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는 벽
돌판은 이미 한 번 숨을 쉬고도 아직 다 열리지 못한 짐승처럼 우리 앞에서 옅게 갈라져 있었다.
붕괴면 안쪽 반각은 바깥 적재 평지보다 한 층 더 낮고 좁았다. 왼편 바닥에는 우리가 방금 지나온 판석 모서리가 흙 아래로 길게 묻혀 있었고, 오른편 벽은 광산 흙벽처럼 울퉁불퉁해 보이면서도 일정한 구간마다 지나치게 반듯하게 꺾여 있었다. 세라는 갈고리 철촉을 돌판 아래턱에 건 채 왼쪽 가장자리로 몸을 빼 두었고, 리에트는 오른쪽 상단 틈을 겨누며 화살 한 대를 손에 잡고 있었다. 나는 둘 사이 반 걸음 뒤에서 물러날 발판과 짐줄이 닿는 길이를 다시 눈으로 셌다.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면 붕괴면 턱, 옆으로 두 걸음 틀면 판석 가장자리, 잘못 밟으면 유도 홈이었다.
횃불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돌판 틈 안쪽으로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실처럼 새어 나왔다. 흙냄새보다 더 눅진하고, 젖은 돌냄새보다 더 마른 냄새였다. 먼지가 아니라 오래된 방 안쪽에서만 나는 냄새였다. 누군가 덮어 숨겨 놓은 공간이 실제로 뒤에 있다는 냄새였다.
세라가 어깨를 낮춘 채 말했다.
“내가 한 번 더 건다. 둘 다 발부터 확인해.”
나는 대답 대신 바닥을 짚어 보았다. 흙이 얇았다. 손끝 아래로 직선 모서리가 다시 잡혔다. 광갱 바닥이 아니라 통로를 숨기려고 덮은 판석. 리에트도 같은 걸 느꼈는지 시선을 아래로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위쪽 틈으로 돌렸다.
“위는 안 움직여.” 그가 낮게 말했다. “열려도 아래가 먼저 밀릴 거야. 위쪽은 흙으로 무게를 먹였어.”
세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갈고리 끝을 아주 조금만 비틀었다.
낮은 금속음이 다시 들렸다.
아주 멀리서 누가 얇은 종을 손톱으로 건드린 것 같은 소리였다. 이어서 돌판 뒤쪽 어딘가에서 잠금쇠가 걸렸다 풀리는 듯한 둔탁한 울림이 한 번 지나갔다. 갈라진 흙이 가늘게 흘러내렸고, 틈 안쪽 어둠이 조금 더 깊어졌다.
리에트가 숨을 죽인 채 중얼거렸다.
“움직인다.”
나는 돌판 가장자리와 그 아래 판석이 맞물리는 선을 봤다. 억지로 부순 흔적이 아니라 원래 움직이도록 만든 선이었다. 누군가 사람이 밟고, 닿고, 미끄러지고, 손을 짚을 자리를 모두 계산해 감춘 문. 내 손안 주머니 속 부적이 다시 미세하게 떨렸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떨림에 기대지 않았다. 지금 문을 여는 건 부적이 아니라 이 장치였다. 문서에 눌린 자국, 바닥 판석, 벽 눌림, 그리고 내 몸이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이 같이 맞물려 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세라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불렀다.
“응.”
“네가 한 발 앞으로 가면 소리가 달라질 수도 있어.”
그 말은 확인이 아니라 경고였다. 나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돌판이 내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었다. 아까 문서에서 본 단어들이 다시 머릿속을 긁고 지나갔다. 반응자. 단독 이탈 금지. 반응 확인 후.
나는 씁쓸하게 웃을 뻔했다가 말았다.
“좋은 소린 아니네.”
“좋아서 하는 말 아니야.”
리에트가 끼어들었다.
“둘 다 멈춰. 소리 또 난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돌판 아래에서 짧은 마찰음이 두 번 더 이어졌다. 첫 번째는 돌이 돌을 긁는 소리였고, 두 번째는 그 뒤 빈 공간에서 되받아 나오는 울림이었다. 세라가 갈고리를 당기지 않았는데도 틈이 손가락 하나 너비만큼 더 벌어졌다. 틈 안쪽 어둠에 횃불을 비추자 먼지가 아니라 얇은 입자가 반짝이며 떠올랐다. 오래 잠든 공기가 밖 빛을 처음 맞는 순간 같았다.
“멈추지 마.” 내가 말했다. “이 정도 열렸을 때 구조가 바뀌는지 먼저 봐야 해.”
세라는 이번엔 내 말을 따랐다. 갈고리를 건 상태 그대로 힘을 빼고, 대신 발끝으로 판석 가장자리를 눌렀다. 판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리에트는 왼손 검끝으로 틈 위쪽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 냈다. 거기서 드러난 건 광맥이 아니라 매끈한 돌면이었다. 그것도 자연석이 아니라 면을 잡아 깎은 돌.
“광갱 벽이 아니야.” 리에트가 말했다. “처음부터 덮개였어.”
세라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안쪽도 작업장이나 묘실 같은 구조겠지.”
“묘실이면 좋겠네.” 내가 말했다. “문서에 문 여는 확인 문구까지 붙일 정도면, 그냥 묻어 둔 장소는 아닐 테니까.”
세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갈고리를 빼서 틈 아래에 다시 걸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깊게 걸렸다. 그녀가 팔에 힘을 주자 돌판 전체가 눈에 보일 만큼 천천히 안쪽으로 밀렸다. 돌이 움직이며 흙먼지가 벗겨졌고, 그 아래에서 눌린 문양 한 조각이 드러났다.
성도 인장처럼 보였지만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해 모양을 둘러싼 선의 절반이 마모돼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른 문양이 한 번 더 깔려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두 번째 문양은 너무 닳아 있었지만, 왕실 장비에서 보던 가지 두 갈래 왕관선과 닮아 있었다.
“둘 다 있네.” 세라 목소리가 낮아졌다. “성도 쪽 덧새김 위에 왕실 쪽 바탕이 남아 있어.”
리에트가 바로 반대편 벽을 훑었다.
“겉에 덮은 쪽은 사람 눈을 속이려고 급히 덧댄 거고, 아래 본체는 훨씬 오래됐어.”
나는 돌판이 열린 틈 옆에 손을 대고 안쪽 바람 방향을 확인했다.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공기가 일정했다. 작은 틈이 아니라 뒤에 제법 넓은 공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횃불 하나만 안쪽으로 넣어 보자.”
세라가 나를 봤다.
“가까이 붙지 마.”
“붙을 생각 없어.”
나는 짐줄 끝에 짧은 횃불을 묶었다. 리에트가 화살촉으로 매듭을 한 번 더 눌러 확인했고, 세라는 돌판 아래턱이 다시 닫히지 않게 갈고리를 고정했다. 그제야 셋이 각각 자기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보게 됐다. 내가 줄을 천천히 풀자 작은 횃불이 틈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처음엔 그냥 먼지뿐이었다.
그다음엔 바닥.
그리고 부러진 발목뼈 하나가 빛에 걸렸다.
나는 줄을 더 풀지 못하고 잠깐 멈췄다. 횃불이 흔들리며 안쪽을 더 비췄다. 발목뼈 하나만이 아니었다. 판석 두 장 너머 어둠 속에 사람 형체가 하나, 둘, 셋 겹쳐 누워 있었다. 갑옷은 거의 썩어 붙어 있었지만 금속 부속은 남아 있었다. 어떤 것은 성도 인장 조각을 달고 있었고, 어떤 것은 가슴받이 중앙이 마모돼 문양을 읽기 어려웠다. 바닥엔 녹슨 창대와 짧은 쇠사슬, 기록판을 고정하는 듯한 철제 걸쇠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가장 바깥쪽 시신은 벽을 등진 채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굳어 있었다. 도망치다 쓰러진 모양이 아니라, 누군가를 막아 세우려다 그대로 주저앉은 자세였다. 그 팔꿈치 아래엔 금속 못이 박힌 좁은 판이 끼어 있었고, 판 옆으로는 끊어진 가죽끈이 두 줄 남아 있었다. 기록판을 손목에 묶거나, 문서 다발을 몸에서 떼어 잃지 않게 고정할 때 쓰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다른 시신 하나는 허리춤에서 작은 유리병 파편이 흘러나와 있었는데, 안쪽에 마른 은빛 가루가 얇게 들러붙어 있었다. 광산 보급품이라기보다 봉인 재료나 정화약을 다루던 쪽 장비처럼 보였다.
“전쟁터네.” 리에트가 아주 작게 말했다.
“광갱 안쪽에 이런 걸 숨겼다고?” 세라가 낮게 되물었다.
“광갱이 아니라 이걸 숨기려고 광갱처럼 덮은 거지.”
나는 횃불을 조금 더 안쪽으로 넣었다. 불빛이 벽을 핥듯 지나가자 검게 그을린 면 위에 엷은 채색 흔적이 살아났다. 처음엔 얼룩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둥근 빛 열두 개가 반원처럼 배열돼 있었고, 그 바깥 가장자리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랜 안료는 절반 이상 벗겨졌지만 배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열둘이 아니었다.
열셋이었다.
그 숫자를 세는 순간 목 뒤가 먼저 식었다. 수련원 벽에 걸린 영웅 도표도, 성도 강론도, 기사단 훈련장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전승도 언제나 열둘에서 멈췄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지막 하나가 빠진 자리가 아니라, 일부러 바깥으로 밀려난 자리처럼 남아 있었다.
세라도 그걸 봤는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리에트가 먼저 앞으로 반 걸음 움직였다. 그는 화살을 뒤로 넘기고 빈손으로 벽면 가까이 다가가더니, 횃불 그림자 안에서 문양 가장자리만 눈으로 쫓았다. 손을 대지 않은 채, 보기만 해도 뭔가를 판독하는 얼굴이었다.
“빛 배열만 이상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오른쪽 아래 선.”
나는 눈을 좁혔다. 처음엔 긁힌 상처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세 줄이 아래로 떨어진 뒤 한 줄이 다시 감겨 닫히는 모양이었다. 인간식 추도문이나 기사단 묘비에서 못 본 방식이었다. 리에트는 그 선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엘프 장례문양 계열이야.”
세라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해?”
“직계 문양은 아니야. 대신 매장을 숨기거나 이름을 지운 자를 표기할 때 쓰는 오래된 변형이랑 닮았어.”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벽의 열세 번째 빛이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워진 이름. 숨긴 매장. 엘프 장례문양. 성도 인장. 닳은 왕실 문양. 서로 맞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한 벽과 한 바닥에 같이 남아 있었다.
“누굴 묻은 거지.”
내 말에 리에트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신들 사이를 훑었다. 그중 하나의 팔뼈 아래에는 길쭉한 철편이 끼어 있었고, 다른 하나의 허리춤에는 반쯤 썩은 가죽띠와 함께 기록봉 같은 게 남아 있었다.
“그냥 묻은 게 아니라 지켜 보면서 남긴 쪽이야.” 그가 말했다. “장례만 한 자리가 아니야. 기록용 고정장치도 있고, 벽화도 있고, 문까지 숨겨 놨어.”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누가 죽는지 확인하고, 누가 반응하는지도 같이 본 자리라는 거네.”
내가 대꾸하기 전에 돌판 안쪽에서 한 번 더 낮은 울림이 번졌다.
이번엔 문이 아니라 바닥이었다.
내 발 아래 판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가 멈췄다. 떨림은 길지 않았고, 발이 아니라 허리 높이쯤에서 되받는 울림이 곧바로 따라왔다. 마치 안쪽 공간이 내 위치를 알고 있다는 듯한 타이밍이었다.
세라가 나를 봤다.
“방금 네가 움직였을 때 맞춰 울렸어.”
“나도 들었어.”
“부적 때문이야?”
“아니.”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바닥이야. 내 발 위치랑 판석선이 먼저 반응했어.”
부적은 여전히 주머니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지만, 핵심은 아니었다. 열쇠처럼 꽂아 넣는 유물도, 주문도 아니었다. 내가 이 선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게 더 끔찍했다. 누군가 처음부터 사람 자체를 장치 일부로 예상해 두었다는 뜻이니까.
리에트가 몸을 낮추고 시신 하나 곁에 떨어진 장비를 살폈다. 그는 장갑 낀 손끝으로 녹슨 어깨걸이를 뒤집어 보더니, 조용히 세라 쪽으로 내밀었다.
“봐.”
세라는 횃불을 가까이 들었다. 장비 표면엔 해 모양 인장이 덧새겨진 자국이 있었고, 그 아래 오래된 왕실 문양 윤곽이 마모된 채 남아 있었다. 둘 다 절반쯤 지워져, 어느 쪽도 제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선이네.” 세라가 낮게 말했다. “문서만이 아니었어.”
“현장 장비까지 같이 돌았다는 거지.” 내가 말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속이 비는 느낌이 들었다. 수련원에서 내 이름 옆에 붙던 낙인, 성문에서만 별도 확인을 하던 성도 사제의 눈빛, 갈림목에서 세라가 감추던 종이, 그리고 지금 여기서 열리는 숨은 유적이 한 줄로 이어졌다. 지금까지는 누군가가 나를 의심하거나 관리하려 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더 구체적이었다. 누군가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반응선을 만들고, 또 나 같은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증거 같았다.
열쇠.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너무 또렷하게 떠올라서 오히려 속이 뒤집혔다. 강해졌다는 감각과는 정반대였다. 내가 문을 푼 게 아니라, 문이 나를 맞춰 기다렸다는 감각이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남긴 구조 속에서 내 이름은 없어도 내 자리만은 이미 준비돼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가 사람 자리라기보다 손잡이나 자물쇠 홈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분 나빴다. 숨이 막힐 만큼. 차갑고, 서늘하고, 깊게.
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 걱정보다 확인에 가깝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무너지는지, 도망치는지, 아니면 계속 안쪽을 보겠다고 하는지. 그녀도 지금은 감정 전에 판단을 먼저 붙잡고 있었다.
“아니.”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안 괜찮아. 내가 이걸 풀었다는 느낌보다, 내가 와야만 열리게 만들어 둔 느낌이 더 커.”
리에트가 벽을 올려다본 채 말했다.
“그 감각이 맞을 가능성이 높아.”
세라가 불쾌한 얼굴로 그를 봤다.
“위로는 못 하냐.”
“위로할 구석이 없잖아.”
그는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거짓말로 덮을 거면 밖에서 했겠지.”
나는 리에트를 노려봤지만 반박은 못 했다. 이럴 때 빈 위로보다 차가운 사실이 더 덜 모욕적일 때가 있다. 적어도 그 사실은 내가 느끼는 공포를 부정하지는 않으니까.
세라는 짧게 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그러면 더 빨리 확인해야 해. 문이 네 반응을 기다렸든, 누군가가 네 같은 사람을 기다렸든, 지금 우리가 잡아 둘 수 있는 건 구조랑 증거뿐이야.”
그 말이 옳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횃불 줄을 조금 더 풀었다. 안쪽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돌판 너머 첫 공간은 사람 셋이 겨우 나란히 설 만큼 좁았고, 그 뒤로 한 단 아래 다시 낮은 방처럼 꺼져 있었다. 벽면 왼쪽에는 금속 고정대가 네 군데 박혀 있었고, 그 위로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누군가 반복해서 등불이나 화로를 걸어 두었던 자리 같았다.
“기록실이랑 의식실을 섞어 놓은 것 같아.” 내가 말했다.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 임시 봉인 시설이었을 수도 있어.”
리에트는 여전히 벽화를 보고 있었다.
“봉인만 하려고 만든 곳이면 장례문양을 이렇게 안 써. 누군가를 감추면서 동시에 기억해 둔 자리지.”
“기억해 둔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야 하는 사람처럼.”
그 말에 셋 다 잠깐 말이 끊겼다.
다시 찾아와야 하는 사람.
그 문장이 이상하게 내 발목에 걸렸다. 내가 여기에 처음 온 게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 안에서는 언젠가 반드시 올 사람처럼 적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 수련원에서 느끼던 낙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건 아래를 향한 멸시였지만, 이건 방향이 있는 기다림이었다. 더 차갑고 더 오래된 기다림.
돌판 틈 안쪽에서 차가운 공기가 한 번 더 흘러나왔다. 횃불 불길이 흔들리며 벽화 위 열세 번째 빛을 길게 비췄다. 열둘이 반원을 이루고, 마지막 하나가 바깥쪽으로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빠진 것이 아니라 밀려난 자리 같았다.
“열세 번째가 밖으로 밀려 있어.” 내가 중얼거렸다.
리에트가 곧바로 대꾸했다.
“나도 봤어. 배열상 실수 아냐. 의도적으로 분리해 둔 거야.”
세라가 시신들 쪽을 다시 살폈다.
“그럼 이 안엔 열세 번째와 관련된 뭔가가 더 있겠지.”
“혹은 지운 흔적이.” 내가 말했다.
리에트는 잠깐 침묵하다가 낮게 덧붙였다.
“엘프 장례문양 쪽에서 이름을 감출 때도, 완전히 없애진 않아. 나중에 찾을 사람이 길을 잃지 않게 아주 작은 선 하나를 남겨 둬.”
나는 벽 아래를 다시 봤다. 정말로 문양 맨 아래에 아주 얇은 긁힘이 있었다. 우연한 균열 같았는데, 이제 보니 다른 선들과 방향이 달랐다. 그 한 줄이 열세 번째 빛 아래에서 판석 가장자리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여기.”
내가 손짓하자 세라와 리에트가 동시에 몸을 기울였다.
세라는 바로 기록판을 꺼냈다. 이제 그녀 손은 문서를 숨기던 사람의 손이 아니라 현장을 고정하려는 사람의 손에 가까워져 있었다. 리에트는 선 끝이 가리키는 바닥을 봤다.
“안쪽 단 아래로 이어져.”
“내려갈 수 있나?” 세라가 물었다.
“지금은 아니야.” 내가 먼저 답했다. “문이 더 열리지 않으면 사람 하나 비집고 들어갈 정도도 안 돼.”
그 순간, 바깥에서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새를 쫓는 흉내가 아니었다. 경계선에서 위험을 알릴 때 쓰는 휘파람 두 번이 짧게 겹쳤고, 한 박자 늦게 넓은 진입로 바깥에서 금속이 서로 스치는 얇은 울림이 따라붙었다.
세라가 즉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이다.”
리에트는 이미 활을 당긴 채 틈 바깥 어둠을 겨눴다. 나는 횃불 줄을 반쯤 걷어 올리며 귀를 기울였다. 적재 평지 쪽에서 누군가 낮게 욕하는 소리, 말이 앞발로 바닥을 긁는 소리, 무너진 흙을 밟고 내려오는 장화 미끄럼이 한데 섞여 왔다. 아직 칼이 부딪히진 않았다. 그런데도 누가 왔든 우리가 돌판 앞에 멈춘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세라가 짧게 말했다.
“철수.”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에이드리언.”
“한 줄만 더 확인하고.”
내가 벽 아래 긁힘 끝을 따라 횃불을 비추는 순간이었다.
판석 아래 어둠에서 아주 희미한 금속 반사가 돌아왔다. 작은 걸쇠였다. 사람 손으로 눌러 열게 만든 장치처럼 보였지만, 그 바로 위 돌면엔 손바닥을 대던 자국이 여러 겹 닳아 있었다.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니었다. 누군가들이 반복해서 이 자리에 손을 올렸다는 마모였다.
내가 그걸 보고 얼어붙자 리에트가 물었다.
“뭐가 보여.”
“손자국.”
세라가 얼굴을 굳혔다.
“많아?”
“생각보다.”
나는 더 말하려다 멈췄다. 그 자국들이 다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큰 손도 있었고, 내 손보다 조금 더 작은 자국도 있었다. 병사들만 드나든 자리는 아니었다. 전쟁 시설, 장례문양, 기록 고정대, 반응을 보는 문구, 그리고 반복된 손자국. 누가 무엇을 확인하고 누구를 들여보냈는지 상상할수록 속이 더 서늘해졌다.
세라가 결정을 내렸다.
“좌표만 기억하고 나간다. 지금은 바깥이 먼저야.”
나는 억지로 몸을 뒤로 뺐다. 맞는 판단이었다. 여기서 더 욕심내면 통로 안에 갇힐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발씩 물러나는 순간, 돌판 안쪽에서 다시 한 번 낮은 울림이 올라왔다. 이번엔 아까와 다르게 뒤쪽 깊은 곳에서 시작해 발밑까지 밀려왔다.
“멈춰.” 리에트가 날카롭게 속삭였다.
우리는 동시에 멈췄다.
다음 순간, 바깥 붕괴면 위쪽에서 자갈이 쏟아졌다.
짧은 소리가 아니었다. 누가 일부러 찼거나, 바깥 구조가 흔들렸을 때만 나는 무게였다. 적재 평지 쪽에서 후보생 하나가 겁먹은 목소리로 세라를 불렀다. 대답하려는 찰나, 돌판 틈 바깥 왼쪽 절개면이 쿵 하고 한 번 내려앉았다.
흙먼지가 확 밀려 들어왔다.
세라가 본능적으로 나를 안쪽으로 밀치고 방패를 세웠다. 리에트는 뒤로 물러나며 활을 놓지 않았다. 무너진 건 전체 통로가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는 가장 넓은 발판 끝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붕괴만으로도 우리가 방금 전처럼 나란히 빠져나갈 길은 사라졌다. 돌아가려면 한 사람씩, 더 비좁은 각도로 틀어야 했다.
발판이 깨져 나간 자리 아래로는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검은 틈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횃불 불빛이 닿아도 바닥이 바로 드러나지 않았다. 누군가 발을 헛디디면 무릎 높이에서 끝날지, 허리 아래로 곧장 꺼질지 가늠도 안 되는 깊이였다. 먼지 사이로 떨어진 돌 몇 조각이 한 박자 늦게야 바닥을 쳤고, 그 짧은 간격만으로도 지금 빠져나가는 길이 더는 퇴로가 아니라 도박이라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젠장.” 세라가 낮게 내뱉었다.
바깥에서 다시 휘파람이 울렸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둘, 그리고 잠깐 뒤에 사람이 뛰는 발소리가 겹쳤다. 리엔 목소리가 찢기듯 들렸다.
“넓은 길 쪽에 불빛!”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성도든 기사단이든 도착이 빨라.”
리에트는 어둠을 향한 채 말했다.
“도착만 빠른 게 아니야. 누군가 우리가 안쪽 들어온 타이밍을 알았어.”
나는 무너져 내린 발판 끝과 반쯤 열린 돌판을 번갈아 봤다. 바깥은 좁아졌고, 안쪽은 더 깊어졌다. 방금 전까진 우리가 확인만 하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구조 자체가 그 생각을 비웃듯 바뀌어 있었다.
움직인 건 문만이 아니었다.
돌판 뒤 어둠에서 차가운 바람이 다시 흘러나왔고, 무너진 바깥 틈에서는 새벽 전 서늘한 공기가 먼지와 함께 밀려들었다. 두 바람이 내 얼굴 양쪽을 동시에 스쳤다. 하나는 안으로 불러댔고, 다른 하나는 이제 뒤로 빠질 자리도 오래 안 남았다고 말해 줬다.
세라가 짧게 명령했다.
“둘 중 하나다. 지금 한 사람씩 빠져나가며 바깥 싸움에 맞추든가, 아니면 여기 안쪽 첫 공간까지 밀고 들어가 숨은 구조를 잡든가.”
리에트가 즉시 답했다.
“넓은 길 쪽 불빛이 이미 가까우면, 바깥에서 받는 쪽이 더 위험해. 저쪽은 시야가 열려 있고, 이쪽은 아직 구조가 우리 편일 수 있어.”
세라는 나를 봤다.
“네 판단은.”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은 벽화의 열세 번째 빛, 닳은 손자국이 남은 걸쇠, 그리고 방금 내려앉은 발판 사이를 오갔다. 누군가가 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끔찍했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바깥에서 다른 손에 잡히느니 안쪽 첫 구조를 선점하는 편이 지금은 더 낫다는 계산도 분명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알았다. 이 장소는 단순한 숨은 방이 아니다. 사람을 가려 들이고, 반응을 확인하고, 지운 이름을 남겨 두는 자리다. 여기서 물러서면 다시는 같은 모양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안쪽 첫 공간까지만.”
나는 낮게 말했다.
“더 깊이는 안 가. 대신 이 문이 닫히기 전에, 안쪽 구조랑 숨을 자리부터 잡아.”
세라가 한순간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앞에서 돌판 고정 확인한다. 리에트, 바깥 견제.”
리에트는 활시위를 더 당기며 차갑게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임시 동맹 같네.”
세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갈고리를 다시 돌판 아래턱에 깊게 박아 넣고, 무너진 발판 반대 각도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짐줄을 짧게 감아 허리에 걸고, 바닥 판석 선과 단 아래 높이를 다시 머릿속에 그렸다. 바깥 휘파람은 더 가까워졌고, 넓은 진입로 쪽 불빛은 붕괴면 먼지 사이로 희미하게 번졌다.
누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오기 직전, 반쯤 숨겨진 전쟁 유적의 문턱 안으로 스스로 몸을 옮기고 있었다.
돌판 아래 오래 닳은 걸쇠가 횃불빛을 한 번 더 받아 번들거렸다.
그 아래, 열세 번째 빛이 가리키는 선은 아직 끝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어둠 속 단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아까와 같은 길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일도, 바깥으로 나가는 일도 이제는 누가 먼저 우리를 붙잡느냐보다 어떤 구조를 먼저 붙잡느냐의 문제가 됐다.
✦ 작가의 말
연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