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이름보다 먼저 읽힌 사람

문 안쪽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착지대는 바로 조용해지지 않았다.

정면의 문틀은 반쯤 열린 채 검은 틈을 물고 있었고, 오른쪽 바깥에 숨어 있던 열세 번째 잔선만 아직 푸르게 살아 있었다. 그 빛은 바닥 먼지를 따라 얇게 흐르다가 내 비껴 선 왼발 앞에서 멎고, 다시 세라의 방패 아랫변을 훑었다. 세라는 낮은 턱 위에 오른발을 걸고 방패를 비스듬히 세웠다. 위 계단에서 내려오는 장대와 정면 문틀의 반응을 한꺼번에 받으려면 그 자세밖에 없었다. 방패 무게 절반은 내 어깨로 넘어와 있었고, 쇄골 아래가 철판에 눌려 뜨겁게 저렸다.

리에트는 세라보다 한 칸 높은 계단턱에 서 있었다. 활끝은 문 안쪽을 겨누었지만, 눈은 위 계단과 바닥 잔선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갔다. 미리엘은 다섯째 홈 아래 은실 구슬을 붙잡은 채 숨을 죽였고, 브론은 문턱 오른쪽에 박아 넣은 쐐기 둘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쐐기 머리 주변 흰 가루가 미세하게 떨렸다. 위쪽에서는 아직 누군가가 돌벽을 더듬었다. 장대 끝이 계단 모서리를 긁는 소리, 사람 발이 조심스럽게 체중을 싣는 낮은 울림, 철편이 벽에 닿는 짧은 소리가 돌을 타고 우리 발바닥까지 내려왔다.

방금 들은 말은 아직 내 귀 안에 남아 있었다.

열세 번째 계승 표식의 보관자.

보관자 확인. 열세 번째 왕좌 기록을 다시 올릴 준비를 한다.

말은 문 안쪽으로 사라졌지만, 그 말이 남긴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호칭 하나가 어둠에서 튀어나와 내 앞에 놓였다. 이름도 아니고 직책도 아니었다. 누가 나를 부른 게 아니라, 오래전에 접어 둔 표찰을 내 목에 다시 걸어 보려는 느낌이었다.

세라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나를 뒤로 밀지 않았다. 대신 방패를 반 치 더 안쪽으로 넣어 문과 내 사이를 좁혔다. 감시자가 대상을 떼어 놓는 동작이 아니었다. 위험이 어느 방향에서 먼저 덮칠지 확인한 뒤 자기 몸을 그 사이에 끼워 넣는 동작이었다.

“다시 말해.”

내게 한 말이 아니었다. 문 안쪽을 향한 명령이었다.

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섯째 홈 아래에서 금속이 짧게 긁혔다. 푸른 잔선이 한 번 떨렸고, 문틀 안쪽 어둠이 아주 낮게 울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자 그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람이 숨을 고르는 박자가 아니라, 정해진 위치에 하중이 닿았을 때만 돌아가는 오래된 장치의 박자였다.

미리엘이 손안의 은실을 더 세게 쥐었다.

“저 호칭, 그냥 부른 게 아니에요.”

그녀는 어둠을 보지 않았다. 바닥을 보았다. 로웬의 메모 조각, 성도식 외피 판, 젖은 수련원 배정 문건 사본. 사람 얼굴보다 먼저 기록 조각을 읽는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 밑에 깔린 공포는 숨기지 못했다. 미리엘은 그 말을 처음 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말과 닮은 줄 이름을 본 사람이었다.

세라가 짧게 물었다.

“어디서 봤지.”

“본 게 아니라 옮겨 적었어요.”

미리엘은 입술 안쪽을 한 번 깨물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삭제 교리 정리실에서요. 금지 구절, 회수 보류 문장, 상위 봉쇄 절차에 걸린 색인어를 따로 옮겨 적는 장부가 있었어요. 원문은 다 남기지 않았어요. 말의 뜻이 아니라, 어느 장부 어느 칸에 묶이는지만 남기는 방식이었죠. 거기서 계승, 보관, 왕좌, 기록이라는 말이 같은 줄 근처에 있었어요.”

정리실.

나는 그 방을 본 적이 없는데도 냄새가 먼저 떠올랐다. 젖은 종이, 묵은 먹, 촛불에 오래 데워진 밀랍, 손이 많이 닿아 반들거리는 책상 모서리. 미리엘의 목소리가 그 냄새를 데리고 왔다. 뜻을 이해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읽지 말라고 배운 문장을 수없이 베껴 적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손은 기억하지만, 입은 아직 허락받지 못한 말투.

브론이 낮게 중얼거렸다.

“불온 문구 장부.”

“정식 교리 바깥으로 밀어 둔 것들이에요.”

미리엘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정리실에서는 뜻보다 순서를 먼저 외워요. 어디에 묶고, 누구에게 넘기고, 누가 읽으면 안 되는지. 그래서 기억나는 것도 문장보다 처리 문구예요. ‘왕좌 기록 계통’은 회수 금지. ‘보관자’는 확인 전 분리. ‘계승 표식’은…”

그녀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위 계단에서 장대 끝이 내려와 세라의 방패 윗면을 때렸다. 둔한 소리가 착지대에 번졌다. 세라는 대답 대신 몸으로 밀어 냈고, 나도 반사적으로 방패 뒤 손잡이를 눌렀다. 충격이 팔꿈치를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미리엘의 은실 구슬이 튀듯 떨렸지만 그녀는 놓지 않았다.

리에트가 활끝을 위로 조금 올렸다.

“끝까지 말해.”

미리엘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워짐.”

그 한마디가 문 안쪽 어둠보다 차가웠다.

세라가 낮게 되뇌었다.

“확인 전 분리.”

그녀의 시선이 나를 스쳤다. 길지 않았다. 오래 보면 내가 무너질 걸 알기라도 한 듯 바로 문틀로 돌아갔다.

“그럼 저건 이름을 안 게 아니군.”

세라는 방패 손잡이를 고쳐 쥐며 말했다.

“사람을 칸으로 접는 말을 집어 든 거야.”

나는 숨을 제대로 들이마시지 못했다.

보관자.

처음 들었을 때부터 축복처럼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또렷해졌다.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맡겼다는 뜻이 아니었다. 확인이 끝나기 전까지 따로 빼 두기 좋은 사람. 일반 보고에 올리지 않고 상위 절차로 넘기기 좋도록 묶어 두는 사람. 사람을 보호하는 말이 아니라, 아직 공개 장부에 적지 않은 채 상자 하나에 넣어 두는 말.

내 피부가 아니라 종이 가장자리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 얼굴을 본 게 아니라, 내 이름 옆 빈칸을 본 것 같았다.

브론이 쐐기 머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좋군. 환영도 칭송도 아니고 분류표였단 소리네.”

세라가 곧장 쏘아붙였다.

“사람 앞에서 그 말밖에 안 나오나.”

“사람이라고 읽다가 먼저 잘리는 놈을 많이 봐서 말이지.”

브론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얇은 긴장이 걸려 있었다.

“위에서 우리를 민 놈들, 바깥 길을 먼저 밟은 손들, 그리고 아래에서 저 말을 던진 장치. 전부 네놈을 그냥 희귀한 초급 보조직으로 취급하지 않았어. 이름을 숨기고, 길을 낮춰 적고, 감시와 확인을 따로 붙였지. 이제 확실해졌다. 넌 문을 여는 열쇠라기보다, 문이 다시 확인하려 드는 사람이다.”

열쇠라는 말보다 그 말이 더 싫었다.

열쇠라면 아직 손에 쥐는 물건이다. 도망치든 부수든 숨기든, 적어도 내가 만질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확인하려 드는 사람은 다르다. 누군가 이미 나를 한 번 따로 빼 두었고, 때가 오면 어느 손에 넘길지 정해 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무엇을 할지보다, 나를 어디에 놓을지가 먼저 정해져 있는 기분. 보이지 않는 장부의 빈칸이 등 뒤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리에트가 그때 낮게 말했다.

“둘 다 반만 맞아.”

우리는 동시에 그녀를 봤다. 리에트는 여전히 내 얼굴보다 발밑을 보고 있었다.

“문은 반기지 않아. 미워하지도 않고.”

그녀의 활끝이 다섯째 홈, 아홉째 홈, 내 비껴 선 발, 세라 방패 아래 눌린 자리, 브론의 쐐기 머리를 차례로 짚었다.

“감정이 없는 움직임이야. 순서만 있다. 첫째, 위치. 가운데를 피했는지. 둘째, 하중. 누가 어디서 무엇을 버티는지. 셋째, 반응. 저 말을 들었을 때 누가 먼저 멎는지.”

미리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반응까지 본다고요?”

“지금도 보고 있잖아.”

리에트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말을 던지고 바로 죽이지 않았어. 기다렸지. 우리가 어디를 보고, 무엇에서 굳고, 누가 누구 앞을 막는지. 저건 문이 아니라 확인 절차야.”

확인 절차.

확인 전 분리.

지워짐.

서로 따로 떠 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한 줄로 맞물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몸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 눈길을 느꼈다. 세라는 내 어깨 위 하중이 얼마나 버티는지 보고 있었다. 브론은 내가 어느 말에서 굳는지 재고 있었다. 미리엘은 내가 들고 온 문건과 방금 들은 호칭 사이 간격을 세고 있었다. 리에트만은 내 감정을 보지 않았다. 발 위치와 빛의 흐름만 봤다. 이상하게도 그 시선이 가장 덜 불쾌했다. 적어도 거기에는 나를 자기 쪽 장부에 넣겠다는 욕심이 없었다.

세라가 방패를 조금 낮추었다. 위에서 다시 장대가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녀는 팔꿈치를 틀어 비껴 받았다. 방패 가장자리로 피 한 줄이 흘렀다. 아까 튄 돌조각에 베인 자리였다. 그녀는 닦지 않았다.

“기사단 문서도 이 냄새가 났어.”

나는 그녀를 봤다.

세라는 바로 이어 말했다.

“허가서 뒷장에 저 호칭이 직접 적힌 건 아니야. 하지만 ‘대상 접촉 시 보고’, ‘단독 이탈 금지’, ‘상급 인계 우선’이 전부 네 움직임에만 과하게 붙어 있었지. 그땐 반응자 확보 절차 정도로 읽었어.”

“그땐?”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세라는 문틀을 보며 말했다.

“확보 뒤에 더 위로 넘기는 길이 있었던 거야. 네 이름을 일반 보고에 올리지 않고, 먼저 위 봉쇄 절차로 넘기는 길.”

나는 방패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왜 숨겼지.”

세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위 계단에서 장대가 깊이 내려왔고, 이번엔 사람 팔 힘이 끝까지 실렸다. 방패가 크게 울렸다. 내가 손잡이를 놓쳤다면 세라의 몸이 뒤로 밀렸을 것이다. 브론이 쐐기 하나를 더 밀어 넣고, 리에트가 위쪽 고리 옆을 향해 화살을 놓았다. 끊어진 쇠고리가 우리 왼쪽으로 떨어졌다.

세라는 그 소리가 멎은 뒤에야 말했다.

“이름이 먼저 돌면 사람은 사라지니까.”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보다 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현장 기사는 이름을 알면 자기 판단을 세워. 보고를 올리는 사람은 판단보다 인계를 원하고. 성도는 더하겠지. ‘보관자’ 같은 말이 실무자들 입에 오르기 시작하면, 넌 원정대원이 아니라 봉쇄 대상이 된다. 누가 너를 데리고 움직일지, 어디에 세워 둘지, 누구 서명 아래 넘길지가 먼저 정해져.”

보호가 아니라 봉쇄.

확보가 아니라 인계.

사람이 아니라 칸.

그 말들이 내 안쪽에 가라앉았다.

나는 수련원 배정 문건 가장자리의 작은 표식을 떠올렸다. 처음엔 귀찮은 행정 표시라고 여겼다. 막사에서 나만 따로 불려 들어갔을 때도, 담당자가 질문보다 내 얼굴과 인장을 더 오래 본 이유를 몰랐다. 왜 내 배정서만 두 번 접혔는지, 왜 내 이름 옆에는 담당자 필체와 다른 작은 점이 찍혔는지, 왜 로웬은 내 이름 대신 열세 번째 줄이라는 말을 먼저 남겼는지.

전부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누군가 내 삶을 사건보다 먼저 분류표로 읽고 있었다.

로웬의 메모가 다시 떠올랐다.

열세 번째 줄을 다시 읽어라.

도시 안이 더 위험하다.

처음에는 숨은 길을 찾으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광갱, 정화문, 폐선 같은 이름을 의심하라는 경고로 읽혔다. 지금은 더 안쪽이 보였다. 도시 안이 위험한 이유는 칼 든 사람이 많아서만이 아니었다. 칼을 쓰기 전에 이미 사람을 넘길 문장이 촘촘하게 깔려 있어서였다. 그 문장 위에 이름이 올라가는 순간, 사람은 자기 발로 걷기도 전에 다른 손으로 접혀 넘어간다.

미리엘이 거의 숨처럼 말했다.

“정리실 장부도 그래요. 정확한 문장은 지우는데, 처리 순서는 남겨요. 뜻은 없애고, 넘기는 길만 남기는 식으로.”

그녀는 떠오르는 조각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보관자 확인 전 임시 침묵.’ ‘기록 계통 재개 시 외부 낭독 금지.’ ‘왕좌 계열은 현장 보고보다 상위 봉쇄 절차 우선.’ 전부 조각뿐이었는데… 지금 들으니 한 묶음이에요.”

미리엘의 시선이 내 손 아래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거기에는 젖은 종이 조각 하나가 돌에 붙어 있었다. 수련원 인장 반쪽과 흐릿한 날짜 하나만 남은 조각. 그녀는 당장 주우려 하지 않았다. 그 종이가 여기까지 같이 내려왔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문은 사람만 읽는 게 아니라, 사람이 들고 온 흔적까지 함께 읽을지 모른다. 그 생각이 그녀 얼굴에 스쳤다.

브론이 혀를 찼다.

“누가 얼마나 감췄는지는 아직 흐려도, 왜 네놈을 그냥 두지 않았는지는 선명해졌군.”

그는 문턱 아래를 손톱으로 긁었다. 돌처럼 보였던 표면에서 가루가 벗겨지자 검푸른 금속층이 짧게 드러났다. 브론은 그걸 보고도 웃지 않았다.

“내 계산도 바뀐다. 네놈이 단순 길잡이면 한몫 챙겨 빠지는 걸 생각하면 됐어. 그런데 아래 구조가 네 반응을 기다린 거라면, 네 옆에 붙는 놈부터 더 큰 몫도 더 큰 화도 같이 받는다.”

세라가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물러날 생각인가.”

“반대지.”

브론은 처음으로 세라 말을 정면에서 잘랐다.

“이쯤 되면 물러나는 놈부터 먼저 잘린다. 왕국이든 성도든, 위에서 내려오는 놈들이든, 바깥에서 먼저 길을 만진 놈들이든 이제 서로 네놈을 먼저 쥐려 들 거다. 아래 장치가 널 먼저 확인하면 우리까지 줄째로 묶일 수 있고.”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브론은 여전히 거래판 위에 물건을 올려놓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값비싼 금속을 보고 들뜬 손이 아니었다. 한 번 잘못 건드리면 손목째 날아갈 물건을 알아본 손이었다.

리에트가 다시 끼어들었다.

“시간도 바뀌었어.”

그녀는 위 계단과 문 안쪽을 번갈아 겨눴다.

“위는 아직 길을 다 못 찾았지만, 아래는 첫 확인을 끝냈다. 오래 머물면 두 쪽이 동시에 조여 와.”

세라가 물었다.

“어느 쪽이 먼저냐.”

“위는 사람 속도.”

리에트는 바로 답했다.

“아래는 절차 속도.”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 안쪽에서 낮은 울림이 번졌다. 다섯째 홈과 아홉째 홈 사이 은실 구슬이 동시에 떨렸고, 브론이 박아 둔 쐐기에서 길고 마른 소리가 샜다. 이번에 살아난 푸른 선은 열세 번째 잔선 하나가 아니었다. 문턱 아래 감춰져 있던 가는 홈 셋이 먼지를 밀어내며 드러났고, 그 선들은 우리 발 위치를 잇는 방향으로 천천히 뻗어 왔다.

빛은 아무렇게나 번지지 않았다.

세라가 전면을 막는 자리, 내가 그 하중을 비껴 받는 자리, 리에트가 위를 덮는 사선, 미리엘이 홈과 문장을 읽는 위치, 브론이 쐐기와 보강층을 붙드는 틈. 제멋대로 버티는 줄 알았던 우리가 어느새 하나의 틀 안에 끼워지고 있었다. 문은 우리를 향해 새로 선을 긋는 게 아니었다. 이미 우리가 서 있어야 했던 자리를 먼지 아래에서 다시 드러냈다.

소름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문은 이름만 읽은 게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자리로 서 있는지도 읽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발을 반 치 뒤로 빼려다가 멈췄다. 선 밖으로 나가면 덜 읽힐 것 같았다. 그러나 발뒤꿈치가 움직이는 순간 잔선 하나가 내 뒤를 따라 얇게 휘었다. 피하는 동작마저 기록하는 것처럼. 나는 더 물러서지 못했다. 도망이 아니라 오답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순간 로웬이 왜 끝까지 설명하지 않았는지 아주 조금 이해될 듯했다.

그가 처음부터 저 호칭을 적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누군가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그는 답을 남긴 게 아니라, 답이 문서로 굳기 전에 내가 직접 보고 이어 붙이도록 만들었다. 선의라고 믿기에는 아직 이른 일이었다. 다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름을 먼저 듣는 순간 사람은 자기 다리로 움직이지 못한다. 로웬은 그걸 알았다.

문 안쪽에서 세 번째 울림이 올라왔다.

이번엔 목소리가 아니었다. 얇은 금속판 여러 장을 한꺼번에 밀어내는 소리였다. 어둠이 아주 조금 갈라졌고, 그 틈 사이로 사람 허리 높이쯤 되는 검푸른 판 하나가 비스듬히 올라왔다. 표면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 수십 번 긁었다가 갈아 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름을 새기려다 매번 지운 자리 같았다. 칼끝이 지나간 홈 위에 더 오래된 흠집이 겹쳤고, 가장자리에는 성도식 정리 부호와 닮은 짧은 선 세 개가 남아 있었다.

판이 멈추자 묵은 분진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돌가루라기보다 갈린 먹과 금속가루가 뒤섞인 색이었다. 오래된 서고 선반 안쪽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을 때 묻는 먼지와 닮았다. 사람을 맞이하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미 와 본 적 있는 무언가를 다시 대조하기 위한 물건. 서류철 한 장이 어둠에서 밀려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미리엘이 그대로 굳었다.

“색인판…”

세라가 즉시 물었다.

“읽을 수 있나.”

“전부는 아니에요.”

미리엘은 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형식은 알아요. 지우기 전 목록판이에요. 먼저 이름이나 역할을 확인하고, 맞는 칸이 있으면 다음 단계로 넘기는…”

그녀 목소리는 갈수록 낮아졌다. 나는 미리엘이 판 위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사라진 글자의 자리를 읽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남은 선보다 깎여 나간 홈을 보는 눈. 그건 기록을 믿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기록이 지워지는 방식을 오래 본 사람의 눈이었다.

브론이 욕설을 삼켰다.

“사람을 장부처럼 넘기는 장치군.”

“사람만은 아닐 거예요.”

미리엘은 판 표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만지지는 않았다. 손이 닿으면 문이 그 손까지 읽을까 봐 두려운 동작이었다.

“역할, 증표, 응답문, 배치. 다 맞아야 다음 장이 열리는 구조일지도 몰라요.”

증표라는 말에 허리 쪽 주머니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거기에는 로웬 메모를 감싼 천 조각과 막사에서 몰래 접어 넣은 배정 문건 사본 일부가 남아 있었다. 작은 종이 두 장. 지금은 검보다 더 무거웠다. 문이 그것까지 읽는다면, 내가 여기까지 들고 내려온 이유도 이미 절반쯤 드러난 셈이었다.

위 계단에서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장대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상단 턱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 짧게 끊는 숨, 벽에 철편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 손들은 아직 정확한 구조를 모르는 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모르는 채 덮쳐 오는 사람은 장치보다 쉽게 실수한다. 그리고 그 실수는 늘 아래 사람 몸으로 떨어진다.

세라가 짧게 결론을 냈다.

“선택해.”

그녀는 나만 보지 않았다. 우리 모두를 둘러보았다.

“아래 절차를 먼저 상대할지, 위에서 내려오는 손을 먼저 막을지.”

“하나만 고르면 둘 다 진다.”

내 말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 꽂혔다. 나는 발밑 선, 색인판, 세라의 방패 높이, 리에트의 활끝, 미리엘의 은실, 브론의 쐐기, 그리고 문틀 오른편에서 아직 살아 있는 열세 번째 잔선을 한꺼번에 보았다.

“저건 가운데를 피한 자리, 하중, 반응을 다 읽었어. 다음은 우리가 맡은 자리일 거야. 누가 무엇을 쥐고 있고,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걸 내놓지 않으면 아래 절차는 멈추지 않아. 위 손들은 곧 내려와. 그러면 우린 위와 아래 사이에 끼여 죽는다.”

세라의 눈매가 좁아졌다.

“결국 서로 비밀을 털어놓자는 소리로 들리는데.”

“신뢰 고백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답을 먼저 내놓는 거지. 저 판이 우리를 자기 순서대로 접기 전에.”

말을 뱉자마자 입안이 말랐다. 내가 위험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 위험한 건 아무도 먼저 자기 칸을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을 끄는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믿어서 한자리에 선 게 아니었다. 우연히 겹친 것도 아니었다. 아래 장치가 그렇게 읽고 있었다. 세라는 막는 자리, 리에트는 재는 자리, 미리엘은 지워진 문장을 푸는 자리, 브론은 닫힌 걸 벌리는 자리. 그리고 나는 이 전부를 한 줄로 묶어야만 하는 자리.

그 배치가 싫다고 우겨도 소용없었다.

이미 선이 우리 발밑에서 그렇게 그어져 있었다.

브론이 마른 숨을 뱉었다.

“말은 좋군.”

“좋든 싫든.”

나는 그를 똑바로 봤다.

“너도 네 몫을 안 내놓으면 저 쐐기 다음에 뭘 건드려야 하는지 못 읽어. 미리엘도 장부 조각을 더 말하지 않으면 저 판을 못 풀고, 세라도 기사단 문서가 어디서부터 너를 사람 대신 대상으로 바꾸는지 말하지 않으면 우릴 언제 버려야 하는지만 계산하게 돼. 리에트도 바깥에서 먼저 자리 잡은 동선의 정체를 숨기면 위 추적 속도를 잘못 읽을 거고.”

말을 내뱉고 나자 마지막이 남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배정 문건, 막사의 별도 확인, 로웬 메모가 왜 다 내 이름 앞에서만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는지, 더는 모르는 척 못 해.”

침묵이 떨어졌다.

짧은데도 길었다. 위에서는 돌가루가 한 줌 미끄러져 내렸고, 아래에서는 색인판 안쪽에서 얇은 판 하나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세라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방패를 든 팔을 한 번 고쳐 쥐었다.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틀렸다고 잘라 말할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해서였다. 미리엘은 은실을 쥔 채 판의 홈 수를 세고 있었고, 브론은 쐐기 깊이를 다시 손끝으로 가늠했다. 리에트만이 이미 다음 순서를 읽은 얼굴이었다.

문 안쪽에서 아주 낮고 평평한 낭독이 흘러나왔다.

“확인 전제 미충족.”

말이 끝나자 색인판 가운데에 가늘고 긴 금이 열렸다. 그 틈 안쪽에는 다섯 개의 빈 칸이 나란히 드러났다. 이름을 새기라는 자리인지, 역할을 맞추라는 자리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세라 방패 높이와 겹쳤고, 하나는 리에트 활끝 사선과 맞았다. 하나는 미리엘이 붙잡은 홈 앞에 멈췄고, 하나는 브론의 쐐기와 보강층 사이에 닿았다. 마지막 하나는 내가 비껴 선 열세 번째 잔선 자리와 정확히 이어졌다.

금이 벌어질 때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왔다. 오래 잠긴 서고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곰팡이보다 금속과 마른 약품 냄새가 먼저 났다. 다섯 칸은 손바닥 절반만 했지만, 이상하게도 깊이보다 더 아래가 느껴졌다. 물건 하나를 얹는 자리라기보다, 그 위에 놓인 것을 판단한 뒤 밀어 넣는 투입구 같았다.

리에트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우리 자리다.”

세라가 낮게 욕을 삼켰다.

미리엘은 거의 숨처럼 말했다.

“다음 잠금을 풀려면… 각자 자기 칸에 자기 답을 넣어야 하는 구조일지도 몰라요.”

브론이 마른 웃음을 냈다.

“좋아. 사람값만이 아니라 비밀까지 꺼내 놓게 생겼군.”

나는 문 안쪽 검은 틈을 바라봤다.

이제 분명했다.

저 아래는 우리가 서로를 믿는지 묻지 않았다. 서로 다른 손에 묶인 다섯 사람이 왜 끝내 한자리에 몰렸는지, 그 이유를 각자 자기 입으로 제출받으려 드는 쪽이었다.

제출.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숨이 막혔다. 칼을 겨누는 것보다 더 선명했다. 칸이 있고, 절차가 있고, 응답하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전투가 아니라 접수였다. 살아남으려면 앞으로 가야 하는데, 앞으로 가려면 내가 누구인지보다 내가 어느 칸에 놓일 사람인지 먼저 답해야 한다.

위에서 발소리가 한 번 더 가까워졌다.

아래 색인판의 푸른 선도 한 칸 더 밝아졌다.

나는 방패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숨을 골랐다. 도망칠 시간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서 더 내려가려면, 우리 중 누구도 자기 줄 이름을 끝까지 숨긴 채 버틸 수 없었다.

“먼저 하나씩만.”

내가 말했다.

“전부 털어놓자는 게 아니야. 저 칸이 읽는 만큼만 먼저 낸다. 세라는 기사단 문서에서 날 언제 넘기라고 했는지. 미리엘은 장부에서 보관자 다음에 붙는 처리를. 브론은 저 판을 건드리면 어디가 먼저 깨질지. 리에트는 위에서 내려오는 자들이 어느 길을 썼는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안쪽 금속이 낮게 떨렸다. 다섯 칸 바닥에 얇은 빛이 고였다. 재촉이 아니라 채점 준비 같았다.

세라가 나를 보았다.

“너는.”

나는 허리 주머니 위에 손을 얹었다. 로웬의 메모와 수련원 문건 조각이 천 안에서 눌렸다.

“나는 내가 들고 온 종이부터 낸다.”

말하고 나서야 손끝이 떨린다는 걸 알았다.

내가 내놓으려는 건 답이 아니었다. 답으로 쓰이기 전에 붙잡은 흔적이었다. 누군가 내 이름보다 먼저 읽은 것들. 누군가 내 발보다 먼저 배치한 것들. 그것을 내가 먼저 바닥에 놓지 않으면, 저 문은 자기 장부대로 나를 접을 것이다.

세라의 방패가 다시 울렸다. 위쪽 손들이 더 가까워졌다.

리에트가 활을 반 치 올렸다.

“늦으면 내가 먼저 끊는다.”

브론이 쐐기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늦으면 이 판이 먼저 먹겠지.”

미리엘은 은실을 문턱에 고정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첫 조각을 꺼냈다.

“보관자 다음 처리 문구는… 임시 침묵이에요.”

그 순간 다섯 칸 가운데 하나가 아주 얕게 빛났다.

아무도 안도하지 못했다. 그 빛은 문이 열렸다는 뜻이 아니었다.

첫 답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머지 네 칸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연재 중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