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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초급 던전이라는 거짓말

붕괴턱 안쪽 바람은 바깥 저녁 공기와 결이 달랐다.

공식 진입로로 불리던 넓은 길 위에는 아직도 흰 먼지가 얇게 깔려 있었지만, 우리가 몸을 숨긴 적재 평지 아래쪽은 바람이 한 번 들어왔다가 어디엔가 막혀 짧게 되받아 나왔다. 그냥 동굴 입김처럼 차갑기만 한 바람이 아니었다. 안쪽 빈 공간이 여러 겹으로 갈라져 있을 때만 나는, 한 번 꺾였다가 다시 밀려오는 숨 같은 바람이었다. 무너진 흙벽 가장자리에는 화살 자국보다 더 얇은 선들이 남아 있었다. 곡괭이 끝으로 여러 번 얕게 긁은 뒤, 다시 흙을 덮어 결을 숨긴 흔적.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사면이라 눈에 늦게 들어왔지만, 한 번 보이기 시작하자 오히려 대놓고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라 벨로네는 방패판이 세워진 반각 앞에 서서 넓은 진입로와 붕괴턱 안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검끝은 내린 상태였지만 손목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뒤쪽에선 다친 후보생들이 깨진 장비통을 모으고 있었고, 놀란 말 한 필이 바위 그림자 뒤에서 짧게 콧김을 뿜었다. 수레 바퀴는 반쯤 들린 채 하얀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조금 전 우리가 버린 넓은 길은 겉보기엔 아직 가장 안전해 보였는데, 막상 발자국은 죄다 이 좁은 적재 평지 쪽으로 모여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 몸이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손바닥엔 세라가 감아 준 천끈이 젖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소금가루가 밴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정신이 더 맑아졌다. 방금 전까지는 살아남는 데 급해서 구조를 읽었다면, 이제는 살아남은 뒤에야 비로소 그 구조가 왜 이렇게 짜였는지를 물을 차례였다.

리에트 아르셸은 붕괴면 바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손가락으로 흙결을 가르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 끝에 묻은 먼지는 아직 털지도 않았다. 그는 발자국부터 보지 않았다. 먼저 무너진 면의 층을 보고, 그다음 덮인 흙 두께를 보고, 마지막으로 바람이 드나드는 틈을 들었다. 마치 여기가 전장이 아니라 오래 숨겨 둔 기록고 입구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 발 들이지 마.”

리에트가 낮게 말했다.

후보생 하나가 깜짝 놀라 발을 들었다. 방금 전 전투에서 창을 놓칠 뻔했던 녀석이었다. 그가 비켜나자 리에트는 짧은 칼끝으로 흙 한 겹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겉은 마른 회백색이었는데 그 아래는 더 진한 갈색이었다. 색만 다른 게 아니었다. 윗층은 부스러졌고, 아래층은 눌렸다. 최근에 덮은 흙과 오래 눌린 흙이 선명하게 갈라져 있었다.

“세 번.”

그가 말했다.

세라가 미간을 좁혔다.

“뭐가.”

“최소 세 번 손댔어.” 리에트가 절개면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안쪽 벽을 얕게 깎아 길을 만들었고, 그다음에는 다른 흙을 가져다가 입구를 가렸다. 마지막엔 누가 들어올 때 어디로 밀리는지 보려고 위쪽만 다시 건드렸어.”

나는 무너진 가장자리와 적재 평지 사이 거리를 다시 쟀다. 넓은 진입로로 뒤로 빼면 발이 미끄러지고, 왼쪽 평지로 틀면 겨우 버틴다. 오른쪽 비탈 틈은 짐줄로 막아야 하고, 위쪽 바위턱에선 화살각이 산다. 그 구조가 전투 중에는 우연처럼 쏟아졌는데, 리에트 설명을 듣는 순간 우연이 아니라 유도선처럼 이어졌다.

“우리 보고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시험했다는 거네.”

내 말에 리에트가 고개를 들었다.

“너만.”

짧은 두 글자였다. 그런데 그 두 글자가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세라가 즉시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원정대 전체를 흔들어 본 건 맞아. 하지만 중심은 저쪽이었겠지.” 리에트의 시선이 내 손, 내 발밑, 그리고 방금 우리가 버틴 평지 각을 한 번 훑었다. “누가 먼저 넓은 길이 함정이라는 걸 읽는지. 누가 사람을 버리지 않고 전열을 고치는지. 누가 보고보다 안쪽 구조를 보려 하는지.”

등줄기가 천천히 식었다. 누가 쐈는가보다 기분 나쁜 말이었다. 저 위에서 화살을 날린 놈들이 단순히 죽이러 온 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미 알고 싶어 했다는 뜻이니까.

세라는 그 불쾌함을 삼키듯 턱을 굳혔다. 그러고는 뒤쪽을 돌아봤다. 다친 후보생 셋이 앉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넓은 진입로 쪽 횃불과 짐을 정리하다 말고 우리 쪽 눈치만 보고 있었다.

“상처 확인부터.”

그녀가 짧게 말했다. “걷는 놈, 못 걷는 놈, 장비 들 수 있는 놈 나눠.”

그러자 뒤늦게 사람들이 움직였다.

적재 평지 오른쪽 바위 밑에는 전투 중 넘어졌던 후보생 둘이 기대 앉아 있었다. 하나는 발목이 부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팔꿈치가 찢어져 피가 말라붙고 있었다. 깨진 방패판 옆에선 짐줄이 흙과 피에 범벅이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방금 전까진 그 줄이 전열이었고 생존선이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그게 다시 짐줄로 돌아가려는 게 묘하게 거슬렸다.

나는 손을 쓰기 애매해 발끝으로 줄을 끌어당겼다.

“그건 버리지 마.”

후보생 하나가 멈칫했다.

“찢어졌는데요.”

“받침줄로 다시 써야 해.” 내가 붕괴면 왼쪽을 가리켰다. “안쪽 들어가면 넓은 바닥 없을 가능성 크다. 저런 건 장비보다 먼저 사람 고정하는 데 써.”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나를 보는 시선이 이전과 조금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방금 한 번 살아남고 나니, 적어도 여기선 내 말이 완전히 웃음거리는 아니라는 정도였다. 그 정도 변화가 오히려 더 위험했다. 누군가가 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다면, 이 변화도 보고 싶어 했을지 몰랐다.

세라는 그 시선을 알아차린 듯 바로 말을 잘랐다.

“멍하니 있지 마. 발목 다친 둘은 바깥 반각에 남겨. 걸을 수 있는 놈만 안쪽 준비.”

“안쪽으로 간다고요?” 누군가가 되물었다. “지금 전투 직후입니다.”

세라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넓은 진입로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길로 물러나면 뭐가 남는데.”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 사이로 바람이 다시 한 번 붕괴면 안쪽에서 밀려 나왔다. 이전보다 분명했다. 바깥으로 뻥 뚫린 굴이라면 저렇게 되받아 나오지 않는다. 안쪽 어딘가에 막히거나 꺾인 빈 공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뒤쪽에 선 후보생 하나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다. 조금 전까지는 다들 화살과 붕괴만 무서워했는데, 이제는 그 위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다른 공포가 올라와 있었다. 칼과 화살은 막을 수 있어도, 문서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면 뭘 믿고 발을 디뎌야 하는지부터 무너진다. 그 불안이 한 줄로 번지자, 누구도 먼저 넓은 진입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리에트가 흙벽 아래 좁은 틈에 손을 넣어 작은 돌 하나를 굴렸다. 돌은 곧장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어딘가에 닿고, 조금 굴렀다가, 다시 늦게 소리를 냈다. 깊이는 얕지 않았다.

“빈 공간 맞아.”

그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자연 광맥 터널 소리도 아니야. 중간에 턱이 둘 이상 있어.”

나는 무너진 절개면을 다시 봤다. 얕은 입구를 일부러 만들어 사람을 받아들이고, 넓은 진입로를 미끼처럼 열어 두고, 겁먹은 원정대가 어디로 몰리는지 확인한다. 그다음 살아남은 쪽이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남긴다. 이게 정말 초급 던전이라면 누가 이런 수고를 들이겠어.

“분류표.”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라가 내 쪽을 봤다.

“뭐.”

“수련원에서 받은 광갱 분류표.” 나는 붕괴면과 넓은 진입로를 번갈아 가리켰다. “진입 안정. 붕괴 위험 낮음. 초급 채집·보급 병행 가능. 그렇게 적혀 있었지.”

세라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비웃음이라기보다 자기 쪽 장부를 떠올렸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래.”

“이 구조를 보고도 그런 표를 붙였으면, 본 적이 없었던가.”

리에트가 말을 받았다.

“아니면 본 뒤에 거짓으로 올렸겠지.”

이번엔 그 말 앞에서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뒤쪽에서 발목을 다친 후보생이 거칠게 숨을 쉬며 말했다.

“그, 그럼 잘못 들어온 겁니까?”

잘못. 그 단어가 이상하게 가벼워서 잠깐 화가 났다. 잘못 들어온 게 아니라, 누군가 들어오게 만든 거라는 감각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 전에 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못이면 돌아가서 보고하면 끝나겠지.”

그녀는 검자루에 손을 얹은 채 붕괴면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갔다. “문제는 지금 저 안쪽이 단순 실수처럼 안 보인다는 거다.”

그 말은 세라가 제일 하기 싫어할 인정이었다. 기사단 후보인 데다 원정 성과까지 손에 쥔 애가, 이제 와서 공식 문서가 거짓일 수 있다고 입에 올린 셈이니까. 실수 한 번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잘못 걸리면 목에 걸릴 줄을 스스로 붙잡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세라가 왜 아직 보고를 올리지 않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날 편들어서가 아니다. 지금 보고를 올리는 순간, 이건 원정 사고가 아니라 책임 추궁 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런 사건에서 먼저 회수되는 건 증거가 아니라 사람이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세라가 마침내 뒤를 돌아봤다.

“리엔. 바깥 횃불 하나만 남겨. 나머지는 반각 안쪽으로 옮겨.”

“기사 후보님, 정식 중단 보고는—”

“내가 판단한다.”

짧고 딱딱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를 내놓는 데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계산을 삼켰는지는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리에트가 피식하고 웃었다. 비웃음과는 조금 다른, 오래 예상한 사실을 이제야 남도 본다는 식의 웃음이었다.

“중단 보고를 올리면 누가 먼저 오지?”

세라가 그를 노려봤다.

“놀릴 거면 입 다물어.”

“놀리는 게 아니야.” 리에트는 바위벽에 붙은 어두운 광맥 자국을 가리켰다. “저 안쪽 구조를 본 놈들이 먼저 오겠지. 인간 기사단이든 성도든, 아니면 아까 위에서 쐈던 놈들이든.”

나는 그 말에 바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넓은 진입로 다시 지나야 해.”

세라 시선이 내게 왔다.

“그래서.”

“저기 이미 한 번 시험당했잖아. 구조를 모른 채 넓은 길로 나가면, 이번엔 우리가 어떤 순서로 빠지는지도 보게 될 거다.”

적재 평지 위 공기가 잠깐 조용해졌다. 다친 후보생도, 짐 정리하던 놈도, 모두 넓은 진입로 쪽을 한 번씩 봤다. 조금 전까지는 퇴로처럼 보였던 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넓음이 오히려 거대한 노출면처럼 느껴졌다.

세라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말했다.

“바깥 보고는 보류한다.”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세라는 그 반응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대신 안쪽 구조를 직접 확인한다. 너무 깊이 안 들어간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거리까지만 본다. 근거 없이 물러나면 우린 사고 친 원정대가 되고, 근거를 쥐고 물러나면 적어도 다음 선택은 우리가 한다.”

그 말은 나를 향한 신뢰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명예선과 기사단 보고, 원정대 실적선까지 전부 걸고 내리는 차가운 계산이었다. 그래서 더 무겁게 들렸다.

리에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나마 인간다운 선택이네.”

세라가 바로 쏘아붙였다.

“입 다물고 길부터 읽어.”

“읽고 있잖아.”

그 둘 사이 공기가 다시 날카로워졌지만, 이번엔 아까와 종류가 달랐다. 서로를 못 믿는 건 여전한데, 적어도 지금은 같은 거짓말을 보고 있다는 점만은 공유된 상태였다.

나는 적재 평지 끝에서 붕괴면 안쪽을 바라봤다. 흙 아래 드러난 절개선은 생각보다 곧지 않았다. 바깥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일부러 휘게 깎은 선이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너무 정확한 각으로 꺾이는 부분이 있었다. 사람 손 아니면 안 나오는 각도였다. 내 손안 부적은 그쪽을 향할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마치 확인은 하되 해답은 주지 않겠다는 듯이.

좋았다. 그 편이 나았다. 지금 필요한 건 부적이 아니라 눈앞 구조를 눈으로 읽는 일이었다.

우리는 안쪽 조사 인원을 다섯으로 줄였다. 세라, 나, 리에트, 그리고 아직 발이 멀쩡한 후보생 둘. 나머지는 적재 평지와 바깥 반각 사이에 남겨 수레와 말, 다친 인원을 지키게 했다. 짐줄은 둘로 나눠 하나는 뒤쪽 방패판 고정에 쓰고, 하나는 안쪽 경사 확인용으로 챙겼다. 횃불도 세 개만 들었다. 너무 밝으면 우리가 먼저 표적이 된다.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바로 냄새가 달라졌다.

바깥은 흙먼지와 말 땀 냄새, 막 식기 시작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붕괴면 안쪽은 젖은 돌 냄새보다 먼저 오래 갇힌 먼지 냄새가 났다. 광산을 오래 비웠다가 누가 다시 열었을 때 나는 냄새였다. 그리고 바닥은 생각보다 덜 무너졌다. 겉으로 덮은 흙만 부서졌지, 그 아래는 누군가 발 딛고 지나가도록 한 번 다져 놓은 느낌이 있었다.

리에트가 맨 앞에서 낮게 손을 들었다.

우리는 멈췄다.

그가 횃불을 든 후보생 손을 조금 더 왼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흙벽에 얇은 홈이 여러 줄 드러났다. 곡괭이 자국 같았지만 광맥을 캐는 방향이 아니었다. 길을 넓히는 자국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 발목 높이로만 반복해서 긁어 놓은 선이었다.

“미끄러지게 만드는 선이야.” 리에트가 속삭였다. “흙 덮기 전에 여기 먼저 만들어 둔 거지.”

내가 아래를 보니 정말 그랬다. 발을 잘못 디디면 앞으로가 아니라 옆으로 미끄러지게 되어 있었다. 넓은 진입로 쪽으로 밀리도록.

“완전히 몰이판이네.” 뒤쪽 후보생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세라는 검끝으로 홈 가장자리를 살짝 찍어 보더니,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 정도면 실수라고 못 한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말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바람이 다시 한 번 갈라졌다. 이번엔 확실히 위아래에서 동시에 왔다. 위엔 좁은 틈이 있고 아래엔 빈턱이 있다는 뜻이었다. 리에트는 무릎을 굽혀 바닥을 더듬다가 작은 돌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회색이 아니라 짙은 청흑색이었다. 바깥 붕괴층 흙과는 전혀 다른 재질이었다.

“이건 안쪽층 돌이 아니야.”

“그럼?” 내가 물었다.

“밖에서 가져다 섞은 거지. 색 맞추려고.”

세라가 짧게 욕설을 삼켰다. 후보생 둘도 이제는 대놓고 얼굴이 굳었다. 누가 봐도 여기선 자연이라는 말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오른쪽 벽 아래에서 아주 희미한 금속 마찰음이 났다.

우리는 동시에 멈췄다.

세라가 먼저 몸을 틀어 앞을 막았고, 리에트는 소리 난 쪽보다 그 반대편 어둠을 먼저 겨눴다. 나는 발밑 경사와 위쪽 틈을 먼저 봤다. 바로 공격이 날아들면 어디가 무너질지부터 알아야 했다.

하지만 화살은 오지 않았다.

대신 벽 아래 흙 한 겹이 저절로 무너지듯 조금 내려앉더니, 안쪽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검은 철편 하나가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무기라기보다는 표식에 가까운 금속 조각이었다. 오래된 광산 못 같기도 했지만, 끝을 보자 느낌이 달라졌다. 단순 못이면 둥글어야 할 부분이 일부러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리에트가 먼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에이드리언.”

부르는 목소리에 짜증과 경계가 같이 섞여 있었다.

“왜.”

“이런 건 네가 먼저 보는 쪽이 낫겠다.”

세라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왜 얘를.”

리에트는 눈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

“난 함정으로 보고 있고, 넌 보고 쪽에서 볼 거야. 얘는 둘 사이에서 뭘 먼저 연결할지 보겠지.”

듣기 좋은 말은 아닌데 반박하기도 애매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금속 조각을 살폈다. 손으로 만지기 전에 주변 흙결부터 봤다. 새로 끼운 흔적은 없었다. 오래 박혀 있다가 방금 흙이 무너지며 드러난 모양새였다.

끝이 납작한 이유를 보고 나서야 숨이 얕아졌다. 못머리 한쪽에 아주 얇은 선이 새겨져 있었다. 점 세 개, 짧은 획 하나, 다시 점 하나. 로웬 헤일이 지도 여백에 남기던 약식 표식과 완전히 같진 않았지만, 같은 손버릇 계열이었다. 길이 아니라 경고를 남길 때 쓰던 축약선.

나는 손을 멈춘 채 낮게 말했다.

“이거, 광산 못이 아니야.”

세라가 즉시 물었다.

“아는 거야?”

“로웬 메모에서 비슷한 걸 본 적 있어.”

그녀 눈빛이 즉시 달라졌다. 불신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냥 헛소리 취급하진 않았다.

“무슨 뜻인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길 표시라기보단, 누가 손댄 경계 표시 같았어.”

리에트가 벽과 바닥을 같이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더 확실하네. 누군가 여길 숨겼고, 누군가는 그 숨김 위에 다시 자기 표식을 남겼다는 뜻이니까.”

안쪽 빈 공간에서 바람이 짧게 되받아 왔다. 말이 끝나자마자 구멍 아래 바닥에서 아주 미세한 공진이 손끝으로 올라왔다. 부적 때문이 아니었다. 벽과 바닥이 연결된 빈 공간에서 나는 진동이었다.

세라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여러 장부를 머릿속에서 동시에 펼치고 있을 것이다. 기사단 분류표, 원정 평가, 나에 대한 감시선, 그리고 방금 자기 눈으로 본 인공 절개면과 로웬 계열 표식. 그게 한 줄로 맞물리면 결론은 하나밖에 안 남는다. 누군가 이 광갱을 초급처럼 보이게 꾸며 놨고, 누군가는 그 위장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론은 세라에게도 안전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안으로 더 깊이는 안 간다.”

뒤쪽 후보생이 안도한 숨을 쉬는 게 들렸다. 하지만 세라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신 여기까지 본 걸 정리하고, 새벽 전에 한 번 더 내측 반각만 확인한다. 바깥 보고는 그 뒤.”

“왜 굳이 또?” 후보생이 물었다.

세라는 바로 답하지 않고 나와 리에트를 번갈아 봤다. 내가 먼저 이유를 말했다.

“지금 돌아가서 보고하면, 우린 저 표식과 절개면 얘길 말로만 해야 해.”

리에트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누가 먼저 와서 지워 버릴 수도 있지.”

세라가 마지막 말을 정리했다.

“맞다. 증거가 더 필요해.”

그녀는 검을 거둬 들이고, 대신 허리춤에서 작은 기록판을 꺼냈다. 처음 본 건 아니지만, 그녀가 전투 직후가 아니라 구조 앞에서 그 판을 여는 장면은 낯설었다. 보통 기사단 후보들은 기록보다 보고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지금 세라는 눈앞 사실을 자기 손으로 고정하려 하고 있었다.

“리에트.”

“말해.”

“절개면 손댄 순서 다시 말해.”

리에트가 짧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얕은 절개, 덮은 흙층, 최근 긁은 유도 홈, 바람이 되받는 빈턱 위치. 세라는 그걸 빠르게 적었다. 중간중간 나를 보며 넓은 진입로와 적재 평지 위치, 방패판을 세운 각도, 짐줄로 막은 틈이 어디였는지도 확인했다. 내가 답할 때마다 그녀 필기 속도가 오히려 더 빨라졌다. 듣기 싫어도 사실이면 써 두겠다는 태도였다.

그 광경이 조금 이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라는 나를 짐처럼 취급했고, 나는 그녀를 명문가 기사 후보로만 봤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쪽은 구조를 읽고 한쪽은 그 구조를 기록하고 있었다. 믿음이라기보다, 같은 거짓말 앞에서 각자 제 역할을 억지로 맡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어둠이 더 내려와 있었다. 넓은 진입로 횃불은 하나만 남겨 둔 탓에 입구 전체가 아니라 우리가 확보한 반각만 떠올랐다. 그 좁은 빛 속에 수레, 방패판, 말 그림자, 다친 후보생들의 웅크린 자세가 층처럼 겹쳐 있었다. 장면이 선명할수록, 여기가 안전지가 아니라 겨우 붙잡은 발판이라는 사실도 더 뚜렷해졌다.

세라는 조사 내용을 짧게 정리해 남은 인원에게 통보했다.

“공식 분류표는 믿지 않는다. 넓은 진입로 접근 금지. 붕괴면 안쪽 반각 중심으로 재배치. 새벽 전까지 교대 경계.”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초급이 아닌 겁니까?”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초급이 아니라는 것보다, 초급처럼 보이게 만든 흔적이 더 확실해.”

그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높은 등급 던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무섭지만, 누가 일부러 속였을 가능성이 붙는 순간 공포는 다른 종류가 된다. 싸우면 되는 위험이 아니라, 누구를 믿어야 할지부터 흔들리는 위험이 되니까.

세라는 그 분위기를 억지로 붙들었다.

“공포는 나중에 해. 지금 필요한 건 정리와 경계야.”

명령은 차갑고 익숙했다. 다만 그 뒤에 이어진 한마디가 조금 달랐다.

“그리고 오늘 본 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건 원정대 전체를 향한 말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내 쪽으로 더 무겁게 떨어졌다.

나는 적재 평지 끝에 서서 다시 한 번 붕괴면 안쪽을 바라봤다. 바람은 여전히 약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절개선은 밤 그림자 속에서 더 얇고 또렷해졌다. 넓은 진입로보다 저쪽이 덜 편해 보이는데도, 이상하게 이제는 저 안이 진짜 길처럼 느껴졌다. 밖으로 물러나는 쪽이 오히려 남이 짜 둔 순서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부적이 손안에서 한 번 아주 약하게 떨렸다.

나는 주머니 위로 손을 눌렀다. 그 반응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작은 떨림보다, 우리가 직접 본 절개면과 홈, 덮인 흙층과 빈 공간이 훨씬 중요했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밝히는 데 필요한 건 신비로운 대답이 아니라, 지워지기 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실제 구조와 흔적이었다.

세라가 기록판을 덮고 내 쪽으로 왔다.

“손은 어때.”

“움직인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어.”

나는 잠깐 그녀를 봤다. 전투 때보다 더 피곤한 얼굴이었다. 대신 눈빛은 아까보다 정리돼 있었다. 불쾌함도, 짜증도 남아 있는데 그 위에 판단이 올라탄 얼굴.

“아프긴 해.” 내가 솔직히 말했다. “근데 쓸 수는 있어.”

“내측 확인할 때 무리하면 바로 뺀다.”

“걱정해 주는 거야?”

세라는 한쪽 눈썹만 아주 조금 올렸다.

“전열 축 빠지면 짜증 나니까.”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 말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호의로 포장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지금은 더 믿을 만하게 느껴졌다.

리에트가 바위 위에서 내려오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전에 저 안쪽 구조를 한 번 더 보면, 다음은 선택이 아니라 확정이 될 거야.”

세라가 물었다.

“무슨 확정.”

리에트는 붕괴면 어둠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

“이 광갱이 초급 던전이 아니라는 확정.”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미 구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넓은 길은 일부러 넓었고, 무너진 곳은 일부러 무너지기 좋았고, 살아남는 위치조차 미리 정해 둔 것처럼 느껴졌다. 분류표의 문장들은 아직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그 문장들은 종이 위 잉크일 뿐이었다.

눈앞 현장은 전혀 다른 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급 던전이라는 말은 이제 정말 이름표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얇은 이름표 뒤에 숨어 있는 거짓말을 확인하려면, 우리는 결국 다시 저 안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

적재 평지 바깥에 남겨 둔 횃불 하나가 바람에 길게 흔들렸다. 불빛이 넓은 진입로를 스칠 때마다, 낮에는 안전선처럼 보이던 바닥이 밤엔 오히려 빈 무대처럼 드러났다. 저 길은 누구든 쉽게 지나갈 수 있게 열린 게 아니라, 누가 어떤 순서로 지나가는지 보기 좋게 펼쳐 둔 길이라는 생각이 이제는 너무 선명했다.

나는 붕괴면 안쪽의 검은 틈과 넓은 진입로를 번갈아 봤다. 어느 쪽도 편한 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안쪽은 아직 남이 써 둔 결말로 곧장 이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바깥에는 이미 누군가 붙여 둔 이름표와 분류표, 보고 올릴 손과 다시 데려갈 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게 더 위험한데도, 이상하게 지금은 그쪽이 덜 속는 길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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