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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월살법 vs 나가레보시(AI, 찬바라) 일러스트

원월살법 vs 나가레보시(AI, 찬바라)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이었다. 코간류(虎眼流) 본도장에는 매캐한 향 냄새와 수련생들의 눅진한 땀 냄새가 무겁게 배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대나무 죽도가 맞부딪히는 메마른 파공음(破空音)과 젊은 기합 소리가 마루바닥을 울렸으련만, 그날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적막이 짙었다.

상석의 신단(神壇) 아래, 당주 나가오카 운류사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미동도 없이 정좌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이 단정한 무사들의 공간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낡은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물 빠진 잿빛 기모노를 뼈대 위에 아무렇게나 걸친 사내. 방랑의 허무와 피비린내를, 기묘한 사향(麝香) 냄새에 섞어 풍기는 무뢰검객. 네무리 쿄시로였다.

그는 남의 도장에 발을 들여놓고도 칼을 오른쪽으로 고쳐 매지 않았다. 왼쪽 허리춤에 우치가타나(打刀)를 찬 그대로, 언제라도 밀어 올릴 수 있게 엄지손가락을 츠바(코등이)에 비스듬히 얹고 있었다.

그것은 무사로서의 예(禮)가 아니었다. 명백한 도발이자 '타노모시(도장깨기)'의 선언이었다.

"……타류 시합을 청하러 왔는가?"

운류사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늙은 우물의 밑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 갈라진 목소리였다.

쿄시로가 삿갓 너머로 비릿한 입꼬리를 올렸다. 삶에 대한 미련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거세된 듯한 초점 없는 짐승의 눈동자가 운류사이를 향했다.

"들어보니 코간류의 검이 제법 날카롭다더군. 이 무료한 길손의 밤을 달래 줄 만한가 싶어 와 보았소."

그 나른한 목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수석 제자 하라다 키쇼의 눈썹이 꿈틀했다. 단정한 하카마 아래로 그의 다리 근육이 팽팽히 당겨졌다.

젊은 나이에 유파의 비검 '나가레보시(流星)'를 전수받아 면허개전을 얻어낸 그는, 이미 세간에서 천재라 불리고 있었다. 그런 키쇼에게 눈앞의 낭인은 모욕 그 자체였다. 스승 앞에서 무엄하게 서 있고, 코간류를 시험하겠다고 지껄이며, 칼조차 예에 맞게 고쳐 차지 않는 무뢰배.

당장이라도 뽑아 들어 저 오만한 목줄기를 쳐내고 싶었다.

운류사이는 한참 동안 쿄시로를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도장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쿄시로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거절이오?"

"우리 코간류는 함부로 타류와 날을 섞지 않소. 그대의 검에서는 사람을 베는 냄새가 지나치게 짙소이다. 우리 도장의 길과 맞지 않소."

짧은 정적. 이윽고 쿄시로의 입에서 낮고 건조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호오. 과거 수라(修羅)라 불리며 핏물로 이름을 썼다는 이와모토 코간의 핏줄을 이었다 들었는데, 당주라는 늙은 쥐새끼가 이리도 얌전할 줄이야. 코간류도 이제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인가 보군."

"네 이놈-!!"

참다못한 키쇼가 벼락같이 무릎을 차고 일어났다. 사삿, 하고 하카마 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검집이 달그락거리며 당장이라도 서슬 퍼런 칼날이 튀어나올 기세였다.

"스승님 앞에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그러나 짐승처럼 튀어나가려던 키쇼보다, 운류사이의 일갈이 한 박자 더 빨랐다.

"물러서라, 키쇼!"

키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스승을 돌아보았다.

"허나 스승님! 유파의 이름이 모욕당했습니다. 저자의 목쯤은 제게 세 합이면—"

"내 말 들리지 않느냐. 검을 거두어라."

짧고 단호했다. 그 한마디에 키쇼는 더는 검을 뽑지 못했다. 억눌린 분노가 목젖을 타고 치밀었으나, 스승의 눈빛은 너무도 침착하고 깊었다. 결국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이를 악물고 칼자루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쿄시로는 그런 사제(師弟)의 광경을 흥미를 잃었다는 듯 나른하게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지루하군. 생각이 바뀌면 유곽 변두리의 주막으로 찾아오시오. 내, 당신들의 수급으로 밤하늘에 둥근 달을 그려 주리다."

불청객의 낡은 잿빛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도장 안에는 누구 하나 쉽게 숨을 쉬지 못했다.

첫 번째로 침묵을 깬 것은 키쇼였다. 그는 다다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거의 이를 갈아 씹듯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참으셨습니까."

운류사이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키쇼의 목소리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저런 무뢰배에게 유파의 이름을 더럽히게 두시다니요. 그것이 당주의 판단입니까!"

그제야 운류사이가 느릿하게 눈을 뜨며 대답했다.

"저 자의 눈을 보지 못했느냐. 삶에 미련이 없는 자의 눈이다. 오직 검으로 사람의 살과 뼈를 가르는 쾌락만을 좇는 짐승의 눈이지. 낭인의 만용에 도장의 이름을 걸고 어울려주는 것은 무사로서의 긍지가 아니라 객기일 뿐이다."

"그건…… 핑계입니다."

도장 안의 수련생들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키쇼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의심의 찌꺼기가, 오늘의 모욕을 계기로 기어이 흙탕물처럼 터져 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옛날 사문의 참극 속에서, 개조(開祖)이신 이와모토 어르신을 배신하고 맹인 검객 이라코 세이겐의 편에 붙어 제 한 목숨 건지셨다는 그 역겨운 풍문을 말입니다!"

"……."

"오늘 저 자의 검을 피하신 것도, 결국 죽음이 두려우셨던 것 아닙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 도장은 무덤처럼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고, 누군가는 차마 듣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코간류의 핏빛 역사. 그것은 유파 내에서 누구도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였다.

그러나 운류사이는 화를 내지 않았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팬 주름 사이로, 깊은 슬픔이 서린 늙은 호랑이의 눈으로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침묵은 키쇼에게 치명적인 확신을 주었다.

'스승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비겁함을.'

키쇼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내가 증명하겠다. 코간류의 비검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스승이 잃어버린 긍지를, 제자인 내가 피로 씻어 되찾겠다고.

그날 밤, 먹구름이 이지러진 달을 반쯤 삼킨 시각. 키쇼는 어두운 색의 시노비쇼조쿠(닌자복) 차림으로 몸을 감추고 유곽 변두리의 주막 뒤편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네무리 쿄시로가 머문다는 곳이었다. 밤바람은 음습했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그는 담벼락 그림자에 몸을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코간류의 비검 나가레보시는 뽑아 드는 찰나에 승패를 결정짓는 일격필살의 검. 기습이라면 질 리가 없었다.

잠시 뒤, 주막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낡은 삿갓을 쓴 쿄시로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술 냄새와 기묘한 사향 냄새가 바람을 타고 훅 끼쳐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틈.

'지금이다.'

키쇼의 몸이 어둠 속에서 범처럼 튀어나갔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기를 억누른 채 코간류 비검 나가레보시의 기수식(起手式) 그대로 허리를 비틀어 벼락같이 찔러 들어갔다. 유성(流星)처럼 곧고 빠른 은빛 일격. 그것으로 끝나야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키쇼의 눈에 비친 것은 인간의 이치를 벗어난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쿄시로는 등 뒤에서 쏘아져 온 검기를 느끼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흐느적거리듯 몸을 반 치 비틀었을 뿐이다.

스아악-.

키쇼의 혼신을 다한 찌르기는 허공의 안개를 찢었을 뿐, 쿄시로의 잔상만을 베었다. 그리고 찰나, 쿄시로의 검이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왔다.

서걱!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끔찍하고도 뜨거운 통증이 터져 나왔다.

"크헉-!"

키쇼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진흙 바닥에 처박혔다. 쥐고 있던 카타나가 힘없이 미끄러졌고, 숨이 턱에서 멎었다.

단 세 합. 자신이 자랑하던 천재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도 허무하고 압도적인 참패였다.

쿄시로가 천천히 돌아섰다. 구름을 벗어난 차가운 달빛을 머금은 요검(妖劍)이 축축한 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설프기 짝이 없군."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나른했으나, 핏기없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조소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살기도 갈무리하지 못하는 풋내기가, 감히 짐승의 목덜미를 물려 들다니. 네 스승이라는 늙은이가 가르친 것이 고작 이런 비겁한 야습이냐?"

"닥, 쳐라……!"

키쇼가 이빨을 까득 갈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찢어진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아 진흙탕 속에 다시 무너져 내렸다. 상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선혈이 진흙과 섞여 검붉게 번져갔다. 쿄시로의 칼끝이 서서히 들려 키쇼의 목줄기를 향했다.

"그런 눈은 보기 좋지.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제 약함을 깨닫는 짐승의 눈. 자, 달무리와 함께 지옥으로 가라."

사신의 낫과도 같은 쿄시로의 칼날이 서늘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던 그 찰나였다.

카아아앙-!!

골목을 찢는 굉음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키쇼의 시야에, 낯익고도 거대한 뒷모습이 어둠을 가르고 서 있었다.

"……스승님?"

평소의 수수한 복장이 아니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무사처럼, 가문의 문장이 박힌 정식 몬츠키 하카마를 갖춰 입고 애도(愛刀)를 뽑아 든 당주 나가오카 운류사이가 그곳에 있었다.

"결국 늙은 쥐새끼가 제 발로 튀어나왔군."

쿄시로의 무심했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짙은 쾌락의 빛이 번졌다.

운류사이는 피투성이가 된 제자를 등 뒤로 감싼 채, 칼끝을 하단으로 툭 떨어뜨렸다. 코간류 특유의 '나가레보시' 예비 동작이었다.

"어리석은 놈이다."

운류사이의 목소리는 밤공기보다 차가웠다.

"타류 시합을 금한 것은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코간류의 검이 또다시 살인검(殺人劍)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거늘."

키쇼는 피를 토하며 헐떡였다.

"어째서…… 비겁한 저 같은 놈을 위해……."

운류사이는 제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다만, 그 노구(老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태산처럼 골목을 짓누르며 쿄시로를 향할 뿐이었다.

"코간류 당주, 나가오카 운류사이. 풋내기 제자의 무례를 이 목숨으로 사죄하고, 그대의 요검을 끊겠소."

"입에 발린 소리는 지겹다. 와라!"

쿄시로가 자세를 바꿨다. 그 순간, 바람이 멎었다. 그의 우치가타나가 허공에서 천천히, 아주 기묘한 궤적으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은빛 칼날이 만월(滿月)처럼 빙글빙글 돌며 무수한 잔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검무가 아니었다. 바라보는 자의 시선을 옭아매고, 뇌리를 마비시키며, 신체의 반응을 한 박자씩 앗아가는 기괴한 살법. 무뢰검객 네무리 쿄시로의 필살검, 원월살법(圓月殺法)이었다.

숨조차 쉬기 힘든 살기 속에서, 그 궤적을 바라본 키쇼는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시선이 칼날이 그리는 둥근 달에 빨려 들어가며, 지독한 수마(睡魔)가 덮치는 듯한 몽롱함이 일었다.

"스승님! 그 칼을, 칼을 보시면 안 됩니다!!"

키쇼가 처절하게 절규했다. 그러나 운류사이는 이미 원월의 궤적 안으로 반 보(半步)를 내디딘 후였다. 그의 노구는 흔들리지 않았다. 쿄시로의 원이 완벽히 그려지는 찰나, 늙은 호랑이의 포효가 밤공기를 찢었다.

"하앗!"

섬(閃)-!

코간류 비검 나가레보시. 키쇼가 썼던 미숙한 찌르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하늘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거대한 빛줄기였다.

운류사이의 검 끝이 쿄시로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러나, 최면에 의해 아주 미세하게 늦어버린 찰나의 간극.

서걱.

뼈와 살을 벼리는 소름 끼치는 파음과 함께 두 무사의 몸이 교차했다. 골목에는 다시 죽음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쿄시로의 뺨에 옅은 선혈이 한 방울 맺혀 흘러내렸다. 그리고, 먼저 무너진 것은 운류사이였다.

"……!!"

가슴께가 깊게 베인 운류사이의 웅장했던 몸이 무릎부터 천천히 꺾여 무너져 내렸다.

"스승님-!!"

키쇼는 기어가듯 진흙탕을 헤집고 달려가 쓰러진 스승의 몸을 끌어안았다. 베인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키쇼의 두 손을 붉게 적셨다. 운류사이의 입술 사이로 붉은 거품이 끓어올랐다.

쿄시로는 피 묻은 칼을 허공에 한 번 가볍게 털어내고는,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날카로웠다. 허나, 내 달(月)에는 닿지 못했군. 코간류는 이걸로 끝이다."

사향 냄새를 남긴 채, 무뢰검객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뒷모습을 붙잡을 힘조차 키쇼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운류사이의 생명의 불꽃은 이미 꺼져 가고 있었다.

"키쇼야…… 보았느냐……."

"말씀하지 마십시오! 의원을, 당장 의원을……!"

"원월살법은…… 눈으로 좇아서는…… 벨 수 없다……."

키쇼의 뜨거운 눈물이 스승의 차가운 핏물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운류사이는 피에 젖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제자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과거의 망령으로서가 아닌, 한 유파의 당주가 후계자에게 남기는 최후의 계고(稽古, 가르침)였다.

"칼을…… 던져라……."

"……스승님……."

"간합(間合)을 흩트려야만…… 그래야만, 진정한 유성(流星)이…… 닿는다……."

그 말이 끝이었다. 키쇼의 소매를 움켜쥐고 있던 늙은 호랑이의 손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무심할 정도로 차갑고 밝은 보름달빛이 핏빛 골목을 훤히 비추었다.

"아아아아아앗-!!"

스승의 주검을 부둥켜안은 하라다 키쇼의 처절한 짐승 같은 오열이 적막한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제야 그는 뼛속 깊이 깨달았다.

과거에서 도망친 겁쟁이는 스승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유파의 긍지를 지키겠다고 오만하게 떠들었으나, 정작 검의 무게도 사람의 목숨이 지닌 업보도 알지 못한 채 날뛰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밤은 길었고, 하늘에 뜬 달은 저주스럽게도 둥글었다. 그 달빛 아래서, 하라다 키쇼는 살갗을 베어내는 듯한 후회 속에서 복수보다 깊은 원념(怨念)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운류사이의 장례가 끝난 뒤, 코간류 본도장은 마치 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고요해졌다. 문하생들은 하나둘 짐을 싸서 떠났다. 남은 자들도 더는 검을 잡지 않았다.

호랑이 같던 당주를 잃은 유파는 삽시간에 사양(斜陽)의 그림자 속으로 기울었고, 에도의 호사가들은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코간류는 끝났다고. 수석 제자는 스승이 베이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는 넋이 나가 미쳐 버렸다고.

하라다 키쇼는 그 소문들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도장 안 가장 깊은 연무장에 틀어박혀 밖에서 빗장을 걸어 잠갔다. 해가 떠도 등불을 켜지 않았고, 밤이 되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밥은 문 앞에 놓인 것을 손더듬이로 찾아 겨우 넘겼다.

스스로 시각을 봉인한 맹인(盲人)이 된 것이다. 원월살법(圓月殺法)을 깨기 위해서였다. 어둠 속에서 스승의 마지막 유언이 피 냄새와 함께 뇌리에 맴돌았다.

—원월은 눈으로 좇아서는 벨 수 없다. 칼을 던져라. 간합을 흩트려야만 진정한 유성이 닿는다.

처음 열흘은 지옥과도 같았다. 눈을 감고 걷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방 안의 기둥에 어깨를 부딪치고, 마루에서 구르고, 허공에 휘두른 칼끝에 제 손등이 베이기도 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그저 막막한 칠흑의 덩어리였다. 그 어둠 속에서 키쇼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스승의 얼굴을 수백 번, 수천 번 다시 보았다.

"나는…… 자격 없는 제자다."

그러나 부르튼 입술 사이로 피를 핥으며, 그는 어둠 속에서 다시 목검을 쥐었다.

"허나, 자격 없는 채로 끝낼 수는 없다."

눈을 감은 채 마루를 밟고, 눈을 감은 채 바람 소리를 들었다. 검집이 하카마에 스치는 미세한 마찰음, 마루 밑을 기어가는 벌레의 진동,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위치. 시각을 차단하자 오히려 온몸의 감각이 짐승처럼 곤두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장 창고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냈다. 과거, 코간류의 개조 이와모토 코간을 꺾었던 사문의 배신자이자 맹인 검객, 이라코 세이겐의 검리(劍理).

—무명역류(無明逆流).

키쇼는 그것을 직접 읽지 않았다. 문하생 하나를 불러 문 밖에서 소리 내어 읽게 했고, 자신은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뇌리에 새겼다. 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꽂아 대지의 진동을 읽는 법, 눈앞의 허상(虛像)을 믿지 않고 오직 적의 숨결과 기미(機微)만을 베는 법.

처음에는 역겨웠다. 유파의 원수이자 배신자의 검술을 배우다니. 그러나 곧 깨달았다. 스승 운류사이가 과거의 핏빛 참극 속에서 살아남아 지키고자 했던 것은 얄팍한 사문의 체면이 아니었다. 비겁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짐승의 길로 타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무사의 긍지임을.

그렇게 석 달이 흘렀다. 보름달이 차오르는 밤, 키쇼는 마침내 연무장 문을 열고 나섰다. 수염은 거칠게 자랐고 뺨은 수척하게 패였으며, 두 눈 위로는 두꺼운 무명천이 안대처럼 질끈 감겨 있었다. 허리에는 본래의 타도(카타나)와 짧은 소태도(와키자시)가 매여 있었다.

마침 도장 앞을 지나던 파발꾼은,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 스산하고 묵직한 살기에 짓눌려 힉, 하고 숨을 삼켰다.

"수고비를 후하게 칠 테니, 당장 서신을 하나 전해주게."

키쇼의 목소리는 쇳덩이를 가는 듯 서늘하고 건조했다.

"수, 수취인은 누구로 할까요……?"

"네무리 쿄시로. 전장은 근방의 폐성, 천수각(天守閣) 지붕. 오늘 밤, 스승의 묘 앞에 바칠 수급을 가지러 가겠다고 전하라."

먹구름이 거센 바람에 밀려나자, 거대한 보름달이 밤하늘에 기괴하리만치 밝은 빛을 뿌렸다. 마치 인간의 목숨 따위는 비웃는 듯, 티 하나 없이 차갑고 둥근 달이었다.

인적이 끊긴 폐성의 가장 높은 곳, 천수각 기와 위에는 네무리 쿄시로가 이미 서 있었다. 삿갓은 벗어 던진 채, 낡은 잿빛 기모노 자락을 바람에 펄럭이며. 그 나른한 얼굴에는 권태와 희열이 기묘하게 뒤섞인 웃음이 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사향 냄새가 흩날렸다.

그 시선 끝에, 두 눈을 무명천으로 가린 하라다 키쇼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놀랍군."

쿄시로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번졌다. 탐색전은 기와를 밟는 호흡만으로 이미 끝났다. 스승을 잃고 울부짖던 석 달 전의 애송이가 아니었다. 안대를 두른 사내의 몸에서는 살갗을 베어낼 듯한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승의 죽음이 애송이를 야차(夜叉)로 만들었나. 제법 쓸만한 사냥감이 되어 돌아왔구나."

"오늘 밤, 코간류의 이름을 되찾겠다."

키쇼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분노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름? 하, 웃기는군."

쿄시로가 우치가타나를 천천히 뽑아 들었다.

"내가 베어 죽인 것은 이름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다. 네 스승의 얄팍한 긍지도, 코간류의 간판도, 다 내 칼 아래서 핏물로 부서졌다. 눈을 가리고 죽음을 기다리겠다면, 그 숨통을 끊어주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쿄시로의 칼끝이 허공에서 천천히 기묘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은빛 칼날이 빙글빙글 돌며 만월(滿月)을 직조해 내는 마검, 원월살법.

그 압도적인 살기 앞에서 키쇼는 천천히 타도(카타나)를 뽑았다.

스르릉-.

그러나 그는 정면으로 상단이나 중단세를 취하지 않았다. 대신, 뽑아 든 검 끝을 발밑의 기왓장에 '지팡이처럼' 푹 꽂아 넣고는 몸을 짐승처럼 낮게 웅크렸다. 여전히 눈을 가린 채였다. 그 이질적인 하단 자세를 본 순간, 쿄시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 자세는……!'

시각을 차단하여 원월살법의 최면을 막고, 검을 땅에 꽂아 대지의 진동을 읽는 맹인의 검. 코간류의 배신자 이라코 세이겐의 무명역류(無明逆流)가 아닌가.

"크하하핫!"

침묵을 깨고 쿄시로의 광기 어린 비웃음이 천수각 지붕 위로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놈! 네깟 놈이 눈을 감고 흉내나 낸다고, 그게 진짜 맹인의 검이 될 줄 알더냐? 고작 그따위 얕은수로 내 달(月)을 깰 수 있다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쿄시로의 미소가 잔인하게 일그러졌다. 원월살법의 본질은 시각적 최면. 상대가 시각을 차단한다면, 억지로 그 머릿속에 달을 띄우면 그만이다.

"옴…… 마카 카라야…… 바하라 마하……."

쿄시로의 핏기없는 입술 사이로 기괴한 범어(梵語)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술과도 같은 그 낮고 탁한 음성은, 밤바람을 타고 키쇼의 고막을 파고들며 머릿속에 강제로 '만월'의 이미지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각을 차단한 적을 옭아매는, 청각을 이용한 원월살법!

바람 소리에 섞인 주문이 고막을 때릴 때마다, 키쇼의 뇌리 속에 은빛 칼날이 빙글빙글 도는 끔찍한 환영이 각인되었다.

"크윽……!"

키쇼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샜다. 기왓장에 꽂아둔 칼자루를 부여잡은 두 손이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쿄시로의 발소리가 셋으로, 다섯으로 갈라져 들리며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쿄시로가 한 발 내디디며 허공을 베었다.

서걱!

키쇼의 어깨죽지가 갈라지며 핏물이 허공에 튀었다. 다시 한 합, 옆구리에 뜨거운 궤적이 그어졌다. 밀린다. 이대로라면 뼈와 살이 갈가리 찢길 뿐이다.

압도적인 공포에 허덕이는 키쇼를 보며 쿄시로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의 원월의 궤적이 정수리를 깨부수기 위해 가장 높고 거대하게 호를 그렸다.

"어찌 되었느냐, 애송이! 눈을 감고도 결국 달은 떠오르지? 끝이다, 키쇼!!"

파앗-!

쿄시로가 기와를 박차고 무자비한 일격을 내려찍으려던 그 찰나. 키쇼의 입가가 피에 젖은 채 비릿하게 비틀렸다.

'그래. 이 상처들은 패배가 아니라, 미끼다.'

키쇼의 몸이 기괴하게 틀어졌다. 그는 기왓장에 꽂혀 있던 카타나를 위로 뽑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의 탄력을 극한까지 쥐어짜 내며, 몸 전체의 반동을 이용해 꽂혀 있던 카타나를 통째로 뽑아 적의 안면을 향해 집어 던졌다.

콰직!

기와가 박살 나는 파음과 함께, 묵직한 카타나가 암기(暗器)처럼 허공을 갈라 쿄시로의 미간으로 날아갔다. 검술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전대미문의 기행.

"……?!"

맹인 검술 무명역류로 대항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던 쿄시로의 무심했던 두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검객답게, 쿄시로는 짐승 같은 반사 신경으로 궤적을 비틀어 날아오는 카타나를 자신의 검면으로 강하게 쳐냈다.

카아아앙-!!

쇳덩이가 맞부딪히는 귀를 찢는 굉음. 키쇼의 카타나가 허공 높이 튕겨 나갔다. 그러나, 날아오는 무기를 쳐내느라 쿄시로가 그리던 완벽한 '원월(圓月)'이 아주 찰나의 순간, 멈칫하며 부서졌다.

달이 깨졌다.

스승 운류사이가 목숨을 바쳐 남긴 유언, 간합(間合)이 붕괴된 바로 그 절대적인 빈틈이었다. 그 찰나, 바람에 찢기듯 키쇼를 결박하고 있던 안대가 허공으로 흩날렸다. 석 달의 암흑을 깨고 번쩍 뜨인 키쇼의 두 눈은, 핏발이 선 채 먹이를 찢어발기는 굶주린 호랑이의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파앗-!

무기를 던져 비어버린 키쇼의 손이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숨겨두었던 소태도(와키자시)가 번개처럼 뽑혀 나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짧은 칼날을 끼워 넣고, 팔의 장력을 활시위처럼 극한까지 당겼다. 무명역류는 미끼였다. 유파의 명예를 되찾는 것은, 오직 긍지 높은 코간류의 비검이어야만 했다.

"진(眞) 나가레보시(流星)……!!"

섬(閃)-!!

은빛 만월의 빈틈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가는, 일락(一落)의 눈부신 유성. 천수각 지붕 위로 거센 돌풍이 휭- 하고 불어닥쳤다. 몸을 웅크린 채 쏘아져 나간 키쇼와 쿄시로의 몸이 허공에서 완벽하게 교차했다. 그제야 허공으로 튕겨 나갔던 키쇼의 카타나가 지붕 위로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정적이 폐성을 무겁게 짓눌렀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두 무사. 침묵을 깬 것은 쿄시로였다.

"……훌륭, 했다."

쿄시로의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선혈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의 허무했던 입가에는 생전 처음 보는, 만족스럽고도 후련한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배신자의 검으로 내 달을 기만하고…… 마지막은 스승의 검으로 꿰뚫었나. 하…… 그래, 그거면 되었지."

털썩.

당대 최고의 무뢰검객, 네무리 쿄시로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와키자시가 남긴 치명적인 궤적이 붉은 초승달처럼 번져 있었다. 키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소태도를 거두었다.

"당신은 강했다. 그래서 스승님이 직접 나서실 수밖에 없었다."

쿄시로가 하늘의 만월을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강해서가 아니다……. 그 늙은이는, 오만한 제자가 저지른 죄를…… 자기 목숨으로 끝내려 했을 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됐다. 달을 좇던 내 요검(妖劍)은…… 결국, 늙은 쥐새끼가 남긴 유성 하나에 졌군……."

그 나른한 혼잣말을 끝으로, 네무리 쿄시로의 숨이 멎었다. 그의 몸이 기왓장 위로 스러졌다.

키쇼는 잠시 눈을 감았다. 피비린내와 밤바람, 그리고 서늘한 달빛이 뒤섞여 폐성을 감돌았다. 복수는 끝났다. 원월살법은 깨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슴에 남은 것은 통쾌함이 아니라, 검이 가진 숙업(宿業)에 대한 묵직한 고요함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구름 한 점 없는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바람이 불었다. 마치 수라의 길에서 벗어난 제자를 쓰다듬는 스승의 대답처럼, 차갑고도 맑은 바람이었다. 키쇼는 와키자시를 검집에 꽂고, 바닥에 떨어진 카타나를 두 손으로 주워 들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제자가 어리석었습니다. 이제야, 코간류의 검이 무엇을 위해 있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검은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가르는 살인술이다. 그러나 그 피비린내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버리지 말아야 할 인간의 도리가 있다. 검을 쥔 자가 끝내 피에 미친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살아남은 자가 다시 내일을 보기 위해 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무사의 긍지였다.

그 만월의 밤 이후, 에도의 거리에 다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폐문한 줄 알았던 코간류가 살아 있다고. 보름달 아래서 유성이 달을 꿰뚫었다고.

그러나 하라다 키쇼는 그 어떤 호사가들의 수군거림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도장 문을 다시 열고, 핏자국이 남은 스승의 자리에 향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도장 벽에 걸린 낡은 현판 아래, 손수 먹을 갈아 글귀 하나를 깊게 새겨 넣었다.

[ 검은 살인술이되, 검객은 짐승이어서는 아니 된다. ]

코간류의 낡은 처마 너머로, 먼동이 트며 긴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차가운 이슬이 맺힌 검집 속에서, 비검(秘剑)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작가의 말

만화 시구루이랑 찬바라 시대극 네무리 쿄시로를 크로스오버한 단편 습작입니다. 플롯만 집어넣고 완성한 원고라 조금 부자연스러운 부분도 보이는군요. 차후에 수정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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