은 피하지 않았다.

“지금 손대면 덮은 순서가 사라져요. 그럼 입회해도 아무것도 못 봅니다.”

사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미리엘을 꾸짖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보고 있었다. 미리엘이 몸을 낮추고 두 기록띠 사이를 보전하는 장면을, 사제의 열쇠보다 먼저 봤다.

브론이 못 통 위에 발을 올리고 서기를 막았다.

“숫자 세고 싶으면 발부터 멈춰. 네가 장부 들고 밟으면 네 숫자도 끝이야.”

서기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움직이진 못했다. 브론의 발 아래 못 통은 단순 장애물이 아니었다. 서기가 한 걸음 더 들어오면 기록띠 옆 흙을 밟게 되는 자리이자,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다시 빠질 길목이었다. 브론은 한 번에 둘을 막고 있었다.

그때 계단 아래쪽 검은 그림자가 손목을 비틀었다. 떨어뜨린 갈고리를 포기한 줄 알았는데, 소매 안에서 작은 주머니가 하나 더 나왔다. 주머니 입구에는 검은 재가 묻어 있었다. 놈이 그것을 통로 쪽으로 던지면 부상자 발밑 흔적과 기록띠 주변 흙이 한꺼번에 같은 가루로 덮인다. 무엇이 먼저 묻었는지, 누가 나중에 덧댔는지 더는 가르기 어렵다.

“리에트, 주머니.”

내가 끝까지 말하기 전에 탑 위에서 화살이 내려왔다. 화살촉은 놈 팔을 찌르지 않고 주머니 끈만 끊었다. 검은 재가 공중에서 흩어지기 전에 브론이 보강재 판자를 세워 바람길을 막았다. 판자 표면에 재가 얇게 붙었다. 통로 바닥은 살아남았다.

병사 하나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저놈들, 사람보다 흔적을 먼저 죽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전열이 이제 우리 다섯만의 일이 아니게 됐다는 걸 알았다. 병사들도 적의 목표를 조금씩 자기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리에트가 감시탑에서 낮게 외쳤다.

“안쪽 하나 빠지는 척한다. 말뚝 아래 빈자리 본다.”

검은 깃 하나가 정말로 뒤로 물러나는 척했다. 그러나 발끝은 서사면 말뚝 아래를 향했다. 놈은 죽은 동료를 챙기러 물러나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무엇을 가리고 무엇을 그냥 두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방금부터 이 전투는 칼싸움이 아니었다. 우리가 병사, 물건, 원본, 반응해야 할 자리 중 무엇을 먼저 살릴지 재는 시험이었다.

나는 곧장 지시를 바꿨다.

“브론, 보강재 세우지 마. 눕혀. 말뚝을 바로 고치면 하중 자리가 보인다. 길목만 가려.”

브론은 대답 대신 긴 보강재를 어깨로 밀어 눕혔다. 나무가 진흙 위에 떨어지며 낮게 울렸다. 말뚝은 여전히 비틀려 있었다. 지휘관 얼굴엔 불쾌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경사 아래에서 들여다보던 검은 깃은 안쪽 통로를 곧장 보지 못하게 됐다. 고치는 시늉을 버리고 가리는 쪽을 택한 결과였다.

세라도 그 선택을 읽었다. 그녀는 방패 끝으로 병사 셋의 자리를 잘라 보였다.

“방책만 보지 마. 봉함 상자 뒤로 둘. 통로 위에 하나. 칼끝 낮춰.”

병사들은 이제 망설임이 짧아졌다. 세라의 명령이 공식 전열을 붙들고, 내 손짓이 안쪽 순서를 잡고, 브론과 미리엘과 리에트가 각각 다른 위험을 막았다. 이건 아름다운 합이 아니었다. 더럽고 미끄러운 흙 위에서 겨우 맞춘 순서였다. 그래도 방금까지 각자 다른 쪽을 보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같은 박자 안에 들어왔다.

파견 지휘관이 나를 향해 말했다.

“보조 인력이 현장 병력을 직접 움직이는 일은—”

“그럼 지금 명령하십시오.”

내가 그를 보며 말했다.

“말뚝을 바로 세울 겁니까, 경사를 가릴 겁니까. 기록띠를 봉할 겁니까, 떨어진 순서를 남길 겁니까. 병사를 앞줄에 묶을 겁니까, 통로를 비울 겁니까.”

지휘관의 입술이 굳었다. 그는 대답을 고르는 동안 이미 늦었다. 현장에서는 한 박자 늦은 명령이 때로 없는 명령보다 위험하다. 병사들도 그것을 알았다. 그들은 지휘관의 직함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지금 죽지 않으려면 누구 말이 먼저 몸을 살리는지 이미 봤다.

세라가 그 침묵을 잘랐다.

“보고에는 내 이름을 올리셔도 됩니다.”

그녀는 지휘관에게 말했다.

“대신 지금 움직이는 자리는 저 사람이 읽습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 하나로 전초 마당의 공기가 바뀌었다. 세라가 내 뒤에 숨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앞줄의 얼굴을 스스로 맡고, 그 얼굴로 안쪽 지휘를 가렸다. 파견 지휘관은 그녀를 선전용 방패로 세우려 했지만, 세라는 그 방패를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벽으로 바꿨다.

미리엘이 다시 흙 밑 울림을 들었다.

“빨라져요. 셋째가 아니라 둘째 끝에서 올라와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창고 뒤 경사 아래 눈이 사르르 무너졌다. 병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뛰려 했다.

“멈춰. 혼자 내려가지 마.”

내가 불렀다. 브론이 대신 보강재 끝을 밀어 넣었다. 무너지는 홈이 아래로 더 내려앉지 않고 옆으로 갈라졌다. 미리엘은 병사 후송 방향을 반 칸 틀어 공명이 올라오는 자리를 비웠다. 리에트는 위에서 확인했다.

“바깥 손 없어. 잔울림이야.”

적이 이미 건드려 놓고 간 줄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한 번 찌른 뒤 현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누가 먼저 뛰고 누가 먼저 비우는지 보는 잔울림. 병사들은 눈앞에서 그걸 배웠다. 칼 든 적이 보이지 않아도 줄은 먼저 흔들린다. 그리고 그 줄을 따라 뛰면, 적이 기다리는 자리로 스스로 들어간다.

“다음엔 어디를 비웁니까?”

아까 내 지시를 따랐던 병사 하나가 물었다. 그는 이제 세라만 보지 않았다. 세라의 방패가 고정한 앞줄 너머, 내가 발끝으로 그은 가운데 홈과 미리엘이 비운 공명 자리까지 번갈아 봤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사람 수를 다시 셌다. 말뚝선 앞 셋, 창고 문턱 둘, 기록 통로 위 계단 둘, 감시탑 아래 예비 둘. 다친 병사 하나는 무릎을 붙잡고 있었고, 손이 떨리는 병사 셋의 시선은 아직도 상자와 칼 사이를 오갔다. 열 명도 안 되는 작은 재배치였다. 하지만 이 열 명의 위치가 어긋나면 뒤쪽 보강재와 봉함 상자와 후송선이 한꺼번에 엉킨다.

나는 가운데 썰매 홈을 발끝으로 그었다.

“여긴 비워. 누가 넘어져도 여기로 몰리지 않게.”

병사 둘이 움직였다.

“왼쪽 고랑 옆 짧은 말뚝은 손대지 마. 깊게 박힌 게 아니야. 그 뒤에 보강재 두 장만 세워서 무게를 옆으로 빼.”

브론이 바로 손바닥으로 길이를 쟀다.

“두 장이면 버틴다. 세 장이면 아래가 죽어.”

“두 장만.”

나는 기록 통로 계단을 가리켰다.

“여긴 사람보다 상자 든 손이 먼저 지나간다. 창끝 낮춰. 물건이 쏠리면 걷어차지 말고 벽 쪽으로 세워.”

병사 하나가 이해 못 한 얼굴로 납패를 봤다. 나는 잠깐 그것을 들어 보였다.

‘서사면 3차’

‘개방 전’

글자가 짧을수록 숨이 막혔다. 3차라면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개방 전이라면 누군가는 아직 열리지 않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북방 기록 안에 남쪽 종루식 표기가 남아 있다면, 이 전초의 반응은 북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쪽에서 사람을 묶던 절차가 북쪽 땅 밑 반응을 다루는 말로 이어진 것이다.

“저런 게 빠지면 적 하나 놓치는 것보다 오래 피 본다.”

나는 병사에게 말했다.

“사람 막는다고 상자부터 걷어차지 마.”

그제야 병사 표정이 달라졌다. 창끝이 적 가슴 높이에서 상자 든 손 높이로 내려왔다. 그는 전투를 피하려는 게 아니었다. 싸움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걸 받아들인 것이다.

세라가 방패 모서리를 계단 앞에 반 걸음 더 들이밀었다. 병사들은 그 선을 기준으로 삼았다. 미리엘은 기록띠와 납패를 젖은 천으로 감싸되 봉하지 않았다. 브론은 못 통과 보강재로 길목을 닫되 말뚝은 일부러 비뚤게 뒀다. 리에트는 감시탑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위에서 손 도구와 발끝만 따라갔다.

나는 그제야 각자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세라는 겉 전열. 병사 시선은 계속 네 쪽에 묶어.”

“알았어.”

“브론은 안쪽 받침. 겉말뚝보다 아래가 먼저 무너지지 않게.”

“그건 내 일이지.”

“미리엘은 박자. 울림 올라오는 칸 비우고, 후송선이 거기 겹치지 않게 잡아.”

“할게요.”

“리에트는 위 각. 사람보다 도구 든 손 먼저 봐.”

“그건 원래 잘해.”

마지막으로 나는 내 자리도 말했다.

“나는 줄을 읽을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해졌다. 계승자라는 이름은 누군가 하나를 강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었다. 세라의 얼굴, 브론의 하중, 미리엘의 박자, 리에트의 시야, 병사들의 겁먹은 발과 떨리는 손까지 한 번에 묶어 무엇을 먼저 살릴지 고르는 일. 나는 그 줄이 끊기기 전에 먼저 봐야 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은 아니었다. 다들 겁먹었고, 손은 젖었고, 지휘관과 사제와 서기는 여전히 서로 다른 장부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방금까지 우연히 같이 살아남던 다섯의 시간은 끝났다. 세라가 방패를 한 뼘 틀면 병사 넷이 시야를 맞췄고, 브론이 보강재 하나를 걷어 내면 흔들리던 홈이 옆으로 힘을 흘렸다. 미리엘이 후송선을 반 칸 비틀면 공명 칸이 비었고, 리에트의 화살은 아래 손놀림만 정확히 끊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어느 발이 어느 물건 옆에서 멈춰야 하는지, 어떤 상자는 세우고 어떤 자루는 눕혀야 하는지만 짧게 짚었다.

병사들도 달라졌다. 누군가는 말뚝을 세우기 전에 못 통 위치를 먼저 물었고, 누군가는 다친 동료를 옮기며 통로와 창고 문턱 중 어느 쪽을 비워야 하느냐고 확인했다. 예전 같으면 전부 파견 지휘관 쪽으로 던졌을 질문이었다. 지금은 윗선 눈치보다 현장의 순서가 빨랐다. 그것이 충성의 변화는 아니었다. 북방 전초 서사면에서만큼은 살아남는 순서가 같아졌다는 뜻이었다.

감시탑 위 리에트가 몸을 낮췄다. 그녀는 서쪽 능선 바깥을 뚫어지게 보더니 목소리를 깔았다.

“셋이 아니야.”

바람이 길게 휘돌았다. 눈발 사이로 검은 점들이 다시 나타났다. 조금 전 셋으로 보였던 그림자 뒤에 두 개가 더 붙어 있었다. 앞선 놈들이 치고 빠지는 동안 뒤쪽 둘은 우리가 어디를 먼저 가리고, 누구 목소리에 병사들이 먼저 몸을 돌리는지 보고 있었던 셈이다.

“다섯.”

리에트가 말했다.

검은 깃 끝이 눈발 사이에서 짧게 흔들렸다. 이번엔 말뚝 하나만 건드리고 끝낼 모양새가 아니었다. 앞의 둘은 낮게 퍼져 서사면 말뚝선을 다시 건드릴 자리에 섰고, 뒤의 둘은 창고 뒤 경사를 돌아 기록 통로와 맞물릴 각을 잡았다. 가운데 하나만 능선 아래에 잠깐 멈췄다. 지휘하는 자일 가능성이 컸다. 방금 우리가 어떤 질문에 먼저 반응했고, 병사들이 어느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는지 그놈이 전부 보고 있었을 것이다.

더 노골적인 건 그들 사이의 빈자리였다. 처음 셋이었을 때 놈들은 일부러 허술한 틈을 남겨 우리 눈을 앞으로 끌었다. 이제 그 빈칸을 뒤쪽 둘이 메우고 있었다. 다음 충돌이 오면 말뚝선만 흔드는 척하다가, 우리가 시선을 주는 순간 기록 통로와 창고 경사를 동시에 찌를 것이다. 미리엘이 비워 둔 박자 칸까지 알고 들어올 가능성도 높았다.

세라가 방패 손잡이를 다시 고쳐 쥐었다. 브론은 남은 못 통 위치를 한 번 더 바꿨다. 미리엘은 공명이 올라오는 칸을 따라 발을 반 걸음 옮겼다. 아까 내 지시를 따랐던 병사 셋도 묻지 않고 통로와 말뚝 사이로 흩어졌다.

나는 서사면과 창고 뒤, 기록 통로와 감시탑 아래 마당을 한 번에 시야에 넣었다.

이제야 정말 시작이었다.

북방 전초가 우리를 뭐라고 부르든, 저 다섯 그림자가 찌르러 올 곳은 분명했다. 전열의 박자와 하중. 그리고 그 둘을 누가 먼저 붙드는지.

방금까지는 전초가 우리를 시험하는 줄 알았다. 이제는 아니었다. 저 다섯 그림자도, 뒤늦게 끼어드는 지휘관도, 기록을 봉하려는 손도 모두 같은 자리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그 줄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면, 저쪽이 우리 대신 이름을 정한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먼저 잘려 나가는 것도 우리일 터였다.

그러니 다음 충돌에선 한 칸도 공짜로 내줄 수 없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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