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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첫 피, 첫 증명

바위턱 위 그림자가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먼저 무너진 건 사람 표정이 아니라 발밑 흙이었다.

리에트 아르셸이 몸을 감춘 바위 끝 아래로 마른 자갈이 한 번 더 흘러내렸고, 그 직후 붕괴턱 오른쪽 사면이 얇게 갈라졌다. 겉으로는 그냥 오래된 흙층이 내려앉는 소리였는데, 내 귀엔 이상할 만큼 순서가 분명했다. 자갈, 흙,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섞여 들어오는 금속성 파열음. 누군가가 먼저 건드린 뒤에야 무너지는 소리였다.

공식 진입로 쪽에 서 있던 후보생 둘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넓은 길이 오히려 함정이었다. 붕괴턱 아래 회백색 흙은 수레가 드나든 만큼 단단해 보였지만, 가장자리 턱은 속이 비어 있었다. 뒤로 뺀 장화 하나가 얇은 겉껍질을 깨뜨리자, 흰 먼지와 검은 돌가루가 한꺼번에 터졌다.

“뒤로 빼지 마!”

내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살 하나가 무너진 흙 가장자리에 박혔다. 사람을 맞히려는 각이 아니라, 물러나는 쪽 발을 더 꼬이게 만드는 각도였다. 그걸 보는 순간 등골이 먼저 서늘해졌다. 이건 우리를 죽이려는 전투라기보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려는 시험에 더 가까웠다.

원정대 뒤쪽에서 누가 비명을 질렀다. 말 한 필이 고삐를 당기며 옆으로 꺾였고, 접이식 방패판이 실린 수레가 반쯤 돌아섰다. 넓은 진입로는 눈으론 시원했는데 실제로는 사람과 짐이 흩어지기 딱 좋은 자리였다. 위쪽 바위턱, 오른쪽 비탈 틈, 아래쪽 붕괴 턱. 세 군데가 한꺼번에 열려 있었다.

세라가 검을 완전히 뽑아 들며 앞을 막아섰다.

“전열 세워!”

그 외침은 맞았다. 그런데 어디에 세울지가 틀렸다.

나는 곧장 왼쪽의 반쯤 주저앉은 적재 평지를 가리켰다. 진입로보다 한 단 낮았고, 오래전에 돌가루 자루를 쌓아 두던 자리인지 바닥이 눌려 있었다. 넓진 않았지만 양옆이 돌출부로 막혀 있었다. 사람을 밀어 넣기 싫은 자리라서, 오히려 버티긴 쉬운 자리였다.

“거기 말고 왼쪽 평지!”

세라가 나를 노려봤다.

“지금 뭐라는—”

“넓은 길 버리면 안쪽이 막혀!” 나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밀어붙였다. “방패판 두 개만 세우고 수레 코를 틀면 위쪽 화살각 죽일 수 있어. 말은 뒤가 아니라 바위 뒤로 묶어. 비탈 쪽 빈 자리 남기면 또 밀려!”

내 머릿속에선 말보다 먼저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누가 강한지보다 누가 어디에 서야 덜 죽는지, 어느 장비가 벽이 되고 어느 틈이 죽는 각인지. 이상하게도 그 구조가 눈앞에 바로 들어왔다. 광갱 외연의 흙줄기, 바위 각도, 무너진 적재 평지의 높낮이, 그리고 사람들이 겁먹었을 때 반드시 뒤로 물러나는 방향까지.

세라는 딱 한 박자 늦게 이를 악물었다.

“하리엔, 방패판 내려! 수레 왼쪽으로 틀어!”

명령이 떨어지자 후보생 둘이 반사적으로 뛰었다. 뒤집히려던 수레가 바퀴 축을 긁으며 반각으로 돌았다. 접이식 방패판 두 장이 적재 평지 가장자리에 박히듯 세워졌고, 흰 먼지가 그 앞에 짧은 장막처럼 뜨다가 곧 가라앉았다. 바로 그때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조금 전 같았으면 사람 허벅지쯤을 꿰뚫을 각이었다. 하지만 방패판 윗모서리를 긁고 튕겨 나갔다.

세라가 나를 한 번 봤다. 놀란 눈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기분 나쁜 종류였다. 맞는 말을 들었을 때 드는 표정.

“더.” 내가 낮게 말했다. “오른쪽 비탈 비워 두면 안 돼. 한 명 세우지 말고 짐줄로 막아.”

세라는 바로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외쳤다.

“짐줄 풀어! 오른쪽 비탈 틈 묶어!”

그녀 목소리가 바뀌는 걸 들었다. 처음의 명예 시험용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 이 판에서 실제로 죽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안 사람 목소리였다.

위쪽 바위턱에서 짧은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났다. 직후 화살 둘이 더 내려왔다. 하나는 방패판을, 하나는 수레 옆 바위를 쳤다. 내가 방패판 뒤로 몸을 낮추는 순간, 왼쪽에서 장비통이 넘어지며 굵은 쇳소리가 터졌다.

“거기!”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보생 하나가 무너진 판석 끝에 발목을 걸친 채 비탈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화살을 피하려고 뒤로 물러나다가, 갈라진 흙판 위에 그대로 체중을 실은 모양이었다. 판석 아래는 그냥 흙이 아니었다. 소금가루와 돌가루가 쌓인 급한 턱이라, 한번 미끄러지면 아래쪽 진입로까지 굴러 떨어질 각도였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몸을 던졌다.

무릎이 거칠게 바닥을 긁었다. 손을 뻗자 상대 손목 대신 소매 끝이 먼저 잡혔고, 그대로 놓치면 둘 다 떨어질 거리였다. 나는 남은 손으로 가까운 짐줄을 낚아채 팔꿈치에 감았다. 거친 삼줄이 손바닥 살을 그대로 밀어 벗겼다. 뜨거운 통증이 한 번에 올라왔다.

“놓지 마!”

누가 외쳤는지는 모르겠다. 내 입이었을 수도 있었다.

넘어지던 후보생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이 더 짜증났다. 이 자식은 지금 내가 강해서 붙든다고 생각할 거다. 아니었다. 그냥 여기서 놓치면 뒤가 더 망가진다는 계산이 먼저였을 뿐이다.

세라가 바로 옆에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는 검을 쓰지 않고 허리로 체중을 눌렀다. 한 손으론 판석 가장자리를 짚고, 다른 손으론 후보생의 어깨끈을 낚아챘다.

“셋에 당겨.”

나는 이를 악물었다.

“둘.”

세라 눈이 잠깐 내 손으로 내려갔다. 벗겨진 손바닥에서 피가 이미 삼줄을 적시고 있었다.

“셋.”

우린 동시에 당겼다. 후보생이 판석 끝에서 반쯤 기어오르듯 미끄러져 올라왔고, 바로 그 자리를 화살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으면 누구 하나는 손등이 아니라 목에 꽂혔을 각이었다.

후보생은 숨도 못 고른 채 바닥에 엎드렸다. 나는 손에서 줄을 풀다가 피가 더 번지는 걸 봤다. 깊진 않았지만 살이 길게 벗겨져 있었다. 따갑다기보다 뜨거웠다.

세라가 짧게 욕설을 삼켰다.

“미쳤어?”

“안 붙잡으면 떨어졌잖아.”

“네가 먼저 떨어질 수도 있었어.”

“그래서 안 떨어졌고.”

나는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목소리가 생각보다 곧게 나가진 않았다. 손바닥이 욱신거릴수록 오히려 머리는 더 차갑게 식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위쪽 사선은 남아 있었고, 바위턱 너머에서 누군가 우리가 어느 쪽으로 몰리는지 계속 보고 있었다.

그때 위쪽에서 짧고 낮은 소리가 하나 더 났다. 활줄 튕김이었다. 그런데 이번 건 우리 쪽으로 날아온 소리가 아니었다. 바위턱 뒤편 그림자에서 누군가 짧게 몸을 틀며 욕설 비슷한 숨을 터뜨렸고, 곧 작은 돌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리에트였다.

그는 우리가 서 있는 진입로보다 한 단 높은 비탈 각을 이미 타고 올라가 있었다. 해 질 녘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그림자에 몸을 섞고 있었지만, 이번엔 숨기기보다 겨누는 쪽이 먼저였다. 첫 화살은 사람을 맞힌 게 아니라,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상대의 이동 각을 끊었다.

“오른쪽 둘!” 리에트가 외쳤다. “인간 원정대식 보폭 아니야. 발목 먼저 노려!”

그 말이 이상하게 바로 이해됐다. 위쪽에서 움직이는 그림자 둘은 넓은 길로 내려오지 않고, 바위와 바위 사이의 좁은 틈만 골라 밟고 있었다. 무게를 싣는 방식이 달랐다. 우리 후보생들처럼 미끄럼을 두려워해 발을 넓게 두지 않았다. 길을 아는 보폭이었다.

“세라!” 나는 방패판 왼쪽 끝을 짚었다. “오른쪽 틈으로 하나 더 돈다. 넓은 길 말고 돌 틈 막아!”

세라는 이번엔 되묻지 않았다.

“브렌, 내 뒤! 방패판 절반만 돌려!”

후보생 하나가 떨리는 손으로 방패판을 밀었다. 넓은 전면을 막는 대신 좁은 틈을 반각으로 잘라 내자, 바위 뒤에서 튀어나오던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잠깐 멈칫했다. 그 순간 리에트 화살이 그 발 앞 바닥을 박살 냈다. 일부러 사람을 맞히지 않고, 디딜 자리를 깨는 방식이었다. 보는 쪽까지 숨이 막혔다.

세라가 낮게 말했다.

“전투가 아니라 몰이야.”

“응.”

나도 낮게 답했다. “우릴 죽이는 것보다, 어디까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쪽.”

그 문장을 입 밖에 낸 순간 등줄기가 더 차가워졌다. 누군가가 나를 이 길에 올려놓고, 이제는 내가 누구를 먼저 살리고 어떤 각을 먼저 읽는지까지 재고 있다는 뜻이 됐으니까.

전열이 한 번 모양을 찾자 흐름이 바뀌었다. 처음엔 우리가 무너지는 쪽이었는데, 이제는 위쪽 그림자가 어디로 빠질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적재 평지 앞 방패판, 반쯤 틀어 세운 수레, 짐줄로 막힌 오른쪽 틈, 그리고 위쪽 사선의 리에트. 넓은 진입로를 버리고 좁은 각만 남긴 순간 상대도 마음껏 흔들 수 없게 됐다.

세라는 검끝으로 한쪽 틈을 찌르듯 밀어 올렸다. 비탈 아래로 짧은 신음이 굴렀다. 후보생 둘도 그제야 뒤늦게 창을 들이밀었다.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어디를 찔러야 덜 틀리는지 이제야 보여서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바위 면을 한 번 훑었다. 전투 와중에도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붕괴턱 안쪽 벽이 자연 절개면치고는 지나치게 매끈했다. 곡괭이로 여러 차례 깎아낸 뒤 다시 흙을 덮은 것 같은 선. 그리고 그 가장자리엔 오래된 광맥 붕괴와는 다른 직선 홈이 얇게 남아 있었다.

초급 던전 외연에 저런 면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왼쪽 아래!” 리에트가 다시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조금 전 붙잡아 올렸던 후보생이 아직 제대로 못 일어난 채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 옆 아래턱에서 짧은 칼날 하나가 번쩍였다. 숨어 있던 상대가 마지막으로 아래를 긁고 빠지려는 각도였다.

세라가 먼저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닿기 전에 내가 더 먼저 본 게 있었다. 칼날이 노리는 건 후보생 다리가 아니라, 그 뒤에 기대 세운 방패판 받침줄이었다. 저걸 끊으면 전열이 다시 무너진다.

“줄!”

내 외침과 동시에 세라 검이 방향을 꺾었다. 원래 사람을 베려던 궤적이 줄 앞으로 비껴 들어가며 칼날을 쳐냈다. 짧은 쇳소리가 터졌고, 그림자가 뒤로 빠졌다. 브렌이 뒤늦게 방패판을 떠받쳤다. 만약 방금 줄이 끊겼으면 우리가 다시 넓은 진입로 쪽으로 밀렸을 거다.

세라는 상대를 더 추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숨을 몰아쉬며 나를 돌아봤다. 피 묻은 내 손, 적재 평지 각도, 방패판 위치,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는 후보생. 그녀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전투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네가 약한 건 맞아.”

세라가 마침내 말했다.

고운 말은 아니었다. 위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근데 없었으면 더 많이 죽었어.”

나는 웃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인정하네.”

“기분 좋게 인정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 대답이 세라답다고 생각한 순간, 오히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건 호감이 아니라 판정이었다. 그리고 그 판정이야말로 지금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비싼 값이었다.

위쪽 바위턱에서 리에트가 가볍게 뛰어내려 적재 평지 옆으로 내려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옅은 은빛 머리칼 끝에 하얀 먼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착지하자마자 싸움이 끝났는지부터 보지 않았다. 먼저 붕괴턱 안쪽 벽면과 방금 칼이 스친 줄 자리, 그리고 우리가 밀리다 멈춘 넓은 진입로 가장자리를 차례로 살폈다.

“보였지?”

그가 낮게 말했다.

세라가 검끝을 조금 내리며 물었다.

“뭘.”

리에트는 붕괴면 안쪽의 매끈한 절개선을 턱으로 가리켰다.

“자연 붕괴면이 아니야. 얕게 깎아 놓은 뒤 다시 덮었어. 초입에서 사람을 정면으로 받는 구조가 아니라, 특정 방향으로 몰아넣는 구조야.”

나는 숨을 천천히 삼켰다. 조금 전 내가 본 선과 같은 이야기였다. 다만 리에트는 그걸 더 빠르게, 더 확신 있게 읽었다.

세라 시선이 나와 리에트 사이를 한 번 오갔다. 그녀는 지금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불쾌함이 예전과 달랐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이미 여러 개 봐 버린 사람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내가 손바닥 피를 대충 털며 말했다. “초급 취급은 개소리지.”

리에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시작이지.”

그는 무너진 붕괴면 아래쪽, 흰 먼지가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틈을 가리켰다.

“방금 달아난 놈들이 남긴 건 발자국만이 아니야. 저 안쪽 절개면 따라 더 들어가면, 일부러 남긴 표식이 하나 더 있을 거야. 너희가 어디까지 보고 어디서 멈추는지 시험한 흔적.”

내 손안의 부적이 그 말 끝에서 아주 짧게 뛰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강하진 않았다. 마치 저쪽이 맞다고 확인만 해 주는 정도였다. 나는 일부러 그 반응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부적 설명이 아니라, 방금 살아남은 이유를 더 밀어붙이는 일이었으니까.

세라는 검을 거두며 짧게 말했다.

“야영 위치 바꾼다. 넓은 진입로 버리고 안쪽 반각부터 다시 본다.”

후보생 몇몇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식 진입로를 기준으로 서 있던 사람이 먼저 그 말을 했기 때문이다. 세라는 그 시선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냥 정면으로 받아냈다.

“못 알아들었어?”

그 한마디에 다들 움직였다. 느렸지만, 이번엔 방향이 분명했다.

나는 피 묻은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따갑고 뜨거웠다. 그 통증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누가 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는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이제 확실했다. 그들이 기대한 대로 내가 무너지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여기 있던 모두가 방금 직접 봤다.

무너진 붕괴면 안쪽 어둠은 생각보다 깊었다. 흰 먼지 밑으로 드러난 매끈한 절개선이 바람을 덜 받는 쪽으로 길게 꺾여 있었고, 그 아래 어딘가엔 아직 안 보인 구조가 더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초급 던전이라는 말은 이제 이름표밖에 안 남았다.

진짜 문제는 이 거짓말을 누가, 얼마나 오래, 누구를 넣기 위해 준비해 왔느냐였다.

***

붕괴턱 아래쪽이 겨우 진정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제야 자기 숨소리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화살이 박히던 방패판엔 금이 얕게 세 개 더 늘어 있었고, 반쯤 틀어 세운 수레 바퀴 둘레엔 하얀 돌가루가 두껍게 묻어 있었다. 왼쪽 적재 평지 바닥은 장화와 피와 끌린 짐줄 자국이 한데 엉겨 있었다. 넓은 진입로를 버리고 이 좁은 반각으로 밀고 들어온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저 흔적 중 절반은 사람 대신 시체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속이 천천히 식었다.

나는 벗겨진 손바닥을 대충 옷자락에 눌렀다. 피는 아까보다 덜 났지만, 소금가루가 스민 상처가 뒤늦게 욱신거렸다. 조금만 더 세게 쥐면 손 안쪽이 다시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손을 펴 두는 쪽이 더 싫었다. 내가 방금 붙잡은 게 후보생 하나였는지, 아니면 무너질 뻔한 전열 전체였는지 아직 구분이 안 갔기 때문이다.

세라가 다가와 내 손을 내려다봤다.

“펴.”

“명령이야?”

“지금은 확인이야.”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는데, 손이 먼저 달랐다. 세라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허리춤 보조 주머니에서 짧은 천끈과 거친 소독포를 꺼냈다. 기사단 후보가 전장 한복판에서 남의 상처를 묶는 그림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어울리지 않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손을 폈다. 벗겨진 살 사이에 삼줄 섬유가 가늘게 박혀 있었다. 세라는 미간을 좁혔다.

“이걸 손이라고 들이밀고 또 지형부터 읽을 셈이었어?”

“읽을 건 읽어야지.”

“죽어도?”

“죽으면 못 읽지.”

세라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소독포를 눌렀다. 따가움이 상처에서 팔꿈치까지 곧게 치고 올라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턱을 굳혔지만 손을 빼진 않았다. 세라는 그걸 확인하듯 한 번 더 눌렀다가 천끈으로 감기 시작했다. 손길이 부드럽진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었다.

“다음부터는 네가 직접 뛰어드는 순서를 맨 앞으로 두지 마.”

“내가 안 뛰면 떨어졌어.”

“알아.”

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혔다. 세라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덧붙였다.

“그래서 더 짜증 나.”

그 말은 내가 방금 들은 어떤 인정보다 세라다웠다. 호의를 흉내 내지도, 빚을 가볍게 만들지도 않는 말. 나는 그제야 조금 웃을 뻔했다가 말았다. 여기서 웃으면 방금 세운 거리까지 같이 무너질 것 같았다.

적재 평지 가장자리에서는 리에트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붕괴면 아래쪽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칼에 스친 줄 자리, 화살이 박힌 각도, 그리고 검은 돌가루가 유난히 적게 남은 부분을 차례대로 짚어 보고 있었다. 바람이 죽은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흔적을 골라 보는 눈이었다.

“거기 뭐가 보여?” 내가 물었다.

리에트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 끝으로 무너진 흙을 한 번 걷어 낸 뒤에야 말했다.

“덮은 흙 두께가 다 달라.”

세라가 고개를 돌렸다.

“자연 붕괴면이 아니라는 얘긴 이미 했잖아.”

“그건 표면이고.”

리에트는 붕괴면 아래, 바람이 덜 닿는 음영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긴 세 번은 다시 손댔어. 처음 절개한 자국이 있고, 그 위에 다른 흙을 메웠고, 최근에 한 번 더 긁어 방향을 흐렸어. 그냥 감추려는 솜씨가 아니야. 누가 어디로 밀리는지 시험해 본 솜씨지.”

그 말을 듣자 조금 전 전투가 다시 머릿속에서 뒤집혔다. 넓은 진입로, 무너지는 가장자리, 방패판이 들어가야만 막히던 오른쪽 틈, 그리고 마지막에 끊기려던 받침줄. 우연히 겹친 위험이 아니라,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여 놓고 결국 한쪽으로 몰아넣는 구조. 누군가는 우리가 겁먹었을 때 어떤 길을 고르는지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내 손안의 부적이 그때 아주 미세하게 식었다. 이번엔 뛰지도, 뜨거워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방금까지의 반응을 거둬들이는 듯했다. 내가 이미 봐야 할 걸 봤다는 식으로.

나는 일부러 그걸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적 얘기를 먼저 꺼내는 순간, 방금 눈앞에 남은 절개면과 보폭 흔적이 도리어 뒷자리로 밀릴 것 같았다.

세라는 내가 잠깐 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내린 걸 놓치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 대신 그녀는 붕괴면 앞에 다시 사람을 세웠다.

“공식 진입로 쪽 횃불 두 개 꺼.”

후보생 하나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꺼요? 바깥이 더 넓은데요.”

“그래서.” 세라가 잘라 말했다. “넓어서 우리가 잘 보이잖아.”

그 짧은 문장 뒤로 조용해지는 기색이 느껴졌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공식 진입로가 안전선처럼 여겨졌는데, 이제는 그 넓음 자체가 함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싫든 좋든 시선을 바꿔야 했다.

나는 방패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손바닥 통증이 심장 박동에 맞춰 올라왔다 내려갔다. 그 박동 덕분에 오히려 머리가 더 또렷해졌다. 내가 방금 한 일이 영웅적인지 어떤지는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이제 이 원정대 안에서도 누가 전장에 필요한지 순서가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수련원 장부와 성도 문서 위에 적힌 내 위치는 여전히 바닥일지 몰라도, 방금 여기 있던 사람들 눈앞에서는 그 순서가 틀어졌다.

그 틀어짐이야말로 누군가 제일 싫어할 결과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속이 느리게 차가워졌다.

“에이드리언.”

세라가 다시 나를 불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아까처럼 날카롭진 않았다. 나는 고개만 돌렸다.

“조금 전 네 지시.”

그녀는 잠깐 말을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봤지.”

질문이었지만 캐묻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게 오히려 더 드물었다. 세라가 정말로 모르는 걸 인정하고 묻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나는 적재 평지와 붕괴턱, 바위각과 짐줄이 걸린 틈을 차례로 봤다. 대단한 비밀을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이 겁먹으면 넓은 쪽으로 물러나.”

세라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넓은 길은 보통 살 길처럼 보여. 근데 여긴 반대였어. 넓어서 다 열려 있었고, 좁은 쪽만 막으면 상대도 선택지가 줄었어. 방패판은 벽이 아니라 각을 자르는 데 써야 했고.”

나는 거기서 잠깐 숨을 골랐다. “그냥… 다 그렇게 보였어.”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시선은 이번엔 내 손이 아니라 내가 방금 가리킨 각도들을 따라 움직였다.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는 지금 내 말을 감정이 아니라 전술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리에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끼어들었다.

“보였다는 건 반응했다는 뜻이기도 하지.”

세라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야.”

“상대가 만들어 둔 유도선에 반응했다는 뜻.”

리에트는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근데 거기서 죽는 쪽으로 반응한 게 아니라, 구조를 거꾸로 읽고 버티는 쪽으로 반응했어. 그게 중요해.”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졌다. 칭찬처럼 들릴 수도 있었는데, 칭찬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보려고 판을 짰고, 나는 거기서 예상 밖으로 살아남는 답을 냈다는 뜻이었으니까. 방금 전까지의 승리가 그대로 더 큰 불쾌함으로 뒤집혔다.

세라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시선을 붕괴면 안쪽 어둠으로 돌렸다. 바람이 덜 닿는 절개선 아래엔 아직 보지 못한 검은 틈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냥 무너진 흙벽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누군가 손으로 만들어 둔 입구 앞가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 안으로 저 안쪽 본다.” 세라가 낮게 말했다. “원정대 절반은 바깥 선 정리. 절반은 안쪽 각 확인.”

후보생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식 보고는요?”

세라는 대꾸보다 먼저 나를 한 번, 리에트를 한 번 봤다. 그 시선엔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 망설임보다 계산이 앞섰다.

“보고는 살아서 정리해도 늦지 않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나는 그 문장이 세라에게도 적지 않은 비용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기사단 후보가 공식 보고보다 현장 판단을 앞세운다. 그건 그냥 고집이 아니라, 나중에 누가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딱 좋은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그 비용을 택했다.

내가 그 사실을 입에 올리기 전에 세라는 먼저 등을 돌렸다. 더 말 섞으면 방금 생긴 균형이 깨질까 봐 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붕괴면 아래 어둠을 다시 보자, 초급 던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얇은 껍질인지 이제는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넓은 진입로, 덮인 절개면, 시험하듯 끊기던 사선, 그리고 우리가 어느 쪽으로 몰리는지 끝까지 보고 있던 눈. 어느 하나도 우연처럼 남지 않았다.

나는 천으로 감긴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폈다. 피가 더 배어나오진 않았다. 대신 통증이 조용히 남았다. 그 통증이 방금 끝난 싸움의 무게를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처음 흘린 피는 겁먹은 후보생의 것도, 위에서 숨어 쏘던 놈의 것도 아니라 결국 내 손에 남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사람들이 내가 왜 여기 전장 안에 필요한지 조금은 보게 됐다.

하지만 그게 증명의 끝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은 이유를, 이제부터 더 노골적으로 묻게 만드는 시작이었다.

붕괴면 안쪽에서 바람이 아주 약하게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밀려 나왔다. 자연 구멍에선 잘 안 나는, 어딘가 막힌 구조물 안쪽에서 되받는 호흡 같은 바람이었다.

리에트도 그걸 들었는지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안쪽에 빈 공간이 더 있어.”

그 한마디에 적재 평지의 공기가 다시 조용해졌다. 전투는 끝났는데, 아무도 끝난 표정을 짓지 못했다. 우리는 겨우 입구 앞에서 살아남았을 뿐이고, 이제야 진짜 구조가 입을 열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어둠 쪽을 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초급 던전이라는 말은 끝났다.

다음엔 우리가 저 안으로 들어가서, 누가 이 거짓말을 구조째로 짰는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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