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위키 누나는 알려주고 싶어(#라이트노벨 #일상개그)
방과 후, 인적이 드문 공원의 낡은 벤치.
중학교 2학년 스나오 스구루는 푹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잿빛 얼굴이었다.
한 시간 전, 짝사랑하던 여자 동급생에게 용기 내어 건넨 고백은 "미안, 넌 좋은 애지만 남자로선 안 보여"라는 처참한 확인 사살로 끝이 났다.
"하아... 차여버렸다. 괜히 고백했나..."
스구루가 씁쓸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려던 찰나였다.
"어이, 소년! 거기까지다!!"
어디선가 정적을 찢는 우렁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저 그런 기분인걸~
동시에 우울한 분위기를 단숨에 박살 내버리는, 묘하게 밝은 멜로디. 스구루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늦가을의 석양을 등지고 웬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웨이브 져서 찰랑이는 머리카락, 제법 각이 잡힌 바바리코트 아래로 뻗은 미니스커트와 검은 스타킹. 가만히 서 있으면 꽤 분위기 있는 미인이었겠지만, 그녀가 꽉 쥐고 있는 스마트폰에서는 여전히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캣치유! 캣치미!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
'무슨 노래지? 가요라고 하기엔 유치한 것 같기도 하고 애니송인가?'
이상한 사람이다. 그것도 꽤 위험한 부류의 이상한 사람이다. 본능적인 경보가 울렸지만, 천성이 고분고분하고 착해 빠진 스구루는 차마 대놓고 피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 안녕하세요? 제게 무슨 볼 일이라도..."
"소년이여, 신화가 되라!!!!"
"......네?"
여자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뜻 모를 소리를 외쳤다. 스구루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신화? 혹시 사이비 종교 권유인가?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거 아닌가...'
스구루가 몸을 뒤로 빼려 하자, 여자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스구루의 코앞까지 삿대질을 해왔다.
"보이즈 비 앰비셔스! 소년, 그렇게 어깨를 움츠러트리고 실망하지 마라! 방금 엑스트라 NPC처럼 차여버린 너를 위해, 여심의 전문가인 바로 나, 시라나이 코토하(白内 琴葉) 누님이 전부 다 알려주러 왔으니까!"
'시라나이 코토하... 모르는 건 없다는 뜻인가? 그보다 내가 방금 차인 건 어떻게 안 거지?!'
무단으로 팩트 폭력을 당해 명치가 얼얼했지만, 일단 상대가 먼저 이름을 밝혔으니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다. 착실한 스구루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스나오 스구루(素直 卓)라고 해요."
"호오, 스나오 스구루. 아주 고분고분하고 솔직해 보이는 이름이군. 반갑다 소년!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코토하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마치 강단에 선 교수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여자를 공략하려면 먼저 여심을 알아야 한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시시때때로 변하고 도무지 종잡기 힘들지. 하. 지. 만.!?"
코토하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였다. 스구루는 왠지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나, 시라나이 코토하가 너를 위해 여심 특강을 해주겠다! 이름하야, 모에모에 여심 대탐구!!!"
"모...에요? 그게 뭐예요? 요즘 애들은 그런 말 안 쓰는데. 오시(최애)라고 하지 않나요?"
"시끄럽다!! 근본 없는 요즘 언어로 내 순정을 모독하지 마라!!"
스구루의 순진한 태클에 코토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에란...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다!!!!! 소년, 오늘 고백하기 전에 네 마음은 어떠했나? 긴장되어 뜨겁게 달아올랐나? 아님, 긴장되어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나??"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 코토하의 기세에 눌려, 스구루는 잠시 아까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심장이 쿵쿵 뛰면서 살짝 떨리고, 몸에 열도 났었던 것 같네요."
딱-!
코토하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며 검지로 스구루의 코끝을 가리켰다.
"모에! 바로 그게 모에인 것이다아아아아아!!!!"
"아... 그게요?"
"그렇다! 모에란 바로 심장 깊은 곳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의 마음! 그 감정의 불길이 어떤 형태로 타오르느냐, 그 차이가 바로 모에 속성을 결정짓는 것이다."
"흠... 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직감했다면 일단 합격이다. 너의 안에 잠들어 있는 로맨스 구조의 형태를 내가 직접 건져 올려 주지. 잘 들어라 소년. 모에, 즉 '데레(달라붙는 애정)'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네 가지나 있다고요...?"
"그래! 나의 혼신의 연기를 똑똑히 봐라!"
코토하가 갑자기 홱 몸을 돌리더니, 팔짱을 꼬고 고개를 팩 돌리며 뺨을 붉혔다.
"흥! 딱히 널 위해 설명해 주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이것이 새침 부끄, 솔직하게 내 맘을 전달할 수 없는 츤데레!"
그러더니 이번엔 표정을 싹 지우고 차가운 눈빛으로 스구루를 응시했다.
"......(무표정). 표현은 안 하지만... 이따금 네겐 미소 지어주곤 해. 이것이 쿨데레!"
다음 순간, 코토하는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스구루에게 덥석 달라붙을 듯 양손을 흔들었다.
"스키스키 다이스키! 완전 좋아! 네가 제일 좋아! 이것이 메가데레!"
그리고 마지막. 코토하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탁하게 죽은 눈동자로 스구루를 올려다보며 음침하게 속삭였다.
"네가 너무 좋아서 가둬두고 싶어... 다른 여자하고 만나지 마. 쳐다보지도 마. 알았지...? 이것이 얀데레!"
혼신의 연기를 마친 코토하가 가파른 숨을 내쉬며 다시 당당한 자세로 섰다.
"츤데레! 쿨데레! 메가데레! 얀데레! 총, 이 네 가지가 바로 서브컬처를 지탱하는 4대 데레인 것이다! 알겠나!"
어느새 공원 한복판에서 펼쳐진 기묘한 연극에 넋을 잃고 있던 스구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츤데레 정도는 인터넷에서 들어 본 것 같아요."
스구루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코토하의 눈매가 매섭게 빛났다.
"호오? 들어봤다라. 그럼 묻겠다 소년. 츤데레가 서브컬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불리는 진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어... 뭘까... 음, 평소엔 틱틱대다가 가끔 상냥하게 대해주면, 더 귀여워 보이니까...?"
스구루가 나름대로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지식을 짜내어 대답했다. 하지만 코토하는 팔짱을 낀 채 쯧쯧 혀를 찼다.
"얕다. 너무 얕아서 발목도 안 잠기겠군!"
"네?!"
"그건 표면적인 감상일 뿐이다! 귀를 기울이고 똑똑히 잘 들어라. 츤데레의 근본은 바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요?"
"맞다!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긴 부끄러우니까 틱틱대며 혼자 애태우는 마음!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이 여자의 심리가 캐릭터 조형 작법과 만났을 때다!"
"작법이요? 갑자기 무슨 소릴..."
"아무튼 들어라! 서사 구조의 관점에서 볼 때, 츤데레의 진짜 정체는 바로... 위대한 '감정 지연 장치'다!"
"감정... 지연 장치요?"
생전 처음 듣는 학술적인 단어에 스구루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코토하는 바바리코트 주머니에서 볼펜 하나를 꺼내더니 허공에 지휘봉처럼 휘둘렀다.
"그래! 로맨스 서사의 핵심은 커플이 되는 '성취'가 아니라 그곳까지 도달하는 '과정'이다! 주인공과 히로인이 1화부터 '나 너 좋아해!', '응 나도 사귀자!' 해버리면 어떻게 되지?"
"어... 행복하게 잘 사귀겠죠?"
"그리고 독자들은 하품을 하며 책을 덮겠지! 긴장감이 제로니까!"
코토하가 펜 끝으로 스구루의 이마를 정확히 가리켰다.
"남녀가 이어질 듯 말 듯, 오해하고 질투하며 애태우는 그 피 말리는 시간! 독자는 그걸 즐기는 거다. 츤데레는 겉으론 거부하면서도 속으론 호감을 품고 있기에, 커플 성립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쫄깃하게 '지연'시킬 수 있는 완벽한 구조적 장치란 말이다!"
"...듣고 보니 뭔가 엄청난 진리 같네요."
스구루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바바리코트 누나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내용이 쓸데없이 전문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하지만 코토하의 진짜 폭격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녀가 스구루의 코앞까지 다가와 음침하게 웃었다.
"자, 그럼 오늘의 실패 사례를 복기해보자. 소년, 너는 오늘 그 여자아이에게 어떻게 고백했지?"
"어... 그냥 방과 후에 잠깐 남으라고 한 다음에, '예전부터 좋아했어, 나랑 사귀어줘'라고..."
"바보 자식아아아아아!!!"
코토하의 쩌렁쩌렁한 사자후에 스구루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 말했잖아! 로맨스의 생명은 긴장과 지연이라고! 너는 그 여자아이와 평소에 티격태격하며 미운 정을 쌓았나?"
"아니요..."
"체육 시간에 넘어진 걸 보건실로 업어다 주며 묘한 시선을 교환했나?"
"아니요..."
"비 오는 날 우산을 같이 쓰며 어깨가 닿는 것에 심장 박동이 빨라진 적은?"
"전혀요..."
"그런데 무턱대고 돌직구를 던져?! 넌 아무런 서사적 빌드업도, 감정 지연 장치를 통한 축적도 없이 다짜고짜 엑셀부터 밟은 거다! 상대방 입장에선 네가 남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갑자기 고백 공격을 시전하는 마을 엑스트라 NPC로밖에 안 보였을 거란 말이다!"
"마... 마을 엑스트라 NPC... 고백 공격..."
스구루의 명치에 치명타가 꽂혔다.
무심코 던진 누나의 말이 너무나도 날카롭게 자신의 상황을 관통하고 있었다. 자신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자격조차 없는, '과정 없는 엑셀'을 밟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는 뼈저린 깨달음.
스구루가 다시금 바닥을 보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려던 찰나.
문득 스구루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강렬한 호기심이 스쳤다. 츤데레에 이렇게 깊은 서사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면, 아까 보여준 나머지 쿨데레, 메가데레, 얀데레에도 필시 엄청난 작법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저기, 코토하 누나. 츤데레는 감정을 지연시키는 장치라고 하셨죠? 그럼 나머지 것들도 마저 알려주세요."
흠칫.
방금 전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당당하던 코토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
"누나?"
"........."
어쩐지 코토하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에서는 식은땀마저 한 방울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공을 찌르던 당당한 지휘봉(볼펜)도 갈 길을 잃고 슬그머니 허리춤으로 내려왔다.
탁-!
코토하가 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그러나 어딘가 삐걱거리는 모션으로 손가락을 튕기더니 쫓기듯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공원에 울려 퍼지던 정체불명의 90년대 애니메이션 노래도 뚝 끊겼다.
"그, 그만! 오늘의 특강은 여기까지다!"
"네? 갑자기요? 식은땀은 왜 흘리세요?"
"아, 알려 주고 싶을 만큼 전부 알려줬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법. 오늘 배운 4대 데레의 기초를 가슴 깊이 새기며, 너의 처참하게 실패한 고백을 뼈저리게 복기하도록 해라!"
"4대 데레의 기초요? 방금 츤데레 하나밖에 안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리고 누나, 아까부터 식은땀을 엄청 흘리시는데..."
"시, 시끄럽다! 특강 끝!!"
코토하는 스구루의 예리한 지적을 싹둑 잘라내고 홱 몸을 돌렸다. 불어오는 늦가을의 바람에 그녀의 바바리코트 자락이 극적으로 펄럭였다. 붉게 물든 노을을 등진 그녀의 뒷모습은 쓸데없이 비장하고 멋있었지만, 발걸음은 묘하게 도망치는 것처럼 빨랐다.
"이제 너는 여심 전문가의 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소년이여, 새로운 사랑이 성공하길 빌겠다! 그럼, 아디오스(Adios)!!"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코토하는 석양을 향해 성큼성큼... 아니, 거의 경보 수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기요! 나머지 데레엔 학술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스구루가 뒤늦게 손을 뻗으며 외쳐보았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려 브이(V) 자를 그려 보일 뿐이었다. 그대로 공원 산책로 너머로 쿨하게 사라져 버리는 코토하.
황량해진 공원 벤치 앞.
가방을 멘 채 덩그러니 남겨진 중학교 2학년 스나오 스구루는,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벌어진 폭풍 같은 원맨쇼의 잔해 속에서 멍하니 눈만 끔벅였다.
어느새 실연의 아픔 따위는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스구루는 공허한 허공을 향해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 알려준다면서 츤데레만 설명하고... 나머진 뭐였는데...?"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 한 장이 스구루의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스구루는 홀린 듯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창을 열었다.
[쿨데레, 메가데레, 얀데레의 구조와 학술적인 분석 연구]
"뭐야... 안 나오잖아.... 이상한 누나네."
그것이, 스구루와 '모든 걸 다 아는' 괴짜 누나 시라나이 코토하의 기묘한 첫 만남이었다.
✦ 작가의 말
다음 편을 언제 올릴 지 미정이라 단편집으로 옮깁니다.