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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의 이름

서사면 방책선은 보기보다 먼저 흔들리고 있었다.

눈가루가 말뚝 사이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끝이 아주 조금씩 어긋났다. 병사들 눈에는 바깥에서 던져진 충격 때문에 나무가 비틀리는 것처럼만 보였겠지만, 내 눈엔 그게 아니었다. 창고 뒤 경사면에서 한 번, 기록 인계 통로 아래에서 또 한 번, 보이지 않는 하중이 반 박자 늦게 올라왔다. 바깥에서 친 힘이 안쪽 어딘가에 닿고 나서야 말뚝이 흔들렸다.

적은 성벽을 깨러 온 게 아니었다.

저 아래 줄이 아직 살아 있는지 떠보러 왔다.

세라는 감시탑 아래 마당 한가운데서 방패를 세운 채 병사 둘을 손짓으로 갈랐다. 그녀가 움직이는 곳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파견 지휘관이 원했던 것도 저 그림이었을 것이다. 벨로네의 딸이 북방 방책선 앞에 서 있는 모습. 전초 병사들이 불안할 틈도 없이 저쪽이 앞줄이라고 믿게 만드는 그림.

하지만 세라는 지금 얼굴만 세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왼쪽 둘, 말뚝으로 붙지 마. 한 걸음 안쪽.”

그녀가 병사들에게 내린 첫 지시는 겉으론 전열 정돈처럼 들렸다. 실제로는 창고 뒤 길목을 비우는 배치였다. 병사 둘이 말뚝 바로 아래에 붙어 섰다면, 브론이 들어갈 자리는 막혔을 터였다.

브론은 이미 못 통 하나를 발끝으로 걸어 세우고 있었다. 굴러떨어지려던 통이 경사 중간에서 툭 멈췄다.

“이 길이부터 묶어.”

나는 창고 뒤 흙바닥을 가리켰다.

“겉말뚝 말고 안쪽 받침.”

브론이 나를 한 번 보고는 바로 욕 비슷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좀 사람답게 시킨다.”

그는 바깥으로 드러난 말뚝보다 흙 속에 박힌 짧은 받침목부터 뒤집어 봤다. 겉에서 보면 방책선 보수였다. 실제로는 하중 방향을 바꾸는 작업이었다. 적이 다시 같은 박자로 밀어 넣어도, 이번엔 경사 아래로 힘이 쏠리지 않고 옆으로 새게 해야 했다.

서사면 방책선 안쪽 배치는 겉으로 볼수록 단순해 보였다. 바깥에서 밀려오는 충격을 막는 앞줄 말뚝, 그 뒤에 눈을 덮어 둔 보강재 더미, 조금 더 안쪽의 창고 뒤 경사, 그리고 기록 인계 통로로 내려가는 낮은 계단. 하지만 실제로 위험한 건 가장 앞줄이 아니었다. 창고에서 나온 못통과 병막 보강천, `접촉 후 보온`이라고 적힌 얇은 마대, 봉함 상자를 옮기던 나무 썰매가 전부 같은 좁은 길목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저 길목 하나가 막히면 병사 후송선과 물품 인계선, 기록 봉함선이 한꺼번에 뒤엉킨다.

나는 그 얽힘을 눈으로 더듬었다. 왼쪽엔 반쯤 얼어붙은 배수 고랑이 있었고, 그 가장자리엔 급히 박아 둔 짧은 말뚝들이 띄엄띄엄 이어져 있었다. 가운데엔 썰매 자국이 눌러 만든 미끄러운 홈이 있었고, 오른쪽엔 기록칸으로 문서를 넘길 때만 쓰는 좁은 돌계단이 붙어 있었다. 병사들이 당황해 가운데 홈으로 몰리면, 보급품은 왼쪽으로 쏠리고 기록 상자는 오른쪽에서 걸린다. 적이 원하는 건 정면 붕괴보다 그 얽힘일 가능성이 높았다.

남문 광장에서 처음 수레를 바로 세웠을 때도 그랬다. 힘센 사람이 하나 더 필요한 게 아니라, 어떤 물건이 어느 순서로 넘어지면 뒤에 뭐가 막히는지를 먼저 보는 게 살길이었다. 여기서도 같았다. 북방 전초는 성벽보다 사람들 손순서가 먼저 꼬이기 쉬운 자리였다. 그래서 적은 병사를 베기 전에 줄을 흔들고, 우리는 칼보다 배치 순서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미리엘은 그보다 한 걸음 더 안쪽, 보강재 더미 그림자에 멈춰 섰다. 그녀는 무릎을 굽혀 흙 위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손끝을 조금 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녀가 듣는 건 병사들 발소리도, 바람도 아니었다. 금속과 얼음 밑에서 늦게 올라오는 얇은 울림이었다.

“여기예요.”

미리엘이 발끝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지금 흔드는 건 말뚝 끝이 아니에요. 셋째 박자에 이 밑이 울어요.”

셋째 박자.

바깥 충격.

말뚝 흔들림.

그리고 조금 늦게 올라오는 밑울림.

“세라.”

내가 부르자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대답했다.

“말해.”

“앞줄은 그대로 잡아. 대신 한 칸만 왼쪽으로 밀어. 병사들 시선은 네 쪽에 묶고, 가운데 비워.”

세라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왜인지 묻지 않았다. 그 한 칸이 비면, 말뚝선과 창고 뒤 길목이 한 줄로 보였다. 바깥 병사들 눈엔 허술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한텐 오히려 움직일 길이 생겼다.

그녀는 방패 아랫변으로 눈을 쓸어 내듯 들었다.

“서쪽 둘은 나 따라와. 가운데 비워. 뛰지 마.”

명령은 군더더기 없이 떨어졌다. 병사들은 거의 본능처럼 세라 쪽으로 몸을 틀었다. 북방 전초에선 아직도 내가 아니라 그녀를 먼저 본다. 그게 지금은 오히려 좋았다. 모두가 세라를 앞줄로 보는 동안, 실제 전열은 안쪽에서 다시 짜일 수 있었다.

감시탑 위에 붙어 있던 리에트가 낮게 휘파람을 끊었다. 짧고, 다시 짧고, 마지막은 길었다.

왼쪽 아래 둘.

안쪽 하나.

나는 바로 창고 뒤 계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가루가 한 번 비틀리더니 낮은 계단 끝 검은 틈에서 그림자 하나가 미끄러졌다. 정면으로 뛰어드는 놈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사람을 베기보다 물건을 낚아채고 빠지기 좋은 몸놀림이었다.

그림자 손목에는 납실을 감아 만든 얇은 감김끈이 둘러져 있었고, 손끝엔 짧은 갈고리와 편날이 한 몸처럼 붙은 도구가 들려 있었다. 목을 긋기엔 짧고, 봉함 끈을 비틀어 끊거나 기록띠를 걸어채기엔 딱 맞는 길이였다.

“리에트, 위 각.”

“봤어.”

화살 소리가 아니라, 공기를 가르는 낮은 떨림이 먼저 내려왔다. 리에트의 화살은 적 어깨를 꿰기보다 손끝 앞 흙을 긁었다. 검은 그림자가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섰고, 그 틈에 브론이 못 통을 걷어차며 경사 아래 길을 막았다.

“통과하려면 여기부터 밟아야지.”

그가 막아 세운 건 적이 아니라 길이었다. 그림자는 한순간 멈칫했다.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나는 병사 하나를 크게 불렀다.

“너, 오른쪽 자루 들어. 지금.”

내 목소리에 근처 셋이 동시에 돌아봤다. 일부러였다.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린 순간, 세라는 방패를 비스듬히 돌려 기록 인계 통로 앞을 아예 가렸다. 바깥에선 다친 병사를 보호하려 전진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는 누가 안쪽으로 손을 넣든 반드시 그녀 방패를 먼저 마주치게 되는 각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그제야 방향을 틀었다. 목숨을 건 병사와 눈앞의 틈을 저울질하는 짧은 정적 끝에 놈은 칼끝이 아니라 바닥에 쓰러진 봉함 상자 쪽으로 몸을 던졌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건 우연히 챙겨 온 손이 아니다.

여기서 뭘 빼야 하는지 알고 들어온 손이다.

“브론, 아래.”

“알아.”

브론이 짧게 답하며 보강재 다발을 무너뜨리듯 옆으로 밀었다. 나무와 쇠못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통로 폭이 갑자기 좁아졌다. 검은 그림자는 세라 방패와 보강재 더미 사이에 몸이 낀 채 반 박자 늦었다. 그 순간 리에트의 두 번째 화살이 날아가 놈 손의 갈고리를 튕겨 냈다.

금속이 돌계단에 부딪혀 짧게 울었다.

미리엘이 바로 그 자리를 보고 숨을 삼켰다.

“거기 밑이에요.”

그녀가 말한 건 적이 아니라 갈고리가 떨어진 자리 아래였다. 기록 인계 통로와 창고 뒤 경사가 만나는 돌 밑에서, 아주 얇게 공명이 다시 번졌다. 적은 우연히 이 통로를 고른 게 아니었다. 여기가 울리는 축이라는 걸 알고 봉함 상자와 기록띠가 한자리에 엉키는 순간을 노린 것이다.

세라가 그대로 방패를 눌러 밀었다. 검은 그림자가 옆으로 튕겨 나가며 계단 끝에 부딪혔다. 병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칼을 들이밀었다. 파견 지휘관 쪽에서 뒤늦게 “정면 유지!”라는 고함이 날아왔지만, 그 병사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 그는 나를 한 번, 세라를 한 번 보고는 칼끝을 통로 쪽으로 돌렸다.

“여기 막으면 되죠?”

처음으로 병사 입에서 내 쪽을 향한 확인이 나왔다.

“그래. 앞줄 세우지 말고 통로부터 비워.”

그가 즉시 다른 둘을 잡아 끌었다. 세라 말이 길을 열고, 내 말이 안쪽 배치를 고정했다. 지휘관의 고함은 눈바람 속에서 한 박자 늦게 흩어졌다.

멀찍이 선 파견 지휘관은 한 번 더 손을 들었다가 끝내 내리지 못했다. 명령권은 아직 저 사람 손에 있었지만, 지금 이 선을 붙드는 건 그 늦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제야 바닥을 봤다.

봉함 상자 하나가 옆으로 넘어지며 뚜껑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안에는 붉은 끈으로 감은 기록띠와 얇은 납패가 들어 있었다. 그냥 보급표였다면 저렇게 따로 봉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북방 전초에서 무엇이 흔들렸는지, 무엇을 어디로 넘겼는지를 저 얇은 띠에 적어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적은 사람을 치는 척하면서 결국 그걸 보러 왔다.

상자 안쪽엔 기록띠만 들어 있지 않았다. 얇은 밀랍 조각 셋이 칸을 나눠 붙어 있었고, 그 위엔 각각 다른 손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하나는 군수 창고 검인, 하나는 현장 사제 봉함, 마지막 하나는 중앙 인계 대기 표식. 물건 하나가 창고를 나와 기록칸을 거쳐 중앙으로 넘어가기까지, 서로 다른 셋이 같은 줄에 손을 얹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적이 이 상자를 노린 이유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단순히 문장을 훔치려는 게 아니라, 누가 어디서 무엇을 감추고 어떤 순서로 갈아입히는지 한 번에 읽을 수 있으니까.

나는 상자 옆으로 쓰러진 물건들을 훑었다. 짧은 못묶음, 접힌 방한포, 납실 뭉치, `병막 보강용 임시 천`이라 적힌 마대, 그리고 `개봉 시 기록칸 입회`라고 눌러쓴 작은 목패. 남쪽 종루에서 보던 문서 말투가 여기에도 그대로 눌어붙어 있었다. 북방 전초는 외곽 요새처럼 보였지만, 실제론 물건과 문장을 같은 줄에 세워 걸러 내는 중간 분류소였다. 그러니 적이 칼보다 갈고리와 편날을 앞세운 것도 당연했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저 줄 하나를 끊어 손순서를 어지럽히는 편이 훨씬 값이 컸을 것이다.

세라가 날카롭게 외쳤다.

“뒤쪽 둘, 칼 세우지 마. 통로 벌려. 지금은 이 선부터 죽이지 마.”

파견 지휘관이 멀리서 무언가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이미 세라 말을 따르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그녀가 전초의 얼굴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다들 그 얼굴 뒤에서 누가 어디를 읽고 있는지 어렴풋이 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 병사가 기록띠를 집으려다 내 눈을 마주치고 손을 멈췄다.

“그건 두지 마.”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가 바로 건넸다.

짧은 납패 끝엔 마른 먹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서사면 3차`

`개방 전`

개방 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남쪽 종루에서 보던 말투와 같았다. 북방 전초도 이 흔들림을 단순 방어전으로 적지 않았다. 무엇이 열리기 전에 뭘 눌러 두고, 무엇을 다른 말로 갈아 적을지 미리 짜 둔 수순이었다. 게다가 `3차`라는 숫자는 지금 이 충격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바깥에선 오늘 아침 벌어진 작은 교전처럼 보여도, 안쪽 장부에선 이미 앞선 두 번의 반응과 같은 줄에 묶여 있었을 수 있다.

나는 기록띠를 아주 조금 풀어 안쪽 첫 줄만 확인했다. 전부 읽을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바깥 면에 눌린 먹자국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사면`, `냉각 지연`, `인계 보류`, `원본 별도`, 그리고 마지막 줄의 `남문식 표기 준용`. 남문. 북방 기록 한 장 안에 왜 남문식 표기가 남아 있는지, 누가 남쪽 사례를 기준으로 북방 반응을 분류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전초 내부 누군가는 이 반응을 현장 돌발이 아니라 이미 아는 절차의 연장선으로 다루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창고 문턱 쪽에서 늦은 실랑이 소리가 튀었다. 군수병 하나가 반쯤 열린 장부를 들고 서 있었고, 현장 사제는 봉함부터 다시 하라며 손을 뻗고 있었다. 파견 지휘관은 병사 재배치를 우선하라고 소리쳤지만, 셋 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느라 한 발씩 늦었다. 나는 그 장면을 곁눈질로만 봤다. 적이 노리는 건 저 갈등 자체다. 누구 손이 먼저 가야 하는지 안 정해진 순간, 현장은 늘 가장 약한 줄부터 끊긴다.

나는 가장 가까운 병사 둘에게 손짓했다.

“상자 색부터 갈라. 붉은 밀랍은 기록칸 벽 안쪽, 회색 납인은 창고 문턱 밖, 끈 없는 건 가운데 두지 마.”

둘은 처음엔 왜 그러는지 묻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막상 움직이고 나니 금세 차이가 드러났다. 붉은 밀랍 상자들은 서로 부딪히며 봉함 끈이 잘 풀렸고, 회색 납인 상자들은 무거워서 경사 아래로 한 번 미끄러지면 멈추기 어려웠다. 끈 없는 자루를 가운데 홈에서 치워 내자 사람 발과 물건 발이 처음으로 갈렸다. 그제야 통로가 통로답게 보였다. 적이 다시 손을 뻗더라도 최소한 무엇이 넘어가고 무엇이 남는지는 우리가 먼저 고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이미 리에트 화살을 피해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세라는 더 깊이 쫓지 않았다. 그녀도 알았다. 지금 필요한 건 적 하나 목을 따는 일이 아니라, 이 자리를 넘기지 않는 일이었다.

브론이 못통 위에 발을 올린 채 투덜거렸다.

“놈들, 사람 수는 안 세고 길부터 잰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해.”

나는 기록띠를 소매 안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앞줄이 누군지보다, 어느 줄이 먼저 끊기는지부터 봐야 한다.”

미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찬바람에 볼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은 더 또렷했다.

“그럼 정화도 뒤예요?”

“지금은 박자부터.”

내가 답했다.

“울림이 셋째 박자에 올라오면 그 전에 비워야 해. 네가 끊는 건 상처가 아니라 저 반응이야.”

미리엘은 한순간 망설이다가 곧장 수긍했다. 여기서 치유는 피를 멎게 하는 손놀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응이 겹치는 칸을 늦추고, 잘못 맞물린 줄을 한 박자라도 비틀어 놓는 게 더 중요했다.

브론도 중얼거리듯 받았다.

“난 하중부터 읽고.”

감시탑 위에서 내려온 리에트가 마지막 화살을 다시 메기며 말했다.

“난 위 각을 자를게.”

세라는 방패를 세운 채 병사들 사이를 훑어봤다. 북방 전초 병사들은 아직도 그녀를 제일 먼저 본다. 하지만 이제 물음은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어디를 비울지, 뭘 먼저 지킬지, 누가 한 박자 늦춰야 할지 묻는 시선이 자꾸만 내 쪽으로 되돌아왔다.

방금 내 지시를 따랐던 병사 하나가 젖은 입술을 훔치고 물었다.

“그럼 다음엔 어디를 비웁니까?”

세라도 그 말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방패를 내린 채 짧게 덧붙였다.

“말해. 다음 줄은 어떻게 묶을 건데.”

나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사람 수를 다시 셌다. 말뚝선 앞에 셋, 창고 문턱에 둘, 기록 통로 위 계단에 둘, 감시탑 아래에서 예비로 서 있는 병사 둘. 다친 놈 하나는 무릎을 붙잡고 있었고, 방금 통로를 막았던 셋은 아직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열 명도 안 되는 작은 재배치였지만, 저 열 명의 위치가 어긋나면 뒤에 쌓인 보강재, 봉함 상자, 후송선까지 한꺼번에 엉킬 수 있었다.

나는 썰매 자국이 눌린 가운데 홈을 발끝으로 짧게 그었다.

“여긴 비워. 누가 넘어져도 여기로 몰리지 않게.”

병사 둘이 즉시 자리를 옮겼다.

“왼쪽 고랑 옆 짧은 말뚝선은 손대지 마. 그건 겉보기보다 깊게 박혀 있지 않아. 대신 그 뒤에 보강재 두 장 세워서 무게를 옆으로 빼.”

브론이 그 말을 듣자마자 보강재 길이를 재듯 손바닥을 댔다.

“두 장이면 버틴다. 세 장 세우면 오히려 아래가 죽어.”

“그 두 장만.”

이번엔 기록 통로 위 계단을 가리켰다.

“여긴 칼 든 손보다 상자 든 손이 먼저 지나가. 창끝을 낮추고, 비워 둔 칸으로 물건이 쏠리면 바로 벽 쪽으로 세워.”

병사 하나가 이해 못 한 얼굴로 계단과 상자를 번갈아 봤다. 나는 방금 주운 납패를 잠깐 들어 보였다.

“저런 게 빠지면 적 하나 놓치는 것보다 더 오래 피 본다. 사람 막는다고 상자부터 걷어차지 마.”

그제야 병사 표정이 달라졌다. 창끝이 적 가슴 높이에서 상자 손 높이로 내려왔다. 세라는 그 변화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방패 모서리를 계단 앞에 반 걸음 더 들이밀어,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그 선을 기준 삼게 만들었다.

미리엘이 다시 흙 아래 울림을 들었다.

“조금 빨라졌어요. 다음엔 셋째 박자 전에 둘째 끝에서 올라와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땅 밑에서 아주 옅은 떨림이 한 번 더 스쳤다. 누가 크게 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는데, 창고 뒤 경사 아래 눈이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병사 하나가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뛰려 했다. 나는 곧장 불렀다.

“멈춰. 혼자 내려가지 마.”

브론이 대신 옆에서 보강재 끝을 밀어 넣었다. 눈이 무너지던 홈이 아래로 더 내려앉지 않고 옆으로 갈라졌다. 미리엘은 바로 그 틈을 짚어 병사 후송선을 반 칸 비껴 잡았고, 리에트는 감시탑에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방금 바깥 손은 없어. 안쪽 울림만 온 거야.”

즉, 지금 흔들린 건 적의 몸이 아니라 이미 건드려 놓고 간 줄이었다. 한 번 흔든 뒤 현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누가 먼저 뛰고 누가 먼저 비우는지 떠보기 위한 잔울림. 병사들도 그걸 눈앞에서 배웠다. 칼보다 위치가 먼저라는 걸, 적이 안 보여도 줄은 먼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세라가 짧게 숨을 토했다.

“알겠네.”

그녀는 병사들을 향해 방패 끝으로 자리를 잘라 보였다.

“내 앞은 보여 주는 줄이다. 안쪽은 저 말대로 움직여.”

파견 지휘관이 그 말을 들었는지 멀리서 두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얼굴엔 분명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지금 병사들 귀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그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끝내 다른 명령을 덧씌우지 못하고, 다친 병사 후송부터 하라고만 내뱉었다. 그 한마디가 오히려 더 선명했다. 앞줄 이름은 아직 저 사람이 쥐고 있어도, 안쪽 배치의 박자는 이미 우리 손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서사면 말뚝선, 창고 뒤 경사, 기록 인계 통로를 다시 눈으로 잇고, 그 위에 사람 자리를 겹쳐 올렸다.

“세라는 겉 전열 고정. 병사 시선은 계속 네 쪽에 묶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론은 안쪽 받침. 겉말뚝 부러져도 아래가 먼저 무너지지 않게.”

브론이 못통을 툭 찼다.

“좋아.”

“미리엘은 셋째 박자. 울림 올라오는 칸 비우고, 병사 후송선이 거기 겹치지 않게 잡아.”

“할게요.”

“리에트는 위 각 절단. 사람보다 도구 든 손 먼저 봐.”

리에트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건 원래 잘해.”

마지막으로 나는 내 자리까지 소리 내 말했다.

“나는 줄을 읽을게.”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세라는 앞을 붙들고, 브론은 무게를 읽고, 미리엘은 박자를 붙들고, 리에트는 시야를 자른다. 나는 그 네 줄이 어긋나지 않게 먼저 읽는다.

계승자라는 이름이 여기서 하는 일은 분명했다. 누군가 하나를 세게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넷과 병사들까지 무엇을 먼저 살리고 무엇을 늦춰야 하는지 한 번에 묶는 일.

그 사실은 거창한 선언보다 눈앞 움직임에서 먼저 드러났다. 세라가 방패를 한 뼘 틀자 병사 넷이 동시에 시야를 맞췄고, 브론이 보강재 두 장만 남기고 하나를 걷어 내자 방금까지 흔들리던 홈이 옆으로 힘을 흘렸다. 미리엘은 후송선을 반 칸 비틀어 공명 칸을 비워 냈고, 리에트는 감시탑 난간에 걸친 몸을 한 번도 크게 움직이지 않은 채 아래 손놀림만 잘라 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누구 발이 어느 물건 옆에서 멈춰야 하는지, 어떤 상자는 세워 두고 어떤 자루는 눕혀 둬야 하는지만 짧게 집어 줬다.

병사들도 그 차이를 몸으로 익히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말뚝을 세우기 전에 먼저 못통 위치를 묻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다친 동료를 옮기며 통로와 창고 문턱 중 어디를 비워야 하는지부터 확인했다. 예전 같으면 전부 지휘관 쪽을 보고 떨어질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필요한 답은 윗선 눈치나 직함보다 빨랐다. 어느 줄이 먼저 끊길지를 읽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왔다. 그게 마음이 모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북방 전초 서사면에서만큼은, 살아남는 순서가 같아졌다는 뜻이었다.

감시탑 위 리에트가 몸을 낮췄다. 그녀는 서쪽 능선 바깥을 뚫어지게 보더니 목소리를 깔았다.

“셋이 아니야.”

바람이 한 번 길게 휘돌았다. 능선 아래 검은 점들이 다시 나타났다. 조금 전보다 많았다. 셋으로 보였던 그림자 뒤로 두 개가 더 붙어 있었다. 앞선 놈들이 치고 빠지는 동안 뒤쪽은 우리가 어디를 먼저 가리고, 누구 목소리에 병사들이 먼저 몸을 돌리는지 보고 있었던 셈이다.

“다섯.”

리에트가 말했다.

검은 깃 끝이 눈발 사이로 짧게 흔들렸다. 이번엔 말뚝 하나만 건드리고 끝낼 모양새가 아니었다. 첫 충돌은 측정이었다. 우리가 병사부터 지키는지, 물건부터 닫는지, 원본부터 숨기는지, 아니면 그 셋 사이에서 어떤 줄을 먼저 살리는지. 놈들은 방금 그 답을 읽어 갔다. 다음엔 말뚝선과 통로를 한꺼번에 흔들고, 미리엘이 비워 둔 셋째 박자 칸까지 찌르러 올 게 분명했다.

눈발 사이로 드러난 다섯 그림자의 간격도 아까와 달랐다. 앞의 둘은 낮게 퍼져 서사면 말뚝선을 다시 건드릴 자리였고, 뒤의 둘은 창고 뒤 경사를 넓게 돌아 기록 통로와 맞물릴 각을 잡고 있었다. 가운데 하나만 능선 아래에서 잠깐 멈췄다. 지휘 손일 가능성이 컸다. 아까 우리가 어떤 질문에 먼저 반응했고, 병사들이 어느 목소리를 따라 몸을 틀었는지 그놈이 전부 보고 있었을 것이다.

더 노골적인 건 간격 사이에 비워 둔 자리였다. 놈들은 처음 셋이었을 때 일부러 허술한 틈을 남겨 우리 눈을 앞으로 끌었다. 이제는 그 빈칸을 뒤쪽 둘이 메우고 있었다. 다음 충돌이 오면 말뚝선만 흔드는 척하다가, 우리가 시선을 주는 순간 기록 통로와 창고 경사를 동시에 찌를 속셈이었다.

세라가 방패 손잡이를 다시 고쳐 쥐었다.

브론은 남은 못통 위치를 한 번 더 바꿨다.

미리엘은 공명이 올라오는 칸을 따라 발을 반 걸음 옮겼다.

아까 내 지시를 따랐던 병사 셋도 묻지 않고 통로와 말뚝 사이로 흩어졌다.

나는 서사면과 창고 뒤, 기록 통로와 감시탑 아래 마당까지 한 번에 시야에 넣었다.

이제야 정말 시작이었다.

우리는 더는 우연히 같이 다니는 다섯이 아니었다.

북방 전초가 우리를 어떻게 부르든, 이제 저 다섯 그림자가 찌르러 올 곳은 분명했다.

전열의 박자와 하중.

그리고 그 둘을 누가 먼저 붙드는지.

방금까지는 전초가 우리를 시험하는 줄 알았다. 이제는 아니다. 저 다섯 그림자도, 뒤늦게 끼어드는 지휘선도, 기록을 봉하는 손도 전부 같은 자리를 겨누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줄 이름을 붙이지 못하면, 저쪽이 우리 대신 그 이름을 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먼저 잘려 나가는 것도 결국 우리 쪽일 터였다. 그러니 다음 충돌에선 한 칸도 공짜로 내줄 수 없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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